젠더 수행성
Gender Performativity
주디스 버틀러가 1988년 논문 「수행적 행위와 젠더 구성」과 1990년 『젠더 트러블』에서 세운 이론. 젠더는 몸 안에 미리 있는 본질이나 정체성의 표현이 아니라, 기존 규범을 인용하며 시간 속에서 되풀이되는 양식화된 행위가 만들어 내는 효과이고, 그 반복이 실체가 있는 듯한 겉모습을 낳는다고 본다. 버틀러는 1993년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에서 수행성이 날마다 고르는 선택이 아니라 금지와 처벌의 위협 아래 강제된, 규칙화된 반복이라고 다시 밝혔다.
상세
버틀러는 1988년 「수행적 행위와 젠더 구성: 현상학과 페미니즘 이론에 관한 시론」에서 젠더가 고정된 정체성이나 역할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일련의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젠더가 안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로 세워진다면 실체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겉모습, 곧 관객과 행위자 자신이 믿게 되고 믿음의 양식으로 수행하게 되는 구성된 정체성이다. 젠더 정체성의 토대가 매끈한 정체성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이라면, 젠더를 바꿀 가능성도 다른 방식의 반복, 그 양식을 깨거나 전복하는 반복에 있다. 버틀러는 대본을 어기고 즉흥 연기를 하는 이에게는 엄한 처벌이 따른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 글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성적 존재로서의 몸」에 크게 기대며, 게일 루빈과 버틀러 자신의 1986년 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나타난 섹스와 젠더」를 인용한다.
『젠더 트러블』(1990)에서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여성」을 공통된 특성을 지닌 따로 떨어진 탈역사적 집단으로 세운 것이 잘못이었다고 비판했다. 섹스는 생물학적이고 젠더는 구성된 것이라는 흔한 구분에도 도전했다. 섹스가 문화보다 먼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젠더가 작동한 효과이고, 섹스라 불리는 구성물도 젠더만큼 문화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어쩌면 늘 이미 젠더였다는 것이다. 젠더는 사람이 무엇「인」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 존재가 아니라 행함의 연속이다. 버틀러는 니체의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를 빌려 수행 뒤에 수행자는 없다고 했다. 원본 젠더가 있다는 관념을 흔드는 실천으로는 드래그를 들었다.
수행성이라는 말은 언어철학에서 왔다. J. L. 오스틴은 1950년대 『말로 행위하는 법』에서 결혼식의 「네, 그러겠습니다」처럼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곧 무언가를 하는 발화를 수행적 발화라 불렀다. 자크 데리다는 「서명, 사건, 맥락」에서 모든 기호가 인용될 수 있고 그래서 주어진 맥락을 깨고 새 맥락을 낳을 수 있다는 인용 가능성, 반복 가능성을 강조했고, 버틀러는 이 인용의 차원을 받아들였다. 버틀러는 수행성을 「담론이 자신이 규제하고 제약하는 현상을 생산하는 반복적 힘」으로 정의하며 오스틴을 미셸 푸코 쪽으로 다시 읽었고, 이 관점에는 푸코와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이 있다.
『젠더 트러블』의 수행성은 옷을 고르듯 젠더를 고른다는 뜻으로 자주 읽혔다. 버틀러는 1993년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섹스」의 담론적 한계』에서 섹스와 젠더의 수행을 날마다 하는 선택으로 보는 독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수행성은 규범의 규칙화되고 강제된 반복이라는 반복 가능성의 과정 밖에서 이해될 수 없고, 이 반복은 주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지와 터부의 힘 아래, 배척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되풀이되는 의례화된 생산이지만, 그 생산을 미리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2004년 『젠더 허물기』에서는 젠더가 자각 없이 수행된다고 해서 자동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젠더 수행성은 퀴어 이론의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수전 스트라이커는 이 이론이 많은 트랜스젠더의 자기 이해에 중심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비판도 많았다. 수전 보르도는 버틀러가 젠더를 언어로 환원하고 몸을 놓친다고 했고, 마사 누스바움은 버틀러가 오스틴의 수행적 발화 개념을 잘못 읽고 젠더 억압의 물질적 현실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 낸시 프레이저와 벌인 논쟁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