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력 상품
Labour-Power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것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일정 시간 동안 일할 수 있는 능력, 곧 노동력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 노동력은 사람의 몸과 인격 안에 있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총체이며, 자본주의에서는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된다. 그 가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살아가며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생활수단의 가치로 정해지지만, 그 사용인 노동은 자기 가치보다 많은 가치를 만들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차이에서 잉여가치의 원천을 찾았다.
상세
노동자는 무엇을 파나?
흔히 노동자는 「노동」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도 1849년 『임금노동과 자본』에서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 노동이 상품이고 모든 상품이 가치대로 교환된다면, 노동자는 자기가 한 노동의 가치를 모두 임금으로 받아야 하고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윤은 생긴다. 엥겔스는 고전파 경제학의 마지막 갈래인 리카도학파가 대부분 이 모순을 풀지 못해 무너졌다고 썼다.
마르크스의 답은 노동자가 파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것이었다. 엥겔스는 1891년 『임금노동과 자본』을 다시 펴내며 이 점을 바로잡고 서문에서 이유를 밝혔다. “나의 수정은 모두 한 가지 점에 관한 것이다. 원문에 따르면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본가에게 자기 노동을 판다. 지금의 본문에 따르면 자기 노동력을 판다.” 그는 이것이 말꼬투리 잡기가 아니라 정치경제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Nach dem Original verkauft der Arbeiter für den Arbeitslohn dem Kapitalisten seine Arbeit; nach dem jetzigen Text seine Arbeitskraft.
노동력이란 무엇인가?
『자본』 1권 4장에서 마르크스는 화폐가 어떻게 자본이 되는지를 묻는다. 모든 상품이 가치대로 교환된다면 유통에서 가치가 늘어날 수는 없다. 그러니 화폐 소유자는 “그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이라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 상품, 그것을 실제로 소비하는 것이 곧 노동의 대상화이고 가치 창조인 상품”을 시장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찾아낸다. 노동능력, 곧 노동력이다.
Und der Geldbesitzer findet auf dem Markt eine solche spezifische Ware vor - das Arbeitsvermögen oder die Arbeitskraft.
마르크스의 정의는 이렇다. “노동력 또는 노동능력이란 한 인간의 신체, 살아 있는 인격 안에 있으며 그가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때마다 움직이는 육체적·정신적 능력의 총체를 말한다.” 노동력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이고, 노동은 그 능력을 실제로 쓰는 일이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내놓는 것은 앞의 것이고, 공장 안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뒤의 것이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노동력은 아무 사회에서나 상품이 되지 않는다. 노예는 노동력이 아니라 몸 전체가 팔리고, 자기 땅을 가진 농민은 노동력을 팔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는 두 조건을 들었다. 노동자는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자기 노동력을 자기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팔 다른 상품이 없어, 자기 노동력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frei in dem Doppelsinn, daß er als freie Person über seine Arbeitskraft als seine Ware verfügt, daß er andrerseits andre Waren nicht zu verkaufen hat, los und ledig, frei ist von allen zur Verwirklichung seiner Arbeitskraft nötigen Sachen.
신분적 예속에서 풀려나야 노동력을 팔 수 있고, 생산수단을 잃어야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 조건이 자연이 아니라 역사가 만든 것이라며, 이 하나의 역사적 조건이 “하나의 세계사를 품고 있다”고 했다. 농민이 땅에서 쫓겨나 무산자가 되는 과정은 『자본』 1권 끝의 본원적 축적에서 다룬다.
노동력의 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나?
노동력도 상품이므로 가치를 지닌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물품의 생산, 따라서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정해진다.” 노동력은 살아 있는 개인 안에만 있으므로, 그것을 생산한다는 것은 그 개인을 먹이고 입히고 쉬게 해 다음 날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다.
Die zur Produktion der Arbeitskraft notwendige Arbeitszeit löst sich also auf in die zur Produktion dieser Lebensmittel notwendige Arbeitszeit, oder der Wert der Arbeitskraft ist der Wert der zur Erhaltung ihres Besitzers notwendigen Lebensmittel.
여기에는 두 가지가 더 들어간다. 노동자는 언젠가 죽으므로 노동력이 시장에 계속 나오려면 자녀를 기를 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 숙련을 익히는 데 드는 교육·훈련비도 들어간다. 무엇보다 마르크스는 무엇이 「필요한」 생활수단인지가 생물학적 최저선으로 정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과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조건과 관습에 따라 다르다. “다른 상품과 달리 노동력의 가치 규정에는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Im Gegensatz zu den andren Waren enthält also die Wertbestimmung der Arbeitskraft ein historisches und moralisches Element.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이 만드는 가치는 왜 다른가?
작은 예를 들어 보자(가정). 한 노동자와 그 가족이 하루를 사는 데 필요한 생활수단을 만드는 데 사회적으로 4시간의 노동이 든다면, 그의 하루 노동력의 가치는 4시간어치다. 자본가는 이 가치를 임금으로 다 치르고 노동력을 산다. 그러나 산 것은 하루 동안 노동력을 쓸 권리이므로, 노동자는 4시간이 아니라 8시간을 일한다. 처음 4시간은 자기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만들고(필요노동), 나머지 4시간은 대가 없이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잉여노동).
마르크스가 든 예에서도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반나절 노동에 해당하지만, 그것이 노동자가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등가는 등가와 교환되었고, 상품 교환의 법칙은 하나도 어겨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잉여가치가 생긴다. 이것이 잉여가치의 수수께끼에 대한 마르크스의 답이다.
임금은 왜 노동의 값처럼 보이나?
노동력의 가치는 임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임금은 「노동의 값」, 곧 하루 노동 전체의 대가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자본』 1권 17장에서 이 겉모습을 분석했다. “임금이라는 형태는 노동일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나뉜다는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린다. 모든 노동이 지불노동으로 나타난다.”
Die Form des Arbeitslohns löscht also jede Spur der Teilung des Arbeitstags in notwendige Arbeit und Mehrarbeit, in bezahlte und unbezahlte Arbeit aus. Alle Arbeit erscheint als bezahlte Arbeit.
부역에서는 농노가 자기 밭에서 일하는 날과 영주의 밭에서 일하는 날이 눈에 보이게 갈린다. 노예노동에서는 반대로 노예가 자기 생계를 위해 일하는 부분까지 주인을 위한 노동으로 보인다. 임금노동에서는 무상으로 일하는 부분까지 대가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노예제에서는 소유관계가, 임금노동에서는 화폐관계가 진실을 가린다고 했다.
시장의 자유와 평등은 어디까지인가?
노동력의 매매는 형식상 자유롭고 평등한 계약이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사고파는 유통 영역을 「타고난 인권의 참된 낙원」이라 비꼬았다. “여기서 지배하는 것은 오직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다.” 그러나 계약을 마치고 생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달라진다. 앞서 걷는 자본가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바쁘고, 뒤따르는 노동자는 머뭇거리며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마르크스는 그가 “자기 가죽을 시장에 내다 팔았으니 이제 무두질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 같다고 썼다.
Die Sphäre der Zirkulation oder des Warenaustausches, innerhalb deren Schranken Kauf und Verkauf der Arbeitskraft sich bewegt, war in der Tat ein wahres Eden der angebornen Menschenrechte.
어떤 논쟁이 있나?
이 개념에는 여러 비판과 확장이 있었다. 영국 경제학자 이언 스티드먼은 마르크스의 노동력 개념이 사실 리카도와 스미스의 것과 매우 비슷해서 새로운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노동력 가치가 고전파의 「노동의 자연가격」과 달리 시장의 힘이 저절로 그 수준에 끌려가는 값이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가치대로 팔린다고 가정했지만, 그것은 그렇게 가정해도 착취가 있음을 보이려는 것이었고, 실제로는 노동력이 오랫동안 가치보다 높게도 낮게도 거래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노동사학자 마르셀 판데르린던은 노동을 그 담지자가 직접 팔아야 하고 판매자가 노동 말고는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두 가정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대리인이 남의 노동을 팔거나 노동과 도구를 묶어 파는 경우, 노예가 제3자의 농장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경우가 역사에 흔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노동력이 집 안에서 날마다 재생산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주로 여성이 맡는 가사노동은 노동력을 만들고 유지하고 회복시키지만 임금을 받지 못하며, 자본주의 경제에 거대한 「무상의 선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가사노동 임금 운동과 사회재생산 이론으로 이어졌다. 한편 노동력은 주류 경제학의 인적 자본 개념과 견주어지기도 하는데, 마르크스는 『자본』 2권에서 노동력을 노동자의 「자본」이라 부르는 경제학자들을 비꼬며, 노동력은 노동자의 재산일 뿐 그것을 사는 자본가의 손에서만 (가변)자본으로 기능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