национально-освободительное движение / mouvement de libération nationale · 1791–현재

민족해방운동

National liberation movements

민족해방운동은 식민 지배나 외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이 그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세우려고 벌인 정치·군사 운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1791년 아이티 혁명의 노예 봉기가 초기의 예로 꼽히고, 19세기 유럽의 민족 독립운동을 거쳐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식민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크게 늘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가 식민지의 ‘민족혁명’ 운동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은 이 운동들과 긴밀히 얽혔고, 소련은 냉전기에 여러 해방운동을 지원했다.

상세

개념과 범위

러시아어 백과사전은 민족해방운동을 어떤 민족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하려는 투쟁을 이끄는 조직으로 정의하고, 유엔 문서가 이를 형성 중인 국가의 임시적 존재 형태로 다룬다고 적는다. 19세기의 예로는 합스부르크 지배에 맞서 이탈리아 통일을 꾀한 청년 이탈리아, 아일랜드 독립을 내건 페니언, 오스만 제국에 맞선 불가리아 혁명중앙위원회가 꼽히며, 1848~1849년 헝가리 혁명과 이탈리아 독립전쟁도 민족해방 투쟁으로 서술된다. 20세기에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뒤 식민 체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인도 국민회의, 베트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모잠비크 해방전선, 아프리카민족회의 같은 운동이 생겼다. 운동의 이념은 다양해서 공산주의 정당이 이끈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 뒤 많은 반식민 지도자가 공산주의·사회주의의 혁명 목표를 공유했다. 조선의 독립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민족해방운동이라 불린다. 1919년 3·1 운동은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만세 운동이었다.

아이티 혁명과 19세기

1791~1804년의 아이티 혁명은 최초의 민족해방전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어판 백과사전은 이를 근대 세계에서 처음 성공한 노예 반란이라 부른다. 1790년 자유 유색인 뱅상 오제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따른 투표권을 요구하며 약 300명을 이끌고 봉기했다가 처형되었고, 1791년 8월 뒤티 부크만이 신호를 보낸 노예 봉기가 열흘 만에 북부 지방 전체를 장악했다. 옛 노예 투생 루베르튀르가 가장 두드러진 장군으로 떠올랐으며, 1802년 나폴레옹이 노예제를 되살리려고 원정군을 보내자 싸움이 다시 불붙었다. 1804년 1월 1일 아이티는 독립을 선포했고, 프랑스는 1825년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조건으로 독립을 인정했다. 같은 시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독립전쟁(1808~1833)이 라틴아메리카에 새 국가들을 낳았다. 20세기 초에는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의 군대가 니카라과를 점령한 미국 해병대와 싸웠다.

레닌과 코민테른의 민족·식민지 문제

레닌은 1916년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 개념을 이론화했고, 1914년 「민족자결권에 대하여」에서 ‘억압하는 민족’과 ‘억압받는 민족’을 구별하면서, 민족자결권 인정을 부르주아 민족주의 장려와 같다고 본 로자 룩셈부르크와 논쟁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는 처음으로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레닌이 식민지 문제 테제를 썼고, 인도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 페르시아의 아베티스 술탄자데, 조선의 박진순이 보충 테제를 냈다. 최종 결의는 식민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지와 농민 같은 비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하더라도 각국의 ‘민족혁명’ 운동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9월 바쿠에서 열린 동방 민족 대회에는 약 1,900명이 모여 코민테른이 식민지 ‘동방’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1927년 브뤼셀에서 결성된 반제국주의동맹에는 175명의 대표 가운데 107명이 37개 식민지에서 왔다. 베트남의 응우옌아이꾸옥(뒤의 호찌민)은 《뤼마니테》에 실린 레닌의 테제를 읽고 이것이 해방의 길이라고 외쳤다고 회고했으며, 1920년 투르 대회에서 프랑스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탈식민화와 냉전

제2차 세계대전 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 알제리 전쟁(1954~1962)이 이어졌고, 포르투갈의 앙골라·모잠비크·기니비사우는 카네이션 혁명 뒤 1975년까지 독립을 인정받았다. 1955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는 29개국이 참가해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대한 반대를 내걸었다. 1960년 12월 14일 유엔 총회는 소련이 처음 제안한 탈식민화 선언을 손질한 ‘식민지 국가와 인민에 대한 독립 부여 선언’을 찬성 89, 반대 0, 기권 9로 채택했다. 1961년 1월 흐루쇼프는 세계 곳곳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1965년 무렵부터 소련·체코슬로바키아·중국산 소화기가 반군에게 대량으로 들어갔다. 쿠바는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해방운동을 지원했고, 1966년 아바나 삼대륙 회의에는 82개국에서 약 500명이 모였다. 기니비사우의 아밀카르 카브랄은 1959년 PAIGC를 세우고 1963년 무장투쟁을 시작했으나 1973년 1월 20일 코나크리에서 자기 당원 두 사람에게 암살되었고, 같은 해 9월 24일 독립이 선포되었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1961)은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폭력을 분석해 여러 반식민 해방운동의 참고서가 되었다.

해석과 논쟁

이 말의 쓰임은 관점에 따라 갈린다. 영어판 백과사전은 같은 전쟁을 다른 쪽에서는 반란이라 부르며, 서방 국가들은 이런 전쟁을 내전으로, 제3세계와 공산주의 국가들은 국제전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고 적는다. 소련의 지원은 반제국주의로 내세워졌으나, 비판자들은 이를 소련 블록의 영향력 확대로 보았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민족을 종족적으로 정의한 경우 해방전쟁이 다른 주민 집단의 추방이나 학살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고 같은 글은 적는다.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을 어디까지 지원할지는 논쟁거리였다. 바쿠 대회의 러시아 대표단은 자기 지역에 별도의 혁명 중심을 세우려는 민족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물리쳤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2. 위키백과 (영문)
  3. fr.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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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위키백과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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