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고
New Political Thinking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집권 후 제창하고 1987년 저서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 및 1988년 유엔 연설을 통해 체계화한 소련 외교정책의 근본적 전환 노선이다. 국제정치의 탈이데올로기화, 계급투쟁 개념의 포기, 전인류적 이익의 계급적 이익에 대한 우선, 세계의 상호의존성 증대, 군사적 수단보다 정치적 수단에 기초한 상호안보를 핵심으로 하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유럽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는 시나트라 독트린으로 이어졌다. 이 노선은 INF 조약 체결, 아프가니스탄 철군, 제3세계 공산운동 지원 중단을 가능케 했으며 냉전 종식의 직접적 동인이 되었으나,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소련 해체의 정치적 조건도 함께 형성했다.
상세
어디서 나온 생각인가?
신사고는 고르바초프 한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 뿌리의 하나는 1956년 제20차 당대회다. 이때 소련공산당은 「전쟁은 숙명적으로 불가피하지 않다」라며 자본주의와의 전쟁 불가피론을 공식 폐기하고 평화공존 노선을 세웠다. 다만 이후 수십 년간 평화공존은 어디까지나 「계급투쟁의 한 형태」라는 단서를 달고 있었다. 경쟁은 계속하되 전쟁만 피한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뿌리는 당 제도권 안의 두뇌집단이다.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와 미국캐나다연구소 같은 기관에서 아르바토프, 보빈, 체르냐예프, 샤흐나자로프 등 이른바 「계몽된 당료」 세대가 1960년대부터 서방을 실제로 연구하며 낡은 교리와 현실의 간극을 기록해 왔다. 이들이 훗날 고르바초프의 참모진이 된다. 세 번째 뿌리는 바깥에 있었다. 스웨덴 총리 팔메가 이끈 국제위원회의 「공동 안보」 개념(1982),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교류, 그리고 핵전쟁이 승자 없이 인류 문명을 끝낸다는 과학자들의 핵겨울 논쟁이다.
여기에 두 개의 경험이 촉매가 되었다. 6년째 수렁이던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1986년 체르노빌 참사다. 방사능 구름이 국경을 무시하고 유럽으로 퍼지는 것을 보며, 「안보는 한 나라만의 것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감이 되었다.
무엇을 주장했는가?
신사고의 핵심 주장은 다섯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전인류적 가치의 우선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통에서 국제정치는 계급투쟁의 연장이었다. 신사고는 핵시대에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공동 이익이 어떤 계급의 이익보다 앞선다고 선언했다.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단절이다. 둘째, 상호안보다. 나의 안보를 상대의 공포 위에 쌓을 수 없으며, 상대가 불안하면 나도 결국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겨냥해 군비를 쌓는 악순환(안보 딜레마)을 정치적 신뢰로 끊자는 제안이었다. 셋째, 합리적 충분성이다. 군사력은 침공을 격퇴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면 되고, 그 이상은 낭비이자 도발이라는 군사 교리다. 넷째, 선택의 자유다. 모든 인민은 자기 체제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여기에는 사회주의를 떠날 권리도 포함된다는 것으로, 1988년 유엔 연설에서 공식화되었다. 다섯째, 상호의존이다. 세계 경제와 환경 문제는 진영을 갈라 풀 수 없으며, 인류는 한 배에 타고 있다는 인식이다.
기존 소련 외교 교리와 무엇이 달랐는가?
전후 소련 외교의 기둥은 세계가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의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는 두 진영론이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이후에는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더해졌다.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이 개별국의 주권보다 앞서므로, 어느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위협받으면 진영 전체가 개입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제한주권론이다.
신사고는 이 기둥들을 하나씩 철거했다. 계급투쟁이라는 렌즈를 내려놓았고, 「선택의 자유」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1989년 동유럽이 흔들릴 때 소련 외무부 대변인 게라시모프는 이를 「시나트라 독트린」이라 불렀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마이 웨이」처럼, 각국이 저마다의 길을 가게 두겠다는 농담이었다. 농담의 형식을 빌렸지만 내용은 제국의 해산 선언이었다.
말이 어떻게 현실이 되었는가?
1985년 제네바에서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핵전쟁에 승자는 없으며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라는 공동성명을 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는 2000년까지의 단계적 핵무기 전폐를 제안했고, 그해 10월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다가 결렬되었지만 군축의 심리적 둑을 무너뜨렸다. 1987년 12월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중거리 미사일)이 통째로 폐기되었다.
1988년 12월 7일 유엔 총회 연설은 신사고의 절정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일방 감군 50만과 동유럽 주둔 전차 1만 대 철수를 선언하며 「선택의 자유는 예외 없는 보편 원칙」이라 못박았다.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끝났고, 그해 가을 동유럽 혁명 앞에서 소련군은 병영에 머물렀다. 12월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이 확인되었고, 1990년 소련은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까지 받아들였다. 1991년 7월에는 전략핵을 감축하는 START 조약이 서명되었다.
소련 안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처음에는 지지가 넓었다. 군비 부담을 덜어야 경제를 살린다는 논리는 당내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양보가 쌓이자 반발도 쌓였다. 군부는 일방 감축에 모욕감을 느꼈고, 참모총장 아흐로메예프는 1988년 유엔 연설과 같은 날 사임했다. 당내에서는 리가초프가 1988년 「국제관계의 계급적 성격」을 공개적으로 되세우며 노선에 반론을 폈다.
더 깊은 문제는 이념의 연쇄였다. 계급투쟁이 국제정치의 원리가 아니라면, 계급의 전위를 자처하는 당의 독재는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신사고는 외교 노선이면서 동시에 체제 정당성의 기둥을 건드린 내부 폭탄이었다. 동유럽이 떨어져 나가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산되자, 강경파에게 신사고는 「전후 소련이 피로 얻은 모든 것의 무상 반납」으로 보였다. 이 원한은 1991년 8월 쿠데타의 심리적 배경이 되었다.
어떻게 평가되는가?
고르바초프 자신은 신사고를 사회주의의 포기가 아니라 레닌의 평화공존 사상으로의 복귀이자 발전으로 제시했고, 저서 『페레스트로이카』에서도 레닌을 그 전거로 들었다. 이것이 내재적 논리다. 학계의 평가는 크게 갈린다. 사상이 역사를 바꿨다는 쪽(로버트 잉글리시, 아치 브라운)은 경제 쇠퇴만으로는 후퇴의 「시점과 방식」, 곧 왜 하필 협상과 자발적 양보의 형태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으며, 지도자와 참모진이 공유한 새로운 관념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반대쪽(브룩스와 월포스 등 현실주의자)은 신사고란 쇠퇴하는 국력이 강요한 감축에 입혀진 이념적 포장이었다고 본다.
논쟁은 「순진함」을 둘러싸고도 이어진다. 1990년 2월 미국 국무장관 베이커의 「나토 관할권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되지 않는다」라는 구두 언급을 문서로 못박지 않은 일은, 훗날 나토 동진 논쟁과 러시아의 원한 서사의 소재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논의가 독일 통일 협상에 국한된 맥락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오늘의 러시아 공식 서사에서 신사고는 흔히 항복 외교로 소환되지만, 냉전이 대규모 전쟁 없이 끝난 데 이 노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에는 어느 쪽도 크게 이견이 없다. 무엇을 지키지 못했는가와 무엇을 피했는가. 신사고의 평가는 이 두 질문 사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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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Mikhail Gorbachev, Perestroika: New Thinking for Our Country and the World (1987)
- Anatoly Chernyaev, My Six Years with Gorbachev (2000)
- Robert D. English, Russia and the Idea of the West: Gorbachev, Intellectuals, and the End of the Cold War (2000)
- Archie Brown, The Human Factor: Gorbachev, Reagan, and Thatcher, and the End of the Cold War (2020)
- Stephen G. Brooks and William C. Wohlforth, Power, Globalization, and the End of the Cold War, International Security 25:3 (2000–01)
- Jack F. Matlock Jr., Reagan and Gorbachev: How the Cold War Ended (2004)
- Svetlana Savranskaya and Thomas Blanton (eds.), The Last Superpower Summits: Gorbachev, Reagan, and Bush (2016)
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
초강대국의 대결은 어떻게 총성 없이 끝났는가?
고르바초프는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안보는 상대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얻는 것이라는 「신사고」를 내걸고 소련 외교를 다시 짰다. 28년간 외무장관이던 그로미코가 물러나고 셰바르드나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을 거쳐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이 통째로 폐기되었고, 1988년 12월 유엔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일방 감군 50만과 「선택의 자유」를 선언했다. 1989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끝났다.
1985년 봄, 제국이 멈춰 선 자리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서기장에 오르기까지 3년 동안 소련은 세 명의 지도자를 묻었다. 브레즈네프가 1982년 11월 76세로 사망했고, 안드로포프가 1984년 2월 신부전으로 사라졌으며, 체르넨코는 1985년 3월 10일 만성 폐기종과 심부전으로 숨을 거두었다. 정치국 평균 연령은 70세에 육박했고, 체르넨코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정치국 회의에 실려 나오는 모습이 해외 언론에 보도되었다. 초강대국의 이미지는 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경제는 더 가혹했다. 소련 GNP 성장률은 1970년대 연평균 3.7%에서 1980~85년 1.8%로 반토막 났고, 1982년에는 사실상 제로 성장을 기록했다. 군사비는 CIA 추산 GNP의 12~14%를 잠식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연간 20억~30억 달러의 외화를 삼켰다. 1980년 배럴당 30달러를 넘던 유가는 1985년 말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으로 폭락 직전이었고, 소련의 외화 수입은 에너지 수출에 80%를 의존하고 있었다. 상점 진열대는 텅 비었고, 흑해 곡물 수입선 없이는 빵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상황이 더 나빴다. 이른바 '제2의 냉전'이었다. 1979년 12월 NATO가 유럽 중거리 핵전력(INF) 배치를 결정하자 소련은 SS-20 미사일을 서부 국경에 전개했고, 1983년 11월 미국은 퍼싱 II와 지상발사 순항미사일(GLCM)을 서독에 배치했다. 퍼싱 II는 모스크바까지 비행시간 6분, 소련 지휘부에는 '경고 후 발사'를 강제하는 시한이었다. 1983년 9월 1일에는 소련 전투기가 자국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해 269명 전원이 사망했고, 같은 해 11월 NATO의 지휘소훈련 '에이블 아처 83'은 소련군이 실제 핵선제공격으로 오인할 정도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1983년 3월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전략방위구상(SDI)를 발표했고, 소련은 INF 협상에서 퇴장했다. 미소 간 대화는 거의 전면 단절된 상태였다.
고르바초프는 이 모든 것을 한눈에 꿰뚫고 있었다. 1984년 12월, 아직 서기장이 아니던 그가 영국 의회 연설에서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는 문장을 처음 공개적으로 꺼냈을 때, 그는 이미 안드로포프가 개혁가들에게 맡겼던 내부 보고서들을 읽고 있었다. 취임 한 달 만에 그는 외무장관직에서 28년간 냉전 외교를 상징해 온 그로미코를 국가원수라는 명예직으로 밀어 올리고, 그루지야 당 제1서기였던 셰바르드나제를 후임에 앉혔다. 정치국은 충격에 빠졌다. 외교 관료가 아닌 사람, 그것도 비러시아인이 외무장관이 된 것은 소련 외교사에 전례가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4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가속화(우스코레니예)'를 선언하며 '국제 긴장을 완화하지 않고는 국내 개혁에 집중할 수 없다'는 논리를 처음으로 분명히 했다. 신사고 외교의 전제는 이렇게 국내의 절박함에서 태어났다.
적을 만나러 가는 길, 적이 아닌 사람을 발견하다
1985년 11월 19일 아침, 제네바의 별장 「플뢰르 도」 앞에 소련 차량이 멈추자 로널드 레이건이 외투도 입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1911년생인 미국 대통령이 1931년생 소련 서기장보다 더 젊고 활기차 보이도록 레이건 측 선발대가 모든 앵글을 계산한 연출이었지만, 두 사람이 단둘이 앉은 15분 예정 면담이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것은 무대 연출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양측은 접점 없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3월 24일 첫 서한에서 「핵전쟁은 어느 쪽에도 재앙」이라며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레이건은 4월 4일 답신에서 인권과 지역분쟁을 의제에 올렸다. 고르바초프가 6월 10일 서한에서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을 「우주 공격무기」로 규정하자, 레이건은 4월 30일 이미 SDI가 핵무기 폐기로 가는 길이라고 반박해 두었다. 하지만 그로미코가 7월 초 슐츠에게 은밀히 접촉해 정상회담 개최를 요청한 것은 모스크바의 절박함을 드러냈다: 소련 경제는 CIA 분석마저 「가장 공격적인 개혁 의제」라 평가한 고르바초프의 공약 앞에서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군비 경쟁 부담을 덜지 않고서는 어떤 개혁도 불가능했다.
7월 2일, 고르바초프는 정치국에서 28년간 외무장관이던 그로미코를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으로 격상시키고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를 후임에 앉혔다. 같은 날 그리고리 로마노프도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외교 노선의 세대교체였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이미 3월 12일 고르바초프에게 레이건 분석 메모를 올려 「이념적 접근을 버리고 국익의 관점에서 보라」고 조언한 상태였다.
제네바 본회담에서 두 정상은 SDI를 두고 정면 충돌했다. 고르바초프는 SDI가 우주의 군사화이며 공격용 우주무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레이건은 SDI가 「방패」일 뿐이며 개발에 성공하면 소련과 공유하겠다고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제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나톨리 도브리닌 대사는 나중에 고르바초프가 우주무기에 「비합리적으로 집착」해 레이건의 공유 제안을 문서화할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했고, 잭 매트록도 이를 「전략적 실수」라고 불렀다. 하지만 SDI에 대한 소련 측의 경계는 정치국 전체의 합의된 입장이었으며, 단순한 협상 전술이 아니었다.
합의문 작성 과정은 그 자체로 첨예했다. 고르바초프는 서면 공동성명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레이건은 구두 발표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실질적 합의가 빈약한 상태에서 서면만 남기면 세계 여론이 실망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고르바초프는 「장밋빛 안경을 쓸 필요는 없다」며 저항했지만 결국 1~3분 분량의 구두 발언을 수용했다.
11월 21일, 국제회의센터에서 두 정상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동성명의 핵심 문장, 즉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선언은 이후 군축 협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전략핵무기 50% 감축 원칙, 중거리핵전력 잠정 합의, 그리고 키예프와 뉴욕에 영사관을 동시 개설한다는 합의가 서명되었다. 41건의 문화교류 협정도 체결되어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중단되었던 예술단체 교류가 재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귀국 후 정치국에 보고하면서, 그리고 회고록에서도 레이건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공룡」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참모들에게 고르바초프를 두고 「완고한 볼셰비키」라고 불렀다. 그러나 같은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도 썼다: 「이미 이틀째에 우리는 그 유명한 공동성명을 채택할 수 있을 만큼 나아갔다.」 제네바는 협상의 돌파구가 아니었다. 조약은 하나도 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적대국 지도자가 서로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재평가한 자리였다. 6년 만에 열린 미소 정상회담은 그렇게 냉전의 종식을 위한 첫 벽돌을 놓았다.
핵무기 없는 세상, 한 뼘 앞에서 멈추다
레이캬비크 회담은 원래 정상회담이 아니었다. 1986년 9월 15일 고르바초프가 레이건에게 보낸 편지는 '아이슬란드나 런던에서 단 하루만' 만나자고 제안했다. 워싱턴 정상회담의 사전 준비에 가까웠고, 미국 측은 여기서 구체적 합의가 나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슐츠 국무장관은 10월 2일 레이건에게 올린 비망록에서 '레이캬비크 자체가 정상회담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라'고 조언했고, 국가안보회의 소련 전문가 스티븐 세스타노비치는 고르바초프가 '수줍어하거나 결정을 못 내린 상태'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완전히 다른 각본을 준비하고 있었다. 10월 4일 보좌관들과의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군비경쟁의 다음 단계를 막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서 타협하지 않으면 본질을 놓친다. 우리는 능력 밖의 군비경쟁에 끌려들어갈 것이고, 지금 우리는 능력의 한계에 있다.' 이틀 전 소련의 원자력잠수함 K-219가 버뮤다 앞바다에서 침몰한 직후였다. 10월 8일 최종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유럽 내 중거리미사일과 영국·프랑스 핵전력 문제에서 양보할 가능성을 열어두며 이렇게 마무리했다: '중간 타협안은 없다. 최대 프로그램을 밀고 나간다.'
10월 11일 아침, 회디 하우스에서 고르바초프는 준비해온 제안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전략무기 50% 감축, 유럽 내 모든 중거리미사일 철수(영국·프랑스 핵전력은 제외), ABM 조약 10년간 탈퇴 금지와 전략방위구상(SDI) 연구개발의 실험실 내 실험으로의 제한이었다. 소련은 이미 모든 주요 쟁점에서 양보한 상태였다. 아흐로메예프 원수와 폴 니츠가 이끄는 군사 전문가 작업반은 그날 밤을 새우며 감축안을 다듬었고, 중폭격기 산정 방식에서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에 레이건은 더 급진적인 제안으로 응수했다: 10년 안에 모든 탄도미사일을 폐기하자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가 '모든 핵무기를 10년 안에 없애자'고 받아치자 레이건은 동의했다. 레이건은 '1996년 아이슬란드에 다시 모여 마지막 미사일을 파괴하자'고까지 말했다. 초강대국 지도자 두 사람이 모든 핵무기의 전면 폐기라는, 냉전 사상 유례없는 합의 직전까지 간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합의는 한 단어 앞에서 무너졌다. '실험실(laboratory)'이었다. 고르바초프는 ABM 조약 10년 비탈퇴 기간 동안 SDI 실험을 실험실 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이것이 SDI를 사실상 죽이는 것이라고 보았다. '실험실로 제한한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가'라고 레이건이 묻자, 아흐로메예프는 '우주에서의 실험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예정에 없던 4차 회기에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개인적 부탁으로서' SDI 실험 제한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답했다: '농업 문제라면 부탁을 들어드리겠지만, 이것은 원칙의 문제입니다.' 셰바르드나제가 '미래 세대가 우리 회담 기록을 읽으면 이 기회를 놓친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호소했지만 교착은 깨지지 않았다.
호프디 하우스를 떠나는 레이건의 얼굴에는 분노가, 고르바초프의 얼굴에는 침통함이 서렸다. 그러나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고르바초프는 체르냐예프에게 '나는 레이캬비크 이전보다 더 큰 낙관론자다. 모두가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직전까지 그는 회담 실패를 선언할 생각이었지만, 연단에 서는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레이캬비크는 실패가 아니라 돌파구다. 우리는 지평선 너머를 보았다.' 이틀 밤낮의 협상 내내 소련 측 군사 전문가로 참여한 게오르기 아르바토프가 니츠에게 남긴 말은 결국 레이캬비크 전체의 비문이 되었다: '당신들이 제안하는 것은 예외적인 수준의 신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런 제안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신뢰는 아직 오지 않았고, 핵폐기는 한 뼘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그 한 뼘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협상할 수 없었다.
한 종류의 핵무기를 통째로 없애다, 그 대가
1987년 2월 26일,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결정적 전환을 밀어붙였다. 레이캬비크에서 INF·전략무기·SDI를 한 패키지로 묶었던 것을 풀고, 중거리 핵전력만 따로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가 전날 올린 메모가 결정적이었다: SDI에 발목 잡혀 있는 한 군축은 진전되지 않으며, INF를 분리하면 오히려 소련에 유리한 정치적 돌파구가 열린다는 논리였다. 예고르 리가초프와 국방장관 세르게이 소콜로프를 포함한 정치국 전원이 찬성했다. 2월 28일 고르바초프는 공개적으로 '패키지를 푼다'고 선언했고, 이로써 협상은 6년간의 교착을 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짜 싸움은 그다음이었다. 1987년 4월 조지 슐츠 국무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더블 제로', 즉 사거리 500~5,500km의 장거리 INF뿐 아니라 500~1,000km의 단거리 미사일까지 전부 없애자는 제안을 꺼냈다. 슐츠는 깜짝 놀랐다. 소련이 스스로 단거리 부문의 우세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처음엔 반대했다. 자국에 배치된 퍼싱-1A 72기가 단거리로 분류되어 희생양이 될 판이었고, NATO의 억지력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8월 26일 콜은 결국 퍼싱-1A의 일방적 폐기를 약속했고, '더블 제로'의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졌다.
소련 쪽에서 가장 뼈아픈 양보는 OTR-23 '오카'(나토 코드 SS-23)의 포함이었다. 사거리 400km로 기술적으로는 조약 기준인 500km에 미달했지만, 미국 측은 이 신형 미사일이 유럽 전역의 NATO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며 포함을 강력히 요구했다. 1987년 9월 워싱턴에서 열린 셰바르드나제-슐츠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군부와 상의 없이 오카를 조약에 넣기로 결정했다. 참모총장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원수는 격분했다. 그에게 오카는 소련이 가장 아끼던 현대화된 전술미사일로, 불과 몇 년 전에 실전 배치된 것이었다. 이후 아흐로메예프는 회고록에서 이 결정을 '중대한 실수'라고 불렀다. 결국 소련은 239기의 오카를 포함해 총 1,846기의 미사일을 폐기해야 했다. 미국의 846기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숫자였다. SS-20 파이오니어 654기, 구형 SS-4 149기, SS-12 718기 등이 줄줄이 해체되었다.
조약은 1987년 12월 8일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서명되었다. 레이건은 'arms control의 언어가 arms reduction으로 바뀌었다'고 말했고, 고르바초프는 에머슨을 인용해 '잘한 일의 보상은 그 일을 해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핵탄두 자체는 폐기 대상이 아니었고(탄두는 회수되어 다른 체계에 재활용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핵무기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전한 핵폐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한 종류 전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것을 확인할 현장 사찰 체제도 핵군축 사상 가장 침투적인 형태로 갖춰졌다. 소련군 내부에서는 '일방적 양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이것이 훗날 고르바초프에 대한 군부의 불신으로 축적되었다.
미 상원은 1988년 5월 27일 93대 5로 비준했고,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비준서가 교환되어 조약은 발효되었다. 1991년 6월 1일까지 소련 1,846기, 미국 846기, 도합 2,692기의 미사일이 모두 폐기되었다.
풀턴에서 뉴욕으로: 한 연설이 냉전의 이념을 거둬들이다
1988년 10월 31일, 고르바초프는 셰바르드나제, 야코블레프, 체르냐예프, 도브리닌 그리고 도브리닌의 부관 발렌틴 팔린을 작은 방에 불러 모았다. 연설까지는 다섯 주 남아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회의에서 던진 말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었다. "이 연설은 반(反)풀턴, 풀턴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1946년 3월 윈스턴 처칠이 미주리주 풀턴에서 철의 장막이 유럽을 가로질러 내려왔다고 선언한 그 순간을, 이제 소련 지도자가 같은 국제무대에서 정면으로 철회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연설의 핵심은 두 개의 개념이었다. 하나는 "선택의 자유는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보편적 원칙"이라는 선언이었다. 이것은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위협받을 때 소련이 무력으로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말로 명시하지도 않고 폐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 간 관계의 탈이데올로기화였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과 철학과 전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라는 울타리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두지는 않을 것이다."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이익이 세계정치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외교의 근본 전제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숫자였다. 소련군 50만 명 일방 감축. 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에서 전차 6개 사단 철수 및 해체, 전차 5천 대·포 8천5백 문·전투기 800대 감축. 아시아 쪽 병력도 대폭 축소하고 몽골 주둔군 상당 부분을 철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소련군 전체의 10퍼센트에 해당했다.
군부는 격렬히 저항했다.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와 총참모부는 정치국 내에서조차 구체적 숫자를 사전에 알리지 말라고 요구했다. 체르냐예프의 일기에 따르면, 연설의 군사적 내용은 중앙위원회 동료들에게조차 고르바초프가 미국으로 출발할 때까지 비밀로 유지되었다. 군 수뇌부로서는 동유럽 주둔 소련군, 즉 나토 침공 능력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전차 사단들을 협상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체하겠다는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88년 12월 7일 오전, 고르바초프는 유엔 총회 연단에 섰다. 연설 직후 그는 레이건, 그리고 대통령 당선자 조지 H.W. 부시와 함께 거버너스섬에서 마지막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그날 오후 아르메니아에서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해 2만5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고르바초프는 쿠바와 영국 방문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즉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냉전 시기 소련 지도자가 서방에 인도적 지원을 공식 요청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연설이 열어젖힌 새 질서는, 바로 그날 밤 자연이 던진 재앙 앞에서 첫 시험을 통과하고 있었다.
「피 흘리는 상처」를 봉합하다: 아프가니스탄 철군의 정치
고르바초프는 취임 즉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았다. 1985년 3월 14일 바브라크 카르말에게 "소련군은 영원히 머물 수 없다"고 통보했고, 10월 17일 정치국은 원칙적 철군을 결정했다. 1986년 2월 당 대회에서 그는 이 전쟁을 「피 흘리는 상처」라고 불렀다. 그러나 결정에서 실행까지 3년이 넘게 걸렸다.
그 3년은 국면 정리의 실패사였다. 카르말을 나지불라로 교체하고 「민족화해」 정책을 추진했다. 이슬람 정체성을 인정하고, 국명에서 「민주」를 삭제하고, 반군과의 권력 분점을 제안했지만, 무자헤딘은 협상을 거부했고 PDPA 내부는 반발했다. 소련은 연평균 75억 루블을 쏟아부었고, 누적 사망자 1만 4,453명, 부상자 5만 3,753명, 입원자 41만 5,932명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1988년 4월 제네바 협정 체결 후 5월 15일 철수가 시작되었다. 석 달 만에 병력 절반이 귀환했으나, 파키스탄은 무기 차단 약속을 어겼고 무자헤딘은 철수 부대를 공격했다. 1988년 11월 카불 로켓 공세로 철수는 중단되었고, 바로 이때 소련 지도부 안에서 깊은 균열이 드러났다.
셰바르드나제와 KGB는 나지불라 정권을 더 강하게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련군과 사실상의 정전을 유지하던 마수드의 판지시르 부대에 대한 공세를 요구했다. 1989년 1월 23일 「타이푼 작전」이 시작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그로모프, 바렌니코프 등 현장 지휘관들의 만류를 무시했다. 셰바르드나제와 크류치코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카불-하이라탄 고속도로 방어를 위해 지원병을 잔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9년 1월 24일 정치국 회의는 분수령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체브리코프, 야조프 등이 공동 제출한 메모에는 다섯 가지 시나리오가 담겼다. 그중 네 가지는 2월 15일 이후에도 소련군을 잔류시키는 방안이었다. 정규군 1개 사단을 남기거나,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주둔하거나, 민간 호송대라는 명목으로 호위 부대를 운용하거나, 「지연된 인계」를 구실로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병사 월 800~1,000루블의 지원병 방식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정치국은 군부의 입장을 따라 다섯 번째 시나리오, 즉 완전 철수 후 나지불라에 추가 지원을 선택했다.
1989년 2월 15일, 그로모프 장군은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왔다. 소련 TV 카메라에 욕설을 퍼부었고, 후일 그 말은 "전쟁을 시작하는 자들과 그 뒷수습을 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철군이 전쟁을 끝낸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이후로도 연간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보냈고, 나지불라는 1992년 옐친이 지원을 끊을 때까지 버텼다. 그러나 1989년 2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는 마지막 장갑차 소리는 한 초강대국이 자국의 「베트남」에서 스스로 걸어 나왔음을 세계에 선언했다.
서류 한 장 없이 냉전을 끝내다: 몰타, 1989년 12월
몰타 회담은 원래 1990년 본회담을 준비하는 '중간 회담'으로 기획되었다. 부시는 1989년 7월 폴란드와 헝가리를 방문한 뒤, 동유럽의 변화를 '관리'하기 위해 고르바초프와 조속히 만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7월의 구상이 12월에 실현되기까지 그 사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의 공산정권도 차례로 붕괴했다. '중간 회담'은 어느새 냉전 종식을 선언하는 자리로 성격이 바뀌어 있었다.
장소 선정은 상징적이었다. 부시는 2차 대전 중 루스벨트가 전함에서 외국 정상과 만나던 방식을 좋아해 공해상 회담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도 의례를 싫어해 동의했다. 몰타 앞바다에 소련 미사일 순양함 슬라바호와 미국 순양함 벨크냅호가 정박하고, 두 정상이 번갈아 오가며 회담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12월 2일 아침 지중해에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다. 두 군함은 종잇조각처럼 흔들렸고, 고르바초프가 미리 대비시켜 둔 소련 여객선 막심 고리키호(서독 여행사에 임대 중이던 배였다)가 라발레타 항에 단단히 계류되어 있어 회담장이 되었다. 부시는 익숙한 솜씨로 카터를 타고 파도 사이를 오갔고, 세계 언론은 이 광경을 '뱃멀미 정상회담'이라 불렀다.
회담의 실체는 두 개의 충돌하는 기대 사이에서 움직였다. 부시 행정부는 회담이 '군축 정상회담'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레이건이 너무 멀리 갔다는 판단이었다. NSC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회담 자체가 '시기상조'라고 보았고, 군축특보 에드워드 라우니 장군은 부시에게 "START 논의에는 잠재적 위험만 있고 이득은 적다"고 조언했다. 대신 부시는 무역정상화 조치, 즉 잭슨-배닉 수정조항 중단 검토, 소련의 GATT 옵서버 지위 수용, 대출 제한 철폐라는 '협력 계획'을 들고 왔다.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해 "우리는 마침내 루비콘 강을 건넜다"고 나중에 썼다.
그러나 회담의 핵심은 경제 패키지가 아니었다. 12월 3일 본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소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을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어 해군 전술핵무기의 상호 전면 폐기를 제안했고, 유럽 재래식 전력 감축 협상을 1990년 중 타결하자고 촉구했다. 냉전의 종식은 조약 서명이 아니라 구두 선언으로, 45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미소 공동 기자회견에서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논쟁도 없지 않았다. 부시는 '서구적 가치'를 반복해서 꺼냈고,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혁명 수출'로 비난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서구적 가치 수출'이 말해지고 있다"며 "오늘날의 변화 정신에 위배된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쿠바와 니카라과 문제에서는 양측이 평행선을 달렸다. 독일 통일 문제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콜 총리의 11월 28일 '10개항 통일안'을 "경박하고 무책임하다"고 비판했고, 부시는 "장벽 위로 뛰어오르지 않겠다"며 사태를 가속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두 정상 모두 아직 독일 통일이 임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회담 직후 평가는 극단으로 갈렸다. 서방은 찬사를 보냈다. 가디언은 "두 사람이 한 배에 탔다"고 평했다. 소련 국내에서는 달랐다. 후일 보수파는 몰타를 두고 고르바초프가 동유럽 불간섭과 독일 통일 묵인을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준 자리라고 비판했다. 이는 후에 리가초프와 야조프가 '신사고' 전체를 공격할 때 핵심 논거가 된다. 다만 냉정하게 보면, 1989년 12월 시점에서 동유럽의 '벨벳 혁명'은 이미 완료 단계였고, 소련이 개입할 실질적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몰타는 전환을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일어난 전환을 양측이 최고위급에서 확인한 자리였다.
회담이 끝난 후 폭풍이 멎고 지중해에 햇살이 비쳤다. 협정문은 없었지만, 고르바초프가 부시에게 던진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한 문장이 모든 서류를 대신했다.
총성 없이 끝낸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을 얻었는지는 아직도
신사고 외교가 남긴 것은 역사가 두 개의 판결을 동시에 내려야 하는 사건이다. 냉전이 핵전쟁 없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20세기 외교의 가장 큰 성취 가운데 하나다. 1989년 동유럽에서 공산정권들이 차례로 무너질 때 소련은 1953년 동베를린이나 1956년 부다페스트, 1968년 프라하에서 그랬던 것과 달리 탱크를 보내지 않았다. 12월 몰타에서는 초강대국 정상이 사상 처음으로 합동 기자회견에 나서 적대의 종언을 선언했고, 이듬해 고르바초프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1988년 유엔 연설의 「선택의 자유」로 대체된 순간부터 동유럽의 평화적 이행은 이미 교리적으로 승인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평가는 갈린다. 해묵은 질문은 이것이다: 냉전은 서방이 '이겼는가', 아니면 고르바초프가 끝냈는가. 미국의 승리론자들은 레이건의 군비경쟁 압박이 소련 경제를 파탄내고 제국을 굴복시켰다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옥스퍼드의 정치학자 아치 브라운은 『고르바초프 팩터』(1996)에서 체제 이행의 결정적 동인은 외압이 아니라 한 지도자의 의지와 개혁이었다고 반박한다. 브라운에게 고르바초프는 구조적 필연성을 깨고 평화적 해체를 선택한 행위자였다. 이 논쟁은 잭 매트록 주소 미국 대사의 날카로운 구분으로 요약된다: 냉전은 1989년에 끝났고, 소련 붕괴는 1991년의 별개 사건이다. 전자는 협상된 평화였으며, 후자는 내부 균열의 산물이었다.
진정으로 합의가 모이는 지점은 따로 있다. 고르바초프가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취는 국내에서는 발판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군축은 재정을 해방시켰지만 그 자원은 시장 이행의 충격을 완충할 경제 재편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개혁은 부분적이었고, 가격 통제 아래 이윤만 허용된 협동조합 체제는 생산보다 사재기를 낳았다. 타지키스탄에서는 아이들이 집 안에 쌓아둔 비누 때문에 알레르기를 앓을 정도였다.
더욱 결정적으로, 서방은 마셜 플랜의 재판을 원치 않았다. 1990년 겨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개혁 이행을 위해 서방에 200억 달러를 요청했을 때,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소련 경제를 '쥐구멍'이라 불렀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돈을 퍼부어서는 시장경제를 만들 수 없다'고 답했다. 1991년 6월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와 그레이엄 앨리슨이 공동 작성한 '대타협' 계획, 즉 대규모 서방 원조와 급진 시장개혁의 교환이 백악관에 전달되었지만, 부시는 이를 외면했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만이 300억 마르크를 지원했을 뿐, 미국은 밀 수출 신용 보증 외에는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신사고 외교는 역설적인 유산을 남겼다. 핵전쟁의 공포를 제거하고, 유럽을 분단에서 해방시켰으며, 40년 적대를 총성 하나 없이 끝냈다. 그러나 그 성취의 설계자는 자신이 평화의 대가로 기대했던 국제적 지원을 얻지 못했고, 그가 무너뜨리길 원치 않았던 체제는 결국 그의 손을 떠나 붕괴했다. 199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고르바초프가 오슬로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외무차관을 대리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날 모스크바의 정치적 지반이 이미 그의 발밑에서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냉전을 끝냈는가: 30년째 끝나지 않은 논쟁
냉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는 미국의 군사력과 레이건의 강경 노선이 소련을 파산시켰다는 「승리주의」다. 실제로 레이건 행정부는 1983년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하고 소련 경제의 목줄인 원유 가격을 사우디 증산으로 눌렀다. 그러나 잭 매트록 주소 대사는 1983년 11월 19일 국무·국방·안보보좌관 3자 회의록에서 “미국은 소련 체제를 무너뜨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레이건 자신도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참모에게 “냉전을 끝내기 위해 출마한다”고 말했다. 군사력으로 찍어누르겠다는 발상과 거리가 멀었다.
둘째는 소련 체제 자체가 개혁 불가능한 상태였고 누가 크렘린에 앉든 붕괴는 시간 문제였다는 구조적 설명이다. 이 시각은 1970년대부터 둔화된 경제성장률, 체르노빌(1986)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술 낙후, 아프가니스탄의 출혈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2021년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붕괴: 소련의 몰락』에서 1991년 여름까지도 소련에는 국가를 유지할 제도적 수단(1,500만 당원, KGB, 군)이 남아 있었으며, 연방은 개혁될 수 있었지 사라져야 할 운명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고르바초프가 당 서열 1위의 권한을 시의적절하게 행사하지 않은 정치적 실패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치 브라운이 『고르바초프 요인』(1996)에서 정식화한 논점으로, 냉전 종식의 결정 변수는 한 사람, 고르바초프 자신이었다는 입장이다. 브라운은 정치국 회의록과 참모들의 회고록을 근거로, 1985년의 소련 경제가 위기는 아니었고 체제에 반항의 조짐도 없었으며, 당 엘리트 내에서 누구도 고르바초프가 택한 방향(동유럽 포기, 전면적 군축, 글라스노스트)을 스스로 추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논증한다. 이 설명의 강점은 정책의 구체적 전환점마다 고르바초프가 관료집단과 군부의 저항을 개인적 결단으로 돌파한 순간들을 지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 입장 모두 일부를 포착하고 있으며, 서로 완전히 양립 불가능하지도 않다. 레이건의 군비 증강이 없었다면 소련 군부가 INF 조약을 받아들였을지, 고르바초프가 아니었다면 정치국이 동유럽 개입 거부로 기울었을지, 그리고 중국의 덩샤오핑처럼 당 독재를 유지하며 시장만 연 선택지가 실제로 소련에 있었는지는 오늘날까지 학계의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논쟁 자체가 신사고의 유산이라는 사실이다. 수십 년간 세계를 양분한 대결이 총 한 방 쏘지 않고 끝났기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구의 손에 무슨 카드가 들려 있었는지를 아직도 세고 있는 것이다.
결과
1989년 동유럽 격변 앞에서 소련은 무력 개입을 거부했고,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부시는 냉전이 끝났음을 확인했다. 서방은 찬사를 보냈지만 국내 보수파는 전후 소련이 쌓은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내주었다고 비판했다. 군축과 화해가 소련 경제의 회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이 간극은 이후 체제 위기의 한 배경이 되었다.
연표
- 1985.11제네바 정상회담
레이건과 처음 마주 앉아 「핵전쟁에 승자는 없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 1986.10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전면 핵폐기 직전까지 갔다가 SDI 문제로 결렬되었지만, 이후 군축의 돌파구가 되었다.
- 1987.12INF 조약
워싱턴에서 중거리 핵미사일 전량 폐기에 서명했다.
- 1988.12유엔 연설
일방 감군 50만과 모든 나라의 「선택의 자유」를 선언했다.
- 1989.02아프가니스탄 철군 완료
마지막 부대가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돌아왔다.
- 1989.12.02–03몰타 회담: 냉전의 종식 확인
지중해의 폭풍 속에 함정을 오가며 열린 「뱃멀미 정상회담」. 문서 하나 서명되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는 부시에게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두 정상은 사상 첫 미소 합동 기자회견으로 냉전의 종식을 확인했다. 「얄타에서 몰타까지」라는 대구가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관련 인물 21명
참여15
신사고의 이념적 설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나톨리 체르냐예프1921–2017외교 보좌관으로 신사고의 문서를 썼다.
아나톨리 도브리닌1919–2010주미 대사 24년의 경험으로 당 국제부를 이끌었다.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1923–1991총참모장으로 군축안의 군사 실무를 맡았다.
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외무장관에서 물러나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 옮기며 한 시대를 닫았다.
제40군 사령관보리스 그로모프1943–철수를 지휘하고 1989년 2월 15일 마지막 병사로서 우정의 다리를 건넜다. 소련 TV 카메라가 다가서자 국가 지도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철수 작전 총괄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철수 작전을 지휘했으며, 군부 측에서 나지불라가 소련군을 자국 안보에 이용하려는 시도를 막아달라고 정치 지도부에 간청했다.
주소 미국 대사잭 매트록1929–몰타 회담을 앞두고 부시에게 대소 무역 정책과 잭슨-배닉 수정조항 중단을 건의했으며, 회담에 미국측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미국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협상 상대로널드 레이건1911–2004고르바초프와 제네바·레이캬비크·워싱턴 정상회담을 통해 INF 조약에 서명하고 냉전 종식의 길을 열었다.
미국 대통령,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 확인조지 H. W. 부시1924–20181989년 12월 몰타 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동 확인했으나, 소련 경제 붕괴를 막을 대규모 지원은 거부했다.
국무장관조지 슐츠1920–2021국무장관으로서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하도록 밀어붙여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과 INF 조약의 외교적 기초를 놓았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협상의 핵심 당사자무함마드 나지불라1947–1996소련군 철수를 앞두고 정권 안정을 위해 소련에 계속된 군사 주둔을 호소했으며, 셰바르드나제는 카불로 가는 도로를 방어하기 위한 의용병 유지 방안을 제안했다.
정상회담의 실무 설계자제임스 베이커1930–부시에게 페레스트로이카 지지를 권하고 회담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정상회담 통역자파벨 팔라젠코1949–고르바초프의 통역으로 제네바 회담에 참여하고 회고록을 남겼다.
제네바 본회의 참석자폴 니츠1907–2004레이건과 슐츠의 군비통제 특별고문으로 제네바 본회의에 참석했다.
반대 · 저항4
동유럽의 상실과 일방적 양보를 비판했다.
국방장관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국방장관으로서 유엔 연설 직전까지 일방 감군에 저항했고, 군 수뇌부는 연설문의 구체적 숫자를 정치국 동료들에게조차 비밀로 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반발했다.
무자헤딘 사령관아흐마드 샤 마수드c. 1953–2001판지시르 계곡의 무자헤딘 사령관. 철수기 소련군과 사실상의 정전을 맺었으나, 1989년 1월 고르바초프가 군부 반대를 무릅쓰고 그에 대한 공세 작전 「타이푼」을 명령했다.
몰타 회담 반대자브렌트 스코크로프트1925–2020부시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몰타 회담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관련 용어
출처: Anatoly Chernyaev, My Six Years with Gorbachev (2000)Jack F. Matlock Jr., Reagan and Gorbachev: How the Cold War Ended (2004)Archie Brown, The Human Factor: Gorbachev, Reagan, and Thatcher, and the End of the Cold War (2020)Odd Arne Westad, The Cold War: A World History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