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sprüngliche Akkumulation · 1867

본원적 축적

Primitive Accumulation

자본주의가 시작되려면 한쪽에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다른 쪽에는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는 노동자가 있어야 한다. 이 두 계급을 처음 만들어 낸 역사적 과정, 곧 직접 생산자를 땅과 생산수단에서 강제로 떼어 낸 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 1권 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에서 이렇게 불렀다. 그는 근면과 절약으로 부가 쌓였다는 경제학자들의 설명을 비꼬며, 인클로저, 피의 입법, 식민지 약탈과 노예무역 같은 폭력이 실제 역사였다고 서술했다. ‘시초축적’, ‘원시적 축적’으로도 옮긴다.

상세

자본주의의 출발점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했나?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려면 두 종류의 사람이 시장에서 만나야 한다. 한쪽은 돈과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을 가지고 남의 노동력을 사서 그 가치를 불리려는 사람이고, 다른 쪽은 제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는 노동자다.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자를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노예나 농노처럼 그 자신이 생산수단의 일부로 남에게 속하지도 않고, 자영농처럼 생산수단을 가지지도 않아서, 생산수단에서 “자유롭고, 떨어져 있고,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두 무리는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을까?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고전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앞서는 ‘선행적 축적’(previous accumulation)을 가정했다. 마르크스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했다. 아주 먼 옛날 한쪽에는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무엇보다 절약하는 엘리트가, 다른 쪽에는 게으르게 가진 것을 탕진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앞의 사람들은 부를 쌓았고 뒤의 사람들은 결국 제 몸뚱이 말고는 팔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이야기가 “정치경제학에서 신학의 원죄와 거의 같은 역할을 한다”고 비꼬았다. 아담이 사과를 깨문 탓에 인류에게 죄가 내렸듯, 기원을 지난날의 일화로 들려줌으로써 설명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아이들 읽기책 수준의 이야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썼다. “실제 역사에서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정복, 예속, 강도 살인, 한마디로 폭력이 큰 역할을 한다.” 그가 장 제목에 ‘이른바’(sogenannte)를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고전 정치경제학이 그리는 ‘본원적 축적’의 모습에 자기의 서술을 맞세우기 위해서다. 그는 1865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강연(훗날 『임금, 가격, 이윤』)에서도 이 과정을 노동하는 사람과 그 노동수단 사이의 본래 결합이 해체되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본원적 축적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나?

마르크스의 정의는 간결하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역사적 분리 과정일 뿐이다.” 이 과정은 한편으로 사회의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바꾸고, 다른 한편으로 직접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바꾼다. 그것이 ‘본원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자본과 그에 걸맞은 생산양식의 ‘전사(前史)’를 이루기 때문이다. 축적이라는 이름과 달리 핵심은 누군가 부를 차곡차곡 모은 데 있지 않고, 많은 사람이 생계 수단을 빼앗긴 데 있다.

『자본』의 구성에서 이 장은 특별한 자리에 있다. 경제학자 엘마어 알트파터에 따르면 앞의 4장은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와 생산수단 소유자 계급이라는 논리적 전제를, 21~22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 계급 분열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24장은 4장에서 그저 전제했던 것의 역사적·경험적 조건을 다룬다.

영국에서는 어떻게 일어났나?

마르크스의 주된 무대는 영국이다. 15세기 말부터 봉건 가신단이 해체되고, 플랑드르 모직 공업이 번창해 양모 값이 오르자 영주들은 경작지를 양을 치는 목장으로 바꾸며 농민을 내쫓았다. 16세기 종교개혁 때는 교회 재산이 헐값에 팔리거나 측근에게 넘어갔다. 1688년 명예혁명 뒤에는 국유지를 나눠 주거나 아예 훔치는 일이 거리낌 없이 이어졌고, 18세기에는 의회가 ‘공유지 인클로저 법’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던 땅을 사유지로 바꾸었다. 마지막 큰 단계는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영지 청소’(Clearing of Estates)로, 사람을 쓸어 내고 그 자리를 양과 사냥터로 채웠다. 마르크스는 교회 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절도, 봉건적·씨족적 소유를 무자비한 테러로 근대적 사유재산으로 바꾼 일을 모두 본원적 축적의 “목가적 방법들”이라고 불렀다. 물론 반어다.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막 생겨나던 매뉴팩처가 한꺼번에 흡수할 수 없었고, 하루아침에 새 규율에 적응할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거지, 도둑, 부랑자가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내내 서유럽 전역에서 부랑을 처벌하는 ‘피의 입법’이 이어졌다. 마르크스는 “오늘날 노동계급의 조상들은 먼저 자기들에게 가해진 부랑자화에 대해 벌을 받았다”고 썼다. 매질, 낙인, 투옥, 되풀이하면 처형이었다. 이런 강제가 사람들을 임금노동의 규율에 길들였다. 역사가 E. P. 톰슨은 인클로저를 “명백한 계급적 강탈”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이 수탈의 역사가 “피와 불의 문자로 인류의 연대기에 새겨져 있다”고 요약했다.

식민지와 노예무역은 어떤 몫을 했나?

본원적 축적은 영국 농촌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아메리카 금은 산지의 발견, 원주민의 절멸과 노예화와 광산 속 매장, 동인도 정복과 약탈의 시작, 아프리카를 흑인 사냥을 위한 사냥터로 바꾼 일이 자본주의적 생산 시대의 새벽을 알린다.” 그 뒤를 지구 전체를 무대로 한 유럽 나라들의 상업 전쟁이 따랐다. 이 여러 계기는 17세기 말 영국에서 식민 제도, 국채 제도, 근대 조세 제도, 보호무역 제도로 체계적으로 묶였다. 그 가운데 식민 제도처럼 가장 잔혹한 폭력에 기댄 것도 있지만, 모두 국가 권력, 곧 집중되고 조직된 사회의 폭력을 써서 봉건적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온실처럼 재촉했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두 문장을 남겼다. “폭력은 새 사회를 잉태한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다. 폭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힘이다.” 그리고 자본은 세상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며” 태어난다고 했다. 다만 그는 1877년 러시아 잡지 《조국 수기》 편집부에 보낸 편지에서, 이 장은 서유럽에서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봉건 경제 질서의 품에서 나온 길을 그리려 한 것일 뿐이라고 못박았다. 모든 나라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역사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제사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마르크스를 비롯해 1500년 무렵을 자본주의의 출발로 보는 시각 전반이 유럽 중심적이라고 비판했다.

‘본원적 축적’, ‘시초축적’, ‘원시적 축적’은 무엇이 다른가?

같은 개념을 두고 우리말 번역어가 여럿이다. 독일어 ursprünglich는 ‘처음의, 근원의’라는 뜻이고, 영어판은 이를 primitive로 옮겼다. 독일어판을 옮긴 강신준 역 『자본』(길, 2008)은 24장 제목을 ‘이른바 본원적 축적’으로, 1절을 ‘본원적 축적의 비밀’로 옮겼다. 영어판의 장 나눔(8편 26~33장)을 따르는 김수행 역 『자본론』(비봉, 2015년 개역판)은 8편 제목을 ‘이른바 시초축적’으로, 26장을 ‘시초축적의 비밀’로 옮겼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 국내 번역본도 부제를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으로 달았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자본의 본원 축적’을 표제로 삼고 ‘원시 축적’을 함께 적는다. 영어 primitive를 그대로 따른 ‘원시적 축적’도 널리 쓰인다.

이 사전은 독일어 원문의 뜻에 가깝고 독일어판 번역과 사전류가 쓰는 ‘본원적 축적’을 표제어로 삼고, 나머지를 같은 개념의 다른 번역어로 둔다. ‘원시’라는 말은 ‘미개하다’는 뜻이 아니라 ‘맨 처음’이라는 뜻임에 주의해야 한다. 한편 1920년대 소련에서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쓴 사회주의적 원시축적은 이 개념을 본뜬 별개의 개념이다.

역사의 한 단계인가, 지금도 계속되는 과정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본원적 축적을 두 가지로 읽어 왔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899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이것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전제가 되는 한 단계로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 위에서 일어나는 자본 축적과 본원적 축적을 구별해야 한다며, 후자를 노동하는 사람과 생산수단의 폭력적 분리, 농민 추방, 공유지 강탈, 식민 제도와 국채와 보호관세 같은 것으로 정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3년 『자본의 축적』에서 다른 길을 열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된 잉여가치를 실현하려면 농민이나 소생산자처럼 자본주의 바깥에 있는 사회와 시장이 필요하다. 이들과의 교환은 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부딪치고, 자본은 이 저항을 군사적·정치적 폭력으로 꺾는다. 그래서 본원적 축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경제 외적 강제는 근대 사회에 늘 붙어 있는 요소이고, 그 활동 반경은 온 지구로 넓어진다. 룩셈부르크의 말로 자본주의는 “다른 경제 형태들을 환경이자 양분으로 삼지 않고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최초의 경제 형태다. 그는 온 세계가 자본주의가 되면 축적이 역사적 끝에 이른다고 결론지었는데, 이 붕괴론은 논쟁을 불렀다.

루이 알튀세르는 본원적 축적을 잉여가치에 이은 마르크스의 둘째로 큰 발견으로 꼽았다.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태어날 때 쓴 ‘믿기 어려운’ 수단들, 곧 가장 잔혹한 폭력을 자본주의는 식민지와 옛 식민지라는 ‘변두리’에서 20세기까지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네크트와 알렉산더 클루게도 이 과정이 계속된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 이후 이 생각은 새 이름을 얻었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신제국주의』(2003)에서 마르크스가 본원적 축적이라 부른 과정이 끝나지 않았다며 이를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고 불렀다. 그가 꼽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요 수단은 민영화, 금융화, 위기의 관리와 조작, 국가에 의한 재분배다. 영국 대처 정부의 공공주택 매각은 그 예로 자주 거론된다. 저소득층이 집을 싸게 사서 자산을 얻는 듯했지만, 투기가 뒤따르며 이들은 변두리로 밀려났고 새 집주인들은 대출 이자를 은행에 바치게 되었다. 독일 빌레펠트의 마리아 미스와 클라우디아 폰 베를호프 등도 소생산자의 수탈, 농민 추방, 생산 기법의 특허화, 공공재 사유화, 노동의 불안정화(‘노동의 주부화’)를 지구적 규모에서 계속되는 본원적 축적으로 분석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2004년 『캘리번과 마녀: 여성, 신체 그리고 시초축적』에서 마르크스의 서술에 빠진 것을 짚었다. 그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다시 생각하되 남성 노동계급의 역사와 동떨어진 ‘여성사’에 갇히지 않으려 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 초 유럽의 대대적인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산에 맞선 여성들의 저항, 그리고 여성이 성과 재생산과 치유 능력으로 얻었던 힘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본원적 축적은 여성의 몸과 재생산 노동을 자본 축적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페데리치는 공동 경작과 친족 유대가 안전망 구실을 하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서부 고지대에는 마녀사냥 기록이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정치적 귀결이 달라진다. 본원적 축적을 지나간 한 단계로 보면 분석과 투쟁의 중심은 이미 성립한 임금노동 관계 안의 착취, 곧 작업장과 계급투쟁에 놓인다. 계속되는 과정으로 보면 토지와 공유재, 사유화와 부채, 가사노동, 그리고 석유·광산 기업의 수탈에 맞서는 원주민과 농민의 싸움까지 같은 반자본주의 투쟁의 일부가 된다. 룩셈부르크의 ‘영속적 본원적 축적’ 분석이 오늘날 이런 싸움에 영향을 주는 까닭이다.

비판도 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에서, 마르크스가 근면과 절약이라는 ‘아이들 이야기’를 비웃은 것은 정치가들이 즐겨 쓰는 웃음의 기술일 뿐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도 상당한 진실이 있고, 폭력과 약탈이 착취를 쉽게 했다는 마르크스의 설명은 누가 어떻게 약탈할 힘을 얻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반대 방향에서, 본원적 축적의 분석은 자본주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학’이지 이전 생산양식의 역사 전체가 아니라고 정리했다.

‘사회주의적 원시축적’과는 어떻게 다른가?

1917년 혁명은 산업이 뒤처진 농업국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볼셰비키는 공업화가 공산주의와 국방 모두의 전제라고 보았고, 신경제정책이 경제를 안정시켰지만 빠른 공업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이에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는 1926년 『새로운 경제학』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공업을 사적 농업 부문의 희생으로 키우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설명한 개념을 사회주의 이행기에 빌려 온 유추다.

스탈린 시기에 이 요구는 실현되었으나, 프레오브라젠스키 자신이 요구했던 정도를 넘는 폭력을 동반했다. 농업은 강제 집산화되어 공업화와 계획경제에 종속되었다. 이 과정의 평가는 엇갈린다. 레오 코플러는 스탈린주의를 ‘간부 관료제’의 지배를 떠받친, 뒤늦게 따라잡은 본원적 축적으로 해석했다. 토니 클리프는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고, 집산화가 농민을 생산수단에서 ‘해방’시켜 일부를 공업 노동력으로 바꾸었다며 영국이 수백 년 걸린 일을 스탈린은 수백 일 만에 해냈다고 썼다. 반면 볼프강 아벤트로트는 1923년 독일 혁명의 패배와 1924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안정으로 유럽 혁명이 오래 멀어지고 선진국의 대규모 투자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조건에서, 서둘러 따라잡는 공업화를 위한 본원적 축적이 소련의 ‘중심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이런 논쟁을 거치며 소련은 아주 짧은 기간에 공업국으로 올라섰지만 그 대가로 수많은 희생자가 났다.

관련 인물

출처

  1. de.wikipedia.org
  2.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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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위키백과 (한국어)
  7. web.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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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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