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단
Spartacus League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조직. 1914년 8월 「인터나치오날레 그룹」으로 출발해 1916년 비합법 「스파르타쿠스 편지」를 내면서 스파르타쿠스 그룹으로 불렸고, 1917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 좌파로 들어갔다. 11월 혁명 중인 1918년 11월 11일 독자 조직 스파르타쿠스단으로 다시 세워져 독일 전체의 평의회 공화국을 요구했고, 1918년 12월 30일~1919년 1월 1일의 창당 대회에서 독일 공산당이 되었다.
상세
전쟁 공채 표결에 맞선 일곱 사람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단은 성내 평화 정책에 따라 전쟁 공채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그날 저녁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를린 자기 집에 전쟁에 반대하는 당 동료들을 불렀고, 헤르만 둥커, 후고 에벌라인,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 프란츠 메링, 에른스트 마이어, 빌헬름 피크 여섯 사람이 왔다. 이 모임이 뒷날 스파르타쿠스단의 씨앗이다. 이튿주에는 레오 요기헤스, 카를 리프크네히트, 아우구스트 탈하이머 등이 합류했고, 클라라 체트킨이 곧바로 지지를 보냈다. 그룹은 1915년 3월 잡지 《인터나치오날레》를 냈지만 한 호만에 경찰에 압수되었고, 이 제호를 따 「인터나치오날레 그룹」이라 불렸다.
리프크네히트는 1914년 12월 2일 사회민주당 의원 가운데 처음이자 홀로 전쟁 공채 연장에 반대표를 던졌다. 1916년 1월 1일 그룹은 룩셈부르크가 옥중에서 쓴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과제에 관한 테제」를 강령으로 채택했고, 1월 27일부터 비합법 「스파르타쿠스 편지」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룹을 「스파르타쿠스」라 부르자 그룹도 스스로 스파르타쿠스 그룹이라 했다. 이름은 고대 로마의 노예 봉기(기원전 73~71년)를 이끈 스파르타쿠스에서 왔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착취자에 맞서 이어 온 저항을 뜻했다.
독립사회민주당 안의 좌파
1917년 4월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민주당원들이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자, 당의 분열에 반대해 온 스파르타쿠스 그룹도 여기에 들어갔다. 다만 「닫힌 선전 단체」라는 독자적 지위를 지켰다.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나 카우츠키, 하제 같은 중앙파와는 전쟁 공채 반대에서만 뜻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룹은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을 반겼지만 볼셰비키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독일 공산당에 합쳐질 때까지 조직과 노선 모두 볼셰비키로부터 독립해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1918년 가을 옥중 원고 「러시아 혁명」에서 10월 혁명을 원칙적으로 환영하면서도 레닌의 당 조직론과 당내 독재가 노동자의 민주적 참여를 질식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원고는 그녀가 죽은 뒤인 1922년에야 파울 레비가 펴냈다.
11월 혁명과 평의회 공화국 강령
1918년 10월 7일 비합법 전국 회의는 즉각 종전, 전쟁 공채 무효화, 군대의 민주화, 은행·광산·중공업의 사회화,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요구하는 강령을 정했다. 11월 9일 필리프 샤이데만이 의사당 발코니에서 「독일 공화국」을 선포한 지 두 시간쯤 뒤, 리프크네히트는 루스트가르텐과 베를린 왕궁에서 「자유로운 사회주의 독일 공화국」을 선포했다. 11월 11일 그룹은 호텔 엑셀시오르에서 전국적이고 독립적인 조직 스파르타쿠스단으로 다시 세워졌고, 일간지 《로테 파네》(붉은 깃발)를 냈다.
룩셈부르크가 쓴 강령은 경찰과 지배계급의 무장 해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과 적위대 창설,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지방의회 접수, 은행·광산·대기업의 사회화를 요구했다. 12월 14일 그녀는 《로테 파네》에 강령 초안 「스파르타쿠스단은 무엇을 원하는가?」를 실었다. 그러나 12월 16일 개막한 독일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회에서 스파르타쿠스단 대의원은 489명 가운데 10명뿐이었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손님 자격으로도 들어가지 못했다. 대회가 국민의회 선거를 1919년 1월 19일로 정하자 룩셈부르크는 대회를 「반혁명의 순순한 도구」라 불렀다.
독일 공산당으로
독립사회민주당이 룩셈부르크가 제안한 당대회를 거부하자, 스파르타쿠스단은 다른 급진 좌파와 함께 새 당을 세우기로 했다. 1918년 12월 30일~1919년 1월 1일 베를린 창당 대회에서 스파르타쿠스단 94명과 「독일 국제공산주의자」(IKD) 29명 등 127명의 대의원이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으로 합치기로 했다. 러시아에서 온 카를 라데크가 통합을 설득했고, 룩셈부르크는 볼셰비키로부터의 독립을 지키려고 「사회주의당」이라는 이름을 원했다. 국민의회 선거 참여를 두고 룩셈부르크, 레비, 요기헤스는 찬성했으나, 오토 륄레와 IKD가 낸 선거 거부안이 62 대 23으로 채택되었다.
1919년 1월 5일 혁명적 오프로이테가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의 해임에 맞서 무장 봉기를 호소하자 공산당도 가담했다. 구스타프 노스케의 명령을 받은 옛 제국군 부대와 자유군단이 이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진압했고, 1월 15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근위기병사단 장병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1월 말 메링이 병으로 죽고 3월에는 요기헤스도 살해되면서, 창립자 네 사람의 죽음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역사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