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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 독일 국가기관 인물 22명

조건 모두 해제

파울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야전원수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육군을 지휘했고,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34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대 초 의회 지지를 얻지 못한 내각이 대통령 비상명령에 의존하는 통치를 하도록 승인했고,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정부는 곧 테러와 정치적 조작을 통해 권력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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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다
  • 1925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 1933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

Rüdiger von der Goltz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5–1946 ○ 사망

핀란드와 발트에서 독일의 동방 영향력을 지키려 한 자유군단 사령관

백군 병참장군 하네스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두고 "핀란드의 사실상의 섭정"이라 불렀다.

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도운 뒤 1919년 라트비아에서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해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다. 체시스 패배 뒤 소환되었고 바이마르 시기 극우 퇴역군인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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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대장성(대참모부) 배속
  • 1914제76보병연대 지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
  • 1918발트해 사단장, 핀란드 백군 지원 후 '주핀란드 독일군 장군'
  • 1919제6예비군단장, 리가 탈환 후 체시스(벤덴)에서 패배하고 소환
  • 1920카프 쿠데타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
  • 1924–1933독일 조국단체연합(VVVD) 의장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39 ○ 자연사

1918년 에베르트와 비밀 협약을 맺어 장교단을 지키고, 뒤에 바이마르 국방·내무장관을 지낸 장군

1918년 11월 10일 에베르트와 비밀 전화 협약을 맺어 군의 새 정부 지지를 약속하고 장교단의 지휘권을 보전했다.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참모 장교로 철도 수송 전문가였고, 전쟁 중 전시청을 맡아 군수 생산과 노동 동원을 지휘했다. 1918년 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부 제1병참감이 되었고, 11월 황제에게 군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알렸다. 11월 10일 밤 에베르트와 전화로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와 장교단 지휘 체계의 유지를 맞바꾸었다. 뒤에 교통장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지냈고 1932년 나치 돌격대 금지령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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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육군에 입대했다.
  • 1912참모본부 철도부장이 되어 전시 병력 수송과 보급을 맡았다.
  • 1918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제1병참감이 되었고, 휴전 뒤 에베르트와 협력해 병력 귀환 및 혁명 진압용 의용군 편성을 추진했다.
  • 1920–1923교통장관을 지냈다.
  • 1928–1932국방장관을 지냈다.
  • 1931–1932내무장관을 지냈다.

구스타프 노스케

Gustav Noske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8–1946 ○ 자연사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키워 1919년 좌파 봉기를 진압한 SPD 국방장관

1919년 베를린 봉기 진압을 지휘해 자유군단과 군대를 투입하고, 3월 사격 명령으로 군의 즉결 처형을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바구니 제조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1906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군사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1918년 11월 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 봉기를 수습하고 총독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위기 뒤 USPD가 떠난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를 맡았고,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조직해 1월 봉기와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19년 2월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1920년 카프 폭동 뒤 물러났다. 하노버 주지사를 지냈고 1944년 7월 음모 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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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바구니 제조공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협회 의장을 지냈다.
  • 1906년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해군·육군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 1918년 11월–12월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들과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이끌었고, 12월 28일 군·해군 전국위원이 되었다.
  • 1919년 2월–1920년라이히스베어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유군단과 군대를 동원해 1월 봉기 및 베를린의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20년 카프 폭동 뒤 사임했다.
  • 1920년–1933년프로이센 하노버 주의 고등행정관을 지냈으며, 1933년 9월 직업공무원 복구법에 따라 해임되었다.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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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 1918.2–3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지휘,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종 조약 강요
  • 1919–1920폴란드 국경 여단장, 이후 퇴역
  • 1920–1927반소비에트 연합군 개입을 주장하는 호프만 계획 추진, 회고록 집필

빌헬름 리터 폰 레프

Wilhelm Josef Franz Ritter von Leeb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76–1956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를 지휘한 독일 국방군 원수

그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도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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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바이에른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및 세르비아 전역 복무
  • 1930–1933제7사단 사령관
  • 1939–1941C집단군 사령관
  • 1941.06–1942.01북부집단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공격과 봉쇄 지휘
  • 1948최고지휘부 재판 유죄 판결,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

에리히 레더

Erich Raeder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76–1960 ○ 전범 유죄, 1955년 석방

대양함대 구상을 끝까지 밀어붙인 나치 독일 해군 지휘관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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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제정 독일 해군 입대
  • 1912–1918고위 해군참모,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8–1935국가해군 해군지휘부장
  • 1935–1939전쟁해군 총사령관, 상급제독
  • 1939–1943대제독, 전쟁해군 총사령관
  • 1943총사령관직 사임 및 퇴역
  • 1946–1955뉘른베르크 재판 유죄, 종신형 복역

발데마르 파프스트

Waldemar Pabst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80–1970 ○ 자연사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하고 카프 폭동에 가담한 자유군단 장교

1919년 1월 근위기병소총사단 참모장교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했다. 1920년 카프-뤼트비츠 폭동을 조직하고 오스트리아 향토방위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1월 최대 자유군단 부대인 근위기병소총사단의 참모 장교로, 붙잡혀 온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심문한 뒤 살해를 명령했다. 뒤에 「내가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고 자랑했다. 1920년 카프 폭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가 오스트리아로 가서 우익 향토방위대 조직을 도왔고 추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나치당과 느슨한 관계에 머물며 공적 무대에서 물러났다. 1962년 인터뷰와 회고에서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살해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고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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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3프로이센 참모본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 1914–1918대위 겸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 1918–1919근위기병소총사단의 제1참모장교로 베를린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체포 후 심문을 거쳐 살해를 명령했다.
  • 1919–1920민족주의 단체 국민연합의 상무이사로 카프-뤼트비츠 폭동의 기술·조직 준비를 맡았다. 폭동 실패 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 1921–1930티롤 향토방위대의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연방참모장이 되었다. 1930년 체포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 1930–1943베를린 라인메탈-보르시히에서 무기부문 책임자로 일했고 1938년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1943년 스위스에 남아 정치적 망명을 받았다.
  • 1955–19701955년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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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82–1946 ✕ 처형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으로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장군이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수장으로서 그는 범죄 명령에 서명하고 나치의 학살과 전쟁 수행에 책임을 졌다.

카이텔은 1938년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군 통수권 아래서 정책을 전달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동부 지역에서의 독일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한 관할권 명령, 소련 정치장교의 즉결 처형을 요구한 정치장교 명령, 야간과 안개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과 포고에 서명했다. OKW 수장으로서 그는 소련에서 아인자츠그루펜과 군대의 민간인 학살 협력 및 소련군 포로의 가혹한 처우에 책임이 있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네 혐의 모두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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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프로이센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다.
  • 1938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에 임명되었다.
  • 19455월 독일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루돌프 뤼터스

Rudolf Lüter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83–1945 ○ 옥사

파르티잔전쟁을 지휘한 독일 국방군 장성

뤼터스는 파르티잔의 전투 사기가 “놀라울 만큼 높다”고 평가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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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제국군 제118보병연대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중대·대대 지휘
  • 1920–1933국가방위군 제15보병연대 및 제5사단 복무
  • 1933–1938제1프로이센보병연대 지휘, 보충군관구 감찰
  • 1941–1942제223보병사단 사단장,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3크로아티아 독일군 사령관, 네레트바·수테스카 공세 지휘
  • 1943제15산악군단 초대 군단장
  • 1944–1945군에서 명예 전역, 소련군 포로로 수용 중 사망

프란츠 할더

Franz Halder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84–1972 ○ 자연사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획하고 전후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주조한 독일 육군 참모총장

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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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

알베르트 케셀링

Albert Kesselring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5–1960 ○ 전쟁범죄 유죄, 1952년 석방

루프트바페를 키우고 이탈리아 방어를 지휘한 나치 야전원수

1947년 2월 베네치아에서 재판이 시작되어 5월 6일 아르데아티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선동 혐의로 유죄, 사형 선고를 받았고, 7월 4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10월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루프트바페 건설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로, 폴란드·프랑스·소련 침공과 지중해 전구를 지휘했고 1941년 11월부터 남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맡아 구스타프선과 고딕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동시에 그의 지휘 아래 민간인 보복이 자행되었고, 1944년 6월 반당파 지령으로 보복을 승인했으며 아르데아티나 동굴 학살을 포함해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베네치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석방되었으나, 자신의 전쟁 수행을 철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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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바이에른군 제2 야전포병연대에 입대
  • 1933제국항공성 행정국장, 루프트바페 창설 준비
  • 1936–1937루프트바페 참모총장
  • 1939–1941제1·제2 항공함대 지휘, 폴란드와 서부 및 동부 전선
  • 1941–1943남부 총사령관, 지중해 전구 독일군 지휘
  • 1943–1945남서부 총사령관 겸 C집단군 사령관, 이탈리아 방어
  • 1945서부전선 총사령관, 5월 미군에 항복
  • 1947–1952전쟁범죄 유죄 판결, 1952년 석방

헤르만 호트

Hermann Hoth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5–1971 ○ 전쟁범죄 유죄, 1954년 석방

기갑전의 성과와 동부전선 범죄가 겹친 독일 장군

1942년 12월, 호트의 제4기갑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헤르만 호트는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국방군의 기갑 지휘관으로 성장한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빠른 기동작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블라우 작전의 남부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구출 시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절멸전으로 이해했고 정치위원 명령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를 전달·집행했다. 전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조기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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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프로이센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및 야전 지휘
  • 1935–1938제18보병사단 지휘
  • 1939–1940제15군단 지휘,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 참가
  • 1941제3기갑집단 지휘, 민스크와 비테프스크 점령
  • 1941–1942제17군 사령관
  • 1942–1943제4기갑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구출 작전 지휘
  • 1948–1954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 유죄 판결과 란츠베르크 수감
  • 1956『기갑작전』 출간
  • 1971고슬라에서 사망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Gotthard Heinrici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6–1971 ○ 자연사

동부전선의 방어전문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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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프로이센 육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동부전선 복무, 참모 장교
  • 1937–1940제16보병사단 사단장
  • 1940–1941제12군단장, 프랑스 전역과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4제4군 사령관, 동부전선 방어전 지휘
  • 1944–1945제1기갑군 사령관, 폴란드·슬로바키아 방면 후퇴전 지휘
  • 1945.03–04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 제로 고지 전투와 베를린 방어 지휘
  • 1945–1948영국군 포로, 1948년 석방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Heinrich von Vietinghoff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7–1952 ○ 자연사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 항복을 대표한 장군

1945년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그의 대리인들이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프로이센 군인 가문 출신인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는 제국군과 국가방위군을 거쳐 국방군의 상급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 침공과 소련 침공에 참여했고, 1943년부터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카세르타에서 연합군과 항복 조건을 조율하고 군을 대표해 서명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는 절차의 핵심 당사자가 되었다. 전후에는 포로 생활 뒤 서독 재무장 논의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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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프로이센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9–1935국가방위군 장교, 육군부와 군단 참모 복무
  • 1938–1939제5기갑사단 사단장
  • 1940–1942제46기갑군단 사령관, 발칸 및 동부전선 지휘
  • 1942–1943제9군 및 제15군 사령관
  • 1943–1944이탈리아 제10군 사령관, 구스타프선과 고딕선 방어
  • 1944–1945육군집단 C 및 남서방면군 최고지휘관
  • 1945카세르타 항복 협정에서 독일군 대표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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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하노버 경보병대대 장교
  • 1914–1918제1차세계대전 참전, 통신·참모 장교
  • 1927–1931육군수송·차량화 부대 참모 및 교관
  • 1935–1938제2기갑사단 지휘관, 차량화 부대 감찰관
  • 1938–1940제19군단 사령관, 서부전역 기갑 지휘
  • 1941제2기갑집단 사령관, 바르바로사 작전
  • 1943–1945기갑부대 총감찰관,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

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90–1946 ✕ 처형

나치 전쟁기획의 실무 책임자

1940년 6월 30일 그는 “영국에 대한 최종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썼다.

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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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바이에른 제4야전포병연대에서 군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포병 장교
  • 1932–1935육군 작전부 근무
  • 1935–1939국방군 최고사령부 국가방위부 책임자
  • 1939–1945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
  • 1944육군 상급대장 진급
  • 1945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독일 항복문서 서명
  • 1946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90–1957 ○ 자연사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 야전사령관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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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제국군 제111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
  • 1935–1939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제10군 참모장
  • 1939–1940제10군, 이후 제6군 참모장
  • 1940–1941독일 육군 총참모부 작전 병참 담당 차장
  • 1942–1943독일 국방군 제6군 사령관
  • 1943상급대장, 1월 30일 야전원수로 승진
  • 1954–1957동독 군사사 연구 및 강의

발터 모델

Walter Mode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91–1945 ✕ 자살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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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

헬무트 바이들링

Helmuth Weidling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91–1955 ○ 옥사

붕괴하는 제국의 마지막 베를린 방위 지휘관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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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8프로이센군 포병 및 비행선 부대 장교
  • 1919–1938국가방위군 포병 장교, 연대 지휘관
  • 1939–1941폴란드·프랑스 전역 및 동부전선 포병 지휘
  • 1942–1943제86보병사단 사단장
  • 1943–1945제41기갑군단 사령관
  • 1945.04제56기갑군단 사령관, 오데르 전선과 베를린 전투
  • 1945.04.23–05.02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 주둔군 항복 명령
  • 1952–1955소련 수감 중 전쟁범죄 유죄 판결, 복역

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나치 독일 해군의 잠수함 전력을 지휘하고 히틀러 사후 국가원수를 지냈다.

되니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해군 잠수함 전력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대제독으로 승진해 해군 총사령관이 됐다. 잠수함 손실이 커진 1943년 5월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격을 명령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유언에 따라 국가원수로 지명됐으며, 1945년 5월 7일 요들에게 독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명령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와 전쟁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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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독일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
  • 1945히틀러 사후 국가원수가 되어 독일 항복을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