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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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이사크 일리치 샤피로

Исаак Ильич Шапиро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를 관리한 예조프의 비서실장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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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적군 정치위원 — 여단 코미사르
  • 1922–1929러시아공화국 재무인민위원부·고스플란 근무
  • 1930년대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부장, 당 중앙위 기구 부문장
  • 1937.1–7NKVD 비서실 부실장
  • 1937–1938NKVD 비서실장(겸임) · GUGB 제9특별부장
  • 1938.3–11NKVD 제1특별부장 — 작전 기록·등록·통계 총괄
  • 1937–1938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

이즈라일 야코블레비치 다긴

Израиль Яковлевич Дагин

북캅카스 NKVD 국장에서 정부 경호부장으로, 대숙청 집행자

1938년 11월, 정부 경호부장 다긴은 베리야의 NKVD 내부 숙청으로 체포되었다. 크렘린을 지키던 자가 루뱐카의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예브도키모프의 측근으로 북캅카스 NKVD에서 대숙청기 대량 체포를 지휘한 국가보안 간부. 정부 경호부장으로 크렘린을 지키다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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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차르군 복무, 적위대·지하당 활동
  • 1919–1924니콜라예프·헤르손·크림 체카 주요 직책
  • 1924–1934북캅카스 OGPU에서 테르스크 주·변경주 보안 책임자로 승진
  • 1934–1937북캅카스(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국장
  • 1937.4–1937.6고리키 주 NKVD 국장
  • 1937–1938GUGB NKVD 제1부(정부 경호) 부장
  • 1938–1940체포, 재판, 총살

지노비 마르코비치 우샤코프

Зиновий Маркович Ушаков

투하쳅스키의 자백을 받아낸 심문관, 자기가 맞고 나서야 매를 말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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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키예프 체카
  • 1935–1936벨로루시 NKVD 특별부 부부장
  • 1937.01국가보안총국(GUGB) 특별부 부부장
  • 1937‘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 주임 심문관
  • 1937.09국가보안소장
  • 1938.09하바롭스크에서 체포
  • 1940.01군사합의회의 사형 선고, 총살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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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33상하이 정보망
  • 1933–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5–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1944.11체포, 도쿄에서 처형

브세볼로드 니콜라예비치 메르쿨로프

Всеволод Николаевич Меркулов

카틴 명령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NKGB 수장, 필명으로 희곡을 쓴 사람

1953년 7월 21일 증인 신문에서 그는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린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9월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가 1923년 베리야에게 발탁되었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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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그루지야 체카·GPU 경제부와 정보국
  • 1931–1934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제1서기(베리야)의 보좌관
  • 1934–1937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소비에트무역부장, 이어 특별부장
  • 1937–1938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수송부장
  • 1938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
  • 1938–1941내무 제1부인민위원 겸 국가보안총국장
  • 1941국가보안인민위원(NKGB 1차)
  • 1941–1943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43–1946국가보안인민위원, 1946년부터 국가보안장관(MGB)
  • 1947–1950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장
  • 1950–1953국가통제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블로힌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Блохин

세 명의 수장을 거쳐 이십칠 년을 집행한 사형집행인

1940년 4월, 블로힌은 가죽 앞치마와 어깨까지 오는 장갑을 갖추고 칼리닌 NKVD 지하실에서 28일 밤 동안 폴란드 포로 약 7천 명을 3분에 한 명꼴로 직접 사살했다.

NKVD 사령부장으로 27년간 루뱐카의 사형을 집행한 소련의 사형집행인. 야고다·예조프·베리야를 거치며 대숙청 희생자를 처형했고, 1940년 카틴 학살 시 칼리닌 처형팀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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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53NKVD·MGB 행정경제국 사령부장, 사실상의 사형집행 책임자
  • 1937–1938대숙청기 처형 집행과 감독
  • 1940칼리닌 처형팀 지휘(카틴 작전)
  • 1953–1954퇴역, 이어 계급 박탈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을 20년간 통치한 스탈린 시대의 당 서기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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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푸호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Пух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58 ○ 자연사

세미나리 출신 교관에서 13군을 유럽 중부까지 이끈 육군대장

"겉으로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결단력을 발휘하고 확고한 손으로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령관이었다." — 이반 코네프 원수

제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하고 내전에서는 여단·사단 참모장을 지낸 니콜라이 푸호프는, 전간기 대부분을 군사학교 교관으로 보내 현장 지휘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독소전을 맞았다. 1942년 1월 13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쿠르스크 북측면에서 모델의 9군을 6일간 저지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에서 세 개 전선군 중 가장 먼저 강을 건너 체르니고프를 해방하여 영웅칭호를 받았다. 이후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까지 13군을 이끌며 중부 유럽을 관통했고, 13군은 최고사령관 명령에 26회 거명되었다. 전후에는 오데사·북캅카스·서시베리아·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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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러시아 제국군 준사관, 북부전선에서 독가스 피해
  • 1918–23적군 입대, 남부전선·카렐리야·폴란드 전선에서 여단·사단 참모장
  • 1924–30제34소총연대장, 비스트렐 과정 수료
  • 1930–41비스트렐 교관 → 기계화군사아카데미 교관 → 하리코프 기갑학교장 → 군사경제아카데미 교관
  • 1941–42제304소총사단장, 폴타바·돈바스 방어전
  • 1942–46제13군 사령관 — 쿠르스크·드네프르·우안우크라이나·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
  • 1946–48제8기계화군 사령관,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48–57오데사 → 북캅카스 → 서시베리아 →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57–58루마니아 인민군 최고군사고문

이오나 티모페예비치 니키첸코

Иона Тимофеевич Никитченко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소련 측 판사, 대숙청 사형 선고자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니키첸코가 말했다. "만약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연만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1938–1949)이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1945–1946)로, 스탈린 시대 사법 살육의 핵심 집행자였다.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기 군사법정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울리히 휘하의 군사합의부 부의장으로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사형에 처한 재판을 비롯한 모스크바 쇼 재판을 주재했다. 런던 헌장의 세 명의 주요 기초자 중 한 명으로 국제군사재판의 법적 틀을 설계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폰 파펜·프리체의 무죄 판결에 유일한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1940년 당 통제위원회로부터 극동 지역 '컨베이어식' 재판의 절차적 위반으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1951년 퇴직 후 196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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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918노보체르카스크 적위대 분대장 대리
  • 1918–1920제4군 및 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 근무
  • 1920–1924세미레치예 군집단·투르케스탄 전선 군사법정 부의장 및 의장
  • 1924–1926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합의부 위원
  • 1926–1935모스크바 군관구 군사법정 의장
  • 1935–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부의장
  • 1938–1949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3법무 소장 진급
  • 1945런던 회의 소련 대표 — 국제군사재판 헌장 기초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
  • 1949–1951소련 법무부 수상운수선박법정 관리국장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티모셴코

Семё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Тимош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5–1970 ○ 자연사

소련 원수, 1940-1941년 국방인민위원

바실렙스키 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1월 7일 최고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를 묻자 긴 침묵이 흘렀고, 티모셴코가 일어나 논의된 모든 것을 받는다면 맡겠다고 답하며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895년 베사라비아 오르만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1914년 징집되었고, 내전에서 부됸니 기병군 계열로 성장했다. 1920~1930년대에 기병 군단과 군관구를 지휘했고 겨울전쟁에서 북서전선을 이끌며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재무장·기계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3일부터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11월 로스토프나도누를 되찾았다. 1942년 5월 하리코프 포위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전선 해임 뒤 1943년 3월까지 북서전선을 지휘했고, 이후 스타브카 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명예직을 맡았다. 197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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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기병 지휘관으로 내전 참전, 부됸니 기병군 계열에서 성장
  • 1939–1940겨울전쟁 후반 지휘로 명성을 얻고 원수로 승진
  • 1940–1941국방인민위원, 대숙청 뒤 붉은 군대 재건 시도
  • 1941–1942독소전 초기 여러 전선을 지휘하나 하리코프 패배 등 한계 노출
  • 1943–1945최고사령부 대표와 원로 지휘관 역할로 후퇴
  • 전후군 원로와 명예직으로 남음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Андреев

20년간 정치국에 앉아 있던 조직의 사나이, 가장 자주 지방을 숙청하러 파견된 서기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지하 볼셰비키들이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몰렌스크주 쿠즈네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두 해의 농촌 학교를 다녔고, 1908년 13세에 모스크바로 나가 식당의 접시닦이 소년으로 일했다. 노동자 야학과 프레치스텐스키 노동자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11~1912년 사회민주주의 서클에 들어갔으며, 1914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대숙청기에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숙청했다. 정치국 정위원으로 20년간 최고 지도부에 있었다. 1937~1962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고, 197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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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위원(1915–1916)
  •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 1938–46연방회의(소비에트) 의장
  • 1939–52당 통제위원회 의장, 예조프의 뒤를 이어 당 규율 총괄
  • 1943–46농업인민위원, 전후 복구 계획 참여
  • 1946–53소비에트 각료회의 부의장, 농업·콜호즈 담당
  • 1953–62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위원
  • 1957–62소중우호협회 회장

이고리 예브게니예비치 탐

Игорь Евгеньевич Тамм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5–1971 ○ 루게릭병

수소폭탄에서 토카막까지, 두 핵 시대의 이론물리학자

1953년 첫 수소폭탄 실험 성공과 함께 탐은 무기 연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남은 18년을 핵융합의 평화적 이용에 바쳤다.

이고리 탐은 체렌코프 복사를 일리야 프란크와 함께 해명하여 195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소비에트 이론물리학자다. 1934년부터 사망까지 FIAN 이론부장으로 탐 준위·탐-댄코프 근사 등 기초물리학에 기여했고, 1948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수소폭탄 개발에 투입되어 1949~1953년 아르자마스-16 이론그룹을 이끌며 사하로프·긴즈부르크 등과 '슬로이카' 설계로 1953년 8월 소련 첫 열핵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1951년 사하로프와 제안한 토카막 자기밀폐 핵융합 개념은 ITER로 이어지는 주류 핵융합로의 토대이며, 후기에는 '300인의 편지'(1955)와 스탈린 복권 반대 성명(1966)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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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대학 졸업
  • 1924–1930모스크바대학 강사 → 이론물리학 주임
  • 1934–197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이론부장
  • 1949–1953아르자마스-16 열핵폭탄 이론그룹장
  • 1951사하로프와 토카막 개념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58노벨 물리학상 (체렌코프 복사 해명)
  • 1966스탈린 복권 반대 25인 성명 서명

이반 스테파노비치 유마셰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Юмаш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2 ○ 자연사

8월 폭풍 작전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스탈린에게 '장관감이 못 된다' 일갈당한 해군원수

1951년 7월 해군 주력군사평의회에서 스탈린은 유마셰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깨끗하고 용감하며 훌륭한 선원이지만, 장관이 아니다. 모든 일을 보좌관에게 맡기고 권력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짜르 해군의 수병으로 출발하여 소련 해군 최고위에 오른 제독. 1939년부터 태평양함대를 지휘하며 극동의 해군 기지를 정비했고, 1945년 8월 대일전에서 함대를 이끌어 남사할린·쿠릴 열도 상륙과 조선 북부 해안의 청진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7년 쿠즈네초프의 뒤를 이어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1950년 해군장관에 올랐으나, 스탈린은 그가 실무를 보좌관에게 넘기고 음주에 빠져 있다며 '사람은 좋지만 장관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1951년 경질했다. 이후 해군아카데미 교장으로 물러나 함대보다 교실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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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발트함대 크론슈타트 소년병학교 입교, 순양함 보가티리에서 복무
  • 1917레발 해안포대 수병위원회 위원장, 혁명 후 질병으로 제대
  • 1918–1920입당 및 붉은의용대 지휘관, 볼가-카스피 소함대에서 내전 참전
  • 1920–1924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후일 마라트) 포술지휘관·부함장
  • 1926–1937흑해함대: 구축함·순양함 지휘, 구축함대·순양함여단장
  • 1938.01–1939.03흑해함대 사령관
  • 1939.03–1947.01태평양함대 사령관, 대일전 승리로 소련영웅 칭호(1945)
  • 1947.01–1950.02군무차관 겸 해군총사령관
  • 1950.02–1951.07소련 해군장관
  • 1951–1957보로실로프 해군아카데미 교장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오를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Орлов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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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 1938.07소환 명령을 거부하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 1938–1953알렉산더 버그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잠적 생활
  • 1953『스탈린 범죄의 비사』 출간, 《라이프》에 연재
  • 1955–1957미국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에서 두 차례 증언
  • 1963『방첩·유격전 편람』 출간, 미시간 대학 법학대학원 연구원
  • 1973.03.25클리블랜드에서 사망

이반 세르게예비치 호흘로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Хох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5–1973 ○ 자연사

전시 러시아 공화국을 이끈 직조공 출신 총리

1941년 10월 10일, 스탈린은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호흘로프를 지명했다. 「툴라와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가능한 한 오래 막아야 한다」 — 주코프, 불가닌, 호흘로프 세 사람의 이름이 모스크바 방어전의 모든 명령에 함께 새겨졌다.

모스크바 근교 구비노 마을에서 농민 아들로 태어나 열 살부터 직조공으로 일했고, 1918년 동네 청년 125명을 모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내전에서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친 뒤 모스크바 주 소비에트와 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을 거쳐 194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에 올랐다. 대조국전쟁이 터지자 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의 병력·군수 수송을 총괄했고, 스몰렌스크 해방과 동프로이센 공세까지 종군해 중장 계급을 받은 유일한 러시아 공화국 총리였다. 전후 다시 첸트로소유스를 이끌며 전쟁으로 파괴된 농촌 소비자 협동조합망을 복구했고, 1955년부터는 국가무역감독국장으로 물자 유통을 감독하다 1965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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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38–1940중앙소비자조합(첸트로소유스) 상임간부회 의장
  • 1940–1943러시아 공화국(RSF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41–1944서부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모스크바 방어·스몰렌스크 해방)
  • 1944–1945제3벨로루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동프로이센 공세)
  • 1945–1954첸트로소유스 이사회 의장
  • 1955–1965국가무역감독국장 (소련·RSFSR 무역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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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슈밀로프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Шуми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남부를 6개월 사수한 64군 사령관

1943년 1월 31일, 베케톱카 64군 사령부. 슈밀로프 장군 앞에 파울루스 원수가 들어섰다. 독일군 원수가 적군에 항복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그를 생포한 것은 슈밀로프의 병사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친 베테랑 보병 장교. 1942년 8월 64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를 6개월간 책임졌다. 추이코프의 62군이 북부 시가전을 치르는 동안 64군은 헤르만 호트의 4기갑군을 저지하며 남부 방어선을 사수했고, 1943년 1월 부하들이 생포한 파울루스 원수를 직접 심문했다. 이후 제7근위군으로 개편된 부대를 이끌고 쿠르스크, 드네프르 도하, 부다페스트, 프라하 공세까지 진군했으며, 드네프르 도하의 공로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백해군관구와 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을 지냈고, 사후 마마예프 쿠르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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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추구예프 군사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붉은 군대·볼셰비키당 입대
  • 1918–20내전: 소대장에서 연대장까지
  • 1938–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
  • 1938–41제11소총군단장 (폴란드·핀란드 전쟁, 발트 방어)
  • 1942.1–8제21군 부사령관 (하리코프·돈 강)
  • 1942.8–1943.4제64군 사령관 — 스탈린그라드 남부 방어
  • 1943.4–1945.5제7근위군 사령관 (쿠르스크 → 프라하)
  • 1949–55보로네시군관구 사령관

파벨 오시포비치 수호이

Павел Осипович Сухой

Су(Sukhoi) 설계국의 창립자, Su-7, Su-24, Su-27의 아버지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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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 1949–1953OKB 해체; 투폴레프 설계국 부수석 설계자
  • 1953–1975OKB-51 재건 — Su-7, Su-9, Su-15, Su-17, Su-24, Su-27 착수
  • 1958–1974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바실렙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Василе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5–1977 ○ 자연사

천왕성 작전을 설계한 신학교 출신 참모

겨울전쟁 계획기 무렵 크렘린의 비공식 오찬에서 스탈린이 부모에 대해 물었다. 바실렙스키는 1938년 자서전에서 1924년부터 개인적·서신적 연락이 끊겼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놀라며 당장 관계를 회복하라고 권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1940년 회복되었다.

1895년 키네솀스키군 노바야 골치하에서 교회 선창자였다가 뒤에 사제가 된 아버지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코스트로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19년 붉은 군대에 들어갔다. 1942년 6월 26일 참모총장이 되고 같은 해 10월 14일부터 국방인민위원을 겸해 스탈린그라드 반격을 조율했으며, 이후 쿠르스크·크림·벨라루스·발트 전역에서 스타프카 대표로 전선을 조율했다. 1943년 2월 16일 소련 원수가 되었다. 1945년 2월부터 4월까지 3벨라루스전선군을 지휘해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켰고, 그해 하반기에는 극동 소련군을 지휘했다. 전후 1946~1948년 참모총장, 1949~1953년 군사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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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41참모본부 작전부, 숙청으로 빈 자리를 채우며 초고속 승진
  • 1942–45참모총장, 천왕성 작전 공동 설계
  • 1945.8극동군 총사령관, 만주 전역
  • 1949–53군사장관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로샬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Рошаль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896–1917 ✕ 살해

크론시타트 수병을 혁명으로 이끈 21세의 인민위원

10월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를 저지하는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를 이끈 젊은 혁명가로, 발트함대 수병을 혁명 편으로 돌려세웠다. 10월혁명 당일 감옥에서 풀려나 케렌스키 반격 저지에 투입되었고, 연말 루마니아 전선에서 백색장교단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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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410번 김나지움 혁명 서클 활동, 전교생 조직 회의 참가로 퇴학
  • 1914볼셰비키 입당, 나르바 구역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 조직
  • 1915북부전선 징집, 전선 선전 활동으로 체포되어 크레스티 수감
  • 1917.3–1917.7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시당위원장 겸 소비에트 집행위원 — 발트함대 수병 조직
  • 1917.7–1917.107월 사건 후 체포, 트로츠키·라스콜니코프 등과 함께 크레스티 재수감
  • 1917.1010월혁명 당일 석방,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 스타프카 점령 참여
  • 1917.12레닌 파견으로 루마니아 전선 인민위원회 대표 — 체포, 비밀장교단에 의해 살해

이에로님 페트로비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37 ✕ 처형

23세에 육군을 지휘한 천재 지휘관, 붉은 군대 기계화의 설계자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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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7제국군 포병 장교, 중위 계급
  • 1918–1918소총사단장, 북부전선
  • 1919–2014군 사령관 — 데니킨군 격파, 하리코프·오데사 점령
  • 1921–22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블라디보스토크 입성
  • 1925–28북캅카스·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9–31적군 무장부장, 부국방인민위원
  • 1931–37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 1936년 기동훈련 지휘
  • 1935제1급 군사령관 칭호 수여

이오나 에마누일로비치 야키르

Иона Эммануилович Яки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896–1937 ✕ 처형

키예프 군관구를 개혁의 실험실로 바꾼 내전 영웅

체포 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과 당신에 대한 사랑의 말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썼다. 스탈린은 여백에 '악당이자 매춘부'라고 적었고, 보로실로프는 '완벽히 정확한 정의'라고 덧붙였다.

키시뇨프 유대인 약사 가정에서 태어나, 차르 시대 입학 제한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 중 오데사에서 지토미르까지 적진 400km를 돌파한 전설적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기계화·공수 실험과 종심작전 교리 발전을 주도한 군사 개혁의 핵심 인물로, 1935년 콤안다름 1계급이 되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총살, 1957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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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집행위원, 루마니아군에 맞서 붉은 부대 지휘
  • 1918–1919제8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남부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 1919제45소총사단장·남부집단군 사령관 — 오데사→지토미르 400km 적후 탈출
  • 1921–1924크림군 사령관,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우크라이나·크림군 부사령관
  • 1924–1925군사교육기관 총국장, 『보옌니 베스트니크』 편집장
  • 1925–1935우크라이나 군관구 사령관 — 기계화·공수 실험, 독일 참모 교육 이수
  • 1935–1937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국방 군사평의회 위원, 콤안다름 1계급
  • 1937/19575월 체포, 6월 12일 총살, 1957년 사후 복권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블라고느라보프

Георгий Иванович Благонравов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볼셰비키 군사위원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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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3RSDLP(b) 입당, 예고리옙스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0–12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사령관
  • 1918.6–7동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31체카·GPU·OGPU 수송국장
  • 1929–1932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35–1936중앙 고속도로·자동차수송국장 (구쇼스도르)
  • 1936–1937NKVD 고속도로건설총국장, 국가보안 1급 위원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스테츠키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Стецкий

부하린파 '적색 교수'에서 스탈린 편으로 전향한 선전 책임자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 연설: "문학에서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노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대회는 8월 17일~9월 1일 열렸다.

스몰렌스크주 보로프시나 마을 출신으로 1915년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중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1~1923년 적색교수양성소에서 수학하며 부하린의 '적색 교수' 그룹에 속했다. 1925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주필, 1926~1930년 중앙위 북서부국과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선전부를 맡았고, 1928년 강제 곡물 수매에 반대했다가 스탈린 편으로 돌아섰다. 1930년부터 중앙위 문화선전부를 이끌며 1933년 작가동맹 조직위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언했으며 1935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체포되어 8월 1일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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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 1917당 선동원, 10월 봉기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란 진압 참가
  • 1918–1920적군에서 군사정치 및 참모 업무
  • 1921–1923적색교수양성소 수학, 부하린파 '적색 교수' 그룹
  • 1925『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초대 주필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작가동맹 조직위 실질적 운영
  • 1934–1938중앙위 조직국 위원, 잡지 『볼셰비키』 주필
  • 1935–1938중앙위 당 선전선동부장, 대숙청기 선전 캠페인 조직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1934년 문화·레닌주의선전부로 개편
  • 1937소련 최고소비에트 제1기 대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