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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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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코체토프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еевич Кочетов

트빌리시에서 정치국 승인 없이 무력 사용을 강행한 국방차관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 1989년 4월 8일,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서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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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리보프 보병학교 졸업, 독일 주둔 소련군에서 소대장·중대장
  • 196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북캅카스 군관구 연대장
  • 1973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24 '철의' 사단장
  • 1977–1979제7근위군 사령관
  • 1982–1985남부군집단(헝가리) 사령관
  • 1985–1988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88–1989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89–1991소련 국방부 제1차관

레프 드미트리예비치 랴베프

Лев Дмитриевич Рябев

체르노빌 직후 핵산업을 넘겨받은 중형기계공업 장관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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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3VNIIEF(KB-11) 기술자·선임 기술자
  • 1963–1967크렘료프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7–1969VNIIEF 생산 담당 부수석 기술자
  • 1974–1978VNIIEF 소장
  • 1978–1984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 중형기계공업 부문장
  • 1984–1986중형기계공업 차관·제1차관
  • 1986–1989중형기계공업 장관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연료에너지복합체 국장
  • 1993–2002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

캄란 마메드 오글루 바기로프

Kamran Məmməd oğlu Bağıro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3–2000 ○ 자연사

알리예프의 후계자였으나 위기 앞에서 무너진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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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바쿠 가스 사무소 정비공
  • 1957아제르바이잔 공과대학 졸업, 조교·전임강사·건축학부 부학장
  • 1968–197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건설·공공주택부 부부장
  • 1971–1974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도시경제부장
  • 1974–1978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8–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2–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2아제르바이잔 국가산업안전·광산감독위원회 의장

압사마트 마살리예비치 마살리예프

Абсамат Масалы уулу Масали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키르기스 1933–2004 ○ 자연사

소련 말 키르기지야의 당 지도자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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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키질키야 탄광관리국 콤소몰스카야 광산의 광산부문 부총공학자, 이어 키르기즈우골 트러스트 부총공학자
  • 1961–1973오시주 당위원회 강사, 알마아타 고등당학교 수학, 당·국가 감독 기관 근무, 오시주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타시쿠미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2–1974프룬제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74–1979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9–1985이식쿨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1991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5년 11월 2일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선출, 1991년 4월 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이동하며 해임).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1990년 4월 10일 제12차 소집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선출, 12월 10일 본인 요청으로 해임)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문 고문(1991년 4~8월)
  • 1992–2004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지도자(1992년 9월부터). 당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공산당연합-소련 공산당 이사회 집행위원 겸 부의장
  • 1993–1996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검열국장(1993년 1월~1996년 6월)
  • 1994–2004이. 라자코프 재단 이사장(1994년부터)
  • 1995–2004주고르쿠 케네시 인민대표회의 의원(1995년 4월 선출, 2000년 4월 재선), 2000년부터 입법회의 의원

블라디미르 미그라노비치 몹시샨

Վլադիմիր Միգրանովիչ Մովսիսյան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계 1933–2014 ○ 자연사

소련 아르메니아의 마지막 공산당 제1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미해결을 이유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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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5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여러 지역의 수석 수의사
  • 1969–1973아르타샤트 지구당 제1서기
  • 1975–197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84–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소련 농업·식량부 차관
  • 1996–1999아르메니아 농업부 장관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파스투호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астухов

콤소몰의 마지막 거물이자 고스코미즈다트 수장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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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바우만 구 콤소몰 제2비서
  • 1959–1961바우만 구 콤소몰 제1비서
  • 1961–1962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2비서
  • 1962–1964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1비서
  • 1964–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7–1982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6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 의장
  • 1986–1989주덴마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9–1992주아프가니스탄 소련/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1992–1996러시아 연방 외무차관
  • 1996–1998러시아 연방 외무제1차관
  • 1998–1999러시아 연방 CIS 담당 장관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말로페예프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офе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벨로루시아인 1933–2022 ○ 자연사

연방 해체기에 당의 연속성을 지키려 한 벨로루시아의 조직가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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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고멜 출생
  •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 1978–1985고멜주 집행위원회 위원장, 벨로루시아 공산당 고멜주위원회 제1서기
  • 1985–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민스크주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6–2000벨로루시아 공화국 국민의회 하원 초대 의장

발렌티나 레오니도브나 포노마료바

Валентина Леонидовна Пономарёва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3–2023 ○ 자연사

가장 뛰어난 여성 우주인 후보였으나 비행하지 못한 시험비행사

테레시코바에게 「너는 콤소몰과 당이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놓았어」라고 말했다고 카마닌이 일기에 기록했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유일한 여성 조종사 출신 우주인 후보였다. 1962년 여성 우주비행사단에 선발되어 최종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의료 책임자 야즈돕스키는 그녀를 1순위로 추천했다. 그러나 카마닌은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를 '오만'으로, 담배와 음주를 '도덕적 불안정'으로 기록했고, 코롤료프는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며 테레시코바를 선택했다. 이후 보스호트 계획의 여성 우주유영 임무를 준비했으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끝내 우주비행을 하지 못했고, 1969년 여성 그룹 해체와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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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57모스크바 여자 156학교 금메달 졸업, 모스크바 항공대학(MAI) 졸업 (액체로켓엔진 전공)
  • 1957–62OKB-1 배치 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응용수학부 연구원 (켈디시 산하)
  • 1962.4여성 우주비행사단 선발 (5인), 공군 입대
  • 1962–63보스토크 6호 훈련, 최종시험 최고점. 테레시코바의 제2후보로 배정
  • 1965–66보스호트 4호 여성 우주유영 임무 훈련 (취소)
  • 1969–88우주비행사훈련센터 선임연구원, 궤도역학·우주비행사 교육
  • 1988–2023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자연과학기술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우주비행사학사 그룹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메르트니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ссмертных

소련 말기의 마지막 정규 외무장관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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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외무장관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넬류보프

Григорий Григорьевич Нелюб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34–1966 ✕ 자살

가가린의 두 번째 예비였으나 한 번도 우주에 닿지 못한 우주비행사

1966년 2월 18일,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 「지노크! 넌 언제나 최고였어. 너 같은 여자는 찾아야만 해. 용서해.」

1961년 1월 국가위원회는 첫 유인비행 탑승 순위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로 확정했다. 보스토크 1호의 두 번째 예비였고 보스토크 3·4호 백업으로도 훈련했으나, 1963년 3월 치칼롭스카야 역에서 군 순찰대와의 충돌로 우주비행사단에서 제적됐다. 극동으로 좌천된 뒤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에 빠졌고, 1966년 2월 18일 기차에 뛰어들어 서른한 살에 죽었다. 그의 존재는 글라스노스트까지 은폐됐고, 집단사진에서도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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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예이스크 해군항공학교 졸업, 해군 항공대 복무
  • 1960.03제1차 우주비행사단 선발 (뱅가드 6인)
  • 1961.01국가위원회, 탑승 순위 3위로 확정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
  • 1961.04보스토크 1호 두 번째 예비 (가가린)
  • 1962.06건강 문제로 보스토크 3·4호 훈련에서 제외
  • 1963.04치칼롭스카야 역 사건으로 우주비행사단 제적
  • 1963–66극동 방공부대 전투기 조종사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타라카노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Тараканов

체르노빌 지붕 위에서 인간이 로봇을 대신한 장군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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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하리코프 군사기술학교 졸업
  • 1963하리코프 도로공과대학 기계공학 전공
  • 1967–72모스크바 민방위 군사학교 교관, 쿠이비셰프 공병사관학교 부관과정
  • 1972–86민방위군 군사기술위원회 선임전문가, 전소련 민방위연구소 제1부소장, RSFSR 민방위참모부 부참모장
  • 1986체르노빌 특별위험구역 제염작전 지휘관
  • 1988스피타크 지진 구조작전 지휘관
  • 1990s–회고록 집필, 러시아 작가동맹 회원, 숄로호프 문학상 수상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파니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аничев

페레스트로이카 속 공작기계 공업을 지키려 했던 마지막 장관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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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5소련군 복무
  • 1955–1956드리빈 지구 DOSAAF 위원장
  • 1957–1959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 선반공
  • 1959–1964레닌그라드 연삭장비 특별설계국 설계사
  • 1964–1975일리치 공장 작업장장 → 스베르들로프 공작기계연합 당위 부비서
  • 1975–1978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장 겸 연삭장비 특별설계국장
  • 1980–1981전연방 정밀공작기계 생산연합 책임자
  • 1981–1986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차관 → 제1차관
  • 1986–199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91–1992국영주식연합 '스탄코인스트루멘트' 회장
  • 1992–로스스탄코인스트루멘트 사장 · 스탄코인스트루멘트 이사회 의장

발레리 표도로비치 비콥스키

Валерий Фёдорович Быков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34–2019 ○ 자연사

5일 동안 혼자 궤도를 돌며 아직도 깨지지 않은 단독 비행 기록을 세운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5호가 지구를 돌고 있던 1963년 6월 18일, 중앙위원회는 그의 입당 청원을 심의하여 후보 기간 없이 그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소련의 5번째 우주비행사. 1963년 6월 14일 보스토크 5호로 발사되어 약 5일 동안 지구를 81바퀴 돌았고, 이 단독 우주 체류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초 보스토크 계획은 두 여성을 동시에 발사할 예정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으로 변경되면서 비콥스키가 테레슈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됐다. 이후 소유스 22호(1976)와 동독 최초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함께한 소유스 31호(1978)까지 총 세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했으며, 보스토크·보스호트 계열 우주비행사 중 유일하게 3회 비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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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카친스크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2.08보스토크 3호 백업 조종사
  • 1963.06.14–19보스토크 5호 탑승, 81회 궤도, 4일 23시간 6분, 단독 우주 체류 기록
  • 1976.09.15–23소유스 22호 사령관, 지구 관측 임무, 블라디미르 악쇼노프와 동행
  • 1978.08.26–09.03소유스 31호 사령관, 동독 우주인 지그문트 옌과 살류트 6호 방문
  • 1988–1990베를린 소비에트 과학문화관 관장
  • 1990은퇴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자소호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засохов

국제주의와 지역 통치를 잇댄 정치가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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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르조니키제 시 콤소몰위원회 제1서기
  • 1967–1986소련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연대위원회 제1서기, 제1부위원장
  • 1986–1988소련의 시리아 대사
  • 1988–1990북오세티야주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서기
  • 1993–1998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 1998–2005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

올레크 다닐로비치 칼루긴

Олег Данилович Калугин

KGB 최연소 장군이자 최고위 망명 비판자

"나는 미국인들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7개월을 이곳에서 보낸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여러분의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 195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위장한 24세 KGB 장교가 《뉴스위크》에.

KGB 최연소 소장으로 대외방첩국(K국)을 이끌며 냉전기 대미 첩보전을 지휘했다. 1980년대 말 체제 개혁파로 전향하여 KGB의 부패를 공개 비판했고, 1991년 쿠데타에서 옐친을 지지한 뒤 미국에 망명해 회고록으로 기관 내부를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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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6KGB 외국어대학 (레닌그라드)
  • 1956–1958KGB 제101고등정보학교
  • 1958–1959컬럼비아 대학 풀브라이트 장학생 신분으로 작전 실습
  • 1960–1964KGB 뉴욕 레지덴투라 작전장교 (모스크바 라디오 기자 신분)
  • 1965–1970KGB 워싱턴 레지덴투라 부레지던트 겸 대행
  • 1971–1973제1총국 제2국(후일 K국) 부국장
  • 1973–1980KGB 제1총국 K국(대외방첩) 국장
  • 1980–1987KGB 레닌그라드국 제1부국장
  • 1990소련 최고회의 인민대표로 선출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4–1968 ✕ 추락사

인류 최초로 지구를 벗어난 미소

재진입 돌입, 캡슐 밖은 3천 도의 플라스마에 휩싸이고 10G의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가가린은 그 안에서 입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 쇼스타코비치의 「조국은 듣는다, 조국은 안다」. 후일 회고록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지구로 낙하하면서 내내 그 노래를 불렀다.」

집단농장 목수의 아들이 1961년 4월 12일, 108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파예할리!(갑시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두 진영이 함께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우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며 훈련하다 1968년 미그기 추락으로 죽었다. 서른네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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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57공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12보스토크 1호: 인류 첫 우주비행 108분
  • 1961–67세계 순방, 우주비행사 훈련 부책임자
  • 1968.3미그-15 훈련비행 중 추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계 1934–1993 ○ 자연사

위기 속에서 공화국 권한을 주장한 소비에트 정치가

“공화국의 동의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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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아제르바이잔 국립대학교 졸업, 문헌학 연구
  • 1966–197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바쿠 시당위원회 이념 담당 서기
  • 1980–1983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장관
  • 1983–1987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외무부 장관
  • 1987–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90–1992아제르바이잔 최고소비에트 의장

알렉세이 아르히포비치 레오노프

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4–2019 ○ 자연사

인류 최초로 우주의 문을 열고, 붓으로 우주를 그린 사관

「너무 고요해서 내 심장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별들에 둘러싸여 통제를 벗어난 채 떠 있었다.」 —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 12분.

시베리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1965년 3월 18일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으로 걸어나갔다. 보스호트 2호 밖으로 몸을 내민 12분 동안 우주복이 팽창해 에어록으로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으나, 산소를 빼내며 간신히 귀환했다. 우주에서 색연필로 궤도 일출을 스케치한 최초의 우주 화가이기도 하다. 1975년 소유스 19호 선장으로서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을 지휘해 미소 최초의 우주 도킹을 성사시켰고, 이후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으로 후배들을 길러냈다. 평생 200점이 넘는 우주화를 남긴 독보적 예술가-우주인으로, 두 차례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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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추게프 공군비행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59동독 주둔 소련 공군 정찰연대 배속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유리 가가린과 동기)
  • 1965.3.18보스호트 2호: 인류 최초 우주유영 12분 9초
  • 1968소련 유인 달착륙 계획 사령관 후보, 계획 취소
  • 1971소유스 11호 주승무원 사령관, 의료 문제로 교체 — 백업 승무원 전원 사망
  • 1975.7소유스 19호 사령관: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미소 최초 도킹
  • 1976–1982가가린 우주비행사훈련센터 부소장 겸 우주비행사단장
  • 1991공군 소장으로 퇴역
  • 2002–2019통합러시아당 최고위원회 위원

바실리 게오르기예비치 자하로프

Василий Георгиевич Захаров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4–2023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기 문화자유화를 집행한 선전 관료 출신 문화장관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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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 1973–1983레닌그라드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서기, 문화·과학·교육 담당
  • 1983–1986중앙위 선전부 제1부부장 → 모스크바 시당위 제2서기 (옐친과 공조)
  • 1986–1989소련 문화장관, 글라스노스트기 금서 해제·검열 완화·극장 자율화 추진
  • 1989–1990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게르만 스테파노비치 티토프

Герман Степанович Тит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35–2000 ○ 심장마비

우주에 오른 두 번째 인간이자 군사우주체계 건설자

우주에서 첫 잠을 청하며 그는 교신했다. "팔과 다리만 잘 정리하면 우주 수면은 훌륭하다… 아기처럼 잤다."

소련의 우주비행사이자 군사우주 지휘관.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를 타고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비행했으며, 17바퀴·25시간의 첫 장기 체류로 인간이 우주에서 먹고 자고 일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5세의 최연소 궤도비행사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우주에서 최초로 수동 조종과 영화 촬영을 수행했으며, 최초로 우주멀미를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비행 후 스피랄 우주왕복선 계획의 조종사 훈련을 이끌었고,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국방부 우주수단총국(ГУКОС/УНКС)의 제1부국장으로서 군사우주체계 시험·개발을 총괄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연방공산당 소속으로 국가두마 의원(1993~200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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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스탈린그라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
  • 1960제1차 우주비행사대 선발
  • 1961.04보스토크 1호 백업 조종사 (유리 가가린)
  • 1961.08보스토크 2호 탑승 — 17회 지구 궤도, 25시간 18분
  • 1965–1968스피랄 우주왕복선 조종사 훈련대장
  • 1968주콥스키 공군공학아카데미 졸업
  • 1972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우주지휘통제 부대 부사령관
  • 1973–1979ГУКОС 연구·개발 담당 부국장
  • 1979–1991국방부 우주수단총국(УНКС) 제1부국장, 중장 → 상장
  • 1993–2000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발레리 이바노비치 볼딘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Болдин

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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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레오니트 블라디미로비치 셰바르신

Леонид Владимирович Шебаршин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책임자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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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주파키스탄 소련 대사관 통역·3등서기관
  • 1962KGB 제1총국 입국, 101정보학교 훈련
  • 1964–1968파키스탄 주재 KGB 정보장교
  • 1971–1977주인도 KGB 부주재관 → 주재관
  • 1979–1983주이란 KGB 주재관
  • 1983–1987KGB 제1총국 정보분석국 부국장 → 국장
  • 1987–1989KGB 제1총국 부국장 (중동·아프리카 담당)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1총국장
  • 1991.8.22–23KGB 의장 대행

세르게이 니키티치 흐루쇼프

Сергей Никитич Хрущё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 미국 (이중국적) 러시아인 1935–202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아들이자 첼로메이의 유도체계 엔지니어

1969년 아폴로 11호 달 착륙 당시, 흐루쇼프는 우크라이나에서 KGB 장교와 함께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며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 했다.

소련의 로켓 엔지니어이자 전산학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로,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설계국(OKB-52)에서 순항미사일과 프로톤 우주발사체의 유도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기 크릴라티예 로켓,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부스터의 핵심 기술에 기여했으며, 1963년에는 28세의 나이로 사회주의 노동영웅과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후 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제1부소장으로 옮겨 연구를 이끌었고, 1991년 미국으로 이주해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에서 냉전사와 소련 우주개발을 강의하며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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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모스크바전력공학연구소 졸업, OKB-52(첼로메이 설계국) 입사
  • 1958–1968OKB-52 기술자 → 부문장 대리 — 유도체계 개발 (순항미사일, 군사위성, 달 탐사선, 프로톤 로켓)
  • 1959레닌상 수상
  • 1963–1964OKB-52 수석 설계자 겸 부설계국장
  • 1963사회주의 노동영웅 · 레닌 훈장 수훈
  • 1968–1991제어컴퓨터연구소(INEUM) 부문장 → 제1부소장
  • 1991–2020미국 이주, 브라운대학교 왓슨연구소 선임연구원 · 교수

빅토르 페트로비치 브류하노프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Брюха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35–2021 ○ 1988년 10년형, 5년 복역 후 석방

건설을 이끌고 사고의 책임을 진 체르노빌 원전의 첫 소장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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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타슈켄트 공과대학 졸업, 앙그렌 화력발전소 취직
  • 1966슬라뱐스크 화력발전소에서 부수석 엔지니어까지 승진
  • 1970–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초대 소장 겸 건설 책임자
  • 1986.07사고 책임으로 당 제명·해임, 8월 체포
  • 1988.0710년형 선고, 도네츠크 교정노동시설 복역
  • 1991.09조기 석방, 우크라이나 대외무역부 근무
  • 1995–2015우크르인테르에네르고에서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