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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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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행정 인물 328명

루이 16세

Louis XVI
정부·행정 프랑스 왕정 프랑스 프랑스 1754–1793 ✕ 처형

혁명으로 폐위되고 재판받은 프랑스 국왕

국민공회는 1792년 12월 3일 루이 16세를 직접 재판하기로 결정했고, 반역죄 유죄 표결 끝에 1793년 1월 21일 그를 단두대로 처형했다.

1774년 즉위한 프랑스 국왕으로 재정 위기 속에서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1791년 헌법을 받아들였지만 바렌 도주와 대외전쟁 속에서 왕실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1792년 왕권이 정지되고 국민공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1793년 1월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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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4–1792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해 1792년 9월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재위했다.
  • 1789재정 위기 속에서 삼부회를 소집했고, 바스티유 함락 뒤 국민의회의 입법 권한을 인정했다.
  • 17916월 바렌 도주가 실패했고, 같은 해 9월 제정된 헌법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가 선포됐다.
  • 17928월 10일 봉기로 체포되어 탕플 감옥에 갇혔고, 9월 21일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했다.
  • 1792–1793국민공회가 12월 3일 그를 재판하기로 결정했고, 12월 11일부터 재판이 열려 반역죄 유죄가 선고됐다.
  • 17931월 21일 파리 혁명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됐다.

조르주 쿠통

Georges Auguste Couthon

로베스피에르와 협력한 공안위원회 의원

변호사 출신으로 1791년 입법의회, 1792년 국민공회 의원이 됐고 1793년 공안위원회에 선출됐다.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와 협력했으며, 피고인의 방어권을 없앤 프레리알 22일법으로 처형이 급증했다.

변호사 출신의 입법의회·국민공회 의원으로 산악파에 합류했다. 공안위원회에서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와 긴밀히 협력했고 피고인의 방어권을 크게 줄인 프레리알 22일법 제정에 핵심 역할을 했다. 테르미도르 9일 체포되어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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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7오베르뉴 주의회 의원
  • 1791퓌드돔 선출 입법의회 의원
  • 1792퓌드돔 선출 국민공회 의원
  • 1793공안위원회 위원
  • 1793알프스군·론에루아르 파견의원, 리옹 진압
  • 1793국민공회 의장
  • 1794프레리알 22일법(대공포정치) 보고자
  • 1794테르미도르 9일 체포, 7월 28일 처형

샤를 10세

Charles Philippe, comte d’Artois
정부·행정 프랑스 왕정 프랑스 프랑스 1757–1836 ○ 망명 중 사망

혁명기 망명왕당파를 이끈 아르투아 백작

1825년 랭스 대관식에서 성왕(聖王) 치유 의식까지 되살리며 왕권의 신성을 내세웠지만, 1830년 7월 칙령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검열하자 파리 시민이 봉기해 8월 2일 퇴위했다.

루이 16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으로 1789년 바스티유 함락 직후 망명했다. 국외에서 왕정복고를 추진하고 망명귀족 세력의 정치적 구심이 됐다. 부르봉 왕정복고 뒤 1824년 샤를 10세로 즉위했으나 1830년 7월혁명으로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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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아버지 도팽 루이 사망
  • 1773사부아의 마리 테레즈와 결혼
  • 17897월 17일, 바스티유 함락 사흘 뒤 출국
  • 1791–1792트리어 선제후국에 망명 궁정을 두고 반혁명 침공을 준비
  • 1814왕국 총독 대리로서 왕정복고를 주도
  • 1824–1830프랑스 국왕. 1825년 랭스에서 대관식
  • 18307월 칙령 발표, 8월 2일 퇴위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Robespierre

생존권과 혁명 정부를 논한 자코뱅 정치가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 의원들은 그를 약 90명의 동료와 함께 체포했고, 그는 재판 없이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변호사이자 국민공회 의원으로, 공안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792년 생필품 연설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재산과 상업의 정당한 영역도 인정했다. 1794년 정치도덕 보고에서는 덕과 공포를 혁명 정부의 원리로 제시했다. 이 주장은 공포정을 정당화한 당사자의 논리이며, 여러 위원회와 국민공회가 내린 결정을 모두 그의 개인 명령으로 볼 수는 없다. 테르미도르의 정치적 패배 뒤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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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아르투아 대표로 삼부회 의원에 선출됨
  • 1780법학 학위를 받고 아라스 변호사로 등록함
  • 1792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됨
  • 1793–1794공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혁명정부를 이끎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

Alexandre de Lameth

혁명 초기의 삼두파에서 푀양파로 이동한 정치가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지만 삼두파와 푀양파에서 입헌군주제로 혁명을 안정시키려 했고, 1792년 왕정이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귀족 장교로 1789년 제3신분에 합류했고 특권 폐지를 지지했다. 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루다가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푀양파의 지도자가 됐다. 망명과 귀환 뒤 나폴레옹 정부의 지방관, 왕정복고기의 자유주의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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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7–1785왕의 친위대에 들어가 근위 기병 장교로 복무했고, 1782년 로샹보 휘하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대령으로 참전했다.
  • 1789페론느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제3신분에 합류했고, 8월 4일 밤 특권 폐지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89–1791바르나브·뒤포르와 삼두파를 이뤄 의회 좌파를 이끌었고, 1790년 11월 20일 의회 의장에 선출됐다.
  • 1791–1792자코뱅 클럽 창립 회원이자 푀양파 지도자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고, 1792년 5월 북부군에서 준장이 되었으나 8월 10일 라파예트와 함께 적국으로 넘어가 오스트리아에 억류됐다.
  • 1800–1814귀국해 바스알프·라인모젤·뢰르·포 주의 지방관을 지냈고 1810년 제국 남작이 됐으며, 1814년 중장으로서 솜 주 지방관을 맡았다.
  • 1820–1827왕정복고기에 센마리팀과 센에우아즈에서 자유주의 야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빌레르 내각에 맞섰다.

피에르 가스파르 쇼메트

Pierre Gaspard Chaumette

비기독교화에 앞장선 파리 코뮌 검사

파리 코뮌의 검사로서 사회 정책과 상퀼로트 대중 압력을 잇고 공포정치와 비기독교화를 추진했으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고 로베스피에르와 갈라선 뒤 1794년 처형됐다.

파리 코뮌의 검사로 물가·구호·공교육 같은 도시 정책과 급진 대중운동에 관여했다. 1793년 비기독교화 운동의 대표적 추진자가 되었고 에베르와 코르들리에 계열에 가까웠다. 혁명정부가 에베르파를 숙청한 뒤 체포되어 1794년 4월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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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0자코뱅 클럽 회원으로 혁명 파리 구역의 급진 언론 『레볼루시옹 드 파리』를 편집했다.
  • 17928월 파리 코뮌의 검사가 되어 8월 10일 봉기 때 체포 권한을 위임받아 감옥을 시찰했다.
  • 179210월 31일 코뮌 의장으로 선출되어 국민공회에서 코뮌을 변론했고 12월 2일 재선됐다.
  • 1793지롱드파 공격을 주도했고 10월 재판에서 에베르와 함께 검사로 나섰다.
  • 17939월 물가·식량 위기에 대중 동원을 이끌며 공포정치 수립에 기여했다.
  • 179311월 10일 이성 축제를 조직하는 등 비기독교화 운동을 주도했다.
  • 17943월 4일 에베르파 체포 뒤 3월 13일 체포되어 뤽상부르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4월 13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혁명의 전쟁에서 황제가 된 정복자

1799년 11월 9–10일 브뤼메르 쿠데타로 그는 탈레랑·시에예스 등과 결탁해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총재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제1통령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코르시카의 이탈리아계 가문 출신으로 1785년 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1789년 혁명을 지지했으며, 1793년 툴롱과 1795년 방데미에르에서 왕당파를 제압해 승진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고 1799년 11월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해 제1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과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무너져 1814년 엘바로 유배되었고, 1815년 백일천하 뒤 워털루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에서 1821년 사망했다. 나폴레옹 법전과 공교육 같은 개혁을 남긴 한편 점령지 약탈, 언론 폐쇄와 비판자 탄압, 식민지 노예제 부활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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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5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 1793툴롱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어 준장으로 승진했다.
  • 1795방데미에르 왕당파 봉기를 진압했다.
  • 1796–1797이탈리아 원정군을 지휘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 1798–1799이집트·시리아 원정을 지휘했다.
  • 1799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제1통령이 되었다.
  • 1804–1814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통치했다.
  • 1815백일천하 동안 다시 권좌에 올랐다가 워털루에서 최종 패배했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2세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18–1881 ✕ 암살

농노해방과 대개혁으로 구체제를 위로부터 현대화하려 했던 차르, 혁명가들의 표적이 되다

1856년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한 연설: "현행 농노 소유 질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래로부터 저절로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1855년 크림전쟁의 패배 속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아래로부터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다'며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젬스트보 자치·사법 개혁·병역 개혁을 차례로 단행했다. '해방자 차르'로 불렸으나, 개혁은 급진파에게는 불충분했고 보수파에게는 지나쳤으며, 1866년 암살 미수 이후 반동으로 기울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 헌법 초안에 서명한 바로 그날,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대개혁 시대의 종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적 테러를 러시아 정치의 결정적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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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5아버지 니콜라이 1세 즉위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55차르 즉위; 크림전쟁 패배 속에 즉위
  • 1856파리 조약으로 크림전쟁 종결; 대관식에서 정치범 사면
  • 1861농노해방령 — 2,300만 농노 해방
  • 1863–64폴란드 봉기 진압; 핀란드 의회 재소집
  • 1864젬스트보(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
  • 1874전계급 징병제 도입 — 군제 개혁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불가리아 해방
  • 1880로리스멜리코프에게 헌법 초안 위임
  • 1881.3.13인민의 의지(나로드나야 볼랴) 소속 이그나치 그리네비츠키의 폭탄에 치명상, 겨울궁전에서 사망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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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27–1907 ○ 자연사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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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39–1917 ✕ 살해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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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 1891법무차관
  •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 1916제1급 추밀고문(제국 최후의 수훈자), 해임
  • 1917.12소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됨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3세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I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45–1894 ○ 신장염

부친의 대개혁을 되돌리고 전제정치를 재확립한 '평화를 만드는 자'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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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5형 니콜라이 황태자의 죽음으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 1866포베도노스체프에게 법률 교육을 받기 시작하다
  •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루슈크 분견대 지휘
  • 1881.3.13부친 암살 후 즉위
  • 1881.4.29'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공포, 반개혁 시작
  • 1889토지대장(zemsky nachalnik) 제도 도입으로 농촌 귀족 통제 강화
  • 1892프랑스-러시아 동맹 체결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골리친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Голицы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0–1925 ✕ 처형

스스로 무능을 고백한 제국의 마지막 총리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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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1879내무부 관료, 폴란드령에서 농민 담당
  • 1879–1885아르한겔스크 부지사,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
  • 1885–1903아르한겔스크·칼루가·트베리 지사
  • 1903–1915원로원 의원, 국가평의회 의원
  • 1915–1916러시아 포로구호위원회 의장
  • 1917.01–03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50–1937 ○ 자연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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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Пётр Дмитрие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57–1914 ○ 자연사

"신뢰의 시대"를 약속했으나 피의 일요일로 끝난 비운의 내무장관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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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펜자 주지사
  • 1897–1900예카테리노슬라프 주지사
  • 1900–1902내무차관 겸 헌병단장
  • 1902–1904빌나·코브노·그로드노 총독
  • 1904.8–1905.1내무장관, '신뢰의 시대'
  • 1905.1피의 일요일 후 사임, 정계 은퇴

위안스카이

袁世凯
군사·지휘 북양정부·군벌 중국 중국 1859–1916 ○ 병사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국보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퇴위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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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1859–1924 ○ 자연사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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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2–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1–1925 ○ 사망

류리크 왕조의 후예, 제국의 마지막 자유주의 총리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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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3툴라 현 젬스트보, 기근 구호 활동
  • 1900–1906툴라 현 젬스트보 행정위원회 의장
  • 1904–1905러일전쟁: 젬스트보 의료여단 조직·지휘, 전국적 영웅
  • 1906제1대 국가두마 의원(카데트), 의료·식량위원회 위원장
  • 1914–1917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 의장, 육군 의료·보급망
  • 1915–1917젬고르 공동위원회 지도자, 전시 군수·구호 총괄
  • 1917.3–7임시정부 총리 겸 내무장관: 보통선거·사형폐지 등 개혁
  • 1918–1925체포·탈출, 미국 거쳐 파리 망명, 회고록 집필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Pehr Evind Svinhufvud

핀란드 독립을 선언하고 내전에서 독일의 개입을 요청한 원로원 수반

유형지 톰스크에서 2월혁명 소식을 들은 그는 경찰서로 걸어가, 나를 여기 보낸 자가 체포되었으니 이제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1917년 12월 핀란드 독립 선언을 이끈 원로원 수반으로 1918년 내전에서 백색정부를 이끌며 독일의 개입을 요청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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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귀족원 대표로 의회 활동 시작
  • 1907–1912핀란드 의회 의장
  • 1914–1917러시아화 반대로 톰스크 유형
  • 1917–1918원로원 수반(초대 정부 수반)
  • 1918섭정(국가 원수)
  • 1930–1931핀란드 총리
  • 1931–1937핀란드 대통령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 1862–1911 ✕ 암살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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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세르게이 예피모비치 크리자놉스키

Сергей Ефимович Крыжанов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62–1935 ○ 자연사

1907년 「뻔뻔한」 선거법으로 두마를 길들인 제국의 법률 설계사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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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1896내무성 경제국 과장
  • 1904–1906내무성 지방경제총국 부국장
  • 1906–1911내무차관 (스톨리핀의 오른팔)
  • 1907상원의원 · 추밀고문관
  • 1911–1917제국 국무장관 (마지막 재임자)
  • 1917국가평의회 의원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볼로고츠키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Вологод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백색운동 러시아인 러시아인 1863–1925 ○ 자연사

타협으로 백색 시베리아를 묶은 변호사 정치가

콜차크에게 그는 군 지휘관의 자의와 정부의 무능으로 권위가 시간마다 떨어진다고 직언했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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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7시베리아 사법기관 서기관·판사·검사보
  • 1897–1917톰스크 변호사, 도시 두마 의원
  • 1902–1907톰스크 사회혁명당 조직과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 지도자
  • 1917톰스크 губер니야 комиссар, 옴스크 사법원장
  • 1918.01–06자치 시베리아 임시정부 외무장관
  • 1918.06–11시베리아 임시정부 의장
  • 1918.11–1919.11러시아 정부 각료회의 의장
  • 1920–1925중국 망명, 법률·교민 업무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키시킨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ишк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4–1930 ○ 자연사

10월 혁명 당일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전권자로 임명된 카데트 장관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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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처형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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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8–1905.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s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