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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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조직 인물 181명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포프코프

Пётр Сергеевич Попков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실무 지휘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첫 희생자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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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니콜라이 일리치 벨랴예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Беляев

흐루쇼프를 지킨 측근, 테미르타우로 무너지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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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9서시베리아 협동조합·당 경제사업
  • 1939–43노보시비르스크 식품공업 담당 당서기
  • 1943–55알타이 지방당 제1서기
  • 1955–58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57–60정치국원 ·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6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 후 연금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

Аверкий Борисович Аристов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레지디움 위원, 낚시를 사랑한 당 조직관리자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증언: "아버지가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에 대해 실망을 표하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었다. 사업 얘기를 꺼내면, 그는 매번 낚시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스트라한 빈농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금속공학자에서 당 기구로 진입하여 스탈린 말기 프레지디움 위원과 중앙위 서기에 발탁되었다. 말렌코프 집권 직후 실각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1957년 반당 그룹 격파 후 다시 프레지디움에 진입, 러시아공화국 당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랴잔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1961년 폴란드 대사로 좌천시켰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플레넘에선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문구를 결의안에 삽입할 것을 정식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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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6스베르들롭스크·케메로보·크라스노야르스크 당 서기
  • 1946–50첼랴빈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0–5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53프레지디움 위원 겸 중앙위 서기, 당·노조·콤소몰 담당
  • 1955–60중앙위 서기 (재임명)
  • 1957–61프레지디움 위원 (재진입), 러시아공화국 당국 부의장
  • 1961–7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71–73주오스트리아 소련 대사

야코프 표도로비치 카푸스틴

Яков Фёдорович Капустин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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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샤탈린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Шаталин

말렌코프의 간부 책임자: 스탈린 사후 보안기관을 감독하다 흐루쇼프에게 밀려난 당 조직가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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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복무
  • 1923–1929콤소몰 · 소비에트 · 교사 활동 (모스크바주 카시라)
  • 1933–1935국영농장 정치부장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 1935–1938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대학원 · 강사 · 학장 직무대행
  • 1938–1939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당기관부 지도원 · 부부장
  • 1939–1944중앙위 간부국 제1부국장
  • 1944–1947중앙위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담당 국장 겸 간부국 제1부국장
  • 1946–1952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국원
  • 1947–1950『파르티나야 지즌』 주필 겸 하바롭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50–1953중앙위 계획재정부장 · 간부배치부장
  • 1953–1955소련 공산당 중앙위 서기 · 내무성 제1차장 (1953년 7월)
  • 1955–1956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
  • 1956–1958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 1958–1959소련 각료회의 ·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60–1984연금생활 · 국가계획위 산하 계획규범연구소 부소장

김산

김산

일제하 조선 독립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 《아리랑》의 주인공

“나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과 내가 평생 믿어온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소.” — 옌안에서 님 웨일즈에게 남긴 말

일제하 조선 독립운동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다. 옌안에서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에게 스물두 차례 인터뷰를 남겨 《아리랑》(1941)의 생생한 증언을 남겼고, 1938년 간첩 누명으로 처형되었다가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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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3·1운동 참가, 일본 경찰에 3일간 구금
  • 1921일본 도쿄 유학 후 중국으로 이동
  • 1922중국 공산당 입당
  • 1923공산청년동맹 가입, 잡지 《혁명》 간행
  • 1925–1927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 수학, 광저우 봉기 참전
  • 1936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창설,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출
  • 1937옌안 항일군정대학 강사, 님 웨일즈와 인터뷰
  • 1938캉성 보안기관에 체포, 간첩 누명으로 처형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쿠즈네초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знецов

전후 당 서기국의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되다

1950년 9월 29일 법정에서 자백을 거부하며: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에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특별 삼인조의 일원으로 스탈린적 탄압에 가담한 책임이 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전후에는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승계 구도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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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복권)

앙리 프르네

Henri Frenay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인 1905–1988 ○ 자연사

비시 지지에서 저항운동으로 이동한 레지스탕스 조직가

“나는 페탱 원수와 이중 역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국민혁명을 믿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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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6생시르 특별군사학교 생도
  • 1935–1938고등전쟁학교 수학, 독일 연구
  • 1939–1940마지노선 제43요새군단 참모장교
  • 1940포로수용소 탈출, 국민해방운동 조직 시작
  • 1941–1943콩바 창립자·지도자, 지하 언론 조직
  • 1943–1945포로·강제이송자·난민 담당 국무위원·장관
  • 1948–1954유럽연방주의자연합 의장
  • 1976회고록 《밤은 끝나리》 출간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페고프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Пегов

스탈린 말기 서기국에서 외교로 밀려난 간부 책임자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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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극동지역당위원회 제3서기, 이후 프리모르스키 조직국 제1서기
  • 1939–1947프리모르스키 주당위원회 제1서기 (194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시당위 제1서기 겸임)
  • 1941–1945극동전선·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
  • 1947–1952중앙위 당기관검증국 부국장 → 경공업부장 → 당·노조·콤소몰 기관 담당 부장 → 간부선발배치부장
  • 1952–1953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후보위원
  • 1953–195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56–1973주이란 대사 (1956–63) → 주알제리 대사 (1964–67) → 주인도 대사 (1967–73)
  • 1973–1982외무차관 → 중앙위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이반 바실리예비치 스피리도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Спиридонов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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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오룔 직물기계 공장장
  • 1941–1944쿠즈네츠크 직물기계 공장장 (전시 소개)
  • 1944–1950레닌그라드 국영계측기 공장장
  • 1950–1952레닌그라드 모스크바 구당위 서기
  • 1952–1954레닌그라드 주집행위 부의장
  • 1954–1956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56–1957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57–1962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1–1962CPSU 중앙위원회 서기
  • 1962–1970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Георгий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전후 모스크바 재건을 이끌었으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당 보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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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탐보프현·타타르 자치공화국에서 콤소몰 활동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28–1938모스크바 중앙노동연구소 근무
  • 1938전연방 산업아카데미 기계공학부 졸업, 중앙위 간부부 인스트럭터
  • 1938–1945모스크바 시당 제2서기
  • 1941예비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7~10월)
  • 1944–1950모스크바 시 집행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5–1949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 1946–1949중앙위 서기 · 조직국 위원
  • 1949–1951도시건설장관 → 농업기계제조장관
  • 1951–1953쿠이비셰프 프룬제 항공공장장
  • 1953–1954주폴란드 소련 대사 (간섭 문제로 소환)
  • 1954–1965항공산업 공장장, 블라디미르 공장장(1959~), 1965년 연금

블라디미르 니키포로비치 말린

Владимир Никифорович Малин

당 중앙 문서 흐름을 11년간 통제한 총무부장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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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3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
  • 1938–1939벨라루스 공산당 모길료프 주당위 제1서기
  • 1939–1941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서기
  • 1942–1944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3–194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3서기
  • 1949–1952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서기
  • 1952–1954CPSU 중앙위원회 인스펙터
  • 1954–1965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65–1970CPSU 중앙위 부설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

안드레이 파블로비치 키릴렌코

Андрей Павлович Кириленко

브레즈네프 시대의 간부 담당 선임서기

1981년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 명단을 낭독하며 거의 모든 이름을 잘못 발음했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상임간부석마저 공공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3인자'로 불리던 후계자의 공개적 몰락이었다.

항공기술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8군 군사평의회에서 브레즈네프와 함께 복무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중앙위 서기국에서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실력자로, 브레즈네프·수슬로프와 함께 당의 '3인자'로 불리며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정체기 당 관료제의 승진 통로와 충성 네트워크를 상징했으나, 1970년대 후반 뇌 기능 저하로 쇠퇴하다 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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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5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당 제1서기
  • 1966–76중앙위 간부 담당 선임서기
  • 1982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은퇴

프롤 로마노비치 코즐로프

Фрол Романович Козлов

뇌졸중 하나로 브레즈네프 시대를 연 제2서기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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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39이젭스크 제철공장 제강소장 → 당위원회 서기
  • 1940–44이젭스크 시당 제2서기: 군수생산 지휘
  • 1947–49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중공업·항공 감독
  • 1949–53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레닌그라드 사건」 후 당 재건
  • 1953–57레닌그라드 주당 제1서기: 지하철·도시 현대화 추진
  • 1957–58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8–60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일상적 정부 운영 총괄
  • 1960–64중앙위 서기, 사실상의 제2서기: 서기국·상임위원회 주재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Алексей Илларионович Кириченко

흐루쇼프 초의 당 임명 담당 서기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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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57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57–60중앙위 서기, 당 임명 업무
  • 1960흐루쇼프 체제 내부에서 실각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프로미슬로프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Промыслов

브레즈네프 시대 모스크바의 얼굴을 만든 23년 집권 시장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프로미슬로프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체로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바빴다. 수많은 해외 출장이 시간을 잡아먹었고, 시 집행위 업무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1963년부터 1986년까지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사실상 시장)을 지내며 오스탄키노 타워, 로시야 호텔, 노비 아르바트, 수십 개 지하철역, 1980년 올림픽 경기장 등 전후 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회고록에서 그가 형식적 대외 활동과 해외 출장에 치중하고 실무를 보좌진에게 떠넘겼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의 저서에 과도한 인세를 받은 스캔들도 남았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소비에트 수도 최장기 행정 수반으로서 도시 발전과 노멘클라투라 정치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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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38건설 현장 감독, 글라브기드로에네르고스트로이 부서장
  • 1938–41모스크바 시당 기구 → 중공업인민위원부
  • 1941–45탱크공업인민위원부 → 국방공업건설총국
  • 1946–51모스크바 시당 → 모스크바 시 집행위 부의장
  • 1955–59글라브모스스트로이 국장 겸 시집행위 제1부의장
  • 1959–63RSFSR 건설위 의장 → RSFSR 부수상 겸 건설장관
  • 1963–8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사실상 시장)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투르코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Турко

쿠즈네초프가 야로슬라블에 심은 인물, 사형 대신 15년형을 산 레닌그라드 사건 피고인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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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7유리 공장 노동자 → 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 기술자·기획생산부장
  • 1937–1940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장
  • 1940–1944레닌그라드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구당위 간부서기 → 제1서기
  • 1944–194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45–194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46–1949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49–1954레닌그라드 사건: 해임·체포·15년형 (MGB 구타로 허위 자백)
  • 1954–1956쿠스타나이 주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56–레닌그라드 주 계획위원회 부의장 → 연방급 개인연금 생활자

콘스탄틴 빅토로비치 루사코프

Константин Викторович Русаков

사회주의권 당 대 당 외교를 관장한 브레즈네프의 비서

1979년 12월, 루사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을 담은 정치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관장하던 '사회주의 국가' 범주 안에는 이제 군사적 현상 변경까지 포함되었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술자 출신으로, 1930년대 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1950년 소련 수산공업장관까지 올랐다. 1957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시대 간부 숙청 때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으로 밀려났다가, 1964년 브레즈네프 시대에 중앙위 기구로 복귀해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를 이끌었다. 1977년 중앙위 서기로 겸직하면서 9년간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과 몽골·베트남·쿠바 등 사회주의권 집권당과의 관계를 총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직후 '구시대 인물'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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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의 기술자·현장소장
  • 1939–1946수산공업인민위원부에서 건설·기술 간부로 승진
  • 1946–1957수산공업 차관·제1차관·장관(1950–1952) 역임
  • 1958–1960주폴란드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2–1963주몽골 소련 대사
  • 1964–1972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 차장 → 제1차장 → 부장
  • 1972–1977브레즈네프 중앙위 서기장 보좌관
  • 1977–1986중앙위 서기 겸 사회주의국가 공산당 연락부장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루다코프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Рудаков

흐루쇼프 산업분할 서기국의 중공업 담당 서기

1962년 11월 19~23일 CPSU 중앙위 전원회의가 당 조직을 산업계열과 농업계열로 분할했고, 루다코프는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어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다.

1910년 9월 11일(구력 8월 29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폴로히(현재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에서 태어나 1966년 7월 10일 모스크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1925년 콤소몰에, 1931년 당에 입당했고 1927년부터 도네츠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다 1937년 레닌그라드 광산연구소를 졸업했다. 1954년 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이 되었고 1962년 11월 23일 정식 중앙위원으로 승격되며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1964년 11월 분할 개혁이 폐기된 뒤에도 사망 시까지 서기직과 중공업부장직을 유지했다. 공식 인사록과 러시아 측 사료는 그를 러시아인으로 적는 한편, 우크라이나 위키백과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산당 인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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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6도네츠 탄광 광부
  • 1936–1938우크라이나 콤소몰 기구에서 활동
  • 1938–194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원, 석탄공업부 차장·부장(1938년 7월부터 흐루쇼프 제1서기 보좌)
  • 1942–1944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44–195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보, 석탄공업부장, 중공업부장, 당·노조·콤소몰기관부장
  • 1954–1962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62–1966CPSU 중앙위 서기 (산업 담당)
  • 1941–1942남서전선 군사평의회 위임 대표
  • 1962–1964CPSU 중앙위 산업·건설 담당 뷰로 의장

라야 두나옙스카야

Raya Dunayevskaya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미국 러시아 1910–1987 ○ 자연사

트로츠키의 비서에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창시자로

“트로츠키와 결별한 후에야 내 진정한 발전이 시작되었다.” — 1980년대 인터뷰에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계 이주민. 트로츠키의 비서로 출발했으나 소련 문제로 결별, C.L.R. 제임스와 국가자본주의론을 정립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을 창시하고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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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가족과 함께 미국 시카고로 이주
  • 1928트로츠키주의 옹호로 미국공산당 청년 조직에서 제명
  • 1929보스턴의 독립 트로츠키주의 그룹(코니코프 지도)에 합류
  • 1937–1938멕시코에서 트로츠키의 러시아어 비서 겸 속기사
  • 1939소련의 성격 문제로 트로츠키와 결별
  • 1940SWP 분열 참여 → 노동자당(WP) 결성
  • 1941–1943C.L.R. 제임스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정립
  • 1947SWP로 복귀
  • 1951한국전쟁 반대, SWP 재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 1953헤겔 『정신현상학』 연구 — '철학적 계기'로서의 절대자 해석 제시
  • 1955C.L.R. 제임스와 결별,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 창설
  • 1958『마르크스주의와 자유』 출간 (마르쿠제 서문)
  • 1973『철학과 혁명』 출간
  • 1982『로자 룩셈부르크, 여성해방, 마르크스의 혁명 철학』 출간
  • 1987시카고에서 77세로 사망

게오르기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Георгий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브레즈네프의 18년 당 살림꾼, '당의 금' 지기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몇 주 후, 80세의 파블로프는 모스크바 그라나트니 거리 자택 발코니에서 몸을 던졌다.

게오르기 파블로프는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리국장을 지내며 당 중앙기구의 물적·행정적 기반을 총괄한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학교에서 브레즈네프보다 한 학년 아래로 함께 수학했으며, 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집권 직후 관리국장에 발탁되었다. 당의 재정·건설·출판·요양 시설을 장악하고 1980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했으며, 후임 니콜라이 크루치나도 한 달 앞서 같은 방식으로 사망하여 '당의 금'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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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부설 공장학교 교사, 금속공업학교 재학
  • 1939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0–1941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지도원 → 금속공업부장
  • 1941–1943오르스크 피난, 시당 위원회 근무
  • 1943–1947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47–1949중앙위 간부관리국 감찰관 → 당·노조·콤소몰 기관부 지도원
  • 1949–1950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50–1951첼랴빈스크 주당 제2서기 (부친의 점령기 경력 문제로 해임)
  • 1951–1957코스트로마 주 집행위 부의장 → 주당 서기 →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 1957–1963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
  • 1961–1971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3–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
  • 1965–1983중앙위원회 관리국장(Управляющий делами ЦК КПСС)
  • 1971–1986중앙위원회 위원
  • 1980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카를루스 마리겔라

Carlos Marighella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브라질 브라질 1911–1969 ✕ 사살

하원의원에서 도시 게릴라 이론가로: 브라질 군사독재 최대의 적

“나는 두려워할 시간이 없었다” — 마리겔라의 묘비명

브라질 공산당 하원의원 출신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평화적 저항을 거부하고 도시 게릴라전 이론가이자 실천가가 되었다. 자신이 창설한 민족해방행동(ALN)을 이끌며 《도시 게릴라 소교본》으로 세계 혁명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1969년 상파울루에서 경찰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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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중재자 주라시 마갈량이스 비판 시로 첫 체포·투옥
  • 1934공과대학 중퇴, 브라질 공산당(PCB) 입당
  • 1936–1945반복적 체포·투옥 — 1939–1945년 장기 구금
  • 1946–1948PCB 소속 연방 하원의원 — 당 불법화로 의석 상실
  • 1953–1954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중국 혁명 시찰
  • 1967무장 투쟁 노선 갈등으로 PCB에서 축출
  • 1968.02민족해방행동(ALN) 창설
  • 1969.06《도시 게릴라 소교본》 집필
  • 1969.11상파울루에서 DOPS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Ефремов

볼가 강변 고아원 소년에서 코시긴 내각 부의장이 된 당 조직인사 전문가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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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사마라 에너지콤비나트 기술전기검사소장
  • 1933–34붉은 군대 복무 (볼가 군관구 사령부)
  • 1934–38쿠이비셰프 목재가공콤비나트 부기계장·주임동력기사
  • 1941–42차파옙스크 제15공장 건설 주임동력기사
  • 1942–51쿠이비셰프 주당: 강사·부서장·서기 대리·중공업부장
  • 1951–52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 1952–5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 진두지휘)
  • 1959–61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 ·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
  • 1961–62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1962–65고리키 공업주당 제1서기 → 고리키 주당 제1서기 (소브나르호스 분할·통합기)
  • 1965–7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코시긴 내각)
  • 1971–75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5–86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Леонид Николаевич Ефремов

고르바초프에게 스타브로폴을 넘겨주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당원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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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 1941–46보로네시 제18항공공장 주임기사, 당 조직자 (Il-2 생산)
  • 1946–52쿠이비셰프 당 간부 → 주 집행위원장
  • 1952–58쿠르스크 주당 제1서기 (1957년 주에 레닌훈장 수여)
  • 1958–62고리키 주당 제1서기
  • 1962–65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 · 상임위 후보위원
  • 1964–7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 (후임: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70–8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