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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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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이반 가브릴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Иван Гаврил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75–1936 ○ 자연사

전력망과 지역계획을 함께 설계한 기술관료

드네프르 급류의 여러 소규모 발전소 대신, 당시로서 초대형인 560메가와트 단일 댐 하나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반 알렉산드로프는 철도·교량 기술에서 출발해 수력공학과 경제지역화의 결합을 개척한 러시아·소련의 공학자였다. 그는 대규모 단일 댐이라는 구상으로 드네프르 수력발전소를 설계하고, 전력 생산을 산업 배치와 교통망의 문제로 함께 다루었다. GOELRO 작성에 참여한 그의 작업은 전기화를 기술 사업이 아니라 계획된 국민경제 재편의 틀로 놓았으며, 이후 5개년계획의 공간적 사고에도 흔적을 남겼다. 학술 연구와 국가 계획 사이에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초 고스플란의 에너지 부문을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다시 과학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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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모스크바 공병학교 졸업, 철도와 교량 설계에 종사
  • 1912중앙아시아 관개사업 연구와 설계 시작
  • 1920드네프르 대형 수력발전소 구상과 설계 착수
  • 1920–1921GOELRO 계획 작성에 참여, 경제지역화 작업을 공동 지휘
  • 1921–1932소련 고스플란 상임위원 및 에너지 부문 책임자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36과학아카데미 교통 부문을 이끌며 연구와 교육에 전념

이반 아돌포비치 테오도로비치

Иван Адольфович Теодорович

첫 식량인민위원, 네프 농업마르크스주의로 숙청되다

1917년, 우리 당은 '전시공산주의'로 시작해야 했는가, 아니면 1921년에 '네프'라 불리게 된 길로 갈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후자의 견해를 고수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반란 전통을 지닌 폴란드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모스크바 '노동자동맹'에 가입하고 스몰렌스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을 조직했으며, 1907년 제5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후 최초의 인민위원회의에서 식량인민위원을 맡았고, 연립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사임했으나 12월까지 실무를 계속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농업부인민위원을 지내며 네프를 '강력한 농가'를 통한 자금 축적 경로로 해석했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보호했다. 1937년 6월 11일 체포되어 9월 20일 '모스크바 센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사망 연도에는 1940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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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가입, 스몰렌스크 최초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2RSDLP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체포되어 야쿠티아 6년 유형
  • 1905제네바 《프롤레타리》 편집 서기; 10월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07RSDLP 제5차 대회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7첫 소브나르콤 식량인민위원 (10월–12월); 연립정부 불발로 사퇴
  • 1922–1928농업부인민위원
  • 1926–1930국제농업연구소 소장 겸 농민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29–1935《카토르가 이 실카》 편집자, 옛 정치범·유형자협회 출판국장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정부·행정 소련 러시아 1875–1946 ○ 자연사

소련의 장기 공식 국가원수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아내와 함께 무장 없이 요새로 들어가 앵커광장에서 박수로 맞았으나 수병들의 야유와 고함으로 연설은 중단되었다.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금속 노동자가 된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27년간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로 있었다. 대숙청기의 핵심 법령들, 즉 1932년 8월 7일 국가재산 보호에 관한 법령, 1934년 12월 1일 테러 사건 신속처리 법령, 1935년 4월 7일 형사책임 연령을 12세로 낮춘 법령에 서명했다. 벨라루스 제1서기가 3천 명 총살과 9천 8백 명 추방을 제안한 전문에도 '칼리닌 찬성'으로 기록되었고, 1940년 3월에는 폴란드 장교·수감자 2만 5천 7백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1932년 5월 4일 농민 3만 8천 가구 추방 표결에서는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고, 2주 뒤 정치국의 결정 번복으로 이미 시작된 조치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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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46중앙집행위원회 ·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новалов
산업·생산 운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75–1949 ○ 자연사

9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자본가, 차르 체제를 뒤흔든 진보블록의 설계자

1917년 5월 16일, 군산업위원회 대회 연설에서 그는 경고했다: "반국가적 경향이, 대중을 최면에 빠뜨리는 구호로 자신의 본질을 위장하며, 러시아를 거대한 걸음으로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섬유 자본가 중 한 명으로, 1900년에 이미 9시간 노동제와 노동자 주택·학교·병원을 도입한 선구적 산업가였다. 진보당 창립자이자 4대 두마 부의장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진보블록을 조직하여 차르 체제에 맞선 의회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고, 마지막 내각에서는 케렌스키의 부총리로서 10월 혁명 당일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밀류코프의 『최신소식』 발행을 이끌며 러시아 망명 사회의 좌파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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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5가업인 콘스탄틴 직물 공장 경영, 1900년 9시간 노동제·노동자 주택·학교·병원 도입
  • 1905–12통상산업당 공동 창립, 모스크바 증권거래소 부위원장
  • 1912–14진보당 공동 창립, 4대 두마 의원(코스트로마), 두마 부의장
  • 1915–17.2중앙군산업위원회 부의장, 진보블록 조직, 두마 임시위원회 위원
  • 1917.3–5임시정부 통상산업부 장관(1차), 노사 타협 추진하다 사임
  • 1917.9–10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 10월 25일 겨울궁전에서 각료 회의 주재 중 체포
  • 1918–40프랑스 망명, 『최신소식』 이사회 의장, 진보적 망명 단체 지도
  • 1941–49미국 거주 후 파리 귀환, 1949년 사망

윌리엄 D. 리히

William D. Leahy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75–1959 ○ 자연사

얄타 합의의 치명적 모호함을 루스벨트에게 직고한 원수급 비서실장

리히가 루스벨트에게 말했다. '이 합의는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윌리엄 리히는 미 해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와 트루먼 두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사실상의 첫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해군작전부장과 푸에르토리코 총독, 비시 프랑스 대사를 지낸 뒤 1942년 현역으로 복귀해 전쟁 내내 연합국 전략을 조율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그는 폴란드 합의문을 읽고 루스벨트에게 '소련이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여도 기술적으로 위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루스벨트는 '나도 아네, 빌.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원자폭탄 투하를 훗날 비판했지만 당시 공개 반대는 하지 않았고, 전후에는 핵 선제사용 전쟁계획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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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5아이오와주 햄프턴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 1897해군사관학교 졸업, USS 오리건에서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 1927–1931해군 병기국장, 동기생 중 첫 제독 진급
  • 1937–1939해군작전부장, 함대 확장과 전쟁 준비 주도
  • 1939–1940푸에르토리코 총독, 기지 건설과 뉴딜 공공사업 집행
  • 1940–1942비시 프랑스 주재 대사, 페탱 정권의 대독 협력 억제 실패
  • 1942–1949대통령 비서실장 겸 합동참모의장, 얄타·포츠담 회담 배석
  • 1950회고록 『나는 거기에 있었다』 출간

이승만

이승만

무력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정전협정 서명을 거부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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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독립협회·협성회 활동, 《매일신문》 주필
  • 1899–1904한성감옥 투옥, 옥중 《독립정신》 집필
  • 1905–1910도미,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
  • 1919–1925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1948제헌국회의장,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당선
  • 1948–1960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
  • 1960–19654·19혁명으로 하야, 하와이 망명

로만 바츨라보비치 말리놉스키

Роман Вацлаво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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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콘코르디야 니콜라예브나 사모일로바

Конкордия Николаевна Самойлова
문학·예술 러시아 러시아 1876–1921 ○ 콜레라

『라보트니차』를 창간하고 러시아 첫 여성의 날을 조직한 볼셰비키 여성 운동의 설계자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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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 1907런던 RSDLP 제5차 대회 대의원
  • 1912–14『프라우다』 편집서기
  • 1913.02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 집회 조직,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 동원
  • 1914.02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 창간 — 발간 직전 체포
  • 19172월 혁명 후 『라보트니차』 복간, 11월 제1차 여성노동자회의 조직
  • 1918.01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대회 공동 조직
  • 1919–20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제8차 당대회 대의원
  • 1920–21『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 볼가 선전선 「붉은 별」 정치부장

루이스 에밀리오 레카바렌

Luis Emilio Recabarren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칠레 칠레 1876–1924 ✕ 자살

칠레 노동운동의 아버지이자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의 선구자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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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칠레 민주당 입당
  • 1906토코피야 지역구 하원의원 당선 (의석 거부됨)
  • 1908–1909아르헨티나·유럽 망명
  • 1912사회주의노동자당(POS) 창당, 《엘 데스페르타르》 창간
  • 1918아르헨티나 공산당 창당 참여, 초대 전국지도부 위원
  • 1921안토파가스타 지역구 하원의원 당선
  • 1922POS를 공산당(PCCh)으로 전환, 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1924산티아고에서 권총 자살

바실리 니콜라예비치 카유로프

Василий Николаевич Каюров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 조직자, 여성의 날 시위를 혁명으로 이끌다

2월 28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카유로프는 병사들 앞에서 "동지들이여, 한 지주를 다른 지주로 바꾸기 위해 사흘 동안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노동자의 피가 흘렀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1898년 입당한 금속노동자 출신 볼셰비키로,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에서 활동하며 1917년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의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당 위원회의 신중론을 뒤집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전환시켰다. 2월 27일에는 무장분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습격해 소총을 확보하고 감옥을 열어 수감된 혁명가들을 해방시켰으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혁명 후 5군 정치부장을 거쳐 경제 행정에서 일했고, 1932년 아들과 함께 류틴의 강령을 받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스탈린에 공개적으로 맞섰다가 1936년 카자흐스탄 유형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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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5소르모보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2–17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비밀 활동
  • 1917.022월 혁명 주도, 비보르크 구 소비에트 의장
  • 1917.07레닌을 자택에 은닉
  • 1918–20제5군 정치부장 (동부전선)
  • 1921–22시브레브콤 특별전권위원, 시비르 당 숙청위 의장
  • 1932'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체포, 3년 유형
  • 1935–36재체포, 카자흐스탄 3년 유형, 유형지에서 사망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엘친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Эльцин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소련 우크라이나 1876–1937 ✕ 처형

러시아 초대 대통령과 이름이 겹치는, 의사 출신의 좌익반대파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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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898오데사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 졸업
  • 1910우파현 유배, 벨레베이 위생의사
  • 1923좌익반대파 가담, 46인 선언 서명
  • 1927당에서 제명
  • 1928–1929우스티-뷔미 유배, 수즈달 정치격리소 수용
  • 1936재체포, 시베리아 유배, 마가단 정치범 단식투쟁 조직
  • 1937처형
  • 1956복권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넵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Невский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76–1937 ✕ 처형

10월에 철도를 장악하고 당 역사를 쓴 혁명가-사학자

1935년 체포된 뒤 수감자들에게 당 역사와 10월 혁명에 관한 강의를 이어갔고, 끝내 자신의 볼셰비키 신념을 철회하지 않았다고 동료 수감자들이 증언했다.

1897년에 혁명 운동에 뛰어든 올드 볼셰비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철도역을 장악했고, 초대 철도인민위원(1918–1919)으로 내전기 수송을 책임졌다. 이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거쳐 당 역사 연구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 도서관장을 지냈다. 500편이 넘는 혁명운동사 저술을 남겼으며, 1935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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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모스크바 대학에서 사민주의 서클 조직, 체포와 유형 반복
  • 1904–1905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 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조직 건설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당 집행위원, 체포·유형 반복, 중앙위원 후보에서 정위원으로
  • 1917.3–10군사기구 창설, 「솔다츠카야 프라우다」 편집, 7월 봉기와 10월 혁명 준비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철도역 점거 지휘
  • 1918–1919철도인민위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9–192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초대 총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부의장
  • 1922–1935이스트파르트 부의장, 당사 집필, 레닌 도서관장
  • 1935–1937체포되어 5년형, 대숙청 중 재판받고 총살

필리프 이사예비치 골로쇼킨

Филипп Исаевич Голощёк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76–1941 ✕ 처형

카자흐스탄의 '소(小) 10월'을 이끈 혁명가

1925년 12월 키질오르다 당대회에서 "내가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소비에트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소(小) 10월' 강령의 포문을 열었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1912년 프라하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러시아국에 선출되었고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랄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지도했으며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저택에서의 차르 가족 처형을 조직한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카자흐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로 사실상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소(小) 10월' 기치 아래 급진적 집단화와 유목민 강제 정착화를 추진했고, 이는 1930~1933년 카자흐 대기근과 함께 기록된다. 1933년 해임되어 소련 국가중재관(1933–1939)을 지내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총살되었으며 1961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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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파벌
  • 1906–09페테르부르크 위원회·모스크바 위원회
  • 1912중앙위원 겸 러시아국 선출 (프라하 당대회)
  • 1917–18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우랄 소비에트 권력 수립
  • 1922–25사마라 주 집행위원장, 기근 복구 지도
  • 1925–33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사실상 독자적 통치, '소(小) 10월' 집단화
  • 1933–39소련 국가중재관
  • 1939–41체포, 수감, 총살

니콜라이 닐로비치 부르덴코

Николай Нилович Бурденко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76–1946 ○ 뇌졸중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적군 주임외과의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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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 1923–1937모스크바 대학·제1모스크바 의학원 외과 교수, 외과 클리닉 원장, 신경외과 병동 개설
  • 1932세계 최초 중앙신경외과연구소 창설, 소장
  • 1937–1946적군 주임외과의, 소련-핀란드 전쟁·대조국전쟁 야전의료 지휘, 수천 건 수술, 페니실린 도입
  • 1944–1946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로잘리야 사모일로브나 제믈랴치카

Розалия Самойловна Землячка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876–1947 ○ 자연사

지하 암호명 '데몬', 유일한 여성 소브나르콤 부의장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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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 1903–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 1918–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 1920–21크림 당 책임서기, 혁명위원회 위원 — 적색 테러 조직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교통인민위원부 간부, 페름·모스크바 지구당 서기
  • 1939–40소비에트 통제 위원회 의장
  • 1939–43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
  • 1943–47당 통제 위원회 부의장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

Максим Максимович Литвинов

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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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외무인민위원

빌헬름 리터 폰 레프

Wilhelm Josef Franz Ritter von Leeb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76–1956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를 지휘한 독일 국방군 원수

그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도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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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바이에른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및 세르비아 전역 복무
  • 1930–1933제7사단 사령관
  • 1939–1941C집단군 사령관
  • 1941.06–1942.01북부집단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공격과 봉쇄 지휘
  • 1948최고지휘부 재판 유죄 판결,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

빌헬름 피크

Wilhelm Pieck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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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에리히 레더

Erich Raeder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76–1960 ○ 전범 유죄, 1955년 석방

대양함대 구상을 끝까지 밀어붙인 나치 독일 해군 지휘관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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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제정 독일 해군 입대
  • 1912–1918고위 해군참모,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8–1935국가해군 해군지휘부장
  • 1935–1939전쟁해군 총사령관, 상급제독
  • 1939–1943대제독, 전쟁해군 총사령관
  • 1943총사령관직 사임 및 퇴역
  • 1946–1955뉘른베르크 재판 유죄, 종신형 복역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정부·행정 독일 국가기관 독일인 독일계 1876–1967 ○ 자연사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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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그리고리 니키티치 바쿨렌추크

Григорий Никитич Вакуленчук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7–1905 ✕ 봉기 중 사살

장교의 총탄에 쓰러져 포툠킨 반란을 촉발하고, 장례는 오데사 혁명 시위가 된 수병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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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흑해함대 징집
  • 1900기뢰·포술학교 졸업, 전함 포툠킨 포수 배치
  • 1903RSDLP 입당, 세바스토폴 수병 첸트랄카 결성 참여
  • 1905.06.27포툠킨 반란 중 기량롭스키 부함장에 치명상, 함상에서 사망

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

Иван Платонович Каляев

폭탄을 든 혁명 시인, 마차 속 가족을 보고 폭탄을 거둔 '윤리적 테러리스트'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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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 1899학생 파업 주도로 예카테리노슬라프 유배
  • 1902베를린에서 혁명 문헌 운반 중 체포, 러시아로 송환되어 야로슬라블 유배
  • 1903제네바에서 SR 전투조직 가입 (아제프 휘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작전 감시팀 참여
  • 1905.2.4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세르게이 대공 폭탄 암살
  • 1905.4.5원로원 특별재판에서 전제정치 고발 연설, 사형 선고
  • 1905.5.23슐리셀부르크 요새 교수형 집행

게오르기 스테파노비치 흐루스탈료프-노사리

Георгий Степанович Носарь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77–1919 ✕ 처형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무소속 노동 변호사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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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11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 14일 만장일치 선출
  • 1905.11–1906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시베리아 탈출, 런던 당대회 참석 후 망명
  • 1909–1914RSDLP 탈당, 파리에서 신디칼리즘·출판 활동
  • 1915–1917귀국 후 체포, 3년 카토르가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8–1919페레야슬라프 공화국 지도자, 반볼셰비키 활동

「철의 펠릭스」: 혁명의 칼을 만든 금욕주의자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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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17체포와 유형 11년, 1917년 석방
  • 1917.12체카 창설, 의장
  • 1921–24교통인민위원 겸임: 철도 복구
  • 1924–26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공업 재건
  • 1926.7중앙위 연설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