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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가타야마 센

片山潜
정치·당 지도 코민테른 일본 일본 1859–1933 ○ 자연사

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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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파벨 밀류코프

Павел Милюков
정치·당 지도 입헌민주당 소련 러시아 1859–1943 ○ 자연사

입헌민주당(카데트)의 지도자: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1916년 11월 두마 연단에서 그는 정부의 실패를 하나하나 열거한 뒤 매번 같은 후렴구를 던졌고, 의원들은 "반역이다!"라고 외쳐 답했다.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이자 역사가. 1916년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로 차르 체제를 뒤흔들었고, 외무장관 시절 4월 위기를 촉발했다. 망명 후 파리에서 신문을 발행했으며, 대독소전 때 소련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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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 1906비보르크 선언 기초 — 의회 해산에 대한 저항 촉구
  • 1907–1917제3·4대 두마 의원, 카데트 원내대표
  • 1915진보블록(Progressive Bloc) 결성 주도
  • 1916.11'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 — 슈튀르메르 정부 맹비판
  • 1917.3–5임시정부 외무장관 — 밀류코프 비망록으로 4월 위기 촉발 후 사임
  • 1917.8코르닐로프 사건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대립 속 혼란 가중
  • 1920–1940파리에서 망명 신문 『최신소식』 발행
  • 1941–1943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 지지 —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기뻐함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칼레딘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Каледин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1–1918 ✕ 자살

돈에서 첫 백군 거점을 연 카자크 아타만

1918년 2월 11일, 마지막 정부회의에서 방어를 위한 총검이 147자루뿐임을 듣고 사임한 그날, 알렉세예프에게 남긴 유서: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을 맡아 루츠크를 돌파한 제국 육군 기병대장. 1917년 6월 돈 카자크 최초의 선출 아타만이 되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을 전면 거부하며 돈 지역을 독립시켜 남부 백군의 첫 거점을 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카자크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의용군마저 돈을 떠나려 하자 「카자크가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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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06노보체르카스크 카자크 사관학교장
  • 1912–15제12기병사단장,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지휘
  • 1915–16제12군단장, 제8군 사령관,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돌파
  • 1916–17기병대장 승진, 제8군 사령관직 유지
  • 1917.6돈 카자크 아타만에 선출 (1709년 이후 첫 선거)
  • 1917.10–11소비에트 권력 불인정, 돈 지역 독립 선포, 백군 장교 수용
  • 1918.1–2카자크 중립 선언으로 전선 붕괴, 사임 후 권총 자살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1–1925 ○ 사망

류리크 왕조의 후예, 제국의 마지막 자유주의 총리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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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3툴라 현 젬스트보, 기근 구호 활동
  • 1900–1906툴라 현 젬스트보 행정위원회 의장
  • 1904–1905러일전쟁: 젬스트보 의료여단 조직·지휘, 전국적 영웅
  • 1906제1대 국가두마 의원(카데트), 의료·식량위원회 위원장
  • 1914–1917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 의장, 육군 의료·보급망
  • 1915–1917젬고르 공동위원회 지도자, 전시 군수·구호 총괄
  • 1917.3–7임시정부 총리 겸 내무장관: 보통선거·사형폐지 등 개혁
  • 1918–1925체포·탈출, 미국 거쳐 파리 망명, 회고록 집필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Pehr Evind Svinhufvud

핀란드 독립을 선언하고 내전에서 독일의 개입을 요청한 원로원 수반

유형지 톰스크에서 2월혁명 소식을 들은 그는 경찰서로 걸어가, 나를 여기 보낸 자가 체포되었으니 이제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1917년 12월 핀란드 독립 선언을 이끈 원로원 수반으로 1918년 내전에서 백색정부를 이끌며 독일의 개입을 요청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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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귀족원 대표로 의회 활동 시작
  • 1907–1912핀란드 의회 의장
  • 1914–1917러시아화 반대로 톰스크 유형
  • 1917–1918원로원 수반(초대 정부 수반)
  • 1918섭정(국가 원수)
  • 1930–1931핀란드 총리
  • 1931–1937핀란드 대통령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 1862–1911 ✕ 암살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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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유데니치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Юденич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2–1933 ○ 폐결핵

캅카스 전선을 승리로 이끌고 백군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제국 러시아의 마지막 명장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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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1–87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제18소총연대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산데푸·무크덴 전투에서 부상
  • 1913–15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 캅카스군 참모장 → 보병대장 진급 및 캅카스군 사령관
  • 1916에르주룸·트레비존드·에르진잔 점령,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
  • 1917.5캅카스 전선 총사령관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불복종'으로 해임
  • 1919.6–10북서군 총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 공세,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 후 패퇴
  • 1920.1북서군 해산 명령, 에스토니아에서 체포 후 석방, 프랑스로 망명

세르게이 예피모비치 크리자놉스키

Сергей Ефимович Крыжанов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62–1935 ○ 자연사

1907년 「뻔뻔한」 선거법으로 두마를 길들인 제국의 법률 설계사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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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1896내무성 경제국 과장
  • 1904–1906내무성 지방경제총국 부국장
  • 1906–1911내무차관 (스톨리핀의 오른팔)
  • 1907상원의원 · 추밀고문관
  • 1911–1917제국 국무장관 (마지막 재임자)
  • 1917국가평의회 의원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구치코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учков
정치·당 지도 10월당 러시아 러시아 1862–1936 ○ 사망

차르의 퇴위를 받아낸 옥토브리스트 지도자, 보어전쟁 의용군에서 임시정부 장관까지

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는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의 황실 열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로부터 퇴위 조서를 받았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그 열차 안에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10월 17일 동맹'(옥토브리스트)을 이끌며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 개혁을 지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제3대 두마 의장과 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라스푸틴과 궁정을 공개 비판하며 니콜라이 2세의 적이 되었다. 1917년 3월 2일 바실리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받아냈으며, 임시정부 초대 육군해군장관이 되었으나 4월 위기로 사임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백군을 후원했다. 보어전쟁 의용군, 티베트 여행, 수차례 결투로 점철된 모험가적 삶을 살았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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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2보어전쟁 의용군, 부상 후 영국군 포로
  • 1906'10월 17일 동맹' 중앙위원회 의장
  • 1907–1912제3대 두마 의원, 국방위원회 위원장
  • 1910–1911제3대 국가두마 의장
  • 1915–1917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
  • 1917.3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7.3–4임시정부 육군해군장관
  • 1919–1936백군 후원, 파리 망명

블라디미르 리보비치 부르체프

Владимир Львович Бурцев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2–1942 ○ 패혈증

차르 비밀경찰의 도발자들을 연쇄 폭로한 '혁명의 셜록 홈스'

10월 혁명 당일 밤, 트로츠키가 보낸 체포대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자택 문을 두드렸다. 부르체프는 반볼셰비키 신문 《나셰 옵셰예 델로》를 그날 아침 발행한 직후였다.

나로드나야 볼랴 출신의 혁명가이자 출판인으로, 예브노 아제프를 비롯한 오흐라나의 도발자들을 연쇄적으로 폭로하여 '러시아 혁명의 셜록 홈스'로 불렸다. 역사 저널 《빌로예(Былое)》를 창간해 19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기록을 체계화했으며, 베른 재판에서 《시온 장로 의정서》가 오흐라나의 조작임을 증언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일 트로츠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의 첫 정치범이 되었고, 이후 망명지 파리에서 반볼셰비키·반파시즘 투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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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1885페테르부르크·카잔 대학 수학, 나로드나야 볼랴 서클 참여
  • 1885–1888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후 이르쿠츠크 유형
  • 1888–1904망명, 《스보보드나야 로시야》《나로도볼레츠》 발행, 런던서 《비록 100년》 출간
  • 1900–1907역사 저널 《빌로예》 창간·편집 (런던 및 페테르부르크)
  • 1906–1909오흐라나 도발자 연쇄 폭로 — 아제프, 하르팅 등
  • 1911–1914파리서 《부두셰예》 발행
  • 1914–1917귀국 후 체포·투루한스크 유형, 사면 후 반볼셰비키 《옵셰예 델로》 발행
  • 1918–1942파리 망명, 반볼셰비키·반파시즘 활동, 베른 재판 증언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볼로고츠키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Вологод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백색운동 러시아인 러시아인 1863–1925 ○ 자연사

타협으로 백색 시베리아를 묶은 변호사 정치가

콜차크에게 그는 군 지휘관의 자의와 정부의 무능으로 권위가 시간마다 떨어진다고 직언했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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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7시베리아 사법기관 서기관·판사·검사보
  • 1897–1917톰스크 변호사, 도시 두마 의원
  • 1902–1907톰스크 사회혁명당 조직과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 지도자
  • 1917톰스크 губер니야 комиссар, 옴스크 사법원장
  • 1918.01–06자치 시베리아 임시정부 외무장관
  • 1918.06–11시베리아 임시정부 의장
  • 1918.11–1919.11러시아 정부 각료회의 의장
  • 1920–1925중국 망명, 법률·교민 업무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Ольминский

이스트파르트의 창설자이자 볼셰비키 당사 편찬의 설계자

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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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 1922–1933구볼셰비키협회 회장(회원번호 1번), 살티코프-셰드린 전집 편찬위원장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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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베르나츠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Вернад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생물권과 지식권 개념으로 지구를 재발견한 생지화학의 창시자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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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1모스크바대학 광물학 교수
  • 1906–1917카데트당 중앙위원 · 국가평의회 의원
  • 1917임시정부 교육부 차관
  • 1918–1921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
  • 1922–1939소련 라듐연구소 소장
  • 1927–1945생지화학연구소 소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릴로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ры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63–1945 ○ 자연사

소련 조선과학의 아버지,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옮긴 수학자

손자 안드레이 카피차가 "왜 혁명 때 장군인 할아버지는 총살되지 않았어?" 하고 묻자, 크릴로프는 짧게 답했다. "장군도 장군 나름이란다."

제정 말기부터 소련까지 활동한 수학자·조선공학자. 마카로프 제독과 선박 불침몰성 이론을 정립했고, 1915년 뉴턴 『프린키피아』를 러시아어로 완역했다. 혁명 후 조선과학 토대를 닦고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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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7해군 소위·나침반부 근무, 자차 이론 첫 연구
  • 1888–1890니콜라옙스크 해군사관학교 조선학과 수료
  • 1890–1908해군사관학교·해군대학 교수, 조선에 수학을 최초로 체계 응용
  • 1900–1908해군성 실험수조장 — 조선 연구 기초 마련
  • 1908–1911해군기술위원회 위원장·수석 조선감독관
  • 1911–1917해군장관 특별임무 담당 대장, 세바스토폴급 전함 설계
  • 1915뉴턴 『프린키피아』 라틴어 원전 러시아어 최초 완역
  • 1916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수리물리학)
  • 1919–1920해군대학장
  • 1928–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물리수학연구소 소장
  • 1938–1941나침반 편차·자이로콤파스 이론 출판, 스탈린상 1급
  • 1943사회주의노동영웅 — 조선과학 평생 공로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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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주바토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Зубатов

차르 체제 안에서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 경찰사회주의의 창안자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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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89모스크바 오흐라나의 비밀정보원으로 혁명조직 침투
  • 1889–1896모스크바 오흐라나 특별임무관, 부국장으로 승진
  • 1896–1902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 정치사찰 체계 근대화
  • 1901–1903친정부 합법노조 설립 — '경찰사회주의' 주도
  • 1902–1903경찰국 특별부장, 전국적 오흐라나 네트워크 구축
  • 1903–1917플레베에 의해 해임·유배, 후일 사면받았으나 공직 복귀 거부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치헤이제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Чхеидзе

이중권력 시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혁명적 수호주의의 얼굴

「인민과의 직접적 소통을 잃자 그는 저항력을 상실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폭풍에 뽑혀 자양분을 공급하던 흙에서 분리되면 시든다. 치헤이제도 그렇게 갔다」 — 이라클리 체레텔리, 1926년 장례식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 멘셰비키. 『공산당 선언』을 그루지야어로 처음 옮겼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이중권력을 주재했으나 10월혁명에 반대했고, 그루지야 독립을 이끌며 파리 망명정부 수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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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메사메다시 가입, 『공산당 선언』 그루지야어 초역
  • 1898–1907바투미 시의회 의원·시 병원 감독관, RSDLP 입당(1898), 멘셰비키(1903~)
  • 1907–173·4대 두마 의원(티플리스 현), 멘셰비키 원내대표
  • 1917.2–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VTsIK 의장(6월~)
  • 1918–21자캅카스 세임 의장, 그루지야 제헌의회 의장, 독립선언 서명
  • 1919파리 강화회의 그루지야 대표
  • 1921–26프랑스 망명, 그루지야 망명정부 수반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키시킨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ишкин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4–1930 ○ 자연사

10월 혁명 당일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전권자로 임명된 카데트 장관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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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안나 일리니치나 옐리자로바-울리야노바

Анна Ильинична Елизарова-Ульянова

레닌의 맏누이이자 이스크라 지하유통을 조직한 구볼셰비키 혁명가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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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즐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злов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러시아인 1864–1940 ○ 사망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으로 봉기했고, 볼셰비키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구제국 장군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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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블라디미르 키예프 사관생도단 입대
  • 1884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90미하일롭스키 포병아카데미 1등급 졸업
  • 1905–1912제33포병여단 제2대대장
  • 1912소장 진급; 제11시베리아 포병여단장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4군단 포병감
  • 1918–1920적군 군사전문가로 복무
  • 1920.12–1921.03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 봉기 중 방어 지휘
  • 1921–1940핀란드 망명: 교사, 도로 노동자, 정비공

펠릭스 야코블레비치 콘

Феликс Яковлевич Кон

바르샤바 소년 애국자에서 코민테른의 노혁명가로: 봉인열차와 함께 돌아온 폴란드인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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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미하일 이바노비치 투간-바라놉스키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Туган-Барановский
학술·연구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1865–1919 ○ 심장마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윤리적 사회주의로: 공황주기론을 개척한 경제학자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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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하리코프 대학 졸업, 자연과학 후보학위 취득
  • 1894『현대 영국의 공업위기』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 1895–189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치경제학 강사(사도첸트)
  • 1898『러시아 공장의 과거와 현재』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1900『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 참여 (프스코프)
  • 1901–1905폴타바 지역 젬스트보 활동, 『정치경제학 최근사 개요』 집필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및 폴리테크니크 강사·교수
  • 1909–1917『협동조합 통보』(Вестник кооперации) 편집장
  • 1917.8–11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서기)
  • 191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 사회경제부문 책임자

티혼 총대주교

Тихо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인 1865–1925 ○ 자연사

혁명기의 교회를 이끈 총대주교

1922년 교회 귀중품 논쟁에서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와 성물의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티혼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이자 1917년 복원된 총대주교직의 첫 보유자로, 혁명 뒤 교회와 새 국가의 충돌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1921~1922년 기근 구호를 호소했지만, 1922년 2월 법령 뒤 성물의 일괄 인도가 교회법을 침해한다고 보아 자발적 기부와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이 입장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방어였지만, 성직자 탄압과 교회 재산 압수로 이어지는 대립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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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 교수
  • 1897류블린 주교
  • 1898–1907알류샨·북아메리카 주교, 대주교
  • 1907–1913야로슬라블·로스토프 대주교
  • 1917모스크바 대주교, 모스크바 총대주교
  • 1917–1925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