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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바딤 안드레예비치 메드베데프

Вадим Андреевич Медведев

이념을 해체한 마지막 이념비서: 검열의 특별보관고를 열고 당의 정통 교리를 폐기하다

1988년 가을, KGB를 통해 솔제니친 전 작품을 입수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인정했지만 〈수용소 군도〉는 주관적 논쟁서라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특별보관고를 열어 솔제니친의 기출판 저작을 모두 일반 서가로 돌려보냈다.

야로슬라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치법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당 엘리트. 중앙위 선전부와 과학·교육부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즈다노프의 1946년 문예지 탄압 결의를 폐기하고, 정기간행물 구독 제한을 철폐했으며, 솔제니친과 트로츠키의 저작을 포함한 특별보관고 도서를 일반 서가로 되돌렸다. 대학에서 당사와 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고, 스탈린 시대 탄압 재심의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었으나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공직을 떠나 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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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68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 졸업, 교수, 경제학 박사
  • 1968–70레닌그라드 시당 서기
  • 1970–78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78–83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총장
  • 1983–86중앙위 과학·교육기관부장
  • 1986–90중앙위 서기, 이후 이념위원회 의장·정치국원
  • 1990–91소련 대통령자문회의 위원
  • 1992–2025고르바초프 재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

아르날도 토마스 오초아 산체스

Arnaldo Tomás Ochoa Sánchez
군사·지휘 쿠바 국가기관 쿠바 쿠바 1930–1989 ✕ 총살형

아프리카 원정군을 지휘한 쿠바의 장군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소말리아군을 격파한 지지가 전투를 지휘했다. 사료는 지지가 탈환 시점을 1978년 3월 4일과 3월 5일로 각각 기록한다.

아르날도 오초아 산체스(1930~1989)는 쿠바 혁명군(FAR)의 사단장이자 쿠바 공화국 영웅이었다. 카코쿰 출신으로 1958년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고, 피그스만 침공을 막았으며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을 20여 년 지냈다. 1975년 루안다에서 FNLA에 맞섰고 1977년 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1984년 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89년 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3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료는 둘째 이름을 토마스와 테오도미로로, 사망 당시 나이를 58~59세와 57세로 각각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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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제2열에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싸웠다.
  • 1961피그스만 침공에서 2506여단과 교전했다.
  • 1975루안다에서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에 맞서 싸웠다.
  • 1977–1978에티오피아 주둔 쿠바 원정군 사령관으로 오가덴 전쟁을 지휘했다.
  • 1984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쿠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 1987–1988앙골라 주둔 쿠바 군사사절단을 이끌며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에 참전했다.
  • 1989마약 밀매와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7월 13일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

Мераб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амардашвили
학술·연구 소련 그루지야 1930–1990 ○ 심장마비

의식을 소리내어 말한 철학자

「영웅적 의식은, 우리가 정확히 사유하지 않을 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정확히 사유하라.」

소비에트 그루지야의 철학자. 마르크스에서 칸트·프루스트로 나아가며 의식과 자유를 비도그마적으로 탐구했다.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을 공동 창립했고, 강의로 철학했으며 작업 대부분이 녹음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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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수학, 졸업
  • 1954–1957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대학원
  • 1958–1961『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자문위원, 철학 후보학위 취득
  • 1961–1966『평화와 사회주의의 제 문제』 비평·서지부장 (프라하)
  • 1966–1974국제노동운동연구소 부문장,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편집장
  • 1968–1980모스크바 국립대·VGIK·심리학연구소 강의; 철학박사(1970), 교수(1972)
  • 1980–1990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주임연구원, 트빌리시 국립대 강의

그로스 카로이

Grósz Károly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동요한 공산당 말기의 과도기적 서기장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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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14세)
  • 1954–56Borsod-Abaúj-Zemplén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1974–79MSZMP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84–87부다페스트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89MSZMP 정치국 위원
  • 1987.6–1988.11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88.5–1989.10MSZMP 서기장, 카다르 후임
  • 1989.12–1990재창당된 MSZMP 대행 의장, 총선 낙선

즈데녜크 믈리나르시

Zdeněk Mlynář

사회주의를 민주화하려 한 개혁 공산주의자

옛 룸메이트 고르바초프를 1967년 찾아가 개혁 구상을 설명했을 때, '그가 내 말을 아주 잘 이해하는 듯했다'고 믈리나르시는 회고했다.

즈데녜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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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
  • 1955–1956프라하 검찰총국에서 근무
  • 1956–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연구자
  • 1967–1968공산당 정치체계 개혁 연구팀 및 행동강령 작성 참여
  • 196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프레지디엄 위원
  • 1970공산당에서 제명, 국립박물관에서 곤충학 연구
  • 1977–1997헌장 77 서명 뒤 오스트리아 망명, 인스브루크대학교 정치학 교수

빅토르 표도로비치 그루슈코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Грушко

해외정보부터 방첩까지 아우른 KGB 작전부사령관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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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0소련 외무부, 노르웨이 대사관 근무
  • 1960–1961KGB 제101학교 수료, PGU KGB 제3부 배치
  • 1968–1971오슬로 KGB 부주재관 (정치첩보)
  • 1971–1972오슬로 KGB 주재관
  • 1975–1980PGU KGB 제3부장 (영국·스칸디나비아 담당)
  • 1983–1989PGU KGB 제1부국장
  • 1989–1991KGB 부의장 겸 제2총국장 (방첩)
  • 1991.1–1991.8KGB 제1부의장

유리 세르게예비치 플레하노프

Юрий Сергеевич Плеханов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0–2002 ○ 체포 1991, 사면 1994

KGB 도청 전문가에서 경호 총괄로, 8월 쿠데타의 방아쇠를 당기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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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CPSU 중앙위 서기 안드로포프의 비서
  • 1970–1983KGB 12부서장: 도청·전화감청·우편검열 총괄
  • 1983–1990KGB 9국장: 당·국가 요인 경호
  • 1990–1991KGB 경호국장 (9국 후신), 콜레기움 위원
  • 1991.7.29노보오가료보 회담실 도청: 녹음이 쿠데타 세력에 유출
  • 1991.8–1994포로스에서 쿠데타 가담, 체포, '마트로스카야 티시나' 수감, 사면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보빈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Бов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930–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 작성자, 데탕트의 문장을 쓴 언론인

한 파티에서 누군가 물었다. '브레즈네프의 최근 연설 읽어보셨나요?' 보빈이 답했다. '읽다뇨? 제가 썼는데요.' 다음 날 그는 『이즈베스티야』로 전보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외교 수사의 핵심 설계자로,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을 이끌며 데탕트·평화공존·군축 담론의 문장을 직접 썼다. 그가 만든 '경제는 절약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은 브레즈네프의 공식 어록이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 당 기구에서 『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로 옮겨갔고, 이후 20년간 TV '국제 파노라마'의 얼굴로 소련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제문제 해설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 최초의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일주일 뒤 러시아 연방 대사로 이어지는 독특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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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6하디젠스크시 인민판사 (소련 최연소 판사)
  • 1959–1963잡지 『콤무니스트』 철학부 과학 컨설턴트
  • 1963–1972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 · 브레즈네프 연설문 작성
  • 1968체코슬로바키아 체르나 협상에 소련 대표단 자문으로 참여
  • 1970–1982브레즈네프 서기장 연설문 작성 (비공식 외부직으로 지속)
  • 1972–1991『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 TV '국제 파노라마' 진행자
  • 1981–198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91.12소련 이스라엘 대사 (1주일 후 러시아 대사로 전환)
  • 1991–1997러시아 연방 이스라엘 대사
  • 1997–2000『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복귀 · TV·라디오 진행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야코블레프

Ег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Яковле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930–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 시대를 연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금기를 깨는 데 앞장서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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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졸업
  • 1956–1966『모스크바 프라우다』·『콤소몰카』·『이즈베스티야』 기자
  • 1967–1968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
  • 1968–1985『이즈베스티야』 특파원, 프라하 주재
  • 1986–1991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 1991–1992소련 및 러시아 국영 TV·라디오 의장
  • 1993–2002『옵샤야 가제타』 발행인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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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파벨 로마노비치 포포비치

Павел Романович Попович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30–2009 ○ 뇌졸중

보스토크 4호로 첫 동시 유인 비행에 나선 4번째 우주인

비행 중 코롤료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 민요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네」를 불러, 인류가 우주에서 노래한 첫 순간을 만들었다.

소련의 4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출신 우주인으로, 보스토크 1호의 교신 담당관을 맡은 뒤 1962년 8월 보스토크 4호 조종사로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세계 최초의 동시 유인 궤도 비행을 수행했다.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고, 포포비치는 궤도상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불러 우주 최초의 음악 공연을 남겼다. 1974년 소유스 14호 사령관으로서 첫 군사 유인 정거장 알마즈에 도킹하는 두 번째 우주 비행을 마치고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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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마그니토고르스크 공업전문학교·비행클럽 졸업
  • 1954군사 항공학교 졸업, 공군 복무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1.4보스토크 1호 교신 담당관 (가가린 비행)
  • 1962.8.12–15보스토크 4호: 첫 동시 유인 비행, 니콜라예프와 6.5 km 접근
  • 1966–68소련 달 착륙 계획 훈련
  • 1974.7.3–19소유스 14호 사령관: 살류트 3호(알마즈) 도킹
  • 1978–89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 부센터장

레오니트 이바노비치 아발킨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Абалкин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수석 경제 이론가,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의 '규제된 시장' 설계자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이 구상은 1990년 5월 최고회의에서 반려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샤탈린의 급진안을 택한 뒤 리시코프 내각이 무너지면서 1991년 초 부총리직을 떠났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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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칼리닌그라드주 구세프 농업기술학교 교사·교무부원장
  • 1958–1966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대학원 →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조교·부교수·교수
  • 1966–1976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76–1985CPSU 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84 / 1987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1기)
  • 1989–1990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겸 소련 부총리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5–12소련 대통령 고문
  • 1991–2005과학아카데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2기)
  • 1992–2011『경제의 제문제』(Voprosy Ekonomiki) 편집장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두비닌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Дубинин

고르바초프 시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를 워싱턴에서 대면한 소련 대사

1986년 5월, 유엔 주재 소련 대표에서 워싱턴 대사로 전격 이동한 두비닌은 백악관에 신임장을 제출하며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소련 말기 고르바초프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워싱턴 주재 대사 시절 INF 조약 체결과 몰타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뒷받침했다. 날치크 출신으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을 졸업하고 유네스코와 주프랑스대사관에서 외교 경력을 쌓은 유럽통이었다. 1986년 봄 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를 거쳐 미국 대사로 부임해 냉전 종식을 위한 양국 정상 간 채널이 작동하도록 실무를 조율했다. 1990년 프랑스 대사로 자리를 옮겨 소련 해체까지 파리에 머물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외무차관과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내며 1997년 우크라이나와의 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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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6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실습
  • 1956–1959유네스코 사무국 직원 (파리)
  • 1959–1963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3등·2등서기관
  • 1963–1968주프랑스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참사관
  • 1968–1971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부과장
  • 1971–1978소련 외무부 제1유럽과 과장
  • 1978–1986주스페인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6.3–5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6–1990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0–1991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94–1996러시아 외무차관
  • 1996–1999주우크라이나 러시아 대사

엔델 테오도로비치 리프마

Endel Teodorovich Lippmaa

인산염 광산 계획을 내부에서 막아낸 에스토니아 과학자

TV 토론에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상대가 반박할 때마다 해당 문서를 꺼내 사실을 입증하곤 했다.

에스토니아의 물리화학자이자 정치인. 탈린공과대학에서 유혈암 기술을 전공한 뒤 소련권 최초로 NMR 분광계를 자체 제작하며 고체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시절 1987년 인산염 광산 계획의 환경·인구적 위험을 보고서로 폭로해 '인산염 전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고, 소련 인민대의원으로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발굴·공개해 발트 병합의 법적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독립 회복 후 두 차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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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탈린공과대학 졸업, 유혈암 기술 전공
  • 1956화학 박사 학위 취득
  • 1969소련 화학물리연구소에서 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72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75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2014년까지 이사회 위원
  • 1980화학·생물물리연구소 설립 및 소장 취임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독소조약 비밀의정서 폭로
  • 1990–1991에스토니아 공화국 동방문제 장관
  • 1995–1996에스토니아 공화국 유럽문제 장관
  • 1996–1999리에기코구(국회) 의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라표로프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Лавё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30–2016 ○ 자연사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마지막 책임자이자 우라늄 지질학자

2009년 글로벌에너지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항상 냉각기와 온난기를 오갔으며, 인간은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아주 짧은 순간만 살아왔다."

소련의 지질학자이자 과학행정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전역의 우라늄 광상을 연구하여 소련 핵연료 자원 기반을 구축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1988년부터 소련 해체 후 2013년까지 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을 지내며 지구과학 부문을 이끌었고, 방사성폐기물 지층처분과 북극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700편 이상의 논문과 28권의 단행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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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6이겜 RAS 우라늄광상연구실 선임연구원 → 실장
  • 1966–1972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 부국장
  • 1968–1972전연방 지질기금(ВГФ) 국장
  • 1972–1983소련 지질부 과학연구조직관리국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87–1989키르기스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8–2013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1소련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91소련 총리 부의장 겸 과학기술부 장관
  • 1991–2016이겜 RAS 소장 → 과학지도자

몰타 회담 직전 10개항 통일 계획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을 쥔 총리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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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 (최연소)
  • 1969–1976라인란트팔츠 주총리
  • 1973–1998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
  • 1976–1982연방의회 CDU/CSU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
  • 1982–1998독일연방공화국 총리
  • 1989.11.28연방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 1990.10.03독일 재통일
  • 1998연방선거 패배, CDU 당수 사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데멘테이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Дементей
정부·행정 소련 벨라루스 1930–2018 ○ 자연사

연방의 보존과 벨라루스 주권 사이에 선 의장

“내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면 소련은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니콜라이 데멘테이는 농업 전문가에서 벨로루시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최고회의 의장으로 올라선 소련·벨라루스 정치가였다. 그는 1990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권 선언을 주재했지만, 연방을 해체하지 않는 개혁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한 뒤 사임하며, 소련 질서의 마지막 국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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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비쳅스크주 당위원회 강사, 비쳅스크 구역 당위원회 제2서기, 비쳅스크 구역 집행위원회 의장
  • 1974벨로루시 공산당 비쳅스크주위원회 서기
  • 197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79–1989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농업 담당
  • 1989–1990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부의장
  • 1990–1991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7–2000벨라루스 공화국 국민회의 공화국 평의회 의원
  • 2005회고록 「삶의 교훈」 출간

로더릭 맥파쿼

Roderick MacFarquhar
학술·연구 영국 영국 1930–2019 ○ 자연사

『문화대혁명의 기원』 3부작과 『마오의 마지막 혁명』으로 엘리트 정치를 해부한 하버드의 중국학자

1961년까지 런던에서 중국 관련 보도를 담당한 언론인이었고 중국 본토는 1972년에야 처음 방문했으며, 이후 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문화대혁명까지의 중국 엘리트 정치를 연구했다.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인으로 언론인과 노동당 하원의원을 거쳐 학자가 되었고 『차이나 쿼털리』를 창간해 편집했다. 1974년부터 1997년까지 낸 『문화대혁명의 기원』 3부작은 1956년 백화제방부터 1966년까지 최고 지도부 안의 노선 대립을 추적해 문화대혁명이 마오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 대약진 실패 이후 누적된 정치적 갈등의 귀결임을 보였다. 2006년 마이클 쇤할스와 쓴 『마오의 마지막 혁명』은 1966~1976년 전체를 다룬 표준적 서술이다. 하버드대학 교수와 페어뱅크센터 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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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1979영국 노동당 하원의원 (벨퍼)
  • 1984–2019하버드대학 정치학 교수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루키야노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Лукьянов
정부·행정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30–2019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동창에서 비판자로: 소련 의회의 마지막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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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소련 각료회의 법률위원회 수석 컨설턴트
  • 1961–197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선임 레페렌트, 부서 부장
  • 1977–198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사무국장
  • 1983–1985CPSU 중앙위 총무부 제1부부장
  • 1985–1987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87–1988CPSU 중앙위 서기 (법률·행정 담당)
  • 1988–1990CPSU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1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3–2003러시아연방 국가두마 의원 (CPRF)

조레스 이바노비치 알표로프

Жорес Иванович Алфё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30–2019 ○ 자연사

반도체 헤테로구조로 IT 시대를 연 공산주의 물리학자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양극화를 설명하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잔의 내용물은 안타깝게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나머지 인구입니다.»

조레스 알표로프는 반도체 헤테로구조 물리학의 창시자로, 1968년 세계 최초의 상온 연속발진 반도체 레이저를 실현해 광섬유 통신과 CD 기술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한 소련의 응용물리학자이다. 2000년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1989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을 지내며 소련 붕괴 후에도 기초과학의 명맥을 지켰다. 1995년부터 공산당 명단으로 국가두마 의원을 지내며 과학 예산을 옹호했고, 2013년 과학아카데미 개혁에 맞서 싸웠다.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딴 그는 평생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냉전기 광전자공학 경쟁의 한복판에서 국제 과학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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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최초의 소련 트랜지스터 개발 참여
  • 1963이중 헤테로구조 반도체 레이저 특허 출원
  • 197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이오페 연구소)
  • 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레닌상 수상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87–2003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 1989–2017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
  • 1995–201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연방명단)
  • 2000노벨 물리학상 수상 (헤르베르트 크뢰머와 공동 수상)

리차르트 이바노비치 코솔라포프

Ричард Иванович Косолапов

브레즈네프 시대 '발전된 사회주의' 교리의 주요 설계자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당신이 시작한 뻬레스트로이까는 필연적 실패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그는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다.

소련의 사회철학자이자 이론가로, 1976년부터 1986년까지 CPSU의 핵심 이론지 《꼼무니스트》의 편집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식 이념인 '발전된 사회주의' 개념을 체계화한 주역으로, 소련이 사회주의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으며 공산주의로의 급속한 이행보다는 장기적 공고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그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은 아나톨리 부텐코, 알렉산드르 찌쁘꼬 등 개혁 성향 이론가들과 충돌했고, 고르바초프가 뻬레스트로이까를 개시하자 가장 먼저 숙청 대상이 되었다. 1986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의 실패를 예측하는 편지를 보낸 직후 《꼼무니스트》 편집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가며 스탈린 전집의 속간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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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 1955–1958브랸스크주 콤소몰 위원회
  • 1958–1959아르마비르 사범대학 강사
  • 1961–1964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철학과 강사
  • 1966–1974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 컨설턴트 → 부장
  • 1974–1976《쁘라우다》 제1부편집장
  • 1976–1986《꼼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6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
  • 1979–1987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타지크 SSR)
  • 1986–201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 · 주임연구원

압두라흐만 할릴 오글루 베지로프

Əbdürrəhman Xəlil oğlu Vəziro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0–2022 ○ 자연사

고르바초프가 카라바흐 위기에 투입했으나 검은 1월 속에 도망친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25일 밤 베지로프가 전화를 걸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 회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8~1990)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임명되었다. 카라바흐 출신이었고 10년 이상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해 현지 정치 부패와 무관했으나, 오히려 그 공백 탓에 아제르바이잔 내 권력 집단이나 거리 정치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소련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한 검은 1월 사태 직전 상황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이후 중앙정부와 헤이다르 알리예프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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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56–1959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9–1970전연방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0–1976키로바바트 시당위 제1서기, 이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공업부장
  • 1976–1979주캘커타 소련 총영사
  • 1979–1985주네팔 소련 대사
  • 1985–1988주파키스탄 소련 대사, 아프간 철수 협상 참여
  • 1988–199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이반 스테파노비치 실라예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Сила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30–2023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 항공장관에서 제국의 청산인으로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소련 정부 수반이 된 실라예프는 옐친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연방 재산을 러시아로 이전하는 포고령을 정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달 뒤 그는 해임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고리키 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20년 만에 공장장이 된 항공산업 관료였다. 1981년 항공공업장관으로 취임해 MiG-29, Su-27, Tu-160, 부란 우주왕복선 등 소련 항공·우주 기술의 정점을 총괄했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1990년 옐친에 의해 RSFSR 각료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실상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옐친이 연방 기관을 일방적으로 접수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한 달 만에 해임되었고, 소련 해체라는 결과에는 결국 맞서지 못한 과도기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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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4고리키 항공공장: 기술자 → 공장장
  •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77–1980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0–198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85–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기계제조 담당)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
  • 1990–1991RSFSR 각료회의 의장
  • 1991.8–12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 ― 사실상 소련 마지막 정부 수반
  • 1991–1994유럽공동체 주재 러시아 상임대표 (대사)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시카바르드냐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Шкабардня

정밀 계측으로 미사일과 우주왕복선을 통제한 장관

1991년 2월, 새 내각에서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러한 지도부에 나는 필요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1980~1989)으로서 전략미사일과 에네르기아-부란 우주왕복선의 핵심 제어 체계를 총괄한 군수산업 행정가다. 부란 프로그램의 성공적 시험 비행을 이끈 공로로 1990년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관리국장으로서 정부 운영을 책임지다 1991년 신내각 참여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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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노보체르카스크 공과대학 졸업, 크라스노다르 전자계측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경력 시작
  • 1954–1968크라스노다르 ZIP 공장에서 기술실험실장·특별설계국장 거쳐 주임기사까지 승진
  • 1968–1974기기제조부 중앙기구에서 전자계측기 총국 주임기사, 이후 소유즈엘렉트로프리보르 국장
  • 1974–1980기기제조부 기술국장·과학기술국장 거쳐 차관
  • 1980–1989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
  • 1981–1986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 1986–1990CPSU 중앙위원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관리국장
  • 1991 이후연금 생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제어문제연구소 전문가 고문 및 회고록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