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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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2014년 10월 30일 리스본에서 죽었다. 남편이자 공동 저자인 알바루 마테우스는 그보다 한 해 앞선 2013년 8월에 죽었다.
포르투갈의 역사가. 비아나두카스텔루 태생으로 1952년에 나 2014년 10월 30일 리스본에서 죽었다. 포르투갈 식민지와 식민지 전쟁, 정치경찰을 연구했고 박사 논문을 『식민지 전쟁 속의 PIDE/DGS 1961-1974』(2004)로 펴냈다. 남편이자 공동 저자인 알바루 마테우스와 함께 앙골라·모잠비크 관련 저작을 냈으며, 1977년 5월 27일을 다룬 『앙골라의 숙청』(2007)에서 아고스티뉴 네투에게 니투 알베스 지지자 학살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옛 정치범들을 면담한 녹음과 기록은 토레 두 톰부에 소장돼 있다.
사고 40년 뒤 회고에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체르노빌이 글라스노스트를 만들었다'고 썼다.
데이비드 마플스는 캐나다의 역사학자로 앨버타대학교에서 벨라루스·러시아·우크라이나의 현대사와 정치를 연구했다. 그는 체르노빌의 사회·정치적 영향을 일찍부터 분석했으며, 사고 직후 출간된 『Chernobyl and Nuclear Power in the USSR』와 후속 연구로 핵에너지 정책, 안전, 주민과 국가의 대응을 함께 조명했다. 이후 연구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민족사, 기근, 소비에트 붕괴로 확장되었고, 체르노빌이 소련 해체에 미친 영향은 중요하지만 단일 원인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신중한 평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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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런던대학교 학사
1980앨버타대학교 역사학 석사
1985셰필드대학교 경제·사회사 박사
1987『Chernobyl and Nuclear Power in the USSR』 출간
1988『The Social Impact of the Chernobyl Disaster』 출간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마셜 플랜을 원조 사업이 아니라 전후 유럽의 경제 질서를 바꾼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읽었다.
배리 아이켄그린은 국제통화·금융 체제의 역사를 현재의 정책 문제와 연결해 분석해 온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사가다. 그는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킨 구조를 밝히며, 통화 제도와 국가 정책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마셜 플랜 연구에서는 원조액 자체보다 원조에 붙은 조건이 서유럽의 전후 혼합경제를 시장과 무역 중심으로 재편한 효과에 주목했다. 이 연구는 경제 재건에서 자금과 제도적 조건의 관계를 묻는 논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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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크루즈 학사
1986예일 대학교 경제학 박사
1987–현재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경제학·정치학 교수
1991J. 브래드퍼드 디롱과 「마셜 플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 공동 집필
《전시의 알바니아》는 점령기를 분열과 내부 대립,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으로 이어진 권력 투쟁으로 다시 그렸고, 전쟁이 알바니아를 한 고립에서 다른 고립으로 밀어넣었다고 결론지었다.
발칸사·알바니아사 연구자로 1952년 1월 27일 출생했다. 1982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인디애나-퍼듀대학교 포트웨인 캠퍼스 역사학 교수와 역사학과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알바니아 과학원 외국인 회원이다. 국적과 출신 배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그 왕과 알바니아의 안정 투쟁》(1984), 《전시의 알바니아 1939–1945》(1999), 《발칸의 강자들》(2006)을 썼고 슈반트너-지버스와 《알바니아 정체성》(2002), 올리버 옌스 슈미트와 《알바니아 약사》(2022)를 함께 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소련 국가보안기관 출신의 러시아 정치가로, 1990년대 국가 위기 속에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섰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연방 권력과 대통령 행정부를 강화했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회복을 통치의 핵심 서사로 삼았다. 2005년 소련 해체를 ‘20세기의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말한 발언은 해체를 러시아 사회의 상실과 혼란으로 기억하는 그의 역사 인식을 압축한다. 동시에 그의 집권은 정치적 경쟁과 독립 언론의 공간을 좁히고, 대외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재편했다.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그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주장했다.
이고르 그랴진은 에스토니아의 법학자이자 정치가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회에 진출한 그는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비밀 의정서와 발트 국가 병합의 법적 의미를 검토한 에스토니아 측 법률가였다. 그의 활동은 학술적 법률 논증을 소비에트 해체기의 주권과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 연결했다.
그는 1989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연구자로, 국가·제도·정치 질서의 형성을 비교해 왔다. 1989년 논문 「역사의 종말?」은 냉전 종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도달한 지점으로 해석하며 1989년의 의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한 축을 만들었다.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이 주장을 확장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역량과 법치, 책임성을 강조하며 초기 명제의 단순한 낙관론을 수정했다.
1979년 스물여섯 살에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하여 세계 최연소 외무장관이 됐다.
캄보디아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 장교다. 1970년 크메르루주에 가담해 대대장을 지냈고, 1977년 이탈해 베트남 측과 함께 싸웠다. 1979년 정권 붕괴 뒤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고, 1985년 챈 시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됐다. 수십 년간 집권했으며 현재 상원 의장 겸 국가수반 대행을 맡고 있다.
4호기 교대 감독관, 사고 당일 수습을 지휘하고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한 소련 원자력 기술자
「나는 모든 것을 옳게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의 소련 원자력 기술자로, 1976년 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를 졸업하고 1979년 9월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해 1984년 7월 10일 4호기 교대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야간 안전시험에서 그가 원자로 정지를 지시했고 01시 23분 39초에 AZ-5 버튼이 눌렸으나 실제로 누른 사람은 증언이 엇갈려 분명하지 않다. 폭발 후 약 8시까지 4호기에 남아 소방대와 구급대를 부르고 급수 계통 밸브를 수동으로 열게 했으며, 15Gy를 넘는 치명적 피폭을 받았다.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33세로 사망했고, 일부 영어권 출처는 5월 10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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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열·전력 공정 자동화 전공)
1979–1984체르노빌 원전: 선임 터빈 관리 기술자, 터빈 공장 교대 감독
1984–1986체르노빌 원전 4호기 교대 감독관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AZ-5 비상정지 지시, 폭발 후 8시간 현장 수습 지휘
1980년 8월 15일, 그녀가 발티츠카 오페라 인근에서 전차를 세우자 그단스크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됐다.
헨리카 크지보노스는 그단스크의 전차 운전사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조선소 안팎의 노동자 행동을 연결한 인물이다. 1980년 8월 15일 전차를 세워 대중교통 파업을 촉발했고, 그 소식은 다른 사업장으로 퍼져 도시 전체의 연대 행동을 넓혔다. 그녀는 사업장 간 파업위원회에서 대중교통 노동자를 대표하고 8월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후 계엄 아래에서는 수감자 지원과 지하 출판물 배포에 참여했다. 훗날 가정위탁시설을 운영하고 국회의원이 된 경력은 거리의 노동자 행동과 돌봄·제도 정치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붉은 태양은 어떻게 떠올랐나』(2000)는 당 문서와 회고록으로 옌안 정풍운동을 재구성해, 마오가 개인적 권위를 공고히 하고 이후 당의 방식을 확립한 과정으로 다루었다.
난징 출신으로 문화대혁명기 아버지가 「우파」로 박해받는 것을 보며 자랐고, 난징대학에서 중국 현대사를 가르쳤다. 2000년 홍콩에서 낸 『붉은 태양은 어떻게 떠올랐나 — 옌안 정풍운동의 전말』은 공개된 문헌만으로 1942~1945년 정풍운동을 재구성해, 마오가 사상 개조와 심사·「구조 운동」을 통해 당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고 이후 정치운동의 틀을 만든 과정을 보여주었다. 대륙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널리 읽혔으며, 그는 201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은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은 것이 되었다: 많은 이가 봤다고 하나 단 하나의 확실한 증거도 제시된 적 없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스탈린 시대 연구자로, 소련 국가 반유대주의의 기록을 발굴해 학계의 표준을 세웠다. 그의 저서 『붉은 파라오의 포로』(1994)와 『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2001)는 의사들의 음모와 반세계주의 캠페인을 포함한 스탈린 말기 유대인 탄압의 전모를 기록으로 실증한 기념비적 작업이다. 2003년 '데포르타치야: 미스티피카치야' 논문에서 스탈린이 유대인 대량 추방을 계획했다는 통설에 대해 '로흐네스의 괴물과 같다'고 비판하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 입장은 브렌트·나우모프의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와 대비되는 대표적 학설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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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항공산업 인민위원회에 관한 후보자 학위논문 심사 통과
1994『붉은 파라오의 포로』 출간
2001『스탈린의 비밀 정책: 권력과 반유대주의』 출간 (2003년 개정판)
2003러시아 유대인공동체연맹 '올해의 인물 5762' 선정
2008박사학위 논문 심사 통과: 소련 정치 지도부와 유대계 인텔리겐치야(1936–1953)
소련군이 떠나면 나지불라 정권도 곧 무너지리라는 예측과 달리, 그는 그 정권이 철군 후 3년 넘게 버텼다고 짚었다.
마크 N. 카츠는 러시아 정치와 외교정책, 혁명, 테러와의 전쟁을 연구한 미국 국제정치학자다. 조지 메이슨 대학교에서 소련과 러시아의 제3세계 정책 및 혁명 운동의 국제적 차원을 가르치고 저술했다. 2011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분석하며, 소련군 철수 뒤에도 소련의 군사·경제 원조가 나지불라 정권을 3년 넘게 지탱했고 철군이 곧 붕괴를 뜻하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민족주의는 행동의 원인일 뿐 아니라 행동의 산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고 베이신저는 말했다. 사건이 구조를 반영할 뿐 아니라 구조 자체를 재구성한다는 뜻이다.
미국 비교정치학자로, 소련 민족주의 동원과 국가 붕괴의 관계를 사건 데이터로 실증한 연구자이다. 2002년 저서 『Nationalist Mobilization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State』에서 소련 해체가 구조적 필연이 아니라, 한 공화국의 민족운동이 다른 공화국으로 확산되는 '조수(tidal)' 효과로 사건들이 누적되며 초래되었다고 주장했다. 선리(Ronald Suny)의 구조적 설명과 대비되는 이 입장은, 민족운동의 전염성과 사건의 우발성이 제도의 제약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보며 이후 색깔혁명 연구로도 확장되었다.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코마리를 도우러 달려갔다. 사수가 경고 사격을 했지만 우소프는 멈추지 않았고, 곧 유탄이 그를 스쳤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에서 경제학자로 일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드미트리 코마리를 도우려 달려가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사흘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한 세 희생자에게 소련 최후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2017년 휴스턴 공항에서, 점령기 기억을 연구해 온 이 역사가는 강연 수당을 문제 삼은 미 국경 당국에 10시간 구금되며 강제송환 직전까지 갔다.
앙리 루소는 제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와 비시 체제, 그리고 그 기억의 변화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가정이 수에즈 위기 뒤 프랑스로 이주한 경험은 그의 역사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대표작 《비시 증후군》은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가 협력과 책임을 망각하거나 재구성해 온 과정을 분석했으며, 그는 레지스탕스의 규모와 국민적 단결을 과장하는 기억의 신화를 ‘레지스탕시알리슴’이라 불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사실과 집단기억, 현재의 정치적 사용을 구별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추적하는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를 "20세기 프랑스사의 가장 뛰어난 역사가 중 한 명"이라 평했다.
줄리언 잭슨은 20세기 프랑스사를 중심으로 연구한 영국 역사가로, 프랑스 대공황과 인민전선에서 점령과 드골주의까지 정치적 선택의 조건과 결과를 추적했다. 『프랑스 인민전선』은 개혁과 재무장, 민주주의 방어와 대중운동의 관계를 정치·사회·문화의 차원에서 분석해 이 시기를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 점령, 전후 동성애 정치, 1968년 5월을 다루며 현대 프랑스사의 범위를 넓혔다.
켐프는 『베를린 1961』에서 체크포인트 찰리 전차 대치 때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 말을 기록했다: "우리가 신경 쓰는 건 우리의 신경이 아니라 워싱턴에 계신 여러분의 신경입니다."
프레더릭 켐프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자로, 독일계 이민자 가정의 배경과 유럽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정치와 대서양 관계를 다뤘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1961』은 새로 공개된 미국·소련·독일 문서와 인터뷰를 엮어 베를린 장벽 건설과 1961년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의 전차 대치를 재구성했다. 이 책은 케네디의 위기 대응을 약함으로 해석하고 흐루쇼프의 선택을 제약 조건 속에 놓았으며, 그 비대칭적 논지는 독립 서평에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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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해체』에서 워커는 소비에트 연방의 완전한 붕괴를 정작 바란 사람은 거의 없었다며,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권'의 의미를 둘러싼 혼란이 붕괴를 앞당긴 '전쟁의 안개'였다고 분석한다.
에드워드 W. 워커는 미국의 정치학자로 소련과 탈소련 공간의 민족정치, 연방제, 분리주의를 연구했다. 그는 버클리에서 소련·유라시아 연구 프로그램을 이끌며 공산주의 체제와 탈공산주의 정치의 연결을 분석했다. 대표작 Dissolution은 소비에트 연방제가 민족공화국을 통합하는 동시에 주권의 언어와 제도를 제공했으며, 중앙 통제가 약화되자 그 틀이 분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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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하버드대학교 학사
1986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석사
1992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1997『소수자, 물라, 근대성』 편집
1998–1999후버연구소 내셔널 펠로
2003『해체: 주권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출간
2000s–2017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정치학과 부교수 겸 유라시아·동유럽 연구 프로그램 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