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카우츠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니콜라이 부하린, 율리 마르토프, 알렉산드르 포트레소프, 니콜라이 치헤이제, 마트베이 스코벨레프, 파벨 악셀로드, 표트르 마슬로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알렉상드르 밀랑,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노스케, 램지 맥도널드, 카미유 하위스만스, 빌헬름 2세 용어제국주의론, 제국주의 전쟁, 제2인터내셔널, 멘셰비키, 청산주의, 수정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코민테른 학습레닌: 제국주의론 · 1장 생산의 집중과 독점, 2장 은행과 그 새로운 역할, 3장 금융자본과 금융과두제, 4장 상품수출에서 자본수출로, 5장 자본가 동맹들 사이의 세계분할, 6장 이미 나누어진 세계, 7장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 8장 이자 쿠폰을 깎아 사는 나라, 9장 「순진한 소망」과 초제국주의, 10장 이행하는 자본주의, 죽어 가는 자본주의

서문

독자에게 내놓는 이 소책자는 1916년 봄 취리히에서 내가 쓴 것이다. 그곳에서 작업하는 조건에서는 당연히 프랑스어와 영어 문헌이 어느 정도 부족했고, 러시아어 문헌은 매우 크게 부족함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제국주의에 관한 영국의 주요 저작인 J. A. 홉슨의 책만은, 내가 확신하기에 이 저작이 받아 마땅한 주의를 기울여 활용했다.

이 소책자는 차르 검열을 염두에 두고 썼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이론적 분석, 특히 경제적 분석에만 나 자신을 가장 엄격하게 한정해야 했을 뿐 아니라, 정치에 관해 꼭 필요한 몇 안 되는 언급도 지극히 조심스럽게, 암시로, 저 이솝식 언어 — 저주받을 이솝식 언어 — 로 표현해야 했다. 차르 체제는 모든 혁명가가 “합법” 저작을 쓰려고 펜을 들 때마다 이 언어에 기대도록 강요했다.

자유의 날을 맞은 지금, 차르 검열을 의식하느라 일그러지고 짓눌리고 쇠집게에 꽉 조여진 이 소책자의 대목들을 다시 읽기란 괴로운 일이다.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는 것, 사회배외주의(말로는 사회주의, 실제로는 배외주의)가 사회주의에 대한 완전한 배신이고 부르주아지 편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이라는 것, 노동운동의 이러한 분열이 제국주의의 객관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등등 — 이런 것을 나는 “노예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곧 나올, 내가 1914~1917년에 국외에서 쓴 글들의 재간행본을 참고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119~120쪽[1]의 한 대목은 짚어 둘 만하다. 병합 문제를 두고 자본가들과 그 편으로 넘어간 사회배외주의자들(카우츠키는 이들과 참으로 일관성 없이 싸운다)이 얼마나 뻔뻔하게 거짓말하는지, 그들이 자기 나라 자본가들의 병합을 얼마나 뻔뻔하게 덮어 주는지를 검열을 통과할 형태로 독자에게 설명하려고, 나는 예로… 일본을 들어야 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일본 자리에 러시아를, 조선 자리에 핀란드, 폴란드, 쿠를란트, 우크라이나, 히바, 부하라, 에스틀란트와 그 밖에 대러시아인이 살지 않는 지역들을 손쉽게 넣어 읽을 것이다.

나는 이 소책자가 근본적인 경제 문제, 곧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이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 문제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전쟁과 오늘의 정치를 평가하는 데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지은이

페트로그라드, 1917년 4월 26일.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 서문

I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작은 책은 1916년에 차르 검열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지금 나로서는 본문 전체를 고쳐 쓸 여유가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마 적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책의 기본 과제는 예나 지금이나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부르주아 통계의 종합 자료와 모든 나라 부르주아 학자들의 자인을 근거로, 20세기 초, 제1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전야에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그 국제적 상호관계 속에서 어떤 총체적 모습을 띠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많은 공산주의자에게는, 차르 검열의 관점에서 합법적이었던 이 작은 책을 보기로 삼아 다음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쓸모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곧, 이를테면 오늘날의 미국이나, 최근 공산주의자들이 거의 모조리 체포된 뒤의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미약한 합법성의 잔재라도, 사회평화주의적 견해와 “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 낱낱이 밝히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아니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열을 거친 이 작은 책에 꼭 필요한 보충은 이 서문에서 해 보려 한다.

II

이 책은 1914~1918년의 전쟁이 양쪽 모두에게 제국주의적(곧 침략적, 약탈적, 강도적) 전쟁, 세계를 나눠 갖기 위한 전쟁, 식민지와 금융자본의 “세력권”을 분할하고 재분할하기 위한 전쟁 등이었음을 증명했다.

전쟁의 참된 사회적 성격, 더 정확히 말해 참된 계급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근거는 물론 전쟁의 외교사가 아니라, 모든 교전 열강에서 지배 계급들이 처한 객관적 처지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 객관적 처지를 그려 내려면 사례나 개별 자료를 들 것이 아니라(사회생활 현상은 엄청나게 복잡하므로 어떤 명제든 그것을 뒷받침할 사례나 개별 자료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반드시 모든 교전 열강과 전 세계의 경제생활 토대에 관한 자료의 총체를 들어야 한다.

내가 1876년과 1914년의 세계분할(제6장)과 1890년과 1913년의 전 세계 철도 분할(제7장)을 그리면서 제시한 것이 바로 이처럼 반박할 수 없는 종합 자료이다. 철도는 자본주의 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인 석탄 공업과 제철 공업의 총결산이며, 세계 무역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 주는 총결산이자 가장 뚜렷한 지표이다. 철도가 대규모 생산, 독점, 신디케이트, 카르텔, 트러스트, 은행, 금융과두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이 책의 앞 장들에서 보였다. 철도망의 분포, 그 분포의 불균등, 철도망 발전의 불균등, 이것은 세계적 규모에서 본 현대 독점자본주의의 총결산이다. 그리고 이 총결산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철도 건설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민주적이고 문화적이며 문명을 퍼뜨리는 사업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를 분칠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부르주아 교수들의 눈에도, 소부르주아적 속물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 실제로는 이 사업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일반과 수천 겹의 그물로 묶어 놓은 자본주의의 끈들이 이 건설을 10억 명(식민지와 반식민지), 곧 종속국에 사는 지구 인구의 절반 이상과 “문명” 나라들에 사는 자본의 임금노예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바꿔 놓았다.

소경영주의 노동에 바탕을 둔 사적 소유, 자유경쟁, 민주주의 — 자본가들과 그들의 신문이 노동자와 농민을 속이는 데 쓰는 이 모든 구호는 이미 멀리 뒤처졌다. 자본주의는 한 줌의 “선진” 나라들이 지구 인구의 거대한 다수를 식민지로 억압하고 금융으로 목 조르는 세계 체제로 자라났다. 그리고 이 “전리품”을 나누는 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세계적으로 막강한 두세 맹수(미국, 영국, 일본) 사이에서 벌어지며, 이들은 자기들 전리품을 나눠 갖기 위한 자기들 전쟁에 온 지구를 끌어들인다.

III

군주제 독일이 강요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이어서 “민주주의” 공화국인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자유로운” 영국이 강요한, 그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비열한 베르사유 강화는 인류에게 더없이 유익한 봉사를 했다. 제국주의에 고용된 글쟁이 쿨리들도, 스스로 평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더라도 “윌슨주의”를 찬미하고 제국주의 아래서 평화와 개혁이 가능하다고 논증하던 반동적 속물들도 함께 폭로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남긴 수천만의 시체와 불구자, 그것도 영국 금융 강도 패거리와 독일 금융 강도 패거리 가운데 어느 쪽이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두고 벌인 전쟁이 남긴 시체와 불구자, 그리고 그 뒤에 나온 두 “평화조약”은 부르주아지에게 짓밟히고 짓눌리고 속고 우롱당한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눈을 전례 없는 속도로 뜨게 하고 있다. 이렇게 전쟁이 만들어 낸 세계적 파탄을 토양으로 세계 혁명의 위기가 자라고 있으며, 이 위기는 아무리 길고 힘겨운 곡절을 겪더라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그 승리로밖에는 끝날 수 없다.

제2인터내셔널의 바젤 선언은 1912년에 전쟁 일반이 아니라(전쟁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혁명전쟁도 있다) 바로 1914년에 닥친 그 전쟁을 평가했다. 이 선언은 제2인터내셔널 영웅들의 수치스러운 붕괴 전체와 배신 전체를 폭로하는 기념비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이번 판의 부록에 이 선언을 다시 싣고, 독자들에게 거듭 주의를 환기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은 바로 이 다가오는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연관을 정확하고 분명하고 곧바르게 말하는 선언의 대목들을 조심스럽게 피해 간다. 도둑이 자기가 도둑질한 곳을 피해 가듯이 조심스럽게 피해 간다.

IV

이 책에서는 “카우츠키주의” 비판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카우츠키주의는 국제적인 사상 조류로, 세계 모든 나라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저명한 이론가들”이자 지도자들(오스트리아에서는 오토 바우어 일파, 영국에서는 램지 맥도널드 등, 프랑스에서는 알베르 토마 등등)과, 수많은 사회주의자, 개량주의자, 평화주의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성직자가 이를 대표한다.

이 사상 조류는 한편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이 해체되고 썩어 가면서 나온 산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모든 환경 때문에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피할 수 없는 열매이다.

카우츠키와 그를 닮은 자들의 이런 견해는, 바로 이 저술가가 수십 년 동안, 그것도 특히 사회주의 내부의 기회주의(베른슈타인, 밀랑, 하인드먼, 곰퍼스 등)에 맞선 투쟁에서 옹호해 온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기초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 세계에서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실천적·정치적으로 극단적 기회주의자들과(제2인터내셔널, 곧 황색 인터내셔널을 통해), 그리고 부르주아 정부들과(사회주의자가 참여하는 부르주아 연립정부를 통해) 손을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자라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 일반, 특히 공산주의 운동은 “카우츠키주의”의 이론적 오류를 분석하고 폭로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를 전혀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카우츠키 일파와 똑같이 제국주의 모순의 깊이와 제국주의가 낳은 혁명적 위기의 필연성을 흐려 놓는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일반 — 이런 조류들이 아직도 전 세계에 대단히 널리 퍼져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이런 조류들과 싸우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의 의무이다. 프롤레타리아 당은 부르주아지에게 우롱당한 작은 경영주들과, 많든 적든 소부르주아적 생활 조건에 놓인 수백만 근로자를 부르주아지에게서 되찾아 와야 하기 때문이다.

V

제8장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에 대해 몇 마디 해 두어야 한다. 이 책 본문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한때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지금은 카우츠키의 동지이며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안에서 부르주아적·개량주의적 정치를 대표하는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힐퍼딩은, 이 문제에서 공공연한 평화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인 영국인 홉슨에 비해서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노동운동 전체의 국제적 분열은 완전히 드러났다(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두 조류 사이의 무장투쟁과 내전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러시아에서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이 볼셰비키에 맞서 콜차크와 데니킨을 지지했고, 독일에서는 샤이데만파와 노스케 일파가 부르주아지와 함께 스파르타쿠스파에 맞섰으며,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사적 현상의 경제적 기초는 무엇인가?

바로 자본주의의 최고의 역사적 단계, 곧 제국주의에 고유한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이다. 이 책에서 증명했듯이, 자본주의는 이제 특별히 부유하고 강력한 한 줌의 국가(지구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되고, 가장 “후하게” 부풀려 계산해도 5분의 1이 안 된다)를 따로 떼어 냈으며, 이 국가들은 단순한 “이자 쿠폰 깎기”로 온 세계를 약탈한다. 자본수출은 전쟁 전 가격과 전쟁 전 부르주아 통계로 해마다 80억~100억 프랑의 소득을 가져다준다. 지금은 물론 훨씬 많다.

이토록 거대한 초과이윤(자본가들이 “자기” 나라 노동자들에게서 짜내는 이윤을 넘어서 얻는 이윤이므로)으로 노동자 지도자들과 노동귀족 상층을 매수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실제로 “선진” 나라들의 자본가들은 그들을 매수한다.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드러나고 감춰진 수천 가지 방법으로 매수한다.

생활 방식으로 보나 소득 규모로 보나 세계관 전체로 보나 완전히 속물이 된 이 부르주아화한 노동자층, 곧 “노동귀족”이 제2인터내셔널의 주된 버팀목이며, 오늘날에는 부르주아지의 주된 사회적(군사적이 아닌) 버팀목이다. 이들이야말로 노동운동 안의 부르주아지 앞잡이요, 자본가계급의 노동 부관(labor lieutenants of the capitalist class)이요,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진정한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내전에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편에, “코뮌파”에 맞선 “베르사유파” 편에 선다.

이 현상의 경제적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정치적·사회적 의의를 평가하지 못하면, 공산주의 운동과 다가오는 사회혁명의 실천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서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의 전야이다. 이것은 1917년부터 세계적 규모로 확인되었다.

1920년 7월 6일

N. 레닌

지난 15~20년 동안, 특히 에스파냐-미국 전쟁(1898)과 영국-보어 전쟁(1899~1902) 이후, 구대륙과 신대륙의 경제 문헌과 정치 문헌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려고 점점 더 자주 “제국주의”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1902년 런던과 뉴욕에서 영국 경제학자 J. A. 홉슨의 저작 『제국주의』가 나왔다. 부르주아 사회개량주의와 평화주의의 관점—사실상 예전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K. 카우츠키의 지금 입장과 같은 성질의 관점—에 서 있는 이 저자는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정치적 특징을 아주 훌륭하고 상세하게 서술했다. 1910년 빈에서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의 저작 『금융자본』이 나왔다(러시아어 번역본: 모스크바, 1912). 화폐 이론 문제에서 저자가 저지른 오류와,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와 화해시키려는 어느 정도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 국면”—힐퍼딩 책의 부제가 바로 이것이다—에 대한 대단히 귀중한 이론적 분석이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제국주의에 관해 이야기된 것들—특히 이 주제를 다룬 엄청난 수의 잡지·신문 기사, 그리고 예컨대 1912년 가을에 열린 켐니츠 대회와 바젤 대회의 결의—은 위의 두 저자가 서술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요약한 사상의 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아래에서 우리는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 특징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고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되도록 대중적인 형식으로 간략하게 서술해 보려 한다. 문제의 비경제적 측면은 그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자세히 다룰 수 없을 것이다. 문헌 출처와, 모든 독자가 관심을 갖지는 않을 그 밖의 주석은 소책자 끝에 모아 두겠다.

I. 생산의 집중과 독점

공업의 거대한 성장, 그리고 생산이 점점 더 큰 기업으로 집중되는 놀랍도록 빠른 과정은 자본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다. 이 과정에 관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정확한 자료는 현대의 공업 센서스가 제공한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공업 기업 1,000개 가운데 대기업, 즉 임금노동자를 50명 넘게 고용한 기업이 1882년에 3개, 1895년에 6개, 1907년에 9개였다. 노동자 100명 가운데 이들 기업에 속한 노동자는 각각 22명, 30명, 37명이었다. 그러나 생산의 집중은 노동자의 집중보다 훨씬 강하다. 대규모 사업장의 노동이 훨씬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증기기관과 전동기에 관한 자료가 이것을 보여 준다. 독일에서 넓은 의미의 공업이라고 부르는 것, 즉 상업과 교통 등까지 포함한 공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온다. 대규모 사업장은 3,265,623개 가운데 30,588개, 즉 겨우 0.9%다. 이들이 고용한 노동자는 1,440만 명 가운데 570만 명, 즉 39.4%이고, 증기 마력은 880만 가운데 660만, 즉 75.3%이며, 전력은 150만 킬로와트 가운데 120만 킬로와트, 즉 77.2%다.

기업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것이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¾ 넘게 가지고 있다! 전체 기업 수의 91%를 차지하는 297만 개의 소기업(임금노동자 5명까지)에는 증기력과 전력의 겨우 7%가 돌아갈 뿐이다! 수만 개의 최대 기업이 전부이고, 수백만 개의 소기업은 아무것도 아니다.

1907년 독일에서 노동자 1,000명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은 586개였다. 이들이 노동자 총수의 거의 10분의 1(138만 명)과 증기력·전력 총량의 거의 3분의 1(32%)을 차지했다[2]. 뒤에서 보겠지만 화폐자본과 은행은 한 줌의 최대 기업이 가진 이 우위를 한층 더 압도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것도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렇게 만든다. 즉 수백만의 소·중 “경영주”, 심지어 대 “경영주”의 일부까지도 실제로는 수백 명의 백만장자 금융가에게 완전히 예속된다.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선진국인 북아메리카 합중국에서는 생산 집중의 증가가 한층 더 강하다. 여기서는 통계가 좁은 의미의 공업을 따로 떼어 내고, 사업장을 연간 생산물 가치의 크기에 따라 분류한다. 1904년에 생산액 100만 달러 이상의 최대 기업은 1,900개(216,180개 가운데, 즉 0.9%)였고, 이들이 노동자 140만 명(550만 명 가운데, 즉 25.6%)과 생산액 56억(148억 가운데, 즉 38%)을 차지했다. 5년 뒤인 1909년의 해당 수치는 다음과 같다. 기업 3,060개(268,491개 가운데 1.1%), 노동자 200만 명(660만 명 가운데 30.5%), 생산액 90억(207억 가운데 43.8%)[3].

나라 안 모든 기업의 전체 생산 가운데 거의 절반이 기업 총수의 100분의 1 손에 있다! 그리고 이 3,000개의 거대 기업이 258개 공업 부문에 걸쳐 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집중이 그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저절로, 말하자면 독점 바로 앞까지 다가간다는 것이다. 수십 개의 거대 기업은 서로 쉽게 협정을 맺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경쟁을 어렵게 만들고 독점으로 기우는 경향은 바로 기업의 큰 규모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경쟁이 독점으로 이렇게 전화하는 것은 최신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장 중요한 현상이 아니라면—이며,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먼저 있을 수 있는 오해 하나를 없애야 한다.

미국 통계는 250개 공업 부문에 3,000개의 거대 기업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부문마다 최대 규모 기업이 겨우 12개씩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든 공업 부문에 대기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지극히 중요한 특징은 이른바 결합, 즉 서로 다른 공업 부문을 한 기업 안에 합치는 것이다. 이 부문들은 원료 가공의 잇따른 단계이거나(예컨대 광석에서 선철을 제련하고, 선철을 강철로 가공하고, 나아가 어쩌면 강철로 이런저런 완제품을 생산하는 것), 서로에게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예컨대 폐기물이나 부산물의 가공, 포장재 생산 등).

힐퍼딩은 이렇게 쓴다. “결합은 경기의 차이를 고르게 하며, 그러므로 결합 기업에 더 안정된 이윤율을 보장한다. 둘째, 결합은 상업을 배제한다. 셋째, 결합은 기술 개선을 가능하게 하며, 따라서 ‘순수’(즉 결합되지 않은) 기업에 비해 추가 이윤을 얻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넷째, 결합은 ‘순수’ 기업에 비해 결합 기업의 지위를 강화한다. 즉 원료 가격의 하락이 제품 가격의 하락보다 뒤처지는 심한 불황기(사업 침체, 공황)에 경쟁에서 결합 기업을 더 강하게 만든다”[4].

독일의 부르주아 경제학자 하이만은 독일 제철업의 “혼합” 기업, 즉 결합 기업을 서술하는 데 특별한 저작 한 권을 바쳤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순수 기업은 완제품 가격은 낮은데 원료 가격은 높아서 짓눌려 망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수백만 톤의 석탄을 채굴하는 대형 탄광 회사들이 남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석탄 신디케이트로 굳게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과 긴밀하게 결합된 대형 제강 공장들이 자신들의 철강 신디케이트를 가지고 있다. 연간 강철 생산 40만 톤(1톤 = 60푸드), 막대한 광석·석탄 채굴, 강철 완제품 생산, 공장촌 합숙소에 사는 1만 명의 노동자, 때로는 자체 철도와 항구까지 갖춘 이 거대 기업들이 독일 철 공업의 전형적인 대표자다. 그리고 집중은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간다. 개별 기업은 점점 커지고, 같은 공업 부문이나 서로 다른 공업 부문의 점점 더 많은 기업이 거대 기업으로 결집하며, 베를린의 대형 은행 여섯 곳 정도가 이 거대 기업들의 버팀목이자 지도자 노릇을 한다. 독일 광업에서는 카를 마르크스의 집중 학설이 옳다는 것이 정확히 증명되었다. 물론 이것은 공업이 보호관세와 운임 정책으로 보호받는 나라의 이야기다. 독일 광업은 수탈할 때가 무르익었다”[5].

예외적으로 양심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이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독일 공업이 높은 보호관세로 보호받는다는 이유로 독일을 말하자면 따로 떼어 놓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집중과, 기업가들의 독점 동맹, 즉 카르텔, 신디케이트 등의 형성을 촉진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극히 중요한 것은 자유무역 국가인 영국에서도 집중이 역시 독점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다소 늦게, 그리고 어쩌면 다른 형태로이긴 하지만 말이다. 헤르만 레비 교수는 『독점, 카르텔, 트러스트』라는 전문 연구서에서 영국의 경제 발전 자료를 바탕으로 이렇게 쓴다.

“영국에서는 바로 기업의 큰 규모와 높은 기술 수준이 독점으로 기우는 경향을 품고 있다. 한편으로 집중은 한 기업에 막대한 자본을 들여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새 기업은 필요한 자본의 규모라는 점에서 점점 더 높은 요구에 직면하고, 이 때문에 새 기업이 생겨나기 어려워진다. 다른 한편으로(그리고 우리는 이 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집중이 만들어 낸 거대 기업의 수준에 오르려는 새 기업은 모두 엄청나게 많은 잉여 생산물을 생산해야 하는데, 이것을 이윤을 남기고 팔려면 수요가 유례없이 늘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과잉 생산물이 가격을 새 공장에도 독점 동맹에도 불리한 수준까지 떨어뜨릴 것이다.” 영국에서 기업가들의 독점 동맹, 즉 카르텔과 트러스트는—보호관세가 카르텔화를 쉽게 해 주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대개 주요 경쟁 기업의 수가 “스물네 개 남짓”으로 줄어들었을 때에야 생겨난다. “대공업에서 집중이 독점을 낳는 영향이 여기서 수정처럼 명료하게 드러난다”[6].

반세기 전 마르크스가 『자본』을 쓸 때, 압도적 다수의 경제학자에게 자유경쟁은 “자연법칙”으로 보였다. 관변 학문은 침묵의 공모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죽이려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분석으로, 자유경쟁이 생산의 집중을 낳고 이 집중이 그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독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독점은 사실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독점의 개별적 발현을 서술하는 책을 산더미처럼 쓰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논박되었다”고 입을 모아 계속 외친다. 그러나 영국 속담처럼 사실은 고집 센 것이어서, 싫든 좋든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 보여 주는 바는 이렇다. 개별 자본주의 나라들 사이의 차이, 예컨대 보호무역주의냐 자유무역이냐 하는 차이는 독점의 형태나 출현 시기에 본질적이지 않은 차이를 낳을 뿐이며, 생산의 집중이 독점을 낳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오늘날 단계의 일반적·기본적 법칙이다.

유럽에서는 낡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자본주의로 최종적으로 교체된 시기를 꽤 정확하게 정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초다. “독점 형성”의 역사를 다룬 최신 종합 연구 가운데 하나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1860년 이전 시기에서도 자본주의적 독점의 개별 사례를 들 수 있다. 거기서 지금은 아주 흔한 형태들의 맹아를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조건 카르텔의 선사시대다. 현대 독점의 진정한 시작은 아무리 일러도 1860년대다. 독점 발전의 첫 번째 큰 시기는 1870년대의 국제적 공업 불황에서 시작해 189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유럽 규모에서 본다면 자유경쟁 발전의 정점은 60년대와 70년대다. 그때 영국은 낡은 양식의 자본주의 조직을 다 지었다. 독일에서는 이 조직이 수공업 및 가내공업과 결정적인 투쟁에 들어가 자기 존재 형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큰 전환은 1873년의 붕괴, 더 정확히는 그 뒤를 이은 불황에서 시작된다. 이 불황은—80년대 초의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중단과 1889년 무렵의 유달리 강하지만 짧은 호황을 사이에 두고—유럽 경제사의 22년을 채운다.” “1889~1890년의 짧은 호황기에 카르텔은 경기를 이용하는 데 많이 쓰였다. 무분별한 정책은 카르텔이 없었을 때보다 더 빠르고 더 세게 가격을 끌어올렸고, 이 카르텔들은 거의 모두 ‘붕괴의 무덤 속에서’ 불명예스럽게 사라졌다. 다시 5년 동안 불경기와 저가격이 이어졌지만, 공업계에는 이미 예전 같은 분위기가 지배하지 않았다. 불황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불황을 새로운 호경기 앞의 휴지기로만 보았다.

그리하여 카르텔 운동은 두 번째 시기에 들어섰다. 카르텔은 일시적 현상에서 전체 경제생활의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된다. 카르텔은 공업 영역을 하나씩 차례로 정복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원료 가공 부문을 정복한다. 이미 1890년대 초에 카르텔은 석탄 신디케이트의 본보기가 된 코크스 신디케이트를 조직하면서, 운동이 사실상 그보다 더 나아가지 못한 카르텔 기술을 만들어 냈다. 19세기 말의 큰 호황과 1900~1903년의 공황은—적어도 광업과 제철업에서는—처음으로 전적으로 카르텔의 표지 아래 놓여 있다. 그리고 그때는 이것이 아직 새로운 것처럼 보였다면, 이제는 경제생활의 큰 부분이 일반적으로 자유경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넓은 사회 의식에게 당연한 진리가 되었다”[7].

이렇게 해서 독점의 역사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1860년대와 1870년대는 자유경쟁 발전의 최고·정점 단계다. 독점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맹아일 뿐이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이 넓게 발전하는 시기가 오지만, 카르텔은 아직 예외다. 아직 견고하지 않다. 아직 일시적 현상이다. 3) 19세기 말의 호황과 1900~1903년 공황 때 카르텔이 전체 경제생활의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했다.

카르텔은 판매 조건, 지불 기한 등을 협정한다. 판매 지역을 서로 나눈다. 생산량을 정한다. 가격을 정한다. 개별 기업에 이윤을 배분한다 등등.

독일의 카르텔 수는 1896년에 약 250개, 1905년에 385개로 추산되었고, 여기에 약 12,000개 사업장이 참여했다[8]. 그러나 모두가 이 수치가 실제보다 작게 잡혔다고 인정한다. 앞에서 든 1907년 독일 공업 통계 자료를 보면, 12,000개의 최대 기업만으로도 틀림없이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절반 넘게 집중하고 있다. 북아메리카 합중국의 트러스트 수는 1900년에 185개, 1907년에 250개로 추산되었다. 미국 통계는 모든 공업 기업을 개인 소유, 상사 소유, 법인 소유로 나눈다. 법인 소유가 1904년에 23.6%, 1909년에 25.9%, 즉 전체 기업 수의 4분의 1이 넘었다. 이 사업장들의 노동자는 1904년에 70.6%, 1909년에 75.6%로 전체 노동자 수의 4분의 3이었고, 생산 규모는 109억 달러와 163억 달러, 즉 총액의 73.7%와 79.0%였다.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손에는 흔히 해당 공업 부문 전체 생산의 10분의 7이나 10분의 8이 집중된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1893년 창립 당시 그 지역 석탄 생산 전체의 86.7%를 집중했고, 1910년에는 이미 95.4%를 집중했다[9]. 이렇게 생겨나는 독점은 엄청난 소득을 보장하며, 엄청나게 큰 기술적·생산적 단위가 형성되게 한다. 미국의 유명한 등유 트러스트(Standard Oil Company)는 1900년에 창립되었다. “그 자본은 1억 5천만 달러였다. 보통주 1억 달러어치와 우선주 1억 600만 달러어치가 발행되었다. 우선주에는 1900~1907년에 48, 48, 45, 44, 36, 40, 40, 40%의 배당이 지급되었으며, 모두 3억 6,700만 달러였다. 1882년부터 1907년까지 순이윤 8억 8,900만 달러를 얻었는데, 그 가운데 6억 600만 달러는 배당으로 지급되고 나머지는 적립금으로 들어갔다”[10]. “철강 트러스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의 모든 기업에는 1907년에 노동자와 직원이 적어도 210,180명 있었다. 독일 광업의 최대 기업인 겔젠키르헨 광업회사(Gelsenkirchener Bergwerksgesellschaft)는 1908년에 노동자와 직원 46,048명을 거느렸다”[11]. 철강 트러스트는 이미 1902년에 강철 900만 톤을 생산했다[12]. 미국 전체 강철 생산 가운데 이 트러스트의 몫은 1901년에 66.3%, 1908년에 56.1%였고[13], 광석 채굴에서는 같은 해에 43.9%와 46.3%였다.

미국 정부의 트러스트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경쟁자에 대한 그들의 우월성은 기업의 큰 규모와 탁월하게 갖춰진 기술에 근거한다. 담배 트러스트는 창립 때부터 어디서나 수작업을 기계 작업으로 대규모로 대체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담배 가공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특허를 모두 사들였고, 여기에 막대한 금액을 썼다. 많은 특허가 처음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나, 트러스트에 고용된 기술자들이 다시 손봐야 했다. 1906년 말에는 오로지 특허 매입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회사 두 곳이 세워졌다. 같은 목적으로 트러스트는 자체 주물 공장, 기계 공장, 수리 공장을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인 브루클린의 공장은 평균 3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여기서는 궐련, 작은 시가, 코담배, 포장용 주석박, 상자 등을 생산하기 위한 발명을 시험하며, 발명을 개량하는 일도 여기서 한다”[14]. “다른 트러스트들도 이른바 기술 개발 기술자(developping engineers)를 고용하고 있는데, 이들의 임무는 새로운 생산 방법을 발명하고 기술 개선을 시험하는 것이다. 철강 트러스트는 기술을 높이거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발명에 대해 자기 기술자와 노동자에게 높은 상금을 준다”[15].

독일 대공업, 예컨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한 화학공업에서도 기술 개선 사업은 이와 비슷하게 조직되어 있다. 생산의 집중 과정은 이미 1908년까지 이 공업에 두 개의 주요 “그룹”을 만들어 냈고, 이 그룹들은 나름대로 역시 독점에 다가갔다. 처음에 이 그룹들은 각각 자본금 2,000만~2,100만 마르크를 가진 최대 공장 두 쌍의 “2국 동맹”이었다. 한쪽은 회히스트의 옛 마이스터 공장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카셀라 공장, 다른 쪽은 루트비히스하펜의 아닐린·소다 공장과 엘버펠트의 옛 바이어 공장이었다. 그 뒤 1905년에 한 그룹이, 1908년에 다른 그룹이 각각 또 하나의 큰 공장과 협정을 맺었다. 그리하여 각각 자본금 4,000만~5,000만 마르크를 가진 “3국 동맹” 두 개가 생겼고, 이 “동맹”들 사이에서는 이미 “접근”, 가격에 관한 “협정” 등이 시작되었다[16].

경쟁이 독점으로 전화한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거대하게 진전된다. 특히 기술적 발명과 개선의 과정도 사회화된다.

이것은 이미, 서로 흩어져 있고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알지 못하는 시장에 팔려고 생산하던 경영주들의 낡은 자유경쟁과는 전혀 다르다. 집중은 한 나라에서, 그리고 뒤에서 보겠지만 여러 나라에서, 전 세계에서 모든 원료 공급원(예컨대 철광석 산지)을 대략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진전되었다. 이런 파악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이 공급원들은 거대한 독점 동맹의 한 손에 장악된다. 시장 규모도 대략 파악되며, 이 동맹들은 계약에 따른 협정으로 그 시장을 서로 “나눈다”. 숙련 노동력이 독점되고, 가장 뛰어난 기술자가 고용되며, 교통로와 교통수단—아메리카의 철도, 유럽과 아메리카의 해운 회사—이 장악된다.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는 생산의 가장 전면적인 사회화 바로 앞까지 다가간다. 그것은 자본가들을 그들의 의지와 의식에 반해, 완전한 경쟁의 자유에서 완전한 사회화로 넘어가는 어떤 새로운 사회 질서 속으로 말하자면 끌고 들어간다.

생산은 사회적이 되지만, 전유는 여전히 사적이다. 사회적 생산수단은 여전히 소수 사람들의 사적 소유로 남아 있다. 형식적으로 인정되는 자유경쟁의 일반적 틀은 남아 있고, 소수 독점자들이 나머지 주민에게 가하는 압제는 백 배나 더 무겁고, 더 뚜렷하게 느껴지며,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독일 경제학자 케스트너는 “카르텔과 아웃사이더”, 즉 카르텔에 들어가지 않은 기업가 “사이의 투쟁”에 특별한 저작 하나를 바쳤다. 그는 이 저작에 『조직 강제』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자본주의를 미화하지 않으려면 물론 독점자 동맹에 복종하도록 하는 강제라고 말했어야 했다. 독점자 동맹이 “조직”을 위해 벌이는 현대적이고 최신의 문명화된 투쟁에서 쓰는 수단들을 그저 목록으로라도 훑어보는 것은 교훈적이다. 1) 원료 공급 차단(“…카르텔 가입을 강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 2) “제휴”를 통한 노동력 공급 차단(즉 자본가와 노동조합이 맺는 계약으로, 노동조합이 카르텔에 가입한 기업에서만 일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3) 운송 차단. 4) 판로 차단. 5) 카르텔하고만 거래하도록 구매자와 계약하는 것. 6) 계획적인 가격 인하(“아웃사이더”, 즉 독점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려고, 일정 기간 원가 이하로 팔기 위해 수백만 마르크를 쓴다. 휘발유 공업에서는 가격을 40마르크에서 22마르크로, 즉 거의 절반으로 낮춘 예가 있었다!). 7) 신용 차단. 8) 보이콧 선언.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소기업과 대기업, 기술적으로 뒤떨어진 기업과 기술적으로 앞선 기업 사이의 경쟁 투쟁이 아니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독점에, 독점의 압제와 자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독점자들이 목 졸라 죽이는 일이다. 이 과정이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의식에는 이렇게 반영된다.

케스트너는 이렇게 쓴다. “순수하게 경제적인 활동 영역에서도 예전 의미의 상업 활동에서 조직적·투기적 활동으로 어느 정도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자신의 기술적·상업적 경험을 바탕으로 구매자의 필요를 가장 잘 판단하고, 잠재 상태에 있는 수요를 찾아내어 말하자면 ‘발견’할 줄 아는 상인이 아니라, 조직의 발전, 즉 개별 기업과 은행 사이에 일정한 연관이 생길 가능성을 미리 계산하거나 적어도 냄새라도 맡을 줄 아는 투기적 천재(?!)다…”

이것을 사람의 말로 옮기면 이런 뜻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이 지경에 이르러, 상품생산이 여전히 “지배”하고 경제 전체의 토대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이미 밑동이 허물어졌으며, 주된 이윤은 금융 술수의 “천재”들에게 돌아간다. 이런 술수와 사기의 밑바탕에는 생산의 사회화가 있지만, 이 사회화에까지 애써 도달한 인류의 거대한 진보는… 투기꾼들에게 이익이 된다. 이 “근거에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속물적·반동적 비판이 어떻게 뒤로, “자유로운”, “평화로운”, “정직한” 경쟁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지는 뒤에서 보게 될 것이다.

케스트너는 이렇게 말한다. “카르텔 형성의 결과인 가격의 지속적 상승은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특히 석탄, 철, 칼리에서만 관찰되었고, 반대로 완제품에서는 한 번도 관찰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수익성 상승도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공업에 국한되었다. 이 관찰에 다음을 덧붙여야 한다. 원료(반제품이 아니라)를 가공하는 공업은 카르텔 형성 덕분에 반제품을 더 가공하는 공업을 희생시켜 높은 이윤이라는 이득을 얻을 뿐 아니라, 이 공업에 대해 자유경쟁 아래서는 없던 일정한 지배 관계에 서게 되었다”[17].

우리가 강조한 말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마지못해 드물게 인정하고, K. 카우츠키를 우두머리로 하는 오늘날의 기회주의 옹호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둘러대며 외면하려 하는 문제의 본질을 보여 준다. 지배 관계와 그에 결부된 폭력, 이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 국면”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이것이 전능한 경제적 독점의 형성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야 했고 또 생겨났다.

카르텔이 판치는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원료 공급원 전부나 주요 공급원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에서는 카르텔이 생기고 독점이 형성되기가 특히 쉽다. 그러나 원료 공급원을 장악할 수 없는 다른 공업 부문에서는 독점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시멘트 공업에서는 원료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이 공업도 고도로 카르텔화되어 있다. 공장들은 지역별 신디케이트, 즉 남독일 신디케이트, 라인-베스트팔렌 신디케이트 등으로 뭉쳤다. 가격은 독점 가격으로 정해졌다. 원가가 180마르크인데 화차 한 량에 230~280마르크다! 기업들은 12~16%의 배당을 내는데, 현대 투기의 “천재”들은 배당으로 분배되는 것 말고도 거액의 이윤을 제 주머니로 돌릴 줄 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토록 수익성 좋은 공업에서 경쟁을 없애려고 독점자들은 술책까지 쓴다. 공업 상황이 나쁘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신문에 “자본가 여러분! 시멘트 사업에 자본을 투자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는 익명 광고를 싣고, 마지막으로 “아웃사이더”(즉 신디케이트에 참여하지 않는 자)의 사업장을 사들이며 6만, 8만, 15만 마르크의 “보상금”을 치른다[18]. 독점은 “겸손한” 보상금 지불에서 시작해 경쟁자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쓰는 미국식 “응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온갖 방법으로 제 길을 연다.

카르텔이 공황을 없앤다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본주의를 미화하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동화다. 오히려 몇몇 공업 부문에서 생겨나는 독점은 자본주의 생산 전체에 고유한 무질서를 강화하고 격화한다. 자본주의 일반의 특징인 농업과 공업 사이의 발전 불균형은 더욱 커진다. 가장 고도로 카르텔화된 이른바 중공업, 특히 석탄과 철이 차지하는 특권적 지위는 나머지 공업 부문에서 “계획성의 결여를 한층 더 심하게” 만든다. “독일 대은행과 공업의 관계”를 다룬 가장 뛰어난 연구 가운데 하나를 쓴 야이델스도 이것을 인정한다[19].

자본주의의 뻔뻔한 옹호자 리프만은 이렇게 쓴다. “국민경제가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 위험한 기업이나 해외 기업, 발전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업, 또는 마지막으로 지방적 의미밖에 없는 기업으로 점점 더 향한다”[20]. 위험성의 증대는 결국 자본의 거대한 증대와 연결되어 있다. 자본은 말하자면 흘러넘쳐 해외로 흘러나가고, 등등. 그리고 그와 함께 기술의 급속한 성장은 국민경제의 여러 측면 사이의 불균형, 무질서, 공황의 요소를 점점 더 많이 가져온다. 같은 리프만도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인류 앞에는 가까운 장래에 다시 기술 분야의 큰 변혁이 놓여 있을 것이며, 이 변혁은 국민경제 조직에도 작용을 미칠 것이다”… 전기, 항공… “보통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런 근본적 경제 변화의 시기에는 강한 투기가 발전한다…”[21]

그리고 공황—온갖 종류의 공황, 가장 흔하게는 경제공황이지만 경제공황만은 아니다—은 다시 집중과 독점으로 향하는 경향을 엄청나게 강화한다. 다음은 1900년 공황, 즉 우리가 아는 것처럼 최신 독점의 역사에서 전환점 노릇을 한 공황의 의의에 관한 야이델스의 매우 교훈적인 논의다.

“1900년 공황이 닥쳤을 때 주요 공업 부문에는 거대 기업과 나란히,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낡은 조직을 가진 기업, 즉 공업 호황의 물결을 타고 올라온 ‘순수’ 기업”(즉 결합되지 않은 기업)“이 아직 많이 있었다. 가격 하락과 수요 감소는 이 ‘순수’ 기업들을 비참한 처지로 몰아넣었지만, 결합된 거대 기업은 그런 처지를 전혀 겪지 않았거나 아주 짧은 기간만 겪었다. 그 때문에 1900년 공황은 1873년 공황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정도로 공업 집중을 가져왔다. 1873년 공황도 우량 기업의 일정한 선별을 낳았지만, 당시의 기술 수준에서는 이 선별이 공황에서 승리하고 빠져나온 기업들의 독점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바로 그런 지속적인 독점을, 그것도 높은 정도로 가진 것이 오늘날 제철 공업과 전기 공업의 거대 기업이다. 매우 복잡한 기술, 멀리까지 뻗은 조직, 강력한 자본 덕분이다. 그다음으로 정도는 덜하지만 기계 제작 공업, 금속 공업의 일부 부문, 교통 등의 기업도 그렇다”[22].

독점, 이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 국면”의 마지막 말이다. 그러나 은행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현대 독점의 실제 힘과 의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극히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며 과소평가된 것이 될 것이다.

II. 은행과 그 새로운 역할

은행의 기본적이고 본래적인 업무는 지불을 매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은행은 놀고 있는 화폐자본을 활동하는 자본, 즉 이윤을 낳는 자본으로 바꾸며, 온갖 종류의 화폐 소득을 모조리 모아 자본가 계급의 처분에 맡긴다.

은행업이 발전하고 소수의 기관에 집중됨에 따라, 은행은 매개자라는 보잘것없는 역할에서 전능한 독점자로 성장한다. 이 독점자들은 자본가와 소경영주 전체가 가진 화폐자본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며, 그 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생산수단과 원료 산지의 대부분도 지배한다. 수많은 보잘것없는 매개자가 한 줌의 독점자로 바뀌는 이 전환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로 성장하는 기본 과정의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은행업의 집중을 살펴보아야 한다.

1907/8년에 자본금 100만 마르크가 넘는 독일의 모든 주식은행의 예금은 70억 마르크였고, 1912/3년에는 벌써 98억 마르크였다. 5년 동안 40%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이 28억 마르크의 증가분 가운데 27억 5,000만 마르크는 자본금 1,000만 마르크가 넘는 57개 은행의 몫이었다. 큰 은행과 작은 은행 사이에 예금은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었다[23].

전체 예금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
베를린 대은행 9개자본금 1,000만 마르크가 넘는 나머지 은행 48개자본금 100만~1,000만 마르크인 은행 115개소은행(100만 마르크 미만)
1907/8…4732.516.54
1912/3…4936123

작은 은행들은 큰 은행들에 밀려났고, 큰 은행 가운데 겨우 아홉 곳이 전체 예금의 거의 절반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매우 많은 것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수많은 작은 은행이 사실상 큰 은행의 지점으로 바뀐 것 등이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이야기하겠다.

1913년 말에 슐체-게퍼니츠는 베를린 9대 은행의 예금을 전체 약 100억 마르크 가운데 51억 마르크로 추산했다. 같은 저자는 예금만이 아니라 은행자본 전체를 고려하여 이렇게 썼다. “1909년 말 베를린의 9대 은행은 그에 딸린 은행들과 함께 113억 마르크, 즉 독일 은행자본 총액의 약 83%를 관리했다. ‘도이체방크’(‘Deutsche Bank’)은 그에 딸린 은행들과 함께 약 30억 마르크를 관리하는데, 프로이센 국유철도청과 나란히 구세계에서 가장 큰 자본 집적체이며, 게다가 고도로 분산된 집적체이다.”[24]

우리가 “딸린” 은행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최신 자본주의적 집중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대기업, 특히 은행은 작은 기업을 곧바로 삼킬 뿐만 아니라, 그 자본에 “참여”함으로써, 주식을 사들이거나 교환함으로써, 채무 관계의 체계 등등을 통해 작은 기업을 자기에게 “결합”하고 종속시키며 “자기” 그룹, 자기 “콘체른”(전문용어로는 이렇게 부른다)에 편입시킨다. 리프만 교수는 현대의 “참여회사와 금융회사”를 서술하는 데 500쪽에 이르는 거대한 “노작” 한 권을 통째로 바쳤다[25]. 유감스럽게도 그는 흔히 소화되지 않은 날것의 자료에 아주 저급한 “이론적” 논의를 덧붙였다. 집중이라는 면에서 이 “참여” 제도가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는 은행계의 “활동가” 리서가 독일 대은행에 관해 쓴 저작에 가장 잘 나와 있다. 그러나 그의 자료로 넘어가기 전에 “참여” 제도의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도이체방크”의 “그룹”은 대은행들의 모든 그룹 가운데 가장 큰 그룹은 아니더라도 가장 큰 그룹 가운데 하나다. 이 그룹의 모든 은행을 하나로 묶는 주요한 끈을 파악하려면 제1차, 제2차, 제3차 “참여”를, 같은 말이지만 (더 작은 은행들이 “도이체방크”에) 제1차, 제2차, 제3차로 종속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나온다[26].

제1차
종속:
제2차
종속:
제3차
종속:
“독일
은행”이
참여한 곳:
{상시 ……17개 은행;그중9개가 34개에;그중4개가 7개에
기간 미정 …〃…5 〃——
수시 …〃…8 〃〃 〃5 〃 14;〃 〃2 〃 2
합계……30개 은행;그중14개가 48개에;그중6개가 9개에

“도이체방크”에 “수시로” 종속된 “제1차 종속” 은행 8개 가운데에는 외국 은행이 셋 있다. 오스트리아 은행 하나(빈의 “은행연합” — “Bankverein”)와 러시아 은행 둘(시베리아 상업은행과 러시아 대외무역은행)이다. “도이체방크” 그룹에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전부 또는 일부로 모두 87개 은행이 들어 있으며, 이 그룹이 지배하는 자기 자본과 타인 자본의 총액은 20억~30억 마르크로 추산된다.

이런 그룹의 꼭대기에 서 있으면서, 국채 같은 특히 크고 수지맞는 금융 업무를 위해 자기보다 조금 못한 다른 은행 대여섯 곳과 협정을 맺는 은행은 이미 “매개자”의 역할을 넘어서 한 줌의 독점자 동맹으로 바뀌었음이 분명하다.

바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은행업의 집중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지는 리서의 다음 자료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자료를 줄여서 옮긴다.

베를린 6대 은행의 보유 현황
연도독일 안의
지점
예금 창구
및 환전소
독일 주식은행에
대한 상시
참여
기관
총수
1895 …1614142
1900 …2140880
1911 …10427663450

우리는 수로의 촘촘한 그물이 얼마나 빠르게 자라나는지를 본다. 이 그물은 온 나라를 뒤덮고, 모든 자본과 화폐 소득을 중앙으로 모으며, 수천수만의 분산된 경제를 하나의 전국적 자본주의 경제로,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로 바꾸어 놓는다. 슐체-게퍼니츠가 위에 인용한 글에서 오늘날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이름으로 말한 그 “분산”은, 실제로는 이전에 비교적 “독립적”이었던, 더 정확히 말하면 지역적으로(국지적으로) 닫혀 있던 경제 단위들을 점점 더 많이 하나의 중심에 종속시키는 데 있다. 그러니 실제로 이것은 중앙집중이며, 독점 거인들의 역할과 의의와 힘이 커지는 것이다.

더 오래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이 “은행망”이 더욱 촘촘하다. 1910년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에서 모든 은행의 지점 수는 7,151개로 집계되었다. 4대 은행은 저마다 400개가 넘는 지점(447개에서 689개까지)을 두었고, 그다음으로 4개 은행이 200개 넘게, 11개 은행이 100개 넘게 두었다.

프랑스에서는 가장 큰 은행 세 곳인 “Crédit Lyonnais”, “Comptoir National”, “Société Générale”[27]이 업무와 지점망을 다음과 같이 넓혀 갔다[28].

지점과 창구 수자본 규모
지방파리합계자기 자본타인 자본
(백만 프랑)
1870…471764200427
1890…192662582652,245
1909…1,0331961,2298874,363

현대 대은행의 “연결망”을 보여 주려고 리서는 “디스콘토게젤샤프트”(“Disconto-Gesellschaft”)가 보내고 받은 편지 수에 관한 자료를 든다. 이 은행은 독일과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의 하나다(이 은행의 자본은 1914년에 3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편지 수
받은 편지보낸 편지
1852 …6,1356,292
1870 …85,80087,513
1900 …533,102626,043

파리의 대은행 “리옹 신용은행”에서는 계좌 수가 1875년 28,535개에서 1912년 633,539개로 늘었다[29].

이 단순한 숫자들은 아마 긴 논의보다 더 분명하게, 자본이 집중되고 은행의 거래액이 늘어남에 따라 은행의 의의가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뀌는지를 보여 준다. 흩어져 있던 자본가들로부터 하나의 집단적 자본가가 형성된다. 은행이 몇몇 자본가의 당좌계정을 관리할 때, 은행은 겉보기에 순전히 기술적이고 오로지 보조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업무가 거대한 규모로 커지면, 한 줌의 독점자가 자본주의 사회 전체의 상공업 활동을 자기에게 종속시킨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은행 거래 관계를 통해, 당좌계정과 그 밖의 금융 업무를 통해 먼저 개별 자본가의 사업 상태를 정확히 알아내고, 다음으로 그들을 통제하며, 신용을 늘리거나 줄이고 쉽게 하거나 어렵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그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수익성을 결정하고, 그들에게서 자본을 빼앗거나 그들이 자본을 빠르게 그리고 엄청난 규모로 늘릴 수 있게 해 주는 등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금 베를린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자본 3억 마르크를 언급했다.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이 자본 증가는 베를린 최대 은행 둘, 곧 “도이체방크”과 “디스콘토게젤샤프트” 사이의 패권 투쟁의 한 장면이었다. 1870년에 전자는 아직 신참으로 자본금이 1,500만 마르크에 불과했고, 후자는 3,000만 마르크였다. 1908년에 전자의 자본금은 2억 마르크, 후자는 1억 7,000만 마르크였다. 1914년에 전자는 자본금을 2억 5,000만 마르크로 올렸고, 후자는 또 하나의 일류 대은행인 “샤프하우젠 연합은행”과 합병하여 3억 마르크로 올렸다. 그리고 물론 이 패권 투쟁은 두 은행 사이에 점점 잦아지고 굳어지는 “협정”과 나란히 진행된다. 이런 발전 과정은 은행업 전문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강요한다. 그것도 경제 문제를 가장 온건하고 가장 단정한 부르주아 개량주의의 테두리를 결코 넘지 않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문가들에게 말이다.

“다른 은행들도 같은 길을 따를 것이다.” 독일 잡지 《디 방크》는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자본이 3억 마르크로 늘어난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리고 지금 독일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300명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 50명, 25명, 또는 그보다 더 적은 사람만 남을 것이다. 최신의 집중 운동이 은행업 하나에 그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개별 은행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당연히 이 은행들이 후원하는 산업가 신디케이트들 사이의 접근으로도 이어진다… 어느 맑은 날 우리가 잠에서 깨어 보면, 놀란 우리 눈앞에 트러스트만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적 독점을 국가 독점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에 맞닥뜨릴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실, 주식으로 조금 가속된 사물의 발전이 제멋대로 흘러가게 놓아두었다는 것 말고는 스스로를 나무랄 것이 없다.”[30]

이것이 부르주아 시사평론의 무력함을 보여 주는 표본이다. 부르주아 과학이 이 시사평론과 다른 점이라고는 덜 솔직하고, 사태의 본질을 흐리며 나무로 숲을 가리려 한다는 것뿐이다. 집중의 결과 앞에서 “놀라고”, 자본주의 독일의 정부나 자본주의 “사회”(“우리”)를 “나무라고”, 주식 도입으로 집중이 “가속”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독일의 한 “카르텔” 전문가 치르슈키가 미국의 트러스트를 두려워하며 독일의 카르텔을 “더 낫게 여기는” 것과 같다. 카르텔은 “트러스트만큼 기술적·경제적 진보를 지나치게 가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31]. 이것이 무력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독일에는 트러스트가 없고 “오직” 카르텔만 있지만, 독일을 지배하는 것은 300명도 안 되는 자본 거물이다. 그리고 그 수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어쨌든 은행은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은행 입법이 어떻게 다르든, 자본 집중과 독점 형성의 과정을 여러 배로 강화하고 가속한다.

“은행은 사회적 규모에서 일반적 장부 기록과 생산수단의 일반적 분배의 형태를, 그러나 바로 형태만을 만들어 낸다.” 마르크스는 반세기 전에 『자본』(러시아어 번역본, 3권 2부, 144쪽)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든 자료, 곧 은행자본의 성장, 최대 은행들의 사무소와 지점 수의 증가, 그 계좌 수의 증가 등에 관한 자료는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 “일반적 장부 기록”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아니, 자본가만의 것도 아니다. 은행은 일시적이나마 소경영주와 사무직원, 그리고 노동자 가운데 보잘것없는 상층의 온갖 화폐 소득까지 모으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일반적 분배”, 형식적 측면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 현대 은행에서 자라나고 있다. 현대 은행은 프랑스에서는 고작 서너 곳에서 여섯 곳, 독일에서는 여섯 곳에서 여덟 곳의 최대 은행으로서 수십억, 또 수십억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 내용에서 보면 이 생산수단의 분배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고 사적이다. 즉 대자본, 그것도 무엇보다 최대 독점자본의 이익에 맞춰진 분배다. 그리고 이 자본은 대중이 반쯤 굶주리며 살고, 농업 전체의 발전이 공업의 발전에 절망적으로 뒤처지며, 공업 안에서는 “중공업”이 다른 모든 부문에서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조건에서 활동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화라는 일에서 저축은행과 우편 기관이 은행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더 “분산되어” 있다. 즉 더 많은 지방, 더 많은 벽지, 더 넓은 주민층을 자기 영향권에 끌어들인다. 다음은 은행 예금과 저축은행 예금의 발전을 비교하여 미국의 한 위원회가 모은 자료다[32].

예금(10억 마르크)
영국프랑스독일
⏞⏞⏞
은행저축
은행
은행저축
은행
은행신용
조합
저축
은행
1880 …8.41.6?0.90.50.42.6
1888 …12.42.01.52.11.10.44.5
1908 …23.24.23.74.27.12.213.9

예금에 4%나 4¼%의 이자를 치르는 저축은행은 자기 자본을 “수익성 있게” 굴릴 곳을 찾아 어음, 저당 대부 및 그 밖의 업무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은행과 저축은행 사이의 경계는 “점점 더 지워진다.” 이를테면 보훔과 에르푸르트의 상공회의소는 저축은행이 어음 할인 같은 “순수한” 은행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라고 요구하고, 우편 기관의 “은행” 업무를 제한하라고 요구한다[33]. 은행계의 거물들은 국가 독점이 뜻밖의 방향에서 자기들에게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듯하다. 그러나 물론 이 두려움은, 말하자면 같은 관청의 두 과장 사이의 경쟁이라는 테두리를 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저축은행의 수십억 자본을 실제로 결국 지배하는 것은 바로 그 은행자본의 거물들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 독점은 이런저런 산업 부문의 파산 직전 백만장자들에게 소득을 올려 주고 굳혀 주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이 지배하던 낡은 자본주의가 독점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로 바뀌는 것은 여러 가지 가운데서도 거래소의 의의가 떨어지는 데서 나타난다. 《디 방크》는 이렇게 쓴다. “거래소는 오래전에 유통의 필수적인 매개자이기를 그만두었다. 예전에는 은행이 발행되는 유가증권의 대부분을 아직 고객들 사이에 배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래소가 그런 매개자였다.”[34]

“‘모든 은행은 거래소다’라는 이 현대의 격언은 은행이 클수록, 은행업에서 집중이 진전될수록 더 많은 진리를 담고 있다.”[35] “예전 70년대에는 젊은 날의 무절제를 지닌 거래소가” (1873년의 거래소 붕괴, 창업 추문 등에 대한 “은근한” 암시다) “독일 공업화의 시대를 열었다면, 지금은 은행과 공업이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다. 우리 대은행들의 거래소 지배는… 완전히 조직된 독일 산업국가의 표현일 뿐이다. 이렇게 자동으로 작동하는 경제 법칙의 활동 영역이 좁아지고 은행을 통한 의식적 조절의 영역이 엄청나게 넓어진다면, 그와 함께 소수 지도적 인물의 국민경제적 책임도 거대하게 커진다.” 독일 교수 슐체-게퍼니츠는[36] 이렇게 쓴다. 그는 독일 제국주의의 변호론자이자 모든 나라 제국주의자들의 권위자로서, 은행을 통한 이 “의식적 조절”이란 한 줌의 “완전히 조직된” 독점자가 대중을 털어먹는 것이라는 “사소한 일”을 흐리려고 애쓴다. 부르주아 교수의 임무는 메커니즘 전체를 드러내는 것도, 은행 독점자들의 온갖 술수를 폭로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을 미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욱 권위 있는 경제학자이자 은행계의 “활동가”인 리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문구로 얼버무린다. “거래소는 경제 전체와 유가증권 유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속성, 즉 자기에게 흘러드는 경제 움직임을 가장 정확하게 재는 측정 도구일 뿐 아니라 거의 자동으로 작동하는 조절기이기도 하다는 속성을 점점 더 잃고 있다.”[37]

다른 말로 하면, 낡은 자본주의, 즉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절기인 거래소를 갖춘 자유경쟁의 자본주의는 과거로 사라져 간다. 그 자리를 새로운 자본주의가 차지했는데, 이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과도적인 것, 자유경쟁과 독점이 뒤섞인 무엇인가의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최신의 자본주의가 무엇으로 “이행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저절로 떠오르지만,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 물음을 던지기를 두려워한다.

“30년 전에는 자유롭게 경쟁하는 기업가들이 ‘노동자’의 육체노동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경제적 작업의 9⁄10을 수행했다. 지금은 관리들이 이 경제적 정신노동의 9⁄10을 수행한다. 은행업이 이 발전의 선두에 서 있다.”[38] 슐체-게퍼니츠의 이 고백은 최신 자본주의, 곧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가 무엇으로 가는 이행인가 하는 물음에 거듭거듭 부딪힌다.— — —

집중 과정 덕분에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선두에 남게 되는 소수의 은행 사이에서는, 당연히 독점적 협정, 곧 은행 트러스트를 향한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강해진다. 미국에서는 아홉 곳이 아니라 가장 큰 은행 두 곳, 억만장자 록펠러와 모건의 은행이 110억 마르크의 자본을 지배한다[39]. 독일에서는 앞서 우리가 언급한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샤프하우젠 연합은행” 흡수에 대해 거래소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문인 《프랑크푸르트 신문》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은행 집중이 커지면서 대체로 신용을 얻으려고 찾아갈 수 있는 기관의 범위가 좁아지고, 그 때문에 대공업이 소수 은행 그룹에 더 의존하게 된다. 공업과 금융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은행자본이 필요한 공업 회사들의 활동의 자유는 제약된다. 그러므로 대공업은 은행의 트러스트화(트러스트로 결합되거나 바뀌는 것)가 강해지는 것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대은행의 개별 콘체른들 사이에서 경쟁 제한으로 귀결되는 일정한 협정의 싹이 이미 여러 번 관찰되었다.”[40]

거듭거듭, 은행업 발전의 마지막 말은 독점이다.

은행과 공업 사이의 긴밀한 연결에 관해 말하자면, 바로 이 영역에서 은행의 새로운 역할이 아마 가장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은행이 어떤 기업가의 어음을 할인해 주고 그를 위해 당좌계정을 열어 주는 등의 일을 할 때, 이 업무들은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그 기업가의 독립성을 조금도 줄이지 않으며, 은행은 매개자라는 보잘것없는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업무가 잦아지고 굳어지면, 은행이 막대한 규모의 자본을 자기 손에 “모으면”, 그리고 어떤 기업의 당좌계정을 관리하면서 은행이 고객의 경제 상태를 점점 더 자세하고 완전하게 알게 되면(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 결과 산업자본가는 점점 더 완전히 은행에 의존하게 된다.

이와 함께, 말하자면 은행과 최대 상공업 기업 사이의 인적 결합이 발전한다. 주식 소유를 통해, 그리고 은행 중역이 상공업 기업의 감사회(또는 이사회) 구성원이 되고 그 반대로도 되는 방식을 통해 양자가 융합하는 것이다. 독일 경제학자 야이델스는 이런 형태의 자본과 기업 집중에 관해 아주 상세한 자료를 모았다. 베를린 6대 은행은 자기 중역들을 통해 344개 산업 회사에, 자기 이사회 구성원들을 통해 또 407개 회사에, 합계 751개 회사에 대표를 두고 있었다. 289개 회사에서는 감사회 구성원 두 자리나 감사회 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공업 회사들 가운데에는 매우 다양한 공업 부문은 물론 보험업, 교통, 음식점, 극장, 미술공예 산업 등도 있다. 다른 한편, 같은 6개 은행의 감사회에는 (1910년에) 최대 산업가 51명이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크루프 상사의 중역, 거대 해운회사 “하파크”(Hamburg-Amerika)의 중역 등등이 있었다. 6개 은행은 저마다 1895년부터 1910년까지 수백 개 산업 회사, 정확히는 281개에서 419개 회사의 주식과 사채 발행에 참여했다[41].

은행과 공업의 “인적 결합”은 이 두 쪽 회사들과 정부의 “인적 결합”으로 보완된다. 야이델스는 이렇게 쓴다. “감사회 자리는 이름난 인물들, 그리고 당국과 교섭할 때 적잖은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전직 국가 관리들에게 자발적으로 내준다.”… “대은행의 감사회에서는 대개 의회 의원이나 베를린 시의회 의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대자본주의적 독점의 형성과 완성은, 말하자면 온갖 “자연적” 경로와 “초자연적” 경로로 전속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수백 명 금융 왕 사이에서 일정한 분업이 체계적으로 형성된다.

“개별 대산업가들의 활동 영역이 이렇게 넓어지고” (은행 이사회에 들어가는 것 등) “은행의 지방 중역에게 오로지 특정한 공업 지구 하나만을 맡기는 것과 나란히, 대은행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정하게 전문화가 커지고 있다. 이런 전문화는 대체로 은행 기업 전체, 특히 그 산업적 연결이 큰 규모를 가질 때에만 생각할 수 있다. 이 분업은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공업 전체와의 교섭을 중역 한 사람에게 그의 전문 업무로 맡긴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역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 기업이나, 업종이나 이해관계가 서로 가까운 기업 그룹의 감독을 맡는다.” … (자본주의는 이미 개별 기업을 조직적으로 감독하는 데까지 성숙했다)… “어떤 사람의 전문은 독일 공업, 때로는 서부 독일 공업만이다” (서부 독일은 독일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이다). “다른 사람들의 전문은 외국의 국가 및 공업과의 관계, 산업가 개인에 관한 정보 등, 거래소 업무 등이다. 그 밖에도 은행 중역마다 특정 지방이나 특정 공업 부문을 맡는 일이 많다. 한 사람은 주로 전기 회사의 감사회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은 화학 공장, 양조장 또는 사탕무 설탕 공장의 감사회에서, 셋째 사람은 소수의 고립된 기업의 감사회에서 일하면서 그와 나란히 보험 회사의 감사회에서 일한다… 한마디로, 대은행에서는 업무의 규모와 다양성이 커짐에 따라 지도자들 사이의 분업이 점점 커진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목적(그리고 그 결과)은 그들을 말하자면 순수한 은행 업무보다 조금 높이 올려놓고, 공업의 일반적 문제와 개별 부문의 특수한 문제에 대해 더 판단을 잘하고 더 잘 알게 하며, 은행의 산업적 세력권에서 활동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은행의 이 체계는 공업을 잘 아는 사람들, 기업가들, 전직 관리들, 특히 철도·광산 관청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자기 감사회에 뽑으려는 노력으로 보완된다” 등등[42].

프랑스 은행업에서도 형태만 조금 다를 뿐 같은 종류의 제도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3대 은행의 하나인 “리옹 신용은행”은 내부에 특별한 “금융 정보 수집부”(service des études financières)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기술자, 통계학자, 경제학자, 법률가 등 50명이 넘는 사람이 상시로 일한다. 이 부서에 드는 비용은 해마다 60만~70만 프랑이다. 부서는 다시 8개 과로 나뉜다. 한 과는 특히 공업 기업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다른 과는 일반 통계를 연구하며, 셋째 과는 철도 회사와 해운 회사를, 넷째 과는 유가증권을, 다섯째 과는 재무 보고서를 연구하는 식이다[43].

그 결과 한편으로는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 또는 N. I. 부하린이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유착이 점점 커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이 참으로 “보편적 성격”의 기관으로 성장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장 잘 연구한 저술가인 야이델스의 정확한 표현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적 연결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결과, 우리는 공업을 위해 일하는 금융 기관들의 보편적 성격을 얻게 된다. 다른 형태의 은행들과 달리, 그리고 은행이 발판을 잃지 않으려면 특정한 사업 영역이나 공업 부문에 전문화해야 한다고 문헌에서 이따금 제기된 요구와 달리, 대은행들은 공업 기업들과의 연결을 장소와 생산 종류에서 되도록 다양하게 만들려고 애쓰며, 개별 기업의 역사에서 비롯된 지역 간 또는 공업 부문 간 자본 분배의 불균등을 없애려고 애쓴다.” “한 경향은 공업과의 연결을 일반적 현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경향은 그것을 견고하고 집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두 경향은 6대 은행에서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이미 상당한 규모로, 그리고 같은 정도로 실현되었다.”

상공업계에서는 은행의 “테러리즘”에 대한 불평이 자주 들린다. 대은행들이 다음 예가 보여 주듯이 “명령을 내리는” 마당에 이런 불평이 나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1901년 11월 19일 이른바 베를린 D 은행(4대 은행의 이름이 D 자로 시작한다) 가운데 하나가 북서·중부 독일 시멘트 신디케이트 이사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귀 신디케이트가 이달 18일 아무개 신문에 발표한 공고를 보면, 이달 30일 열릴 귀 신디케이트 총회에서 귀사 기업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결정이 채택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귀사가 이용하던 신용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총회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 채택되지 않고 앞으로에 대해서도 이 점에 관한 상응하는 보증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귀사에 새로운 신용을 열어 주는 교섭에 들어갈 용의가 있습니다.”[44]

사실 이것은 대자본의 억압에 대한 소자본의 바로 그 불평이다. 다만 여기서는 신디케이트 하나가 통째로 “소자본” 부류에 들어갔을 뿐이다! 소자본과 대자본의 오랜 투쟁이 새로운, 비교할 수 없이 더 높은 발전 단계에서 되살아난다. 대은행의 수십억 규모 기업들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단으로 기술 진보도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은행들은 특별한 기술 연구 회사를 세우는데, 그 연구 결과는 물론 “우호적인” 공업 기업들만 이용한다. “전기 철도 문제 연구회”, “과학기술 연구 중앙국”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은행의 지도자들 자신도 국민경제의 어떤 새로운 조건이 생겨나고 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앞에서 무력하다.

야이델스는 이렇게 쓴다. “최근 몇 년 동안 대은행의 중역과 감사회 구성원 자리에서 사람이 바뀌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권력이 점차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대은행이 공업의 전반적 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필요하고 점점 더 절박한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이들과 은행의 옛 중역들 사이에는 사업상의, 그리고 흔히 개인적인 차원의 불화가 생겨난다. 문제는 본질적으로 이런 것이다. 신용기관인 은행이 공업 생산 과정에 이렇게 개입함으로써 손해를 입지 않는가, 견실한 원칙과 확실한 이윤이 이런 활동에 희생되는 것은 아닌가. 이 활동은 신용 공급의 매개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은행을 예전보다 더욱 산업 경기의 맹목적 지배에 종속되는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은행의 옛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이렇게 말하는 반면, 젊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공업 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현대 대공업과 함께 대은행과 최신의 산업 은행 기업을 탄생시킨 필연성과 똑같은 필연성으로 본다. 두 쪽이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점은 오직 하나, 대은행의 새로운 활동에는 확고한 원칙도 구체적 목표도 없다는 것뿐이다.”[45]

낡은 자본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무엇인가로 가는 이행이다. 독점과 자유경쟁을 “화해”시킬 “확고한 원칙과 구체적 목표”를 찾는 것은 물론 가망 없는 일이다. 실무가들의 고백은 슐체-게퍼니츠, 리프만 같은 변호론자들과 그 비슷한 “이론가들”이 “조직된” 자본주의의 매력을 관변식으로 찬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대은행의 “새로운 활동”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이 정확히 언제인가,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우리는 야이델스에게서 꽤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새로운 내용, 새로운 형태, 새로운 기관, 즉 중앙집중적이면서 동시에 분산적으로 조직된 대은행을 갖춘 산업 기업들 사이의 연결은, 특징적인 국민경제 현상으로서 1890년대보다 앞서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출발점을 1897년까지 늦출 수도 있다. 그해에는 기업들의 대규모 ‘합병’이 있었고, 이 합병은 은행의 산업 정책상의 고려에서 처음으로 분산적 조직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도입했다. 이 출발점을 아마 더 늦은 시기로 미룰 수도 있을 것이다. 1900년의 공황이 비로소 공업과 은행업 양쪽에서 집중 과정을 거대하게 가속하고 그 과정을 굳혔으며, 공업과의 교섭을 처음으로 대은행의 진정한 독점으로 만들었고, 이 교섭을 훨씬 더 긴밀하고 집약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46]

이리하여 20세기, 이것이 낡은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자본주의로, 자본 일반의 지배에서 금융자본의 지배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III. 금융자본과 금융과두제

“산업자본 가운데 갈수록 커지는 부분이 그것을 사용하는 산업가들의 것이 아니다. 산업가들은 은행을 매개로 해서만 자본을 처분할 수 있게 되는데, 은행은 그들에 대해 이 자본의 소유자들을 대표한다. 다른 한편으로 은행도 자기 자본 가운데 갈수록 커지는 부분을 산업에 묶어 두어야 한다. 그 결과 은행은 갈수록 더 산업자본가가 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는 산업자본으로 전화한 이러한 은행자본—따라서 화폐 형태의 자본—을 나는 금융자본이라고 부른다.” 힐퍼딩은 이렇게 쓰고, 또 “금융자본: 은행이 처분하고 산업가가 사용하는 자본”이라고 쓴다[47].

이 정의는 가장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 곧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매우 높은 정도로 커져서 집중이 독점으로 이어지고 또 이미 독점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가리키지 않는 한에서 불완전하다. 그러나 힐퍼딩의 서술 전체에서, 특히 이 정의가 나오는 장에 앞선 두 장에서는 자본주의적 독점의 역할이 강조된다.

생산의 집중, 거기서 자라나는 독점, 은행과 산업의 융합 또는 유착—이것이 금융자본이 생겨난 역사이고 이 개념의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적 독점의 “전횡”이 상품생산과 사적 소유라는 일반적 조건 아래서 어떻게 불가피하게 금융과두제의 지배가 되는지를 서술하는 데로 넘어가야 한다. 지적해 둘 것은, 리서, 슐체-게퍼니츠, 리프만 등 독일의—아니, 독일만이 아닌—부르주아 학문의 대표자들이 하나같이 제국주의와 금융자본의 변호론자라는 점이다. 그들은 과두제가 형성되는 “메커니즘”, 과두제의 수법, “죄 없는 것이든 죄 있는 것이든” 과두제 수입의 규모, 과두제와 의회의 관계 따위를 폭로하지 않고 오히려 흐려 놓고 꾸며 준다. 그들은 “저주받은 문제들”을 거창하고 모호한 문구로 얼버무린다. 은행 이사들의 “책임감”에 호소하고, 프로이센 관리들의 “의무감”을 칭송하고, “감독”이니 “규제”니 하는 전혀 진지하지 않은 법안들의 사소한 대목을 진지하게 따지고, 이론적 소꿉장난을 한다. 이를테면 리프만 교수가 써낸 다음과 같은 “과학적” 정의가 그렇다. “… 상업이란 재화를 모으고 보관하며 남이 처분할 수 있게 내주는 데 목적을 둔 영업 활동이다”[48](이탤릭과 굵은 글씨는 교수의 저작 그대로)… 그렇다면 아직 교환을 알지 못하던 원시인에게도 상업이 있었고, 사회주의 사회에도 상업이 있으리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금융과두제의 괴물 같은 지배에 관한 괴물 같은 사실들은 너무도 눈에 띄는 것이어서,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부르주아적 관점에 서 있으면서도 금융과두제를 대체로 사실에 가깝게 그려 내고—물론 속물적인—비판을 가하는 문헌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먼저 앞에서 몇 마디 언급한 바 있는 그 “참여제도”를 다루어야 한다. 이 제도에 아마 누구보다 먼저 주목했을 독일 경제학자 하이만은 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서술한다.

“지배자는 기본 회사(글자 그대로는 ‘모회사’)를 통제한다. 모회사는 다시 거기에 종속된 회사들(‘자회사’)을 지배하고, 자회사는 또 ‘손자회사’를 지배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그다지 크지 않은 자본을 가지고도 거대한 생산 부문들을 지배할 수 있다. 실제로 주식회사를 통제하는 데 언제나 자본의 50%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지배자는 100만만 가지고도 ‘손자회사’들의 자본 800만을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얽힘’이 더 이어진다면 100만을 가지고 1,600만, 3,200만 등을 통제할 수 있다.”[49]

실제로는 주식의 40%만 가지고 있어도 주식회사의 업무를 좌우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경험으로 드러난다[50]. 흩어져 있는 영세 주주들 가운데 일부는 주주총회 등에 참여할 길이 사실상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궤변가들과 기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는 자들”은 주식 소유의 “민주화”에서 “자본의 민주화”, 소생산의 역할과 의의의 강화 따위를 기대한다(또는 기대한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금융과두제의 힘을 키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더 앞선, 또는 더 오래되고 “경험 많은” 자본주의 나라일수록 법률이 더 소액의 주식을 허용한다. 독일에서는 법률이 1,000마르크 미만의 주식을 허용하지 않으며, 독일의 금융 거물들은 법률이 1파운드스털링(=20마르크, 약 10루블)짜리 주식까지 허용하는 영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독일의 최대 산업가이자 “금융왕” 가운데 한 사람인 지멘스는 1900년 6월 7일 제국의회에서 “1파운드스털링짜리 주식이야말로 영국 제국주의의 토대”라고 말했다[51]. 이 상인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면서 제국주의를 어느 한 민족의 못된 성질쯤으로 생각하는 어떤 점잖지 못한 저술가보다,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눈에 띄게 더 깊이, 더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참여제도”는 독점자의 권력을 엄청나게 키워 줄 뿐 아니라, 무슨 음흉하고 더러운 일이든 벌을 받지 않고 해치우고 대중의 돈을 털어 갈 수 있게 해 준다. “모회사”의 지배자들은 형식상, 법률상 “자회사”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자회사는 “독립된” 회사로 간주되고, 바로 그 자회사를 통해 무엇이든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우리가 독일 잡지 《디 방크》 1914년 5월호에서 가져온 예다.

“카셀의 ‘스프링강 주식회사’는 몇 해 전만 해도 독일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기업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경영이 부실한 탓에 배당은 15%에서 0%로 떨어졌다. 알고 보니 이사회는 주주들 모르게 자회사 가운데 하나로 명목자본이 겨우 수십만 마르크에 지나지 않는 ‘하시아’에 600만 마르크를 대출해 주었다. ‘모회사’ 주식자본의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이 대출은 모회사의 대차대조표에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 법률상으로는 이런 은폐가 전적으로 합법이었고 꼬박 두 해 동안이나 계속될 수 있었다. 상법의 어느 한 조항도 이로써 위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임자로서 거짓 대차대조표에 서명한 감사회 의장은 카셀 상공회의소 의장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주주들은 ‘하시아’에 대한 이 대출이 실책으로 드러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필자는 이 낱말에 따옴표를 쳤어야 했다)… “그리고 내막을 아는 자들이 ‘스프링강’ 주식을 팔아 치우기 시작해서 그 시세가 약 100% 떨어지고 나서야…

주식회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이 대차대조표 곡예의 전형적인 예는 왜 주식회사 이사회가 개인 기업가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위험한 사업에 손을 대는지를 설명해 준다. 최신의 대차대조표 작성 기법은 위험한 사업을 보통 주주에게 숨길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실험이 실패할 경우 주요 이해 당사자들이 제때 주식을 팔아 책임을 벗어던질 수 있게 해 준다. 반면에 개인 기업가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제 살갗으로 책임을 진다…

많은 주식회사의 대차대조표는 중세 시대에서 알려진 저 팔림프세스트를 닮았다. 팔림프세스트에서는 먼저 쓰인 글자를 지워야 그 밑에 있는, 필사본의 진짜 내용을 전하는 글자가 드러난다.”(팔림프세스트—본래의 글을 긁어 지우고 그 위에 다른 글을 쓴 양피지)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 그래서 가장 흔히 쓰이는 수단은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그런 회사를 합병해서 하나의 기업을 몇 개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여러 목적—합법적인 목적과 불법적인 목적—에서 볼 때 이 제도의 이점이 너무도 뚜렷해서 지금은 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회사가 그야말로 예외일 정도다.”[52]

필자는 이 제도를 가장 폭넓게 이용하는 거대 독점 회사의 예로 저 유명한 “일반전기회사”(A.E.G., 이 회사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를 든다. 1912년에 이 회사는 175~200개 회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물론 그 회사들을 지배하면서 모두 합쳐 약 15억 마르크의 자본을 거느리고 있었다[53].

통제 규칙, 대차대조표 공개, 대차대조표의 일정한 양식 마련, 감독 기관 설치 따위로 선의의—곧 자본주의를 변호하고 꾸며 주려는 선한 의도를 가진—교수와 관리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여기서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사적 소유는 신성하며, 누구도 주식을 사고팔고 교환하고 저당 잡히는 일 따위를 금지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은행에서 “참여제도”가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르렀는지는 E. 아가트가 전하는 자료로 판단할 수 있다. 그는 러청은행에서 15년 동안 직원으로 일했고 1914년 5월에 『대은행과 세계시장』이라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제목으로 저작을 펴냈다. 필자는 러시아 대은행을 두 주요 집단으로 나눈다. 가) “참여제도” 아래서 영업하는 은행과 나) “독립” 은행이다. 그런데 그는 “독립”을 제멋대로 외국 은행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이해한다. 첫째 집단을 필자는 다시 세 하위 집단, 곧 1) 독일의 참여, 2) 영국의 참여, 3) 프랑스의 참여로 나누는데, 해당 국적을 가진 외국 거대 은행의 “참여”와 지배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필자는 은행의 자본을 “생산적으로” 투자되는 자본(상업과 산업에)과 “투기적으로” 투자되는 자본(거래소 업무와 금융 업무에)으로 나눈다. 그는 소부르주아적 개량주의자다운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첫째 종류의 투자를 둘째 종류의 투자와 갈라놓고 둘째 종류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자료는 다음과 같다.

은행의 자산(1913년 10~11월 보고서에 따름), 단위 100만 루블
러시아 은행 집단:투자된 자본
⏞
생산적으로투기적으로합계
가1) 4개 은행: 시베리아 상업은행, 러시아 은행, 국제은행, 할인은행…413.7859.11,272.8
가2) 2개 은행: 상공은행, 러시아·영국 은행…239.3169.1408.4
가3) 5개 은행: 러시아·아시아 은행, 페테르부르크 사립은행, 아조프·돈 은행, 모스크바 우니온 은행, 러시아·프랑스 상업은행…711.8661.21,373.0
‎(11개 은행) 소계 … 가)=1,364.81,689.43,054.2
나)8개 은행: 모스크바 상인은행, 볼가·카마 은행, 융커 상회, 페테르부르크 상업은행(구 바벨베르크), 모스크바 은행(구 랴부신스키), 모스크바 할인은행, 모스크바 상업은행, 모스크바 사립은행...504.2391.1895.3
‎(19개 은행) 총계 …1,869.02,080.53,949.5

이 자료에 따르면, 대은행들의 “활동” 자본 40억 루블 가까이 가운데 4분의 3 이상, 곧 30억 루블 이상이 사실상 외국 은행의 “자회사”인 은행들 몫이다. 그 외국 은행이란 무엇보다 파리의 은행(유명한 은행 삼총사인 “파리 연합은행”, “파리·네덜란드 은행”, “소시에테 제네랄”)과 베를린의 은행(특히 “도이체방크”와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이다. 러시아 최대의 두 은행인 “러시아 은행”(“러시아 대외무역은행”)과 “국제은행”(“페테르부르크 국제상업은행”)은 1906년부터 1912년까지 자본을 4,400만 루블에서 9,800만 루블로, 준비금을 1,500만 루블에서 3,900만 루블로 늘렸는데, “4분의 3을 독일 자본으로 영업하고” 있었다. 앞의 은행은 베를린 “도이체방크”의 “콘체른”에 속하고, 뒤의 은행은 베를린 “디스콘토게젤샤프트”의 콘체른에 속한다. 사람 좋은 아가트는 베를린 은행들이 주식의 과반을 손에 쥐고 있어서 러시아 주주들이 무력하다는 데 깊이 분개한다. 그리고 물론 자본을 수출하는 나라가 단물을 빨아먹는다. 예를 들어 베를린의 “도이체방크”는 시베리아 상업은행 주식을 베를린 시장에 내놓으면서 그것을 한 해 동안 자기 금고에 쥐고 있다가, 액면 100에 대해 193의 시세로, 곧 거의 두 배로 팔아 약 600만 루블의 이득을 “벌었다”. 힐퍼딩은 이런 이득을 “창업이득”이라고 불렀다.

필자는 페테르부르크 최대 은행들의 “힘” 전체를 82억 3,500만 루블, 거의 82억 5,000만 루블로 산정하고, 외국 은행의 “참여”, 더 정확히는 지배를 다음과 같이 나눈다. 프랑스 은행—55%, 영국 은행—10%, 독일 은행—35%. 필자의 계산에 따르면 이 82억 3,500만 루블의 기능자본 가운데 36억 8,700만 루블, 곧 40% 이상이 신디케이트들, 곧 프로두골, 프로다메트, 석유·야금·시멘트 산업의 신디케이트들에 돌아간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독점의 형성과 맞물려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이 러시아에서도 엄청난 걸음을 내디뎠다.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사실상의 독점을 누리는 금융자본은 회사 설립, 유가증권 발행, 국채 따위에서 막대한,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이윤을 거두어들여 금융과두제의 지배를 굳히고, 사회 전체에 독점자들에게 바칠 공물을 지운다. 다음은 힐퍼딩이 드는, 미국 트러스트의 “전횡”을 보여 주는 수많은 예 가운데 하나다. 1887년에 해브마이어는 총자본이 650만 달러인 작은 회사 15개를 합병해서 설탕 트러스트를 세웠다. 그런데 트러스트의 자본은 미국식 표현으로 “물을 타서” 5,000만 달러로 정해졌다. 이 “과대자본화”는 앞으로의 독점이윤을 미리 셈에 넣은 것이었다. 같은 미국의 철강 트러스트가 철광 토지를 점점 더 많이 사들이면서 앞으로의 독점이윤을 미리 셈에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실제로 설탕 트러스트는 독점가격을 정했고, 일곱 배로 “물을 탄” 자본에 대해 10%씩 배당할 수 있을 만큼, 곧 트러스트를 세울 때 실제로 납입된 자본에 대해서는 거의 70%를 배당할 수 있을 만큼 수입을 올렸다! 1909년에 트러스트의 자본은 9,000만 달러였다. 22년 동안 자본이 열 배 넘게 불어난 것이다.

프랑스에서 “금융과두제”의 지배(『프랑스의 금융과두제에 반대하여』는 1908년에 제5판이 나온 리시스의 유명한 책 제목이다)는 조금 달라진 형태를 띠었을 뿐이다. 4대 은행이 유가증권 발행에서 상대적 독점이 아니라 “절대적 독점”을 누린다. 사실상 이것은 “대은행 트러스트”다. 그리고 독점은 발행에서 독점이윤을 보장한다. 차관을 받을 때 돈을 빌리는 나라는 보통 총액의 90% 이상을 받지 못하고, 10%는 은행과 그 밖의 중개자들에게 돌아간다. 4억 프랑의 러청 차관에서 은행이 얻은 이윤은 8%, 8억 프랑의 러시아 차관(1904)에서는 10%, 6,250만 프랑의 모로코 차관(1904)에서는 18¾%였다. 영세한 고리대 자본에서 발전을 시작한 자본주의는 거대한 고리대 자본으로 발전을 마친다. 리시스는 “프랑스인은 유럽의 고리대금업자다”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이러한 변질 탓에 경제생활의 모든 조건이 깊은 변화를 겪는다. 인구, 산업, 상업, 해운이 정체해 있는데도 “나라”는 고리대로 부유해질 수 있다. “800만 프랑의 자본을 대표하는 50명이 4개 은행에 있는 20억 프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참여”제도도 같은 결과를 낳는다. 최대 은행 가운데 하나인 “소시에테 제네랄”(Société Générale)이 “자회사”인 “이집트 정제당 공장”의 사채 64,000장을 발행한다. 발행가는 150%, 곧 은행은 1루블에 50코페이카씩 챙긴다. 이 회사의 배당은 허구로 드러났고, “대중”은 9,000만~1억 프랑을 잃었다. “‘소시에테 제네랄’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이 ‘정제당 공장’의 이사였다.” 필자가 “프랑스 공화국은 금융 군주국이다”, “금융과두제의 완전한 지배. 금융과두제는 신문도 정부도 지배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54].

금융자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인 유가증권 발행은 수익성이 유달리 높아서 금융과두제의 발전과 강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일 잡지 《디 방크》는 “국내에는 외국 차관 발행을 중개하는 것만큼 높은 이윤을 대충이라도 가져다주는 장사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다[55].

“발행 업무만큼 높은 이윤을 가져다주는 은행 업무는 하나도 없다.” 《독일 경제학자》의 자료에 따르면 산업 기업의 증권 발행에서 얻은 이윤은 한 해 평균 다음과 같았다.

1895 — 38.6%
1896 — 36.1 〃
1897 — 66.7 〃
1898 — 67.7%
1899 — 66.9 〃
1900 — 55.2 〃

“1891~1900년의 10년 동안 독일 산업 증권의 발행에서 10억 마르크 이상을 ‘벌었다’.”[56]

산업 호황기에 금융자본의 이윤이 한없이 크다면, 불황기에는 작고 튼튼하지 못한 기업들이 망하고, 대은행들은 그런 기업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수익성 좋은 “건전화”와 “재편”에 “참여”한다. 손실을 내는 기업을 “건전화”할 때는 “주식자본을 줄인다. 곧 수익을 더 적은 자본에 분배하고 이후로는 그 줄어든 자본을 기준으로 수익을 계산한다. 또는 수익성이 0으로 떨어졌다면 새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이 새 자본은 수익성이 낮은 옛 자본과 합쳐져 이제 충분한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힐퍼딩은 이렇게 덧붙인다. “말이 난 김에 하자면, 이 모든 건전화와 재편은 은행에 이중의 의의를 지닌다. 첫째는 수익성 좋은 업무로서, 둘째는 이처럼 궁지에 몰린 회사들을 자기에게 종속시킬 좋은 기회로서다.”[57]

예를 들어 보자. 도르트문트의 광업 주식회사 “우니온”은 1872년에 설립되었다. 거의 4,000만 마르크의 주식자본이 발행되었고, 첫해에 12%의 배당이 나오자 시세는 170%까지 올랐다. 금융자본은 단물을 빨아먹고 고작 2,800만 마르크쯤 되는 푼돈을 벌었다. 이 회사를 설립할 때 주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독일 최대 은행인 저 “디스콘토게젤샤프트”였는데, 이 은행은 무사히 3억 마르크의 자본에 이르렀다. 그 뒤 “우니온”의 배당은 0으로 떨어진다. 주주들은 전부를 잃지 않으려고 자본의 “상각”, 곧 자본의 일부를 잃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거듭된 “건전화”의 결과로 30년 동안 “우니온” 회사의 장부에서 7,300만 마르크 이상이 사라진다. “현재 이 회사의 최초 주주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주식 액면가의 5%뿐이다.”[58]—그런데 은행들은 “건전화”를 할 때마다 계속 “벌어들였다”.

금융자본의 특히 수익성 높은 업무에는 빠르게 성장하는 대도시 근교의 토지 투기도 있다. 여기서는 은행의 독점이 지대의 독점, 교통로의 독점과 융합한다. 토지 가격의 상승, 토지를 쪼개어 유리하게 팔 가능성 따위는 무엇보다 시 중심부와 잘 연결된 교통로에 달려 있는데, 이 교통로는 참여제도와 이사 자리의 배분을 통해 바로 그 은행들과 얽혀 있는 대회사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디 방크》의 기고자로 토지 매매와 토지 저당 따위의 거래를 특별히 연구한 독일 저술가 L. 에슈베게가 “늪”이라고 부른 사태가 벌어진다. 교외 토지를 둘러싼 광적인 투기, 건설 회사들의 파산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베를린의 “보스바우 운트 크나우어” 회사는 “가장 견실하고 가장 큰” “도이체방크”(Deutsche Bank)를 통해 1억 마르크에 이르는 돈을 긁어모았다. 도이체방크는 물론 “참여”제도에 따라, 곧 몰래 뒤에서 움직였고, “고작” 1,200만 마르크를 잃고 빠져나갔다. 그다음으로는 거품 같은 건설 회사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소규모 업주와 노동자들의 몰락, 그리고 토지에 관한 증명서 발급과 건축 허가를 내주는 시의회의 권한을 손에 넣으려고 베를린의 “정직한” 경찰 및 행정 당국과 벌이는 사기 거래 따위가 이어진다[59].

유럽의 교수들과 선량한 부르주아들이 그토록 위선적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개탄하는 “미국식 풍속”은 금융자본의 시대에 들어 말 그대로 어느 나라의 어느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풍속이 되었다.

1914년 초 베를린에서는 “교통 트러스트”, 곧 베를린의 세 교통 기업, 즉 시내 전기철도와 전차 회사와 합승마차 회사 사이의 “이익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디 방크》는 이렇게 썼다. “합승마차 회사 주식의 과반수가 다른 두 교통 회사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 우리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런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통 사업을 통일적으로 규제해서 비용을 절감하고 결국 그 일부가 대중에게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는 말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 형성 중인 교통 트러스트 뒤에 은행들이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은행들은 마음만 먹으면 자기들이 독점한 교통로를 자기들의 토지 매매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다. 이런 추측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확인하려면, 이미 시내 전기철도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그 설립을 후원한 대은행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곧 이 교통 기업의 이익이 토지 매매의 이익과 얽혀 있었다. 사정은 이렇다. 이 철도의 동부 노선은 일정한 토지들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철도 건설이 확정되자 이 은행은 그 토지들을 팔아 자기와 몇몇 참여자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 주었다…”[60]

독점은 일단 형성되어 수십억을 굴리게 되면 정치 체제나 그 밖의 어떤 “세부 사항”과도 상관없이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스며든다. 독일 경제 문헌에서는 프랑스의 파나마 사건이나 미국의 정치적 부패를 손가락질하며 프로이센 관료의 청렴을 하인처럼 자화자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사실을 보면, 독일의 은행 업무를 다룬 부르주아 문헌조차 순수한 은행 업무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예를 들어 관리들이 은행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잦아지는 것을 두고 “은행으로 몰려가기”에 대해 써야 한다. “남몰래 베렌슈트라세의 따뜻한 자리를 노리고 있는 국가 관리의 청렴은 어떻게 되는가?”[61]—베렌슈트라세는 “도이체방크”가 있는 베를린의 거리다. 《디 방크》의 발행인 알프레트 란스부르크는 1909년에 「비잔틴주의의 경제적 의의」라는 글을 썼다. 무엇보다 빌헬름 2세의 팔레스타인 여행과 “이 여행의 직접적 결과인 바그다드 철도 건설, 우리의 모든 정치적 죄과를 합친 것보다 ‘포위’에 더 큰 책임이 있는 이 숙명적인 ‘독일 기업 정신의 위업’”[62]을 두고 쓴 글이다—(포위란 독일을 고립시키고 반독일 제국주의 동맹의 고리로 둘러싸려 한 에드워드 7세의 정책을 말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같은 잡지의 기고자 에슈베게는 1911년에 「금권정치와 관료」라는 글을 써서, 이를테면 독일 관리 펠커의 사례를 폭로했다. 펠커는 카르텔 위원회의 위원으로 정력적인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얼마 뒤 가장 큰 카르텔인 철강 신디케이트에서 수입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코 우연이 아닌 이러한 사례들 때문에 바로 이 부르주아 저술가는 “독일 헌법이 보장하는 경제적 자유는 경제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내용 없는 문구가 되었다”라고, 그리고 금권정치의 지배가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가장 폭넓은 정치적 자유조차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민족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줄 수 없다”라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63].

러시아에 대해서는 한 가지 예만 들기로 한다. 몇 해 전 모든 신문에 신용국 국장 다비도프가 국가 공직을 떠나 어느 대은행에 자리를 얻는데, 계약상 그 봉급이 몇 해 동안 100만 루블이 넘는 액수에 이르게 되어 있다는 소식이 실렸다. 신용국은 “국가의 모든 신용기관의 활동을 통합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기관이며, 수도의 은행들에 8억~10억 루블에 이르는 보조금을 내준다[64]— — —

자본에 대한 소유가 자본을 생산에 사용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 화폐자본이 산업자본 또는 생산자본과 분리되는 것, 화폐자본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 살아가는 금리생활자가 기업가와 자본 운용에 직접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은 자본주의 일반의 특징이다. 제국주의 또는 금융자본의 지배는 이 분리가 거대한 규모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다. 다른 모든 형태의 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우위는 금리생활자와 금융과두제가 지배적 지위에 선다는 것을 뜻하며, 금융 “힘”을 가진 소수의 국가가 다른 모든 국가에서 두드러져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이 어느 정도 규모로 진행되는지는 발행, 곧 온갖 종류의 유가증권 발행에 관한 통계 자료로 판단할 수 있다.

A. 네마르크[65]는 《국제통계연구소 회보》에 전 세계의 발행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하며 비교 가능한 자료를 발표했고, 이 자료는 그 뒤 경제 문헌에서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인용되었다. 다음은 40년 동안의 합계다.

10년 단위 발행 총액(10억 프랑)
1871~1880…76.1
1881~1890…64.5
1891~1900…100.4
1901~1910…197.8

1870년대에는 특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관련된 차관과 그 뒤 독일에 찾아온 창업 열풍 시대 때문에 전 세계 발행 총액이 늘어났다.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는 증가가 비교적 그리 빠르지 않으며, 20세기의 첫 10년에 와서야 증가가 엄청나서 10년 사이에 거의 두 배가 된다. 따라서 20세기 초는 우리가 이미 이야기한 독점(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의 성장이라는 점에서뿐 아니라 금융자본의 성장이라는 점에서도 전환의 시기다.

네마르크는 1910년 세계의 유가증권 총액을 약 8,150억 프랑으로 산정한다. 중복을 대략 빼고 나서 그는 이 액수를 5,750억~6,000억 프랑으로 줄인다. 다음은 나라별 분포다(6,000억 프랑으로 잡는다).

1910년 유가증권 총액(10억 프랑)
영국 …142479
미국 …132
프랑스 …110
독일 …95
러시아 …31
오스트리아-헝가리 …24
이탈리아 …14
일본 …12
네덜란드 …12.5
벨기에 …7.5
에스파냐 …7.5
스위스 …6.25
덴마크 …3.75
스웨덴, 노르웨이, 루마니아 …2.5
합계 …600

이 자료에서 곧바로 알 수 있듯이, 대략 1,000억에서 1,500억 프랑의 유가증권을 가진 가장 부유한 네 자본주의 나라가 뚜렷하게 두드러진다. 이 네 나라 가운데 두 나라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앞으로 보겠지만 식민지를 가장 많이 가진 자본주의 나라인 영국과 프랑스다. 다른 두 나라는 발전 속도와 생산에서 자본주의적 독점이 퍼진 정도로 보아 앞선 자본주의 나라인 미국과 독일이다. 이 네 나라는 모두 합쳐 4,790억 프랑, 곧 세계 금융자본의 거의 80%를 가지고 있다. 나머지 세계는 거의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이 나라들—국제적 은행가들, 세계 금융자본의 이 네 “기둥”—의 채무자이자 공납자 노릇을 한다.

금융자본이 국제적 종속과 연계의 그물을 만들어 내는 데 자본수출이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IV. 자본수출

자유경쟁이 완전히 지배하던 옛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수출이 전형적이었다. 독점이 지배하는 최신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수출이 전형적인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노동력마저 상품이 되는, 가장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른 상품생산이다. 국내 교환은 물론이고 특히 국제 교환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특징적인 표지이다. 개별 기업, 개별 산업 부문, 개별 나라의 발전이 불균등하고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자본주의 아래서 피할 수 없다. 처음에는 영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자본주의 나라가 되었고, 19세기 중엽에는 자유무역을 도입하면서 “전 세계의 공장”, 곧 모든 나라에 공업 제품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그 나라들에게서 원료를 공급받는 나라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 독점은 이미 19세기 마지막 4분의 1에 무너졌다. 다른 여러 나라가 “보호” 관세로 자신을 지키면서 독자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문턱에서 우리는 다른 종류의 독점이 형성되는 것을 본다. 첫째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모든 나라에서 생겨난 자본가들의 독점적 동맹이고, 둘째는 자본축적이 거대한 규모에 이른 소수 최부국의 독점적 지위이다. 선진국들에서 엄청난 “과잉자본”이 생겨났다.

물론 자본주의가, 지금 어디서나 공업에 비해 끔찍하게 뒤처져 있는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현기증 나는 기술 진보에도 어디서나 반쯤 굶주리고 빈곤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대중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과잉자본이란 말은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 비판가들은 걸핏하면 이런 “논거”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발전의 불균등도, 대중의 반기아 상태의 생활수준도 이 생산양식의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조건이자 전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로 남아 있는 한, 과잉자본은 그 나라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쓰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떨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잉자본은 해외로, 후진국들로 자본을 수출하여 이윤을 높이는 데 쓰인다. 이 후진국들에서는 대개 이윤이 높다. 자본이 적고, 땅값이 비교적 싸며, 임금이 낮고, 원료가 싸기 때문이다. 자본수출이 가능해지는 것은 여러 후진국이 이미 세계 자본주의의 순환에 끌려 들어와, 주요 철도 간선이 놓였거나 놓이기 시작했고, 공업 발전의 기초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수출이 필요해지는 것은 소수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성숙”하여, (농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대중이 빈곤한 조건에서) 자본이 “수익성 있게” 투자될 분야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다음은 세 주요 나라가 해외에 투자한 자본의 규모에 관한 대략적인 자료이다[66].

해외 투자 자본
연도(단위 10억 프랑)
영국프랑스독일
1862 …3.6——
1872 …1510 (1869)—
1882 …2215 (1880)?
1893 …4220 (1890)?
1902 …6227~3712.5
1914 …75~1006044

여기서 우리는 자본수출이 20세기 초에 와서야 거대하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전에 세 주요 나라가 해외에 투자한 자본은 1,750억~2,000억 프랑에 이르렀다. 이 금액에서 나오는 소득은 5%라는 낮은 이율로 잡아도 해마다 80억~100억 프랑에 이를 것이다. 세계 대다수 민족과 나라를 제국주의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한 줌의 최부국이 자본주의적으로 기생하는 탄탄한 토대가 아닌가!

해외에 투자된 이 자본이 여러 나라 사이에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 투자되어 있는지 하는 물음에는 대략적인 답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답으로도 현대 제국주의의 몇 가지 일반적인 상호관계와 연관을 밝힐 수 있다.

해외 자본이 분포된 지역(대략, 1910년 무렵)
영국프랑스독일합계
(10억 마르크)
유럽 …4231845
아메리카 …3741051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298744
‎총계 …703535140

영국에서는 식민지 영토가 첫자리를 차지한다. 영국의 식민지는 아시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아메리카에서도(예컨대 캐나다) 매우 크다. 여기서는 거대한 자본수출이 거대한 식민지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식민지가 제국주의에 대해 갖는 의의는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프랑스는 사정이 다르다. 여기서는 해외 자본이 주로 유럽에, 무엇보다도 러시아에(적어도 100억 프랑) 투자되어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주로 대부자본, 곧 국채이지 산업 기업에 투자되는 자본이 아니다. 영국의 식민지 제국주의와 달리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고리대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독일은 세 번째 변종이다. 독일의 식민지는 크지 않으며, 독일이 해외에 투자하는 자본은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가장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자본수출은 자본이 흘러 들어가는 나라들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쳐 그 발전을 매우 빠르게 한다. 그러므로 자본수출이 어느 정도까지 수출국의 발전을 얼마간 정체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더 넓고 깊게 발전하는 것을 대가로 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자본을 수출하는 나라들에는 거의 언제나 일정한 “이득”을 얻을 기회가 생기는데, 그 이득의 성격은 금융자본과 독점의 시대가 지닌 독특함을 잘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베를린의 잡지 《디 방크》는 1913년 10월에 이렇게 썼다.

“얼마 전부터 국제 자본시장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붓이 그려 낼 만한 희극이 벌어지고 있다. 에스파냐에서 발칸까지,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 브라질, 중국까지 수많은 외국 국가가 드러내 놓고 혹은 은밀하게 큰 금융시장에 나서서, 때로는 극도로 집요하게 차관을 요구한다. 금융시장은 지금 형편이 그리 좋지 않고, 정치적 전망도 밝지 않다. 그런데도 어느 금융시장도 차관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웃이 먼저 차관에 응하고 그와 함께 일정한 반대급부를 챙겨 갈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국제 거래에서는 거의 언제나 채권자에게 무언가가 떨어진다. 통상조약에서의 양보, 석탄 기지, 항만 건설, 짭짤한 이권, 대포 주문 같은 것이다.”[67]

금융자본은 독점의 시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독점은 어디서나 독점의 원리를 함께 들여온다. 열린 시장에서의 경쟁 대신 유리한 거래를 위해 “연줄”을 이용하는 일이 들어선다. 가장 흔한 일은 차관의 일부를 채권국의 생산물, 특히 무기나 선박 등을 사는 데 쓰라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프랑스는 지난 20년 동안(1890~1910년) 이 수단을 매우 자주 썼다. 해외로의 자본수출은 해외로의 상품수출을 장려하는 수단이 된다. 이때 특히 큰 기업들 사이의 거래는, 실더[68]가 “부드럽게” 표현했듯이, “매수의 경계선”에 놓일 정도이다. 독일의 크루프, 프랑스의 슈네데르, 영국의 암스트롱은 거대 은행 및 정부와 긴밀히 연결된 그런 회사들의 본보기로, 차관을 맺을 때 이들을 “비켜 가기”란 쉽지 않다.

프랑스는 러시아에 돈을 빌려주면서 1905년 9월 16일의 통상조약에서 러시아를 “죄어”, 1917년까지 유효한 일정한 양보를 받아 냈다. 1911년 8월 19일 일본과 맺은 통상조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일곱 달의 중단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관세 전쟁은, 부분적으로는 세르비아에 군수품을 공급하는 일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경쟁 때문에 일어났다. 폴 데샤넬은 1912년 1월 하원에서, 프랑스 회사들이 1908~1911년에 세르비아에 4,500만 프랑어치의 군수 물자를 공급했다고 밝혔다.

상파울루(브라질)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영사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브라질 철도 건설은 대부분 프랑스, 벨기에, 영국, 독일 자본으로 이루어진다. 이 나라들은 철도 건설과 관련된 금융 거래에서 철도 건설 자재의 납품권을 자기 몫으로 정해 둔다.”

이처럼 금융자본은 말 그대로 세계 모든 나라에 그물을 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식민지에 세워진 은행들과 그 지점들이 큰 역할을 한다. 독일 제국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특히 “성공적으로” 자기 몫을 확보한 “오래된” 식민지 나라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1904년에 영국은 지점 2,279개를 거느린 식민지 은행 50개를 가지고 있었고(1910년에는 지점 5,449개를 거느린 72개), 프랑스는 지점 136개를 거느린 20개, 네덜란드는 지점 68개를 거느린 16개를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은 지점 70개를 거느린 은행 “고작” 13개를 가지고 있었다[69]. 미국 자본가들은 또 그들대로 영국과 독일 자본가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1915년에 이렇게 불평했다. “남아메리카에서 독일 은행 5개는 지점 40개를, 영국 은행 5개는 지점 70개를 가지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지난 25년 동안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에 약 4빌리언(곧 40억) 달러를 투자했고, 그 결과 이 세 나라 무역 전체의 46%를 차지하고 있다.”[70]

자본을 수출하는 나라들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세계를 저희끼리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금융자본은 직접적인 세계분할로도 이어졌다.

V. 자본가 동맹들 사이의 세계분할

자본가들의 독점 동맹인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는 무엇보다 먼저 국내시장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지며, 그 나라의 생산을 어느 정도 완전하게 제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국내시장은 반드시 해외시장과 이어져 있다.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시장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자본수출이 늘어나고 가장 큰 독점 동맹들의 해외 연계와 식민지 연계, “세력권”이 온갖 방식으로 넓어짐에 따라, 일은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의 세계적 협정으로, 국제 카르텔의 형성으로 다가갔다.

이것은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과 생산이 집중되는 새로운 단계이며, 앞선 단계들보다 비할 데 없이 높은 단계이다. 이 초독점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살펴보자.

전기 산업은 최신 기술의 성과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산업이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자본주의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산업이다. 그리고 이 산업은 새로운 자본주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앞선 두 나라, 미국과 독일에서 가장 크게 발전했다. 독일에서는 이 부문의 집중이 커지는 데 1900년 공황이 특히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 무렵 이미 산업과 꽤 깊이 유착해 있던 은행들은 이 공황 동안 비교적 작은 기업들이 몰락하고 큰 기업들에 삼켜지는 과정을 크게 앞당기고 심화했다. 야이델스는 이렇게 쓴다. “은행들은 바로 도움이 가장 절실한 기업들에게서 도움의 손길을 거두어들였고, 그리하여 은행과 충분히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 회사들에 처음에는 미친 듯한 호황을, 다음에는 절망적인 붕괴를 불러왔다”[71].

그 결과 1900년 이후 집중은 거인의 걸음으로 나아갔다. 1900년까지 전기 산업에는 여덟 개 또는 일곱 개의 “그룹”이 있었다. 그룹마다 여러 회사로 이루어져 있었고(모두 28개였다), 그룹마다 뒤에 2개에서 11개의 은행이 버티고 있었다. 1908~1912년에 이르러 이 그룹들은 모두 둘로, 또는 하나로 합쳐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전기 산업의 그룹:
1900년까지:펠텐
운트 기욤
라마이어우니온
A. E. G.
지멘스 운트
할스케
슈커트
상회
베르크만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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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텐
운트 라마이어
A. E. G.
(일반
전기
회사)
지멘스 운트
할스케-
슈커트
베르크만1900년
에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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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까지:A. E. G. (일반 전기
회사)
지멘스 운트 할스케-
슈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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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긴밀한 “협력”)

이렇게 자라난 저 유명한 A. E. G.(일반전기회사)는 (“참여”제도를 통해) 175~200개 회사를 지배하며, 모두 합쳐 약 15억 마르크의 자본을 주무른다. 해외에 직접 둔 대표 기관만 34곳이고 그 가운데 12곳이 주식회사인데, 이것들이 10개가 넘는 나라에 있다. 이미 1904년에 독일 전기 산업이 해외에 투자한 자본은 2억 3,300만 마르크이고, 그 가운데 6,200만 마르크가 러시아에 있다고 추산되었다. “일반전기회사”가 거대한 “결합” 기업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회사는 케이블과 절연체에서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제품을 생산하며, 제조 회사만 해도 16개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집중은 미국의 집중 과정을 이루는 한 부분이기도 했다. 일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General Electric Co)
⏞
톰슨-휴스턴 회사가 유럽을 위해 회사를 세운다에디슨 회사가 유럽을 위해 회사를 세운다: “프랑스 에디슨 회사”, 이 회사가 독일 회사에 특허를 넘겨준다

독일
“우니온 전기회사”“일반전기회사”(A. E.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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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전기회사”(A. E. G.)

이리하여 두 전기 “열강”이 생겨났다. 하이니히는 「전기 트러스트의 길」이라는 글에서 “지구상에 이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전기 회사는 달리 없다”고 쓴다. 두 “트러스트”의 거래 규모와 기업 크기는 다음 숫자들로 어느 정도, 물론 전혀 완전하지는 않지만, 짐작할 수 있다.

상품 거래액
(백만 마르크)
종업원 수순이윤
(백만 마르크)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 E. C.) …1907:25228,00035.4
1910:29832,00045.6
독일: “일반전기회사”(A. E. G.) …1907:21630,70014.5
1911:36260,80021.7

그리고 마침내 1907년에 미국 트러스트와 독일 트러스트 사이에 세계를 나누는 협정이 맺어졌다. 경쟁은 없어진다. “제너럴 일렉트릭”(G. E. C.)은 미국과 캐나다를 “받고”, “일반전기회사”(A. E. G.)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터키, 발칸반도가 “돌아간다”. 새로운 산업 부문과 형식상 아직 분할되지 않은 “새로운” 나라들로 파고드는 “자회사”들에 관해서는 따로 협정이 — 물론 비밀리에 — 맺어졌다. 발명과 실험 결과를 서로 교환하기로 정했다[72].

수십억의 자본을 주무르고 세계 곳곳에 “지점”, 대표 기관, 대리점, 연줄 등을 둔 이 사실상 단일한 세계 트러스트에 맞서 경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두 강력한 트러스트 사이의 세계분할은, 힘 관계가 — 발전의 불균등, 전쟁, 붕괴 따위로 말미암아 — 바뀐다면 물론 재분할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재분할의 시도, 재분할을 위한 투쟁을 보여 주는 교훈적인 예가 등유 산업이다.

야이델스는 1905년에 이렇게 썼다. “세계 등유 시장은 지금도 두 거대 금융 그룹, 곧 록펠러의 미국 ‘등유 트러스트’(Standard Oil C-y)와 러시아 바쿠 석유의 주인인 로스차일드와 노벨 사이에 나뉘어 있다. 두 그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벌써 몇 해째 다섯 적이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73]. 그 다섯은 1) 미국 유전의 고갈, 2) 바쿠에 있는 경쟁 회사인 만타셰프 상사, 3) 오스트리아의 유전과 4) 루마니아의 유전, 5) 해외 유전, 특히 네덜란드 식민지의 유전(영국 자본과도 연결된 가장 부유한 회사들인 새뮤얼 상사와 셸 상사)이다. 마지막 세 계열의 기업들은 가장 큰 은행인 “도이체방크”을 필두로 한 독일 대은행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은행들은 “자기” 거점을 갖기 위해 이를테면 루마니아에서 독자적으로, 계획적으로 등유 산업을 발전시켰다. 1907년 루마니아 등유 산업에 들어온 외국 자본은 1억 8,500만 프랑으로 추산되었고, 그 가운데 독일 자본이 7,400만 프랑이었다[74].

투쟁이 시작되었다. 경제학 문헌에서도 그대로 “세계 분배”를 위한 투쟁이라고 부르는 투쟁이다. 한편에서는 록펠러의 “등유 트러스트”가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네덜란드 본토에 “자회사”를 세우고 네덜란드령 인도의 유전을 사들였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주적인 네덜란드-영국계 “셸” 트러스트에 타격을 주려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도이체방크”과 그 밖의 베를린 은행들이 루마니아를 “자기 몫으로” “지켜 내고”, 루마니아를 러시아와 묶어 록펠러에 맞서려 했다. 그런데 록펠러는 헤아릴 수 없이 더 큰 자본을 가졌고, 등유를 실어 날라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훌륭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투쟁은 “도이체방크”의 완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1907년에 그렇게 끝났다. “도이체방크”에게 남은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수백만의 손실을 보며 자신의 “등유 이권”을 청산하든지, 아니면 굴복하든지. 은행은 뒤의 길을 골랐고, “등유 트러스트”와 “도이체방크”에 매우 불리한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도이체방크”은 “미국의 이익에 불리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의무를 졌다. 다만 독일에서 등유 국가독점법이 통과되면 협정이 효력을 잃는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러자 “등유 희극”이 시작된다. 독일의 금융왕 가운데 하나이자 “도이체방크”의 이사인 폰 그비너가 자신의 개인 비서 슈타우스를 내세워 등유 독점을 지지하는 선동을 벌인다. 베를린 최대 은행의 거대한 기구 전체와 폭넓은 “연줄”이 모두 움직이고, 신문들은 미국 트러스트의 “멍에”에 맞서는 “애국적” 외침으로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었으며, 제국의회는 1911년 3월 15일 정부에 등유 독점 법안을 마련하라고 요청하는 결의를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한다. 정부는 이 “인기 있는” 생각에 달려들었고, 미국 거래 상대를 속이고 국가독점을 이용해 제 사정을 바로잡으려던 “도이체방크”의 게임은 이긴 것처럼 보였다. 독일의 등유왕들은 벌써 러시아 제당업자들의 이윤에 못지않은 막대한 이윤을 기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첫째, 독일 대은행들이 노획물 분배를 놓고 서로 다투었고, “디스콘토게젤샤프트”가 “도이체방크”의 사리사욕을 폭로했다. 둘째, 정부가 록펠러와 싸우기를 두려워했다. 록펠러를 빼고 독일이 등유를 구할 수 있을지 몹시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루마니아의 생산력은 크지 않다). 셋째, 독일의 전쟁 준비를 위한 1913년의 10억 마르크 예산이 들이닥쳤다. 독점 법안은 미루어졌다. 록펠러의 “등유 트러스트”가 당분간 투쟁의 승자로 남았다.

베를린의 잡지 《디 방크》는 이 일을 두고, 독일이 “등유 트러스트”와 싸울 수 있는 길은 전류 독점을 도입하고 수력을 값싼 전기로 바꾸는 것뿐이라고 썼다. 그러나 잡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전기 독점은 생산자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올 것이다. 바로 전기 산업에 다음번 대붕괴가 문 앞에 닥쳤을 때, 그리고 지금 전기 산업의 민간 ‘콘체른’들이 곳곳에 짓고 있으며 이 ‘콘체른’들이 벌써 도시와 국가 등으로부터 개별 독점권을 따내고 있는 그 거대하고 값비싼 발전소들이 이윤을 내며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올 것이다. 그때에는 수력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력을 국가 비용으로 값싼 전기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고, 또다시 ‘국가가 통제하는 민간 독점’에 넘겨야 할 것이다. 민간 산업이 이미 여러 거래를 맺고 큰 보상을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칼리 독점이 그러했고, 등유 독점이 그러하며, 전기 독점도 그러할 것이다. 아름다운 원칙에 눈이 먼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도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되었다. 독일에서 독점은 소비자에게 이익을 주거나 하다못해 기업가 이윤의 일부라도 국가에 돌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적도, 그런 결과를 낳은 적도 한 번도 없었으며, 오직 파산 직전에 이른 민간 산업을 국가 비용으로 회생시키는 데에만 쓰였다는 것을”[75].

독일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이처럼 귀중한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금융자본의 시대에 민간 독점과 국가독점이 어떻게 하나로 얽히는지, 그리고 둘 다 실제로는 가장 큰 독점자본가들 사이에서 세계분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제국주의 투쟁의 개별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본다.

상선 해운에서도 집중이 엄청나게 커져 세계분할에 이르렀다. 독일에서는 두 거대 회사, “함부르크-아메리카”와 “북독일 로이드”가 두드러졌다. 두 회사 모두 자본이 각각 2억 마르크(주식과 채권)이고, 보유한 기선의 값어치는 1억 8,500만~1억 8,900만 마르크이다. 다른 한편 미국에서는 1903년 1월 1일 이른바 모건 트러스트인 “국제 해상무역 회사”가 생겨났다. 이 회사는 미국과 영국의 해운 회사 9개를 묶었고, 1억 2,000만 달러(4억 8,000만 마르크)의 자본을 갖고 있었다. 이미 1903년에 독일의 두 거인과 이 미국-영국 트러스트 사이에 이윤 분할과 함께 세계를 분할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독일 회사들은 영국과 미국 사이의 운송에서 경쟁을 포기했다. 어느 항구가 누구에게 “맡겨지는지” 정확히 정했고, 공동 감독위원회 따위를 만들었다. 협정은 20년 기한으로 맺어졌고, 전쟁이 나면 효력을 잃는다는 앞날을 내다본 단서가 붙어 있었다[76].

국제 레일 카르텔이 형성된 역사도 매우 교훈적이다. 영국, 벨기에, 독일의 레일 공장들이 이런 카르텔을 세우려고 처음 시도한 것은 이미 1884년, 산업 경기가 극심하게 침체했을 때였다. 이들은 협정에 참가한 나라들의 국내시장에서는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해외시장은 영국 66%, 독일 27%, 벨기에 7%의 할당률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인도는 통째로 영국에 맡겨졌다. 협정에 들어오지 않은 영국 회사 하나를 상대로는 공동 전쟁을 벌였고, 그 비용은 공동 판매액의 일정 비율로 충당했다. 그러나 1886년 영국 회사 두 곳이 동맹에서 빠져나가자 동맹은 무너졌다. 특징적인 것은, 그 뒤에 이어진 산업 호황기 동안에는 협정을 맺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1904년 초에 독일에서 철강 신디케이트가 세워졌다. 1904년 11월에 국제 레일 카르텔이 영국 53.5%, 독일 28.83%, 벨기에 17.67%의 할당률로 되살아났다. 그 뒤 프랑스가 첫해, 둘째 해, 셋째 해에 각각 4.8%, 5.8%, 6.4%의 할당률로, 100%를 넘는 몫으로, 곧 합계 104.8% 등으로 가입했다. 1905년에는 미국의 “철강 트러스트”(“철강 회사”)가, 이어서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가 가입했다. 포겔슈타인은 1910년에 이렇게 썼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의 분배는 끝났다. 그리고 대소비자들, 무엇보다 국유 철도들은 — 세계가 이미 분배되었고 그들의 이익은 고려되지 않았으므로 — 시인처럼 유피테르의 하늘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77].

1909년에 세워져 독일, 벨기에,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의 다섯 공장 그룹 사이에 생산량을 정확히 배분한 국제 아연 신디케이트도 언급해 두자. 그리고 화약 국제 트러스트도 있다. 리프만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독일의 모든 폭약 공장들 사이의 아주 현대적인 긴밀한 동맹으로서, 이 동맹은 그 뒤 마찬가지로 조직된 프랑스와 미국의 다이너마이트 공장들과 함께, 말하자면 온 세계를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78].

리프만은 1897년에 독일이 참가한 국제 카르텔을 모두 약 40개로 셌는데, 1910년에 이르면 이미 약 100개였다.

일부 부르주아 저술가들은(이제 이들에게 K. 카우츠키도 합류했다. 그는 이를테면 1909년의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완전히 배반했다) 국제 카르텔이 자본의 국제화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현상의 하나이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민족들 사이의 평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의견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터무니없고, 실천적으로는 궤변이며 가장 나쁜 기회주의를 정직하지 못하게 변호하는 수단이다. 국제 카르텔은 오늘날 자본주의 독점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지, 그리고 자본가 동맹들 사이의 투쟁이 무엇을 둘러싸고 벌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이 마지막 사정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만이 지금 벌어지는 일의 역사적·경제적 의미를 밝혀 준다. 왜냐하면 투쟁의 형태는 비교적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여러 원인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늘 바뀌지만, 투쟁의 본질, 그 계급적 내용은 계급이 존재하는 한 그야말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독일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서는 — 카우츠키는 이론적 논의에서 사실상 이 독일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 현대 경제 투쟁의 내용(세계분할)을 흐리고 이 투쟁의 이런저런 형태를 부각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카우츠키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물론 문제는 독일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세계 부르주아지이다. 자본가들이 세계를 나누는 것은 그들이 유달리 악독해서가 아니라, 이미 도달한 집중의 단계가 이윤을 얻기 위해 이 길로 들어서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를 “자본에 따라”, “힘에 따라” 나눈다. 상품생산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다른 분할 방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힘은 경제적·정치적 발전에 따라 바뀐다.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려면 힘의 변화로 어떤 문제가 결판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변화가 “순전히” 경제적인 것인지 경제 외적인 것(이를테면 군사적인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자본주의의 최신 시대에 대한 기본 견해를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자본가 동맹들 사이의 투쟁과 거래의 내용 문제를 투쟁과 거래의 형태 문제(오늘은 평화적이고 내일은 비평화적이며 모레는 다시 비평화적인 형태)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궤변가의 역할로 떨어지는 것이다.

최신 자본주의 시대는 자본가 동맹들 사이에 세계의 경제적 분할을 토대로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고, 이와 나란히, 이와 연관되어 정치적 동맹인 국가들 사이에는 세계의 영토적 분할, 식민지 쟁탈전, “경제적 영토를 위한 투쟁”을 토대로 일정한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VI. 열강 사이의 세계분할

지리학자 A. 주판은 “유럽 식민지의 영토적 발전”을 다룬 책[79]에서 19세기 말 이 발전을 다음과 같이 짧게 결산한다.

유럽 식민 열강(미국 포함)에 속한 토지 면적의 비율:
18761900증가분
아프리카 …10.8 %90.4 %+79.6 %
폴리네시아 …56.8 %98.9 %+42.1 %
아시아 …51.5 %56.6 %+5.1 %
오스트레일리아 …100.0 %100.0 %—
아메리카 …27.5 %27.2 %−0.3 %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특징은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의 분할이다.” 아시아와 아메리카에는 아직 차지되지 않은 땅, 곧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땅이 이제 없으므로, 주판의 결론을 넓혀서 우리가 다루는 이 시기의 특징은 지구의 최종적 분할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최종적이라는 것은 재분할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재분할은 가능하고 불가피하다. 그것은 자본주의 나라들의 식민정책이 우리 행성의 차지되지 않은 땅을 점령하는 일을 끝마쳤다는 뜻이다. 세계는 처음으로 이미 나누어진 상태가 되었고, 그러므로 앞으로 남은 것은 오직 재분할, 곧 주인 없는 상태에서 “주인”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소유자”에게서 다른 소유자에게로 넘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적 식민정책의 독특한 시대를 겪고 있으며, 이 시대는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 단계”, 곧 금융자본과 아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따라서 이 시대가 이전 시대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지금의 사정이 어떠한지를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사실 자료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맨 먼저 두 가지 사실 문제가 떠오른다. 바로 금융자본의 시대에 식민정책이 강화되고 식민지 쟁탈전이 격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점에서 세계는 정확히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의 저술가 모리스는 식민의 역사를 다룬 책[80]에서 19세기의 여러 시기에 걸친 영국, 프랑스, 독일의 식민지 영유 규모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 보려 한다. 그가 얻은 결과를 줄여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식민지 영유 규모
연도영국프랑스독일
면적
(백만 제곱
마일)
인구
(백만)
면적
(백만 제곱
마일)
인구
(백만)
면적
(백만 제곱
마일)
인구
(백만)
1815~1830?126.40.020.5——
18602.5145.10.23.4——
18807.7267.90.77.5——
18999.3309.93.756.41.014.7

영국에서 식민지 점령이 엄청나게 늘어난 시기는 1860~1880년이고,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에도 매우 크게 늘어났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바로 이 20년이 그런 시기다. 우리는 앞에서 독점 이전 자본주의, 곧 자유경쟁이 우세한 자본주의가 가장 높이 발전한 시기가 1860년대와 1870년대라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 시기 뒤에 식민지 점령의 거대한 “고조”가 시작되고, 세계의 영토 분할을 둘러싼 투쟁이 극도로 격화된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금융자본으로 이행한 것이 세계분할을 둘러싼 투쟁의 격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홉슨은 제국주의에 관한 저작에서 1884~1900년을 유럽 주요 국가들이 “팽창”(영토 확장)을 강화한 시대로 따로 떼어 낸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이 기간에 영국은 인구 5,700만의 370만 제곱마일을 얻었다. 프랑스는 인구 3,650만의 360만 제곱마일, 독일은 1,470만의 100만 제곱마일, 벨기에는 3,000만의 90만 제곱마일, 포르투갈은 900만의 80만 제곱마일을 얻었다. 19세기 말, 특히 1880년대부터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쫓아 경쟁한 것은 외교사와 대외정책사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에서 자유경쟁이 가장 번성한 시대인 1840~1860년에 영국의 지도적 부르주아 정치가들은 식민정책에 반대했고, 식민지의 해방, 곧 식민지가 영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불가피하고 유익한 일로 여겼다. M. 베어는 1898년에 발표한 “최근의 영국 제국주의”에 관한 글[81]에서, 대체로 말해 제국주의 쪽으로 기울어 있던 영국 정치가 디즈레일리 같은 사람조차 1852년에 이렇게 말했다고 지적한다. “식민지, 이것은 우리 목에 걸린 맷돌이다.” 그런데 19세기 말 영국에서 시대의 영웅은 세실 로즈와 조지프 체임벌린이었다. 이들은 공공연히 제국주의를 설교하고 제국주의 정책을 더할 나위 없이 파렴치하게 실행했다!

흥미로운 것은, 최신 제국주의의 이른바 순수하게 경제적인 뿌리와 사회정치적인 뿌리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영국 부르주아지의 이 지도적 정치가들에게는 그때 이미 분명했다는 점이다. 체임벌린은 제국주의를 “참되고 현명하며 경제적인 정책”이라고 설교하면서, 특히 영국이 지금 세계시장에서 독일, 미국, 벨기에와 맞닥뜨리고 있는 경쟁을 지적했다. 구원은 독점에 있다.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를 세우던 자본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구원은 독점에 있다. 세계에서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부분을 서둘러 차지하려던 부르주아지의 정치 지도자들도 이렇게 맞장구쳤다. 그리고 세실 로즈의 절친한 친구였던 언론인 스테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로즈는 1895년에 자기의 제국주의 사상에 관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제 런던의 이스트엔드(노동자 지구)에 가서 실업자 집회 하나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빵을, 빵을!’ 하는 외침뿐인 거친 연설들을 듣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며 본 것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제국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전보다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소중히 품고 있는 생각은 사회문제의 해결입니다. 곧, 연합왕국의 주민 4,000만 명을 살인적인 내전에서 구하려면, 우리 식민 정치가들은 과잉인구를 이주시키고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새로운 판로를 얻기 위해 새로운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내가 늘 말해 왔듯이 제국은 밥통의 문제입니다. 내전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82]

1895년에 백만장자이자 금융왕이며 영국-보어 전쟁의 주범인 세실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의 제국주의 옹호는 조금 거칠고 파렴치할 뿐, 본질에서는 마슬로프, 쥐데쿰, 포트레소프, 다비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등등 여러 나리의 “이론”과 다를 것이 없다. 세실 로즈는 조금 더 정직한 사회배외주의자였을 뿐이다…

세계의 영토 분할과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점에서 일어난 변화를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그려 보이기 위해, 주판이 앞에서 말한 저작에서 세계 모든 열강의 식민지 영유에 관해 정리한 자료를 이용하겠다. 주판은 1876년과 1900년을 잡는다. 우리는 1876년과 1914년을 잡고, 주판의 수치를 휘브너의 『지리통계표』에 따른 더 새로운 수치로 바꾸겠다. 1876년은 아주 잘 고른 기준점이다. 대체로 보아 바로 이 무렵에 서유럽 자본주의의 독점 이전 단계의 발전이 끝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판은 식민지만 다룬다. 우리는 세계분할의 전체 그림을 보여 주기 위해 비식민지 나라들과 반식민지에 관한 자료도 간단하게 덧붙이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반식민지에는 페르시아, 중국, 터키를 넣는다. 이 가운데 첫째 나라는 이미 거의 완전히 식민지가 되었고, 둘째와 셋째는 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열강의 식민지 영유: (백만 제곱킬로미터, 백만 명)
식민지본국합계
1876191419141914
제곱킬로미터인구제곱킬로미터인구제곱킬로미터인구제곱킬로미터인구
영국 …22.5251.933.5393.50.346.533.8440.0
러시아 …17.015.917.433.25.4136.222.8169.4
프랑스 …0.96.010.655.50.539.611.195.1
독일 …——2.912.30.564.93.477.2
미국 …——0.39.79.497.09.7106.7
일본 …——0.319.20.453.00.772.2
6대 열강 합계 …40.4273.865.0523.416.5437.281.5960.6
그 밖의 나라들(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9.945.3
반식민지(페르시아, 중국, 터키)…14.5361.2
그 밖의 나라들 …28.0289.9
전 세계 …133.91,657.0

여기서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에서 세계분할이 얼마나 “끝나” 있었는지를 똑똑히 본다. 1876년 이후 식민지 영유는 거대한 규모로 넓어졌다. 6대 열강의 경우 4,000만 제곱킬로미터에서 6,500만 제곱킬로미터로 1.5배 넘게 늘었다. 늘어난 2,500만 제곱킬로미터는 본국 면적(1,650만)의 1.5배이다. 세 열강은 1876년에 식민지가 전혀 없었고, 넷째 열강인 프랑스도 식민지가 거의 없었다. 1914년까지 이 네 열강은 1,410만 제곱킬로미터, 곧 유럽 면적의 대략 1.5배에 이르는 식민지를 얻었고, 그 인구는 거의 1억에 이른다. 식민지 영유가 넓어지는 데서 나타나는 불균등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면적과 인구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 독일, 일본을 비교하면, 프랑스는 독일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 거의 세 배나 많은 식민지(면적으로)를 얻었다. 그러나 금융자본의 규모로 보면, 우리가 다루는 시기 초에 프랑스는 아마 독일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도 몇 배나 부유했을 것이다. 식민지 영유의 규모에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조건 말고도, 그리고 그 경제적 조건을 토대로 하여, 지리적 조건 등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대공업, 교환, 금융자본의 압력을 받아 세계의 평준화, 곧 여러 나라의 경제 조건과 생활 조건의 평준화가 아무리 강하게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그 차이는 여전히 적지 않다. 앞에서 든 여섯 나라 가운데에서도 한편으로는 유례없이 빠르게 발전한 젊은 자본주의 나라들(미국, 독일, 일본)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에 앞의 나라들보다 훨씬 느리게 발전한, 자본주의 발전이 오래된 나라들(프랑스와 영국)이 보인다. 셋째로는 경제적으로 가장 뒤처진 나라(러시아)가 보인다. 이 나라에서는 최신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이전 관계의 유난히 촘촘한 그물에 이른바 휘감겨 있다.

우리는 열강의 식민지 영유 곁에 작은 나라들의 작은 식민지를 나란히 놓았다. 이 식민지들은 이를테면 앞으로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날 법한 식민지 “재분할”의 가장 가까운 대상이다. 이 작은 나라들은 대개 큰 나라들 사이에 이해의 대립, 마찰 따위가 있어서 노획물의 분배에 관한 합의가 방해받는 덕분에 겨우 자기 식민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반식민지” 국가로 말하자면, 이들은 자연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과도적 형태의 한 예이다. 금융자본은 모든 경제 관계와 모든 국제 관계에서 매우 큰 힘, 결정적인 힘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힘이어서, 정치적 독립을 완전히 누리는 국가들까지도 자기에게 종속시킬 수 있고 실제로 종속시킨다. 그 예는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금융자본에 가장 큰 “편의”와 가장 큰 이익을 주는 것은 종속되는 나라와 민족이 정치적 독립을 잃는 그런 종속이다. 반식민지 나라들은 이 점에서 “중간”으로서 전형적이다. 나머지 세계가 이미 분할된 금융자본의 시대에 이러한 반종속 나라들을 둘러싼 투쟁이 특히 격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식민정책과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 이전에도, 심지어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다. 노예제에 기초한 로마도 식민정책을 펼쳤고 제국주의를 실행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구성체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잊어버리거나 뒷전으로 밀어 두는 제국주의에 관한 “일반적” 논의는 “위대한 로마와 위대한 브리튼”을 비교하는 것[83] 같은 더없이 공허한 진부함이나 허풍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이전 단계들의 자본주의적 식민정책조차도 금융자본의 식민정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신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은 최대 기업가들의 독점적 동맹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점은 모든 원료 원천이 한 손에 장악될 때 가장 튼튼하다. 그리고 우리는 국제적 자본가 동맹이 적수에게서 경쟁의 가능성을 모조리 빼앗기 위해, 예를 들어 철광석 매장지나 유전 등을 사들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힘을 쏟는지를 보았다. 식민지를 영유하는 것만이 경쟁자와의 투쟁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우연에 맞서 독점의 성공을 완전히 보장해 준다 — 적수가 국가독점에 관한 법률로 자기를 지키려 하는 우연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자본주의가 높이 발전할수록, 원료 부족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전 세계에서 경쟁과 원료 원천 쟁탈이 격렬해질수록 식민지 획득을 둘러싼 투쟁은 더욱 필사적이 된다.

실더는 이렇게 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역설적으로 보일 주장을 하나 내세울 수 있다. 그것은 도시 인구와 공업 인구의 증가가 가까운 장래에 식료품의 부족보다는 공업 원료의 부족에 부딪힐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예컨대 갈수록 값이 오르는 목재, 그리고 가죽과 섬유공업 원료의 부족이 이렇게 심해지고 있다. “공업가 동맹들은 세계경제 전체의 범위에서 농업과 공업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 내려고 애쓴다. 그 예로는 1904년부터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몇몇 공업국의 면방적업자 동맹들의 국제 동맹을 들 수 있다. 그다음으로 이를 본떠 1910년에 세워진 유럽 아마방적업자 동맹들의 동맹을 들 수 있다.”[84]

물론 부르주아 개량주의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오늘날의 카우츠키주의자들은 이런 종류의 사실이 갖는 의미를 깎아내리려고 한다. 그들은 원료를 “값비싸고 위험한” 식민정책 없이도 자유로운 시장에서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거나, 농업 조건 전반을 “단순히” 개선하기만 하면 원료 공급을 엄청나게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제국주의의 변호론, 제국주의 미화로 바뀐다. 이 지적들은 최신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 곧 독점을 잊어버린 데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시장은 점점 더 과거의 일이 되어 가고 있고, 독점적 신디케이트와 트러스트가 날마다 이 시장을 갉아먹고 있다. 그리고 농업 조건의 “단순한” 개선이란 결국 대중의 처지 개선, 임금 인상과 이윤 감소로 귀결된다. 달콤한 개량주의자들의 공상 속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식민지를 정복하는 대신 대중의 처지를 돌보는 트러스트가 있단 말인가?

금융자본에게는 이미 발견된 원료 원천뿐 아니라 발견될 수 있는 원천도 중요하다. 오늘날 기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서, 새로운 방법이 발견되고(이를 위해 대은행은 기술자, 농학자 등으로 이루어진 특별 탐사대를 꾸릴 수 있다) 큰 자본이 투입되면 오늘 쓸모없는 땅이 내일은 쓸모 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물 자원 탐사, 이런저런 원료를 가공하고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 따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 경제 영역을, 나아가 영토 일반을 넓히려는 금융자본의 불가피한 지향이 나온다. 트러스트가 현재의 이윤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이윤을 계산에 넣고, 독점이 가져올 앞으로의 결과를 계산에 넣어 자기 재산을 두 배나 세 배로 평가해 자본화하듯이, 금융자본 일반도 발견될 수 있는 원료 원천을 계산에 넣고, 나누어지지 않은 세계의 마지막 조각들이나 이미 나누어진 조각들의 재분할을 둘러싼 미친 듯한 투쟁에서 뒤처질까 두려워하면서, 어떤 땅이든, 어디에 있든, 어떤 방법으로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한다.

영국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식민지인 이집트에서 면화 생산을 발전시키려고 온갖 애를 쓴다 — 1904년에 이집트의 경작지 230만 헥타르 가운데 이미 60만 헥타르, 곧 4분의 1이 넘는 땅에 면화가 심어져 있었다. 러시아인들도 자기들의 식민지인 투르키스탄에서 똑같이 한다. 이렇게 하면 외국 경쟁자들을 더 쉽게 물리칠 수 있고, 원료 원천을 더 쉽게 독점할 수 있으며, 면화의 생산과 가공의 모든 단계를 한 손에 집중시킨 “결합” 생산을 하는, 더 경제적이고 수익성 높은 섬유 트러스트를 더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수출의 이해관계도 마찬가지로 식민지 정복을 부추긴다. 식민지 시장에서는 경쟁자를 독점적인 방법으로 몰아내고, 납품을 확보하고, 그에 걸맞은 “연줄”을 굳히는 일 따위가 더 쉽기(때로는 오직 거기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을 토대로 자라나는 경제외적 상부구조, 곧 금융자본의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정복을 향한 지향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힐퍼딩은 “금융자본은 자유가 아니라 지배를 원한다”라고 옳게 말한다. 그리고 한 프랑스 부르주아 저술가는 앞에서 인용한 세실 로즈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보충하기라도 하듯이, 현대 식민정책의 경제적 원인에 사회적 원인을 덧붙여야 한다고 쓴다. “생활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노동자 대중뿐 아니라 중간계급까지 짓누르는 어려움이 커짐에 따라, 오래된 문명을 가진 모든 나라에는 ‘사회의 평온을 위협하는 조바심, 짜증, 증오가 쌓이고 있다. 일정한 계급적 궤도에서 튕겨 나온 에너지에게 쓸 곳을 찾아 주어야 하며, 나라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라 밖에서 할 일을 주어야 한다’.”[85]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정책을 이야기하는 이상, 금융자본과 그에 걸맞은 국제정치, 곧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분할을 둘러싼 열강의 투쟁으로 귀결되는 국제정치가 국가 종속의 과도적 형태들을 잇달아 만들어 낸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이 시대에 전형적인 것은 식민지를 영유한 나라와 식민지라는 두 가지 기본 국가군만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형식적으로는 자주적이지만 실제로는 금융적·외교적 종속의 그물에 얽혀 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속국들도 전형적이다. 그 가운데 한 형태인 반식민지는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 또 다른 형태의 본보기는 이를테면 아르헨티나이다.

슐체-게퍼니츠는 영국 제국주의에 관한 저작에서 이렇게 쓴다. “남아메리카, 특히 아르헨티나는 런던에 대해 금융적으로 매우 종속되어 있어서 거의 영국의 상업 식민지라고 불러야 할 정도이다.”[86] 실더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영사의 1909년 보고에 근거해 영국이 아르헨티나에 투자한 자본을 87억 5,000만 프랑으로 추산했다. 이로 말미암아 영국의 금융자본이 — 그리고 그 충실한 “벗”인 외교가 — 아르헨티나의 부르주아지와, 아르헨티나의 경제생활과 정치생활 전체를 이끄는 집단들과 얼마나 단단한 연줄을 맺게 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치적 독립 아래에서 금융적·외교적 종속이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예를 포르투갈이 보여 준다. 포르투갈은 자주적인 주권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이래 200년이 넘도록 영국의 보호 아래 있다. 영국은 자기 적수인 에스파냐, 프랑스와의 투쟁에서 자기 위치를 굳히려고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를 지켜 주었다. 그 대가로 영국은 무역상의 이익,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로 상품을, 특히 자본을 수출할 때의 더 나은 조건, 포르투갈의 항구와 섬, 해저 전신선 등을 이용할 권리 따위를 얻었다.[87] 크고 작은 개별 국가들 사이의 이런 종류의 관계는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에 이 관계는 보편적인 체계가 되고, “세계분할”이라는 관계의 총체에 그 일부로 들어가며, 세계 금융자본이 벌이는 활동의 고리로 바뀐다.

세계분할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음 사실을 더 지적해야 한다. 19세기의 맨 끝과 20세기 초에 이 문제를 아주 공공연하고 분명하게 제기한 것은 미국-에스파냐 전쟁 뒤의 미국 문헌과 영국-보어 전쟁 뒤의 영국 문헌만이 아니었고, “영국 제국주의”를 가장 “질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독일 문헌만이 이 사실을 체계적으로 평가한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문헌에서도 이 문제는,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충분히 분명하고 폭넓게 제기되었다. 역사가 드리오를 예로 들자. 그는 『19세기 말의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이라는 책의 “열강과 세계분할”에 관한 장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을 빼고 지구상의 모든 빈 곳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열강에게 점령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미 몇 차례의 충돌과 세력의 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더 끔찍한 폭발의 전조이다.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몫을 확보하지 못한 국민은 영영 자기 몫을 얻지 못하고, 다음 세기(곧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가 될 거대한 지구 착취에 참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유럽과 미국 전체가 식민지 팽창의 열병, 곧 19세기 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제국주의’의 열병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세계분할에서, 지구의 보물과 큰 시장을 쫓는 이 미친 듯한 경쟁에서, 바로 이 19세기에 세워진 제국들의 상대적 힘은 그 제국들을 세운 국민들이 유럽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전혀 걸맞지 않다. 유럽에서 우세하고 유럽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강이 전 세계에서도 똑같이 우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힘, 아직 헤아려지지 않은 부를 차지하리라는 희망은 분명히 유럽 열강의 상대적 힘에 거꾸로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이미 유럽 자체의 정치적 조건을 바꾸어 놓은 식민지 문제 — 원한다면 ‘제국주의’라고 해도 좋다 — 는 그 조건을 더욱더 바꾸어 나갈 것이다.”[88]

VII. 자본주의의 특수한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이제 우리는 일정한 결론을 끌어내고, 지금까지 제국주의에 관해 말한 것을 한데 모아 보아야 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일반의 기본 속성이 발전하고 그대로 이어진 결과로 자라났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된 것은 그 발전의 일정한, 아주 높은 단계에 이르러서였다. 그때 자본주의의 몇몇 기본 속성이 자기의 반대물로 바뀌기 시작했고, 자본주의에서 더 높은 사회경제 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이 전선 전체에 걸쳐 형성되고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기본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이 자본주의적 독점으로 교체되는 것이다.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와 상품생산 일반의 기본 속성이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정반대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자유경쟁이 우리 눈앞에서 독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유경쟁은 대규모 생산을 만들어 내고, 소규모 생산을 밀어내고, 대규모 생산을 최대 규모의 생산으로 바꾸며, 생산과 자본의 집중을 끌어올렸고, 마침내 그 집중에서 독점이 자라났으며 지금도 자라나고 있다. 그 독점이란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그리고 이것들과 융합한, 수십억을 주무르는 은행 열 개 남짓의 자본이다. 그와 동시에 독점은 자유경쟁에서 자라나면서도 자유경쟁을 없애지 않고 그 위에, 그 곁에 존재하며, 이로써 특히 첨예하고 격렬한 일련의 모순과 마찰과 충돌을 낳는다. 독점은 자본주의에서 더 높은 제도로 넘어가는 이행이다.

제국주의를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정의해야 한다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정의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금융자본은 독점적인 소수 최대 은행의 은행자본이 산업가들의 독점 동맹의 자본과 융합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세계분할은 어느 자본주의 열강도 아직 차지하지 않은 지역으로 거침없이 넓혀 가던 식민정책에서, 끝까지 나누어진 지구 영토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식민정책으로 넘어가는 이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짧은 정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요약해 주므로 편리하기는 하지만, 정의해야 할 현상의 매우 중요한 특징들을 거기서 따로 끌어내야 하는 한 역시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가 일반적으로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만을 갖는다는 것, 정의는 완전히 발전한 현상의 전면적인 연관을 결코 다 포괄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제국주의의 다음 다섯 가지 기본 표지를 담은 정의를 내려야 한다. 1)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매우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르러,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독점을 만들어 냈다. 2) 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고, 이 “금융자본”을 토대로 금융과두제가 생겨났다. 3) 상품수출과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4) 세계를 나누어 갖는 자본가들의 국제 독점 동맹이 형성된다. 5) 최대 자본주의 열강이 지구의 영토 분할을 끝마쳤다. 제국주의란 독점과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고, 자본수출이 두드러진 의미를 얻고, 국제 트러스트에 의한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최대 자본주의 나라들이 지구의 전 영토를 다 나누어 가진 발전 단계의 자본주의이다.

순전히 경제적인 기본 개념들(위의 정의는 여기에 한정된다)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일반에 대해 이 자본주의 단계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나, 제국주의와 노동운동 안의 두 기본 조류 사이의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제국주의를 어떻게 달리 정의할 수 있고 또 정의해야 하는지는 아래에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짚어 두어야 할 것은, 위에서 말한 뜻으로 이해한 제국주의가 의심할 여지 없이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한 단계라는 점이다. 우리는 독자에게 제국주의에 관해 될 수 있는 대로 근거가 탄탄한 관념을 주려고, 자본주의 최신 경제에 관해 특히 논란의 여지 없이 확인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평가를 일부러 되도록 많이 인용하려 했다. 같은 목적에서 상세한 통계자료도 인용했다. 이 자료를 보면 은행자본 등이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커졌는지, 양에서 질로의 이행, 곧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로의 이행이 정확히 무엇으로 나타났는지 알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자연과 사회의 모든 경계는 조건적이고 유동적이며, 이를테면 제국주의가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이 어느 해나 어느 10년간에 속하는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정의를 두고는 무엇보다 이른바 제2인터내셔널 시대, 즉 1889~1914년의 25년간의 주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K. 카우츠키와 논쟁하지 않을 수 없다. 카우츠키는 우리가 내린 제국주의 정의에 담긴 기본 사상에 맞서 1915년에도, 아니 이미 1914년 11월에도 아주 단호하게 나섰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제국주의는 경제의 “국면”이나 단계가 아니라 정책, 그것도 금융자본이 “선호하는” 특정한 정책으로 이해해야 한다. 제국주의를 “현대 자본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제국주의를 “현대 자본주의의 모든 현상”, 곧 카르텔, 보호무역, 금융가의 지배, 식민정책으로 이해한다면, 자본주의에 제국주의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가장 진부한 동어반복”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에 사활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등등. 카우츠키의 생각은 그가 내린 제국주의 정의를 인용하면 가장 정확히 표현될 것이다. 이 정의는 우리가 펼치는 사상의 본질을 정면으로 겨눈 것이다(여러 해 동안 이와 비슷한 사상을 주장해 온 독일 마르크스주의자 진영의 반론은 마르크스주의 안의 특정 조류의 반론으로서 카우츠키에게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의 정의는 이렇다.

“제국주의는 고도로 발전한 산업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것은 각 산업자본주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 사는 곳이든 상관없이, 점점 더 넓은 농업(강조는 카우츠키) 지역을 자기에게 병합하거나 복속시키려는 지향에 있다.”[89]

이 정의는 털끝만큼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일면적으로, 즉 자의적으로 민족 문제 하나만을 떼어 내고(이 문제는 그 자체로도,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도 지극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의적이고 잘못되게 다른 민족을 병합하는 나라의 산업자본하고만 연결하며, 똑같이 자의적이고 잘못되게 농업 지역의 병합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병합을 향한 지향이다. 카우츠키 정의의 정치적 부분은 이것으로 귀착된다. 이것은 옳지만 극히 불완전하다. 정치적으로 제국주의는 대체로 폭력과 반동을 향한 지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카우츠키 자신이 자기 정의에 끌어들인 문제의 경제적 측면이다. 카우츠키 정의의 잘못은 눈에 확 들어온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바로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이다. 프랑스에서 바로 금융자본이 유난히 빨리 발전하고 산업자본은 약해지면서,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병합주의(식민주의) 정책이 극도로 첨예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바로 농업 지역만이 아니라 가장 공업화된 지역까지 병합하려는 지향이다(벨기에를 노리는 독일의 식욕, 로렌을 노리는 프랑스의 식욕). 첫째로, 지구의 분할이 끝났기 때문에 재분할할 때는 어떤 땅에든 손을 뻗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제국주의에 본질적인 것은 몇몇 강대국이 패권을 다투는 경쟁, 즉 땅을 직접 자기를 위해서라기보다 적을 약화하고 적의 패권을 허물기 위해 빼앗으려는 경쟁이다(독일에게 벨기에가 특히 중요한 것은 영국에 맞서는 거점이기 때문이고, 영국에게 바그다드가 중요한 것은 독일에 맞서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등등).

카우츠키는 특히, 그것도 여러 차례, 영국인들이 제국주의라는 말에 그의, 카우츠키의 의미에서 순전히 정치적인 뜻을 정착시켰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끌어댄다. 영국인 홉슨을 펼쳐 1902년에 나온 그의 저서 『제국주의』를 읽어 보자.

“새로운 제국주의가 옛 제국주의와 다른 점은, 첫째로 하나의 성장하는 제국의 지향 대신에 서로 경쟁하는 여러 제국의 이론과 실천을 내세운다는 것인데, 이 제국들 각각은 정치적 팽창과 상업적 이익을 향한 똑같은 욕망에 이끌린다. 둘째로 금융상의 이해관계, 곧 자본 투자와 관련된 이해관계가 상업상의 이해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90]

우리는 카우츠키가 영국인 일반을 끌어댄 것이 사실에서 완전히 틀렸음을 본다(그가 끌어댈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영국의 속류 제국주의자나 노골적인 제국주의 옹호자들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카우츠키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다고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사회자유주의자 홉슨에 비해서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음을 본다. 홉슨은 현대 제국주의의 두 가지 “역사적-구체적” 특징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카우츠키는 자기 정의로 바로 역사적 구체성을 조롱하고 있다!). 1) 여러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 2) 상인에 대한 금융가의 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공업국이 농업국을 병합하는 것이 주된 문제라면, 그것은 상인의 주도적 역할을 내세우는 셈이 된다.

카우츠키의 정의는 틀렸고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도 마르크스주의 실천과도 전선 전체에 걸쳐 단절하는 견해 체계 전체의 토대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카우츠키가 제기한 말싸움, 곧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를 제국주의라고 부를지 금융자본의 단계라고 부를지 하는 논쟁은 전혀 진지하지 않다. 마음대로 부르라.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의 핵심은 카우츠키가 제국주의의 정치를 그 경제에서 떼어 낸다는 데 있다. 그는 병합을 금융자본이 “선호하는” 정책으로 설명하고, 여기에 똑같은 금융자본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다른 부르주아 정책을 맞세운다. 그러면 경제에서의 독점이 정치에서의 비독점적, 비폭력적, 비약탈적 행동 방식과 양립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바로 금융자본의 시대에 완결되었고, 최대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오늘날 벌어지는 경쟁 형태의 독특함의 토대를 이루는 지구의 영토 분할이 비제국주의적 정책과 양립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최신 단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그 깊이까지 드러내기는커녕 그것을 흐리고 무디게 하는 것이 되며, 마르크스주의 대신에 부르주아 개량주의가 되고 만다.

카우츠키는 독일의 제국주의·병합 옹호자 쿠노와 논쟁한다. 쿠노는 조잡하고 뻔뻔스럽게 이렇게 추론한다. 제국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고 진보적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는 진보적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앞에 굽실거리며 찬양해야 한다! 이것은 1894~1895년에 인민주의자들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겨냥해 그리던 풍자화와 비슷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고 진보적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선술집을 차리고 자본주의를 심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식이었다. 카우츠키는 쿠노에게 이렇게 반박한다. 아니다, 제국주의는 현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정책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우리는 이 정책과 싸울 수 있고 싸워야 하며, 제국주의, 병합 등과 싸울 수 있고 싸워야 한다.

이 반박은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국주의와의 화해를 더 교묘하게, 더 은밀하게 (그래서 더 위험하게) 설교하는 것과 같다. 트러스트와 은행의 경제적 토대를 건드리지 않는 트러스트와 은행의 정책과의 “투쟁”은 부르주아 개량주의와 평화주의로, 착하디착하고 순진한 소망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모순의 깊이를 다 드러내는 대신에 그 모순을 말로 얼버무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와 아무 공통점도 없는 카우츠키의 이론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이 쿠노 같은 자들과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옹호하는 데에만 쓰인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쓴다. “순전히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 즉 카르텔 정책을 대외 정책으로 옮기는 국면, 초제국주의의 국면을 겪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91] 곧 제국주의를 넘어선 제국주의, 전 세계 제국주의들의 투쟁이 아닌 연합의 국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전쟁이 멈추는 국면,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의 공동 착취”[92]의 국면이다.

이 “초제국주의론”이 얼마나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는지를 상세히 보여 주기 위해 우리는 아래에서 이 이론을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이 개요의 전체 계획에 따라 이 문제에 관한 정확한 경제적 자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순전히 경제적 관점에서” “초제국주의”는 가능한가, 아니면 그것은 초헛소리인가?

순전히 경제적 관점이라는 것을 “순수한” 추상으로 이해한다면,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다음 명제로 귀착될 것이다. 발전은 독점으로, 따라서 하나의 세계 독점, 하나의 세계 트러스트로 나아간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식료품이 실험실에서 생산되는 쪽으로 “발전이 나아간다”고 지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내용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초제국주의 “이론”은 “초농업 이론”이 그러할 것과 똑같은 헛소리이다.

그러나 금융자본 시대의 “순전히 경제적인” 조건을 20세기 초에 해당하는 역사적-구체적 시대로서 이야기한다면, “초제국주의”의 죽은 추상(이 추상은 오로지 현존하는 모순의 깊이에서 주의를 돌린다는 가장 반동적인 목적에만 이바지한다)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거기에 현대 세계경제의 구체적인 경제 현실을 맞세우는 것이다. 초제국주의에 관한 카우츠키의 더없이 내용 없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금융자본의 지배가 세계경제 안의 불균등과 모순을 약화한다는, 지극히 잘못된, 제국주의 옹호자들의 물레방아에 물을 대 주는 생각을 부추긴다. 실제로는 금융자본의 지배는 그것들을 강화한다.

R. 칼버는 그의 작은 책 『세계경제 입문』[93]에서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세계경제 안의 상호관계를 구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순수 경제적 자료를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전 세계를 5개 “주요 경제 지역”으로 나눈다. 1) 중유럽(러시아와 영국을 뺀 유럽 전체), 2) 영국, 3) 러시아, 4) 동아시아, 5) 아메리카. 식민지는 그것을 소유한 국가의 “지역”에 넣고, 지역별로 나누지 않은 몇몇 나라, 이를테면 아시아의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아라비아,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아비시니아 등은 “제쳐 둔다”.

그가 인용한 이 지역들의 경제 자료를 줄여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세계의
주요 경제
지역
면적인구교통로무역공업
백만 제곱킬로미터(백만)철도 (천 킬로미터)상선 (백만 톤)(수입과 수출 합계) (10억 마르크)산출량면방적 공업의 방추 수 (백만)
석탄선철
(백만 톤)
1) 중유럽 …27.6
*(23.6)
388
(146)
2048412511526
2) 영국 …28.9
*(28.6)
398
(355)
1401125249951
3) 러시아 …2213163131637
4) 동아시아 …1238981280.022
5) 아메리카 …201483796142451419

우리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교통로, 무역, 공업이 모두 크게 발전한) 세 지역을 본다. 중유럽, 영국, 아메리카이다. 그 가운데 세계를 지배하는 세 국가가 있다. 독일, 영국, 미국이다. 이들 사이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투쟁은 독일의 지역이 보잘것없고 식민지가 적다는 사정 때문에 극도로 첨예해져 있다. “중유럽”의 창출은 아직 미래의 일이고, 그것은 필사적인 투쟁 속에서 태어나고 있다. 당분간 유럽 전체의 표지는 정치적 분열이다. 반대로 영국 지역과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정치적 집중이 매우 높지만, 앞의 것의 광대한 식민지와 뒤의 것의 보잘것없는 식민지 사이에는 엄청난 불균형이 있다. 그런데 식민지에서 자본주의는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남아메리카를 둘러싼 투쟁은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다.

두 지역, 러시아와 동아시아는 자본주의 발전이 약한 지역이다. 앞의 지역은 인구밀도가 극히 낮고, 뒤의 지역은 극히 높다. 앞의 지역에서는 정치적 집중이 크고, 뒤의 지역에서는 그것이 없다. 중국은 이제 겨우 분할되기 시작했을 뿐이며, 그것을 둘러싼 일본, 미국 등의 투쟁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다.

이 현실, 곧 경제적·정치적 조건의 거대한 다양성, 여러 나라 성장 속도의 극심한 불균형 등,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미친 듯한 투쟁과, “평화로운” 초제국주의에 관한 카우츠키의 어리석은 우화를 나란히 놓아 보라. 이것은 겁먹은 속물이 무서운 현실에서 숨으려는 반동적 시도가 아닌가? 카우츠키에게 “초제국주의”의 맹아로 보이는 국제 카르텔이야말로(실험실에서 알약을 생산하는 것을 초농업의 맹아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 평화적 분할에서 비평화적 분할로, 그리고 그 반대로의 이행의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국제 레일 신디케이트나 국제 해운 트러스트에 독일이 참여한 가운데 온 세계를 평화롭게 나누어 가졌던 미국과 그 밖의 금융자본은, 지금 전혀 비평화적인 방법으로 바뀌고 있는 새로운 힘 관계를 바탕으로 세계를 재분할하고 있지 않은가?

금융자본과 트러스트는 세계경제 여러 부분의 성장 속도 차이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한다. 그리고 힘의 상호관계가 변했다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모순의 해결이 힘 말고 무엇에 있을 수 있겠는가? 세계경제 전체에서 자본주의와 금융자본의 성장 속도가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 우리는 철도 통계에서 매우 정확한 자료를 얻는다[94]. 제국주의 발전의 지난 수십 년 동안 철도 길이는 다음과 같이 변했다.

철도
(천 킬로미터)
18901913+
유럽 …224346+122
미국 …268411+143
모든 식민지 …82}125210}347+128}+222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독립국과 반독립국 …43137+94
‎합계 …6171,104

그러니까 철도가 가장 빨리 발전한 곳은 식민지와 아시아·아메리카의 독립(및 반독립) 국가들이었다. 알다시피 이곳에서는 4~5개 최대 자본주의 국가의 금융자본이 전적으로 군림하고 지배한다. 식민지와 아시아·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새로 놓인 철도 20만 킬로미터, 이것은 특별히 유리한 조건으로, 수익에 대한 특별한 보장을 받고, 제강 공장에 대한 수지맞는 주문을 동반하는 등등으로 이루어진 400억 마르크가 넘는 새로운 자본 투자를 뜻한다.

자본주의는 식민지와 해외 나라들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다. 그 가운데서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일본)이 나타난다. 세계 제국주의들 사이의 투쟁은 첨예해진다. 금융자본이 특히 수지맞는 식민지 기업과 해외 기업에서 거두어들이는 공물이 늘어난다. 이 “전리품”을 나눌 때 생산력 발전 속도에서 늘 첫째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는 나라들의 손에 유난히 큰 몫이 돌아간다. 최대 열강의 철도 길이는 식민지와 합쳐서 다음과 같았다.

(천 킬로미터)
18901913
미국 …268413+145
영 제국 …107208+101
러시아 …3278+46
독일 …4368+25
프랑스 …4163+22
‎5대 열강 합계491830+339

이렇게 전체 철도의 약 80%가 5대 열강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철도의 소유의 집중, 금융자본의 집중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이를테면 미국, 러시아, 그 밖의 나라 철도의 주식과 채권의 막대한 양이 영국과 프랑스의 백만장자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식민지 덕분에 “자기” 철도망을 10만 킬로미터 늘렸는데, 이는 독일의 네 배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독일의 생산력 발전, 특히 석탄과 철 생산의 발전은 프랑스와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보다도 비할 바 없이 빨랐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1892년에 독일은 선철 490만 톤을 생산했고 영국은 680만 톤을 생산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이미 1,760만 톤 대 900만 톤, 곧 영국을 크게 앞질렀다![95] 묻건대,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한편으로 생산력 발전과 자본 축적, 다른 한편으로 금융자본을 위한 식민지와 “세력권”의 분할 사이의 불균형을 없애는 데에 전쟁 말고 다른 어떤 수단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VIII.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

이제 우리는 제국주의의 아주 중요한 측면 하나를 더 살펴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논의는 대체로 이 측면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 힐퍼딩의 결함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여기서 비마르크스주의자 홉슨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는 데 있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제국주의에 고유한 기생성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제국주의의 가장 깊은 경제적 토대는 독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독점, 곧 자본주의에서 자라났으며 자본주의, 상품생산, 경쟁이라는 일반적 환경 속에 놓여 있으면서 이 일반적 환경과 끊임없이, 그리고 출구 없이 모순을 이루는 독점이다. 그럼에도 이 독점은 다른 모든 독점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정체와 부패로 향하는 경향을 낳는다. 일시적이라도 독점가격이 확립되는 만큼, 기술적 진보, 따라서 다른 모든 진보와 전진을 이끄는 동기가 어느 정도 사라진다. 또 그만큼 기술적 진보를 인위적으로 가로막을 경제적 가능성이 생긴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에서 오언스라는 사람이 병 제조에 혁명을 일으키는 제병기를 발명했다. 독일의 병 제조업자 카르텔은 오언스의 특허를 사들여 서랍 속에 처박아 두고 그 사용을 가로막는다. 물론 자본주의 아래의 독점은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완전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없앨 수는 결코 없다(덧붙이자면 초제국주의 이론이 허튼소리인 까닭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물론 기술적 개량을 도입해 생산비를 낮추고 이윤을 높일 가능성은 변화를 촉진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독점에 고유한, 정체와 부패로 향하는 경향도 그것대로 계속 작용하며, 개별 산업 부문에서, 개별 나라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이 경향이 우위를 차지한다.

특히 넓거나 풍요롭거나 위치가 유리한 식민지를 소유하는 독점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제국주의는 소수의 나라에 화폐자본이 막대하게 쌓이는 것인데, 우리가 보았듯이 그 규모는 유가증권으로 1,000억~1,500억 프랑에 이른다. 여기서 금리생활자 계급,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금리생활자 계층이 유례없이 늘어난다. 금리생활자란 “이자 쿠폰 깎기”로 살아가는 사람들, 어떤 기업에든 참여하는 일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는 사람들, 무위가 직업인 사람들이다. 제국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제적 토대 가운데 하나인 자본수출은 금리생활자 계층이 생산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현상을 더욱 강화하며, 바다 건너 몇몇 나라와 식민지의 노동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나라 전체에 기생성의 낙인을 찍는다.

홉슨은 이렇게 쓴다. “1893년에 해외에 투자된 영국 자본은 연합왕국 전체 부의 약 15%였다”[96]. 1915년까지 이 자본이 대략 2½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홉슨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공격적 제국주의는 납세자에게는 그토록 큰 비용을 치르게 하고 산업가와 상인에게는 그토록 보잘것없는 의미밖에 없지만… 자기 자본의 투자처를 찾는 자본가에게는 큰 이윤의 원천이다”…(영어에서는 이 개념을 한 낱말로 나타낸다. “인베스터”(investor) — “투자자”, 곧 금리생활자다)… “통계학자 기펜은 영국이 대외 무역과 식민지 무역 전체, 곧 수입과 수출 전체에서 얻는 연간 소득을 1899년에 1,800만 파운드스털링(약 1억 7,000만 루블)으로 추산하는데, 이는 총거래액 8억 파운드스털링에 2½%를 매겨 계산한 것이다.” 이 액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영국의 공격적 제국주의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9,000만~1억 파운드스털링이라는 액수, 곧 “투자된”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 금리생활자 계층의 소득이다.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인” 나라에서 금리생활자의 소득이 대외 무역 소득의 다섯 배나 된다! 이것이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기생성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금리생활자 국가”(Rentnerstaat), 또는 고리대금업자 국가라는 개념은 제국주의에 관한 경제학 문헌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 된다. 세계는 한 줌의 고리대금업자 국가와 거대한 다수의 채무자 국가로 나뉘었다. 슐체-게퍼니츠는 이렇게 쓴다. “해외 자본투자 가운데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종속된 나라나 동맹국에 대한 투자다. 영국은 이집트, 일본, 중국, 남아메리카에 돈을 빌려준다. 영국 해군은 최악의 경우에는 집달관 노릇을 한다. 영국의 정치적 힘은 채무자들의 반항으로부터 영국을 지켜 준다”[97]. 자르토리우스 폰 발터스하우젠은 『해외 자본투자의 국민경제적 체계』라는 저서에서 네덜란드를 “금리생활자 국가”의 본보기로 내세우고, 이제는 영국과 프랑스가 그런 나라가 되어 간다고 지적한다[98]. 실더는 다섯 산업국가, 곧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스위스가 “뚜렷한 채권국”이라고 본다. 그가 네덜란드를 여기에 넣지 않는 것은 오직 네덜란드가 “산업화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99].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서만 채권국이다.

슐체-게퍼니츠는 이렇게 쓴다. “영국은 산업국가에서 채권국가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산업생산과 산업 수출이 절대적으로 늘어나는데도, 국민경제 전체에서 이자와 배당, 발행, 수수료, 투기에서 나오는 소득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커지고 있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이 사실이 제국주의적 고양의 경제적 토대다. 채권자는 판매자가 구매자와 맺어지는 것보다 더 단단하게 채무자와 맺어져 있다”[100]. 독일에 관해서는 베를린 잡지 《디 방크》의 발행인 A. 란스부르크가 1911년 「독일 — 금리생활자 국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에서는 프랑스에서 보이는, 금리생활자가 되려는 경향을 즐겨 비웃는다. 그러나 그러면서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부르주아지에 관한 한 독일의 사정도 점점 더 프랑스의 사정을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101].

금리생활자 국가는 기생적이고 부패하는 자본주의의 국가다. 이 사정은 해당 나라들의 사회적·정치적 조건 전반에, 그리고 특히 노동운동의 두 가지 기본 조류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생생하게 보여 주기 위해 홉슨에게 발언권을 넘기자. 그는 증인으로서 누구보다 “믿을 만하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정통”에 치우쳤다고 의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식민지로도, 금융자본으로도, 제국주의적 경험으로도 가장 부유한 나라의 사정을 잘 아는 영국인이기 때문이다.

홉슨은 보어전쟁의 생생한 인상 아래 제국주의와 “금융가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연관, 청부와 납품 등에서 나오는 그들의 이윤 증대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뚜렷이 기생적인 정책을 이끄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그러나 같은 동기가 특정한 부류의 노동자들에게도 작용한다. 많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부문은 정부 주문에 의존한다. 금속공업과 조선업 중심지의 제국주의는 적지 않은 정도로 이 사실에 달려 있다.” 저자의 견해로는 두 가지 사정이 옛 제국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1) “경제적 기생성”과 2) 종속 민족들로 군대를 편성한 것이다. “첫째는 경제적 기생성의 관습이다. 이 관습에 따라 지배 국가는 자기 지방과 식민지와 종속국을 자기 지배계급을 살찌우는 데, 그리고 자기 하층계급을 매수하여 그들을 조용히 있게 하는 데 이용한다.” 우리 쪽에서 덧붙이자면, 그러한 매수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든 그것이 경제적으로 가능하려면 독점적으로 높은 이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둘째 사정에 관해서 홉슨은 이렇게 쓴다. “제국주의의 맹목을 보여 주는 가장 기이한 징후 가운데 하나는 영국, 프랑스, 그 밖의 제국주의 국민들이 이 길에 들어서는 그 태평함이다. 영국은 누구보다 멀리 나아갔다. 우리가 인도 제국을 정복한 전투들의 대부분은 원주민으로 편성된 우리 군대가 치렀다. 인도에서는, 그리고 최근에는 이집트에서도, 대규모 상비군이 영국인의 지휘 아래 있다. 남부를 빼면 우리의 아프리카 정복과 관련된 전쟁은 거의 모두 원주민이 우리를 위해 치렀다.”

중국 분할의 전망은 홉슨에게서 이러한 경제적 평가를 이끌어 낸다. “그렇게 되면 서유럽의 대부분은 지금 이 나라들의 일부, 곧 잉글랜드 남부, 리비에라,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고 부자들이 사는 곳들이 지니고 있는 모습과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머나먼 동양에서 배당과 연금을 받는 한 줌의 부유한 귀족, 그보다 조금 더 큰 전문직 종사자와 상인 집단,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가내 하인과 운송업 노동자와 완제품 마무리 가공업 노동자가 있을 뿐인 모습이다. 주요 산업 부문은 사라지고, 대량의 식료품과 대량의 반제품이 공물로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흘러들어 올 것이다.” “서구 국가들의 더 넓은 동맹, 열강의 유럽 연방은 이런 가능성을 우리 앞에 열어 준다. 그것은 세계 문명의 대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는커녕 서구 기생성의 거대한 위험을 뜻할 수도 있다. 곧 선진 산업국민의 한 무리를 떼어 내는데, 그 상층계급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막대한 공물을 받고, 이 공물로 길들여진 수많은 고용인과 하인을 부양한다. 이들은 더는 농산물과 공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고, 새로운 금융귀족의 통제 아래 개인적 시중이나 부차적인 산업 노동에 종사한다. 이런 이론을”(전망을, 이라고 했어야 한다) “검토할 가치도 없다며 물리치려는 사람들은 이미 이런 처지에 놓인 오늘날 잉글랜드 남부 여러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중국이 이와 비슷한 금융가 집단, ‘자본 투자자’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상공업적 고용인들의 경제적 통제에 굴복하게 되면 이런 체제가 얼마나 엄청나게 확대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이들은 세계가 일찍이 알았던 가장 큰 잠재적 저수지에서 이윤을 퍼내어 그것을 유럽에서 소비하려 한다. 물론 상황은 너무나 복잡하고 세계적 힘들의 작용은 너무나 헤아리기 어려워서, 이것이든 다른 무엇이든 미래를 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서유럽의 제국주의를 움직이는 영향력들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반작용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다른 쪽으로 돌려지지 않는다면, 바로 이런 과정의 완결을 향해 작용하고 있다”[102].

저자의 말은 완전히 옳다. 제국주의의 힘들이 반작용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바로 이런 결과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는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환경에서 “유럽 합중국”이 지니는 의미가 올바르게 평가되어 있다. 다만 덧붙여야 할 것은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시적으로 승리한 기회주의자들이 체계적으로, 꾸준히 바로 이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는 세계분할과 중국 하나만이 아닌 착취를 뜻하고, 한 줌의 가장 부유한 나라들을 위한 독점적으로 높은 이윤을 뜻하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층을 매수할 경제적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기회주의를 키우고 모양을 갖추게 하고 강화한다. 다만 제국주의 일반에, 그리고 특히 기회주의에 맞서는 힘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자유주의자 홉슨이 그 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의 기회주의자 게르하르트 힐데브란트는 한때 제국주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었지만 지금이라면 이른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을 사람인데, 그는 아프리카 흑인에 맞서, “거대한 이슬람 운동”에 맞서 “공동” 행동을 하고,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며, “일본·중국 연합”[103] 등에 맞서기 위해 “서유럽 합중국”(러시아는 빼고)을 설교함으로써 홉슨을 훌륭하게 보완한다.

슐체-게퍼니츠가 묘사한 “영국 제국주의”도 우리에게 같은 기생성의 특징을 보여 준다. 영국의 국민소득은 1865년부터 1898년까지 대략 두 배로 늘었는데, 같은 기간 “해외로부터의” 소득은 아홉 배로 늘었다. 제국주의의 “공적”이 “흑인을 노동하도록 교육하는 것”(강제 없이는 안 된다…)이라면, 제국주의의 “위험”은 “유럽이 육체노동을, 처음에는 농업 노동과 광업 노동을, 다음에는 더 거친 산업 노동까지 유색 인류의 어깨에 떠넘기고 자신은 금리생활자의 역할에 안주하며, 그럼으로써 어쩌면 붉은 피부와 검은 피부의 인종들이 경제적으로, 그다음에는 정치적으로 해방될 길을 닦는” 데 있다.

영국에서는 점점 더 많은 토지가 농업 생산에서 떨어져 나가 스포츠용, 부자들의 오락용으로 돌려진다. 가장 귀족적인 사냥과 그 밖의 스포츠의 장소인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스코틀랜드는 자기 과거와 카네기 씨로 살아간다”라는 말이 있다(카네기는 미국의 억만장자다). 경마와 여우 사냥 하나에만 영국은 해마다 1,400만 파운드스털링(약 1억 3,000만 루블)을 쓴다. 영국의 금리생활자 수는 약 100만 명이다. 생산적 인구의 비율은 떨어지고 있다.

영국 인구주요 산업 부문의
노동자 수
인구 대비
%
(백만)
1851 …17.94.123 %
1901 …32.54.915 %

그리고 “20세기 초 영국 제국주의”를 연구한 부르주아 학자는 영국 노동계급을 이야기하면서 노동자의 “상층”과 “본래의 프롤레타리아 하층”을 체계적으로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상층은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스포츠 단체, 수많은 종교 종파의 회원 대다수를 공급한다. 선거권은 이 상층의 수준에 맞추어져 있는데, 그것은 영국에서 “여전히 본래의 프롤레타리아 하층을 배제할 만큼 충분히 제한되어 있다”!! 영국 노동계급의 처지를 미화하려고 사람들은 대개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수를 이루는 이 상층에 대해서만 말한다. 예를 들어 “실업 문제는 주로 런던과 프롤레타리아 하층, 곧 정치가들이 별로 고려하지 않는 계층에 관한 문제다…”[104].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 부르주아 정상배들과 “사회주의” 기회주의자들이 별로 고려하지 않는 계층이라고.

여기서 서술하는 현상들과 관련된 제국주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나가는 이민이 줄고, 임금이 더 낮은 더 뒤떨어진 나라들에서 이 나라들로 들어오는 이민(노동자의 유입과 이주)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홉슨이 지적하듯이 영국에서 나가는 이민은 1884년부터 줄고 있다. 그해에는 24만 2,000명이었고 1900년에는 16만 9,000명이었다. 독일에서 나가는 이민은 1881~1890년의 10년 동안 145만 3,000명으로 최고에 이르렀다가, 그다음 두 10년 동안 54만 4,000명, 34만 1,000명으로 줄었다. 그 대신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독일로 들어오는 노동자의 수가 늘었다. 190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독일에는 외국인이 134만 2,294명 있었고, 그 가운데 산업 노동자가 44만 800명, 농업 노동자가 25만 7,329명이었다[105]. 프랑스에서는 광업 노동자의 “상당 부분”이 외국인, 곧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에스파냐인이다[106]. 미국에서는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자리를 차지하고, 감독으로 승진하거나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얻는 사람은 미국인 노동자 가운데서 가장 높은 비율로 나온다[107]. 제국주의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특권적인 부류를 떼어 내어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한 대중에게서 갈라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그들 사이에서 기회주의를 강화하며 노동운동의 일시적 부패를 낳는 제국주의의 경향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보다 훨씬 이전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제국주의의 두 가지 큰 특징, 곧 거대한 식민지 영유와 세계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가 영국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수십 년에 걸쳐 체계적으로 노동운동 안의 기회주의와 영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특성 사이의 이 연관을 추적했다. 이를테면 엥겔스는 1858년 10월 7일 마르크스에게 이렇게 썼다.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로 점점 더 부르주아화하고 있어서, 모든 국민 가운데 가장 부르주아적인 이 국민은 결국 부르주아지와 나란히 부르주아적 귀족과 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는 데까지 일을 끌고 가려는 것 같네. 물론 온 세계를 착취하는 국민으로서는 이것이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 거의 사반세기 뒤인 1881년 8월 11일 자 편지에서 그는 “부르주아지에게 매수되었거나 적어도 부르주아지에게 돈을 받는 자들이 자기들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는 최악의 영국 노동조합들”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1882년 9월 12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영국 노동자들이 식민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들이 정치 일반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곳에는 노동자 정당이 없고 보수당과 자유급진당이 있을 뿐이며, 노동자들은 이들과 함께 영국의 식민지 독점과 세계시장 독점을 태연하게 누리고 있습니다”[108]. (엥겔스는 같은 내용을 1892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제2판 서문에서 출판용으로 서술했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원인은 1) 이 나라가 온 세계를 착취하는 것, 2) 세계시장에서 이 나라가 차지하는 독점적 지위, 3) 이 나라의 식민지 독점이다. 결과는 1) 영국 프롤레타리아트 일부의 부르주아화, 2)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가 부르주아지에게 매수되었거나 적어도 부르주아지에게 돈을 받는 자들이 자기들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제국주의는 한 줌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분할을 끝마쳤다. 이 국가들은 저마다 지금 (초과이윤을 뽑아낸다는 의미에서) 1858년의 영국보다 조금 작을 뿐인 “온 세계”의 한 부분을 착취하고 있다. 저마다 트러스트, 카르텔, 금융자본, 채권자 대 채무자의 관계 덕분에 세계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저마다 어느 정도 식민지 독점을 가지고 있다(우리가 보았듯이 세계의 모든 식민지 7,500만 제곱킬로미터 가운데 6,500만 제곱킬로미터, 곧 86%가 여섯 열강의 손에 집중되어 있고, 6,100만 제곱킬로미터, 곧 81%가 세 열강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상황이 다른 점은 기회주의가 노동운동의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이익과 화해할 수 없게 되는 정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경제적·정치적 조건에 있다. 제국주의는 맹아에서 지배적 체제로 자라났다. 자본주의적 독점체들이 국민경제와 정치에서 첫자리를 차지했다. 세계분할은 끝까지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영국의 분할되지 않은 독점 대신에 소수의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독점에 참여하려는 투쟁을 보는데, 이 투쟁이 20세기 초 전체를 특징짓는다. 기회주의는 이제,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어느 한 나라의 노동운동에서 수십 년 동안 완전한 승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회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사회배외주의로서 부르주아 정치와 완전히 융합하여 결정적으로 무르익었고, 지나치게 무르익었으며, 썩어 버렸다[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