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물세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용어현물세, 국가자본주의 사건신경제정책(네프)

서문을 대신하여

현물세 문제는 지금 대단히 큰 주목을 받고 있으며 많은 논의와 논쟁을 낳고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현재의 조건에서 그것은 참으로 정책의 근본 문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논의는 다소 산만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아주 명백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시사적' 측면이 아니라 일반 원칙의 측면에서 접근해 보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그 위에 오늘날 정책의 구체적·실천적 조치들의 무늬를 그려 넣고 있는 그림의,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바탕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 시도를 위해 나는 내 팸플릿 『우리 시대의 주요 임무 —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적 심성』에서 긴 대목을 인용하는 자유를 취하려 한다. 그것은 1918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첫째로 브레스트 강화에 관한 1918년 3월 11일자 신문 논설을, 둘째로 당시 존재하던 좌익 공산주의자 그룹에 대한 1918년 5월 5일자 나의 논쟁을 담고 있다. 그 논쟁은 이제 불필요하므로 생략하고,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논의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 중인 우리 현재 경제의 주요 요소들에 관련된 부분만을 남긴다.

내가 그때 쓴 것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현재 경제

(1918년 팸플릿에서의 발췌)

국가자본주의는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현 상태에 비하면 한 걸음 전진일 것이다. 만약 대략 여섯 달 안에 우리 공화국에 국가자본주의가 확립된다면, 이는 커다란 성공이며 1년 안에 사회주의가 이 나라에서 항구적으로 확고한 지반을 얻고 불패의 것이 되리라는 확실한 보증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 말에 얼마나 고결한 분노를 품고 물러설지 나는 상상할 수 있다…. 뭐라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전진이라고? …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반이 아닌가?

우리는 이 점을 더 자세히 다루어야 한다.

첫째, 우리가 우리나라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부를 권리와 근거를 부여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소부르주아적 경제 조건과 소부르주아적 요소를 우리나라 사회주의의 주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의 오류를 폭로해야 한다.

셋째, 소비에트 국가와 부르주아 국가 사이의 구별이 갖는 경제적 함의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점을 살펴보자.

러시아의 경제 체제 문제를 연구하면서 그것의 과도적 성격을 부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기존 경제 체제를 사회주의적 질서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달성하겠다는 소비에트 권력의 결의를 뜻한다는 것을 부인한 공산주의자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행'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경제에 적용될 때, 현 체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의 요소·입자·파편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모든 이가, 현재 러시아에 존재하는 여러 사회·경제적 구조를 실제로 어떤 요소들이 구성하는지 따져 보는 수고를 하지는 않는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 요소들을 열거해 보자.

1. 가부장적, 즉 상당 정도 자연경제적인 농민 경영 2. 소상품 생산 (곡물을 파는 농민 대다수가 여기에 포함된다) 3. 사적 자본주의 4. 국가자본주의 5. 사회주의

러시아는 너무나 광대하고 다양해서 이 모든 상이한 유형의 사회·경제적 구조들이 뒤섞여 있다. 바로 이것이 현 상황의 특유한 성격을 이룬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떤 요소가 우세한가? 소농의 나라에서는 분명히 소부르주아적 요소가 우세하며 또 우세할 수밖에 없다. 대다수, 즉 땅을 부치는 사람들이 소상품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의 껍데기(곡물 전매, 국가 통제하의 기업가와 상인, 부르주아 협동조합원)는 투기꾼들에 의해 여기저기 뚫리고 있으며, 투기의 주된 대상은 곡물이다.

주된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이다. '국가자본주의' 같은 경제적 범주로 말한다면, 이 투쟁은 어떤 요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가? 내가 방금 열거한 순서에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이인가? 물론 아니다. 사회주의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상대로 싸우는 소부르주아지 더하기 사적 자본주의다. 소부르주아지는 국가자본주의적이든 국가사회주의적이든 모든 종류의 국가 개입·계산·통제에 반대한다. 이는 현실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에 대한 몰이해가 수많은 경제적 오류의 뿌리에 놓여 있다. 투기꾼, 상업적 협잡꾼, 전매 파괴자 —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주된 '내부' 적이자 소비에트 권력의 경제 조치에 대한 적이다. 125년 전이라면, 가장 열렬하고 진실한 혁명가였던 프랑스 소부르주아지가 '선별된' 몇 명을 처형하고 우레 같은 선언을 함으로써 투기꾼을 분쇄하려 한 것도 용서될 만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좌익 사회혁명당원이 취하는 이 순전히 프랑스식 접근은 의식 있는 혁명가라면 누구에게나 혐오와 반감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우리는 투기의 경제적 기초가 러시아에 유난히 널리 퍼져 있는 소소유자들과, 모든 소부르주아가 그 대리인 노릇을 하는 사적 자본주의 양쪽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소부르주아적 문어의 수백만 촉수가 때때로 노동자의 여러 층을 휘감으며, 국가 전매 대신 투기가 우리 사회·경제 조직의 모든 구멍으로 파고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그 맹목으로써 자신이 소부르주아적 편견의 노예임을 드러낼 뿐이다….

소부르주아지는 돈을 모아 두고 있다. 전쟁 동안 '정직한' 방법으로, 특히 부정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수천 루블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경제적 유형, 즉 투기와 사적 자본주의의 기초다. 돈은 소지자에게 사회적 부를 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증서다. 그리고 수백만에 이르는 방대한 소소유자층이 이 증서에 매달리며 그것을 '국가'로부터 감춘다. 그들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믿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의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제자리걸음'을 한다. 우리가 소부르주아지를 우리의 통제와 계산에 종속시키든가(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 전위 주위에 빈농, 즉 인구의 다수인 반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한다면 우리는 이를 할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이 우리 노동자 권력을 전복하든가다. 그것은 바로 이 소소유의 토양에서 자라난 나폴레옹들과 카베냐크들에 의해 혁명이 전복되었던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필연적일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서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다….

수천 루블을 쟁여 두는 소부르주아는 국가자본주의의 적이다. 그는 그 수천 루블을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빈민에 맞서, 어떤 종류의 국가 통제에도 대립하여 쓰고자 한다. 그리고 이 수천 루블들의 총계, 수십억에 이르는 그 총계가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을 잠식하는 투기의 기반을 이룬다. 일정 수의 노동자가 며칠 동안 1,000에 해당하는 가치를 생산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 총액 중 200이 소소유자들의 잔챙이 투기, 각종 횡령, 소비에트 법령과 규정의 회피로 사라진다고 하자. 의식 있는 노동자라면 누구나, 만약 1,000 중 300의 대가로 더 나은 질서와 조직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200 대신 300을 내놓겠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질서와 조직이 확립되고 국가 전매에 대한 소부르주아적 교란이 완전히 극복되고 나면, 소비에트 권력하에서 이 '공납'을 나중에 100이나 50으로 줄이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명료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극도로 단순화한 이 간단한 수치 예시는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현재 상관관계를 설명해 준다.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을 쥐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목적을 제외하고는 단 한 코페이카도 내주지 않고 1,000 전부를 '가져갈' 모든 법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권력이 노동자에게 이전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이 법적 가능성은 사회주의의 한 요소다. 그러나 여러 방식으로 소소유자적·사적 자본주의적 요소가 이 법적 지위를 잠식하고, 투기를 끌어들이며, 소비에트 법령의 집행을 방해한다. 설령 우리가 현재 치르는 것보다 더 많이 치른다 해도 국가자본주의는 거대한 전진일 것이다(나는 이 점을 더 날카롭게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그 수치 예시를 들었다). 왜냐하면 '수업료'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노동자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며, 무질서·경제적 파탄·해이에 대한 승리가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고, 소소유의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크고 심각한 위험이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파멸이 될 것인 반면, 국가자본주의에 더 무거운 공납을 치르는 것은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을뿐더러 가장 확실한 길로 사회주의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소소유의 무정부 상태에 맞서 국가 체제를 방어하는 법을 배우고, 국가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라 전국적 규모로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는 법을 배웠을 때, 그것은 —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 모든 으뜸패를 쥐게 될 것이며 사회주의의 공고화는 보장될 것이다.

첫째로, 경제적으로 국가자본주의는 우리의 현 경제 체제보다 헤아릴 수 없이 우월하다.

둘째로, 소비에트 권력에게 그 안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비에트 국가는 노동자와 빈민의 권력이 보장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우선 국가자본주의의 가장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그 예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안다. 독일이다. 여기에 우리는 융커·부르주아 제국주의에 종속된, 근대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술과 계획적 조직의 '최후의 말'을 갖고 있다. 이탤릭체로 된 말들을 지워 버리고, 군국주의적·융커적·부르주아적·제국주의적 국가 대신에 역시 국가이되 다른 사회적 유형, 다른 계급적 내용을 지닌 국가 — 소비에트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 국가 — 를 놓아 보라. 그러면 사회주의에 필요한 조건들의 총합을 얻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근대 과학의 최신 발견에 기초한 대규모 자본주의적 기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 생산과 분배에서 통일된 기준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계획적 국가 조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이것을 말해 왔으며, 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아나키스트들과 좌익 사회혁명당원의 절반가량)과는 2초도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동시에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의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또한 초보다. 그리고 역사는 (일급 멘셰비키 얼간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완전한' 사회주의가 순조롭고 부드럽고 쉽고 단순하게 도래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매우 독특한 경로를 밟아, 1918년에 국제 제국주의라는 하나의 알껍데기 안에 두 마리의 미래 병아리처럼 나란히 존재하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사회주의의 두 반쪽을 낳았다. 1918년에 독일과 러시아는 각각 한편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경제적·생산적·사회경제적 조건의,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조건의 물질적 실현을 가장 뚜렷이 체현한 나라가 되었다.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다면 그것은 즉시, 그리고 아주 쉽게 제국주의의 어떤 껍데기도 부술 것이며(그 껍데기는 불행히도 최상급 강철로 만들어져 있어 어떤 병아리의 힘으로도 깨질 수 없다), 세계 사회주의의 승리를 확실하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또는 아주 사소한 어려움만으로 가져올 것이다. 물론 '어려움'이라는 말로 우리가 편협한 속물의 의미가 아니라 세계사적 규모의 어려움을 뜻한다면 말이다.

독일에서 혁명이 '나오기'를 아직 더디게 하는 동안, 우리의 임무는 독일인의 국가자본주의를 연구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데 온 힘을 쏟으며, 야만적인 러시아가 서구 문화를 모방하는 것을 앞당기기 위해 독재적 방법을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야만과 싸우는 데 야만적 방법을 쓰기를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리 혁명가에게 독일 제국주의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카렐린식 사색에 빠지는 아나키스트나 좌익 사회혁명당원(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의 카렐린과 게의 연설이 즉시 떠오른다)이 있다면,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혁명은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마땅히) 파멸하리라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며, 거기에서 대규모 국가자본주의로 이어지는 길과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길은 '생산과 분배의 전국적 계산과 통제'라는 하나의 동일한 중간역을 거치는 하나의 동일한 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경제학에서 용서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삶의 사실을 모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아니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추상적으로 비교하는 데 그치면서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인 이행의 구체적 형태와 단계를 연구하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것이야말로 『노바야 지즌』과 『브페료드』[2] 진영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오도한 바로 그 이론적 오류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쁘고 평범한 자들은 어리석음과 무기력 때문에 자기가 경외하는 부르주아지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들은 사회주의의 스승들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 전체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사회의 '길고 긴 산고'[3]를 강조한 데에 이유가 없지 않았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회 또한 하나의 추상이며, 그것은 이런저런 사회주의 국가를 창조하려는 다양하고 불완전한 구체적 시도들의 연속을 통과함으로써만 존재하게 될 수 있다.

러시아는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공통된 지반(전국적 계산과 통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경제 상황에서 전진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로의 진화'로 남들과 자기 자신을 겁주려는 시도는 완전한 이론적 헛소리다. 이것은 '진화'의 참된 길에서 생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이 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천적으로 그것은 우리를 소소유자적 자본주의로 되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내가 이렇게 국가자본주의에 '높은' 평가를 부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기 전에도 그렇게 했음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1917년 9월에 쓴 내 팸플릿 『임박한 파국과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다음 대목을 인용하는 자유를 취한다.

"융커·자본가 국가, 지주·자본가 국가 대신에 혁명적 민주주의 국가, 즉 혁명적 방식으로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혁명적 방식으로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를 도입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국가를 놓아 보라. 그러면 진정으로 혁명적·민주주의적인 국가가 주어졌을 때 국가독점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란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으로부터의 바로 다음 걸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한 물질적 준비이며, 사회주의의 문턱이며, 그것과 사회주의라 불리는 단 사이에 아무런 중간 단이 없는 역사의 사다리의 한 단이다." (27, 28쪽)

이것이 케렌스키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쓰였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논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 유의하라. 우리가 이 정치적 사다리에서 높이 서 있을수록, 소비에트 안에 사회주의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더 완전하게 구현할수록 '국가자본주의'를 덜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물질적·경제적·생산적 관점에서 우리가 아직 사회주의의 '문턱'에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직 이르지 못한 '문턱'을 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다음의 이야기도 대단히 시사적이다.

우리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부하린 동지와 논쟁했을 때, 그는 무엇보다도 전문가들에게 높은 봉급을 주는 문제에 관해 '그들'이 '레닌보다 오른쪽에' 있다고 선언했다. 이 경우에 '그들'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노동계급이 '그들 전부를 사들이는' 편[4](즉 자본가 전부를,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로부터 토지·공장·작업장 및 기타 생산수단을 사들이는 편)이 더 합목적적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염두에 두고,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발언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을 주의 깊게 검토해 보자.

마르크스는 지난 세기 70년대의 영국, 즉 독점 이전 자본주의 발전의 정점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군국주의와 관료주의가 덜 두드러진 나라였고, 노동자가 부르주아지를 '사들인다'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평화적' 승리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였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어떤 조건하에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를 사들이기를 결코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이나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들을 형식의 문제, 혁명 수행의 방식과 수단에 묶어 두지 않았다. 그는 방대한 수의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리라는 것, 혁명의 과정에서 상황 전체가 바뀌리라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이 혁명의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또 자주 바뀌리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어떤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 이후, 착취자들의 무장 저항과 사보타주를 분쇄한 이후, 만약 반세기 전 영국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시작되었다면 존재했을 조건에 상응하는 일정한 조건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당시 영국에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다음 사정들 덕분에 보장되었을 것이다. (1) 농민층의 부재로 인한 인구 중 노동자,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 우세(70년대 영국에는 농업 노동자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극히 빠르게 확산되리라는 희망을 주는 징후가 있었다), (2) 노동조합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훌륭한 조직(이 점에서 영국은 당시 세계 선두였다), (3) 수 세기에 걸친 정치적 자유의 발전으로 훈련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교적 높은 문화 수준, (4) 잘 조직된 영국 자본가들이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타협으로 해결하는 오랜 습관(당시 영국 자본가는 세계 어느 나라 자본가보다도 잘 조직되어 있었다. 이 우위는 이제 독일로 넘어갔다). 이러한 사정들이 당시 노동자에 의한 영국 자본가의 평화적 복속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이 복속이 근본적 의의를 지닌 일정한 전제들(10월의 승리와, 10월부터 2월까지 자본가들의 무장 저항 및 사보타주의 진압)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인구 중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 우세와 그들 사이의 높은 조직 수준 대신에, 러시아에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은 프롤레타리아가 빈농과 갑작스러운 몰락을 겪은 이들에게서 받은 지지였다. 끝으로 우리에게는 높은 문화 수준도, 타협의 습관도 없다. 이 구체적 조건들을 주의 깊게 고려한다면, 우리가 지금 두 가지 방법의 결합을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국가자본주의'와 아무 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고 어떤 형태의 타협도 고려하지 않으며 투기로써, 빈농을 매수함으로써 소비에트가 취한 조치의 실현을 계속 방해하는 무교양한 자본가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국가자본주의'에 동의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능력이 있으며, 수천만 명에게 실제로 제품을 공급하는 최대 규모 기업의 지적이고 경험 많은 조직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용한 교양 있는 자본가들을 타협의 방법으로, 즉 사들이는 방법으로 대해야 한다.

부하린은 대단히 박식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바로 대규모 생산의 조직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노동자들에게 가르쳤을 때 깊이 옳았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예외로서, 그리고 당시 영국은 예외였다) 만약 자본가들이 평화적으로 굴복하고 충분한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교양 있고 조직된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넘어오도록 강제하는 사정이 있다면, 자본가들에게 충분히 지불하고 그들을 사들인다는 생각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부하린은 현재 러시아 상황의 특수성을 충분히 깊이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었다. 그것은 예외적인 상황으로서, 우리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 체제에서, 노동자 정치권력의 강도에서 어떤 영국이나 어떤 독일보다도 앞서 있지만, 좋은 국가자본주의를 조직하는 면에서, 문화 수준에서, 사회주의의 '도입'을 위한 물질적·생산적 준비 정도에서는 서유럽의 가장 후진적인 나라보다도 뒤처져 있다. 현 상황의 특수한 성격이, 소비에트 권력에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가능한 한 최대 규모로 '국가' 생산을 조직하는 데 정직하게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본가 가운데 가장 교양 있고 가장 재능 있고 가장 유능한 조직자들에게 노동자가 제안해야 할 특수한 유형의 '사들이기' 조작의 필요성을 낳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가 두 가지 오류 — 둘 다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닌 — 를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한편으로, 우리의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 사이에 불일치가 있으므로 우리가 권력을 잡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고 선언하는 것은 치명적 오류일 것이다. 이런 논변은 오직 '외투 두른 인간'만이 내놓을 수 있다. 그는 그런 '불일치'가 언제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서만이 아니라 자연의 발전에서도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 오직 일련의 시도들 — 그 각각은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일면적이고 어떤 비일관성을 지닐 것이다 — 을 통해서만 모든 나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협력에 의해 완전한 사회주의가 창조되리라는 것을 잊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눈부신' 혁명적 정신에 도취되지만 이행의 가장 어려운 단계들을 고려하는 지속적이고 사려 깊고 신중한 혁명 사업은 감당하지 못하는 떠벌이와 미사여구꾼들에게 자유로운 고삐를 주는 것도 명백한 오류일 것이다.

다행히도 혁명적 정당들의 발전사와 볼셰비즘이 그들과 벌인 투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뚜렷이 구별되는 유형들의 유산을 남겨 주었으며, 그중 좌익 사회혁명당원과 아나키스트는 나쁜 혁명가의 두드러진 사례다. 그들은 지금 '우파 볼셰비키'의 '타협'에 반대하여 히스테릭하게, 목이 메고 쉬도록 외쳐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타협'에서 무엇이 나쁜지, 왜 '타협'이 역사와 혁명의 경과에 의해 정당하게 단죄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케렌스키 시절의 타협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을 뜻했고, 권력 문제는 모든 혁명의 근본 문제다. 1917년 10~11월 볼셰비키 일부의 타협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을 두려워했거나 좌익 사회혁명당원 같은 '믿을 수 없는 동반자'뿐 아니라 적들, 즉 체르노프파와 멘셰비키와도 권력을 균등하게 나누어 갖기를 바랐음을 뜻했다. 후자는 제헌의회 해산, 보가옙스키 일당의 무자비한 진압, 소비에트 기구의 보편적 수립, 그리고 모든 몰수 행위 같은 근본 문제에서 필연적으로 우리를 방해했을 것이다.

이제 권력은 '믿을 수 없는 동반자'조차 없이 단일한 당,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의 수중에 장악되고 유지되고 공고화되었다. 권력 분점의 문제도,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 문제도 있을 수 없는 지금 타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암기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나라를 통치할 수 있고 또 통치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소소유자적 해체에 맞서 자본주의가 길러 낸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비용을 아끼지 않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우리 복무에 두려 한다는 사실을 '타협'이라 부르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경제적 과제에 대해 사유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낼 뿐이다.


현물세, 거래의 자유, 그리고 이권 양여

위에 인용한 1918년의 논의에는 시기와 관련하여 몇 가지 오류가 있다. 그 기간들은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길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기본 요소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대단히 많은 경우에 '빈'농(프롤레타리아와 반프롤레타리아)이 중농이 되었다. 이는 소소유자적·소부르주아적 '요소'의 증가를 낳았다. 1918~20년의 내전은 나라의 황폐를 심화시켰고, 생산력의 회복을 지연시켰으며, 어느 계급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피를 흘리게 했다. 여기에 1920년의 흉작, 사료 부족, 가축의 손실이 더해져,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된 연료인 목재를 실어 나르는 데 농민의 말을 쓰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운송과 공업의 재건이 한층 더 지연되었다.

그 결과 1921년 봄의 정치적 상황은, 농민의 상태를 개선하고 그들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즉각적이고 매우 단호하며 긴급한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왜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인가?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려면 곡물과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이것이 현재 가장 큰 '병목'이다. 왜냐하면 농민층의 상태를 개선하고 그들의 생산력을 높이지 않고서는 곡물의 생산과 수집, 연료의 저장과 배달을 늘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농민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농민을 앞세우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라거나 그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저 생각을 멈춘 채 말의 힘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책의 지도다. 지도하고 지배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가장 긴급하고 '골치 아픈'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가장 긴급한 일은 농민 경영의 생산력을 즉시 증대시킬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오직 이 길로만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화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를 거부하는 프롤레타리아 또는 프롤레타리아의 대표는 사실상 자신이 백위군과 자본가의 공범임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직업적 이익을 그들의 계급적 이익 위에 놓는 것이며, 노동자를 위한 즉각적이고 단기적이며 부분적인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 그 독재, 지주와 자본가에 맞선 농민과의 동맹, 그리고 자본의 멍에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는 투쟁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희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첫째로 필요한 것은 농민의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즉각적이고 진지한 조치들이다.

이는 우리의 식량 정책에 중요한 변화를 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변화의 하나가 식량징발제를 현물세로 대체한 것이며, 이는 세금을 낸 뒤에 적어도 지역적 경제 교환에서는 자유 시장을 함의한다.

이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점에 관해 잘못된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이는 주로 이 이행의 의미를 연구하거나 그 함의를 규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변화가 일반적인 공산주의로부터 일반적인 부르주아 체제로의 변화라고 상정되기 때문이다. 이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1918년 5월에 이야기된 바를 참조해야 한다.

현물세는, 극심한 궁핍과 파탄과 전쟁이 우리에게 강요했던 저 독특한 전시공산주의로부터 정상적인 사회주의적 생산물 교환으로 이행하는 형태의 하나다. 그리고 후자는 다시, 압도적으로 소농적인 인구 구성에서 비롯한 특유한 성격을 지닌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형태의 하나다.

이 독특한 전시공산주의하에서 우리는 군대의 필요를 충족하고 노동자를 부양하기 위해 농민에게서 사실상 모든 잉여를, 때로는 그의 필수품의 일부까지도 가져갔다. 그 대부분은 종이돈을 주고 빌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황폐한 소농의 나라에서 지주와 자본가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착취자들이 세계 최강국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음에도) 이겼다는 사실은, 노동자와 농민이 자신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어떤 영웅적 기적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줄 뿐 아니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과 카우츠키 일당이 이 전시공산주의를 두고 우리를 비난했을 때 그들이 부르주아지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 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얼마만큼 인정받아야 하는가 역시 똑같이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를 전시공산주의로 몰아넣은 것은 전쟁과 파탄이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과제에 상응하는 정책이 아니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임시변통이었다. 소농의 나라에서 독재를 행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올바른 정책은 농민이 필요로 하는 공산품을 주고 곡물을 얻는 것이다. 그것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에 상응하는 식량 정책이며, 사회주의의 토대를 강화하고 그것의 완전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식량 정책이다.

현물세는 이 정책으로의 이행이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부담(그것은 어제까지 계속되었고 자본가들의 탐욕과 악의로 인해 내일 다시 터질 수도 있다)으로 너무나 황폐하고 짓눌려 있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곡물에 대해 농민에게 공산품을 줄 수 없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현물세를 도입한다. 즉 우리는 (군대와 노동자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곡물을 세금 형태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공산품과의 교환으로 얻을 것이다.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우리의 빈곤과 황폐가 너무나 커서 우리는 대규모 사회주의적 국영 공업을 단번에 복구할 수 없다. 그것은 대도시 공업 중심지에 곡물과 연료의 대규모 비축이 있고 낡은 기계를 교체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경험은 이것이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켰고, 파괴적인 제국주의 전쟁 이후에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조차 상당히 긴 세월에 걸쳐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소공업의 복구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소공업은 국가에 기계도, 대량의 원료·연료·식량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농민 경영에 즉시 얼마간 도움을 주고 그 생산력을 곧바로 높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가?

그것은 (설령 지역적인 것에 그친다 해도) 어느 정도의 거래의 자유에 기초한 소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의 부활이다. 그것은 확실한 일이며 눈을 감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그것이 필요한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위험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들이 많이 제기되고 있으며, 대부분은 완곡히 말해도 단순함의 증거일 뿐이다.

우리 경제의 여러 사회·경제적 구조의 요소(구성 부분)에 관한 1918년 5월의 내 정의를 보라. 가부장적, 즉 반야만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주의적 체제에 이르기까지 이 다섯 단계(또는 구성 부분), 다섯 가지 경제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소농의 나라에서 부분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부분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소농적 '구조'가 우세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일단 교환이 존재하면 소경영은 소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의 초보적이며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이고, 문외한의 일상 경험조차 이를 확인해 줄 것이다.

이 경제적 현실 앞에서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은 무엇인가? 소농의 곡물과 원료를 대가로, 대규모 사회주의적 공업이 생산한 재화 가운데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인가? 이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올바른' 정책일 것이며, 우리는 그 길에 착수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재화를 공급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우리는 아주 빠른 시일 안에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전국 전화(電化)의 첫 단계를 완료하기 전에는 그렇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사적인, 비국가적 교환, 즉 상업, 즉 자본주의 — 수백만 소생산자가 있는 곳에서는 불가피한 — 의 모든 발전을 전면 금지하고 자물쇠를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책은 그것을 시도하는 당에게 어리석고 자살적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리석고, 그것을 시도하는 당이 필연적 파국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자살적이다. 인정하자. 어떤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그런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죄를 지었다. 우리는 이 오류들을 바로잡으려 할 것이며, 이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태는 매우 유감스러운 지경에 이를 것이다.

또 다른 길(그리고 이것이 유일하게 분별 있고 마지막으로 가능한 정책이다)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금지하거나 자물쇠를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국가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끄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으로 가능한데, 왜냐하면 자유로운 거래와 자본주의 일반의 요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국가자본주의가 — 형태와 정도를 달리하며 —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가자본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양립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1918년 5월에 주장한 바다. 나는 그때 그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국가자본주의가 (소가부장적이든 소부르주아적이든) 소소유자적 요소에 비하면 전진임을 증명했다.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하고만 비교하는 자들은 수많은 오류를 범한다. 현재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에서는 국가자본주의를 소부르주아적 생산과도 비교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문제의 전부는, (어느 정도, 그리고 얼마 동안은 불가피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국가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끄는 올바른 방법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그것이 사회주의로 전화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어떤 조건으로 그것을 둘러싸야 할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소비에트 체제 내부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틀 안에서 국가자본주의가 실제로 무엇이 될 것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가능한 한 분명하게 그려 보아야 한다.

이권 양여(concession)는 소비에트 정부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국가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끌고 국가자본주의를 '이식'하는 방식의 가장 단순한 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권 양여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 함의를 모두 생각해 보았는가? 위에서 언급한 경제 형태들과 그 상호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소비에트 체제하의 이권 양여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소유자적(가부장적·소부르주아적) 요소에 맞선, 소비에트 즉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과 국가자본주의 사이의 협정이자 동맹이자 블록이다. 이권 양수자는 자본가다. 그는 이윤을 위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며, 초과이윤이나 달리 얻을 수 없거나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얻을 수 있는 원료를 얻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정부와 협정을 맺을 용의가 있다. 소비에트 권력은 생산력의 발전과, 즉시 또는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늘어난 양의 재화를 확보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예컨대 우리에게는 백 개의 유전, 광산, 삼림 지대가 있다. 우리는 기계도, 식량도, 운송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다 개발할 수 없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다른 지역을 개발하는 데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유다. 대기업의 발전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소소유자적 요소가 온갖 형태로 더 두드러지고, 이는 주변(나중에는 전체) 농민 경영의 악화, 그 생산력의 파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신뢰의 저하, 좀도둑질과 만연한 (가장 위험한) 잔챙이 투기 등으로 나타난다. 이권 양여 형태로 국가자본주의를 '이식'함으로써 소비에트 정부는 소생산에 맞서 대규모 생산을, 후진적 생산에 맞서 선진적 생산을, 수공업적 생산에 맞서 기계제 생산을 강화한다. 또한 그것은 대규모 공업 생산물을 더 많은 양으로(자기 몫의 산출을) 얻으며, 소부르주아적 관계의 무정부 상태에 맞서 국가가 규제하는 경제 관계를 강화한다. 이권 양여 정책을 절도 있고 신중하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아주 겸손한 정도로나마) 공업 상태와 노동자·농민의 처지를 빠르게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일정한 희생과, 매우 귀중한 생산물 수백만 푸드를 자본가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얻게 될 것이다. 이권 양여가 위험이 되기를 그치고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환되는 규모와 조건은 힘의 관계에 달려 있으며 투쟁 속에서 결정된다. 이권 양여 또한 하나의 투쟁 형태이고, 다른 형태로 계급투쟁이 계속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계급 전쟁을 계급 평화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투쟁의 방법은 실천이 결정할 것이다.

소비에트 체제 내 다른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이권 양여는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국가자본주의 형태일 것이다. 그것은 가장 문명화되고 선진적인 서유럽 자본주의와의 형식적인 문서 협정을 수반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득과 손실, 우리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 우리는 이권이 부여되는 기간을 정확히 안다. 협정이 조기 상환을 규정하는 경우 그 상환 조건도 정확히 안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 일정한 '공납'을 지불한다. 우리는 일정한 조정하에 우리 자신을 '되사며', 그로써 즉시 소비에트 권력을 안정시키고 우리의 경제 조건을 개선한다. 이권 양여의 어려움은 오로지, 협정을 맺을 때 모든 사정을 적절히 고려하고 평가하며 그다음에 그것이 이행되도록 감시하는 데 있다. 어려움은 분명히 있으며, 처음에는 아마 오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 혁명의 다른 문제들, 특히 국가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허용하고 이식하는 다른 형태들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에 비하면 사소한 어려움이다.

현물세의 도입과 관련하여 모든 당 일꾼과 소비에트 일꾼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권 양여' 정책의 원리(즉 '이권 양여'식 국가자본주의와 유사한 정책)를 자본주의의 다른 형태들 — 자유로운 거래, 지역적 교환 등 — 에 적용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을 보자. 현물세 법령이 즉시 협동조합 관련 규정의 개정과 그 '자유' 및 권리의 일정한 확대를 필요하게 만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협동조합 역시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이지만, 덜 단순한 형태다. 그 윤곽은 덜 뚜렷하고 더 복잡하며, 따라서 정부에게 더 큰 실천적 어려움을 만들어 낸다. 소상품 생산자의 협동조합(우리가 논하는 것은 소농의 나라에서 지배적이고 전형적인 형태로서 노동자 협동조합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은 필연적으로 소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관계를 낳고 그 발전을 촉진하며 소자본가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준다. 소소유자가 우세하고 교환이 필요하고도 가능한 이상 달리 될 수 없다. 러시아의 현 조건에서 협동조합의 자유와 권리는 자본주의의 자유와 권리를 뜻한다. 이 명백한 진리에 눈을 감는 것은 어리석거나 범죄적인 일이다.

그러나 사적 자본주의와 달리 소비에트 체제하의 '협동조합적' 자본주의는 국가자본주의의 한 변종이며, 그런 것으로서 현재 우리에게 — 물론 일정한 한도 안에서 — 유리하고 유용하다. 현물세는 (세금으로 거두는 것 이상의) 잉여 곡물의 자유로운 판매를 뜻하므로, 우리는 이 자본주의의 발전 — 자유 시장이란 곧 자본주의의 발전이므로 — 을 협동조합적 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끄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국가자본주의를 닮은 점은, 계산·통제·감독을 쉽게 하고 국가(이 경우 소비에트 국가)와 자본가 사이에 계약 관계를 수립하기 쉽게 한다는 데 있다. 협동조합적 상업이 사적 상업보다 더 유리하고 유용한 것은 위에 든 이유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수백만 명의, 나아가 결국에는 전 인구의 결합과 조직을 촉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후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막대한 이득이다.

이권 양여와 협동조합을 국가자본주의의 두 형태로 비교해 보자. 이권 양여는 대규모 기계제 공업에 기초한다. 협동조합은 소규모의 수공업적 산업, 부분적으로는 가부장적 산업에까지 기초한다. 각각의 이권 협정은 한 명의 자본가, 한 개의 회사·신디케이트·카르텔·트러스트와 관계된다. 협동조합은 수천, 수백만의 소소유자를 포괄한다. 이권 양여는 정해진 기간의 명확한 협정을 허용하며 또 전제한다. 협동조합은 어느 쪽도 허용하지 않는다. 협동조합에 관한 법을 폐지하는 것은 이권 협정을 파기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만, 협정의 파기는 자본가와의 경제적 동맹 또는 경제적 공존이라는 실천적 관계의 갑작스러운 단절을 뜻하는 반면, 협동조합에 관한 법 — 또는 어떤 법이든 — 의 폐지는 소비에트 권력과 소자본가의 실천적 공존을 즉시 끊지 못하며, 대체로 실제의 경제적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이권 양수자를 '감시'하기는 쉽지만 협동조합원을 감시하기는 쉽지 않다. 이권 양여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대규모 생산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이다. 소소유자적 협동조합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소규모 생산에서 대규모 생산으로의 이행, 즉 더 복잡한 이행이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더 폭넓은 인민 대중을 포괄하고, 모든 '혁신'에 가장 완강히 저항하는 낡은 전(前)사회주의적, 나아가 전(前)자본주의적 관계의 더 깊고 질긴 뿌리를 뽑아낼 수 있다. 이권 양여 정책은 성공한다면 우리 자신의 것에 비해 현대 선진 자본주의 수준으로 세워진 몇 개의 모범적 대기업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몇십 년 뒤 이 기업들은 통째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협동조합 정책은 성공한다면 소경영을 끌어올리고, 자발적 결합에 기초한 대규모 생산으로의 이행을 무기한의 기간 안에서 촉진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국가자본주의의 세 번째 형태를 보자. 국가는 자본가를 상인으로 끌어들여, 국가 재화의 판매와 소생산자 생산물의 구매에 대해 일정한 수수료를 지불한다. 네 번째 형태. 국가는 국가에 속한 산업 시설, 유전, 삼림 지대, 토지 등을 자본가 기업가에게 임대하는데, 이 임대는 이권 협정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후자의 국가자본주의 형태를 언급하지도, 생각하지도, 주목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강하고 영리해서가 아니라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속한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를 두려워하고, 너무 자주 '드높이는 기만'[5]에 굴복한다. 우리는 '우리'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있다고 되풀이해 말하지만, 그 '우리'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얻으려 애쓰지 않는다. 이 그림을 명확히 하려면, 1918년 5월 5일자 글에서 내가 제시한 국민경제의 구성 부분 전체와 그 모든 다양한 형태의 목록을 예외 없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 즉 전위,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 부대는 곧바로 사회주의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선진 부대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작은 부분일 뿐이고,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는 다시 전 인구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이행이라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려면, 전자본주의적 관계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어떤 중간의 길·방법·수단·도구가 필요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의 전부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를 보라. 볼로그다 북쪽, 로스토프나도누와 사라토프 남동쪽, 오렌부르크와 옴스크 남쪽, 톰스크 북쪽에 펼쳐진 저 광대한 지역에는 수십 개의 큰 문명국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 그곳은 가부장제와 반야만, 그리고 노골적인 야만의 왕국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 마을과 철도 — 즉 대도시, 대규모 공업, 자본주의, 문화와의 물질적 연결 — 사이에 수십 베르스타의 시골길, 아니 길 없는 벌판이 놓인 저 농촌 오지는 어떤가? 그곳 역시 전면적 가부장제와 오블로모프주의[6]와 반야만의 영역이 아닌가?

러시아에 지배적인 상태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즉각적 이행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다,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단 한 가지 조건에서 그렇고, 그 조건의 정확한 성격을 우리는 완수된 위대한 과학적 작업[7] 덕분에 이제 알고 있다. 그것은 전화(電化)다. 만약 우리가 수십 개의 지역 발전소를 건설하고(우리는 이제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건설할 수 있고 또 건설해야 하는지 안다), 모든 마을에 전력을 보내고, 충분한 수의 전동기와 기타 기계를 얻는다면, 우리는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사이에 어떤 이행 단계나 중간 고리도 필요로 하지 않거나 거의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 가지' 조건의 첫 단계를 완료하는 데만도 최소 10년이 걸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기간은 오직 영국, 독일, 미국 같은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할 경우에만 단축될 수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는 가부장제와 소생산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할 수 있는 중간 고리들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따금 여전히 "자본주의는 해악이고 사회주의는 이로움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논변은 틀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경제 형태들의 총체를 고려하지 않고 그중 둘만을 떼어 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비하면 해악이다. 자본주의는 중세, 소생산, 그리고 소생산자의 분산에서 생겨나는 관료주의의 폐해에 비하면 이로움이다. 우리가 아직 소생산에서 사회주의로 직접 나아갈 수 없는 한, 소생산과 교환의 자연발생적 산물로서 어느 정도의 자본주의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특히 그것을 국가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끎으로써) 소생산과 사회주의 사이의 중간 고리로서,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수단이자 길이자 방법으로서 이용해야 한다.

관료주의의 폐해가 갖는 경제적 측면을 보라. 1918년 5월 5일에 우리는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10월 혁명 여섯 달 뒤, 낡은 관료 기구가 위에서 아래까지 분쇄된 상태에서 우리는 그 폐해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1년 뒤 러시아 공산당 제8차 대회(1919년 3월 18~23일)[8]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체제 내부에서의 관료주의의 부분적 부활"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악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고 폭로하고 규탄하며 그것과 싸울 사상과 의지와 에너지와 행동을 자극하고자 했다.

2년 뒤인 1921년 봄, 관료주의의 폐해를 논의한 제8차 소비에트 대회(1920년 12월) 이후, 그리고 이 폐해의 분석과 밀접히 연결된 논쟁들을 총괄한 러시아 공산당 제10차 대회(1921년 3월) 이후, 우리는 그 폐해가 한층 더 뚜렷하고 험악해진 것을 본다. 그 경제적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한편으로 발달한 부르주아지는 노동자(그리고 부분적으로 농민)의 혁명 운동에 맞서기 위해 관료 기구, 주로 군사 기구, 그다음으로 사법 기구 등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의 법정은 부르주아지를 겨냥한 계급 법정이다. 우리의 군대는 부르주아지를 겨냥한 계급 군대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군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에 봉사하는 기관들 안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료주의적 관행은 다른 경제적 뿌리를 갖는다. 즉 소생산자의 원자화되고 분산된 상태, 그의 빈곤·문맹·문화 결여, 도로의 부재, 농업과 공업 간 교환의 부재, 그 둘 사이의 연결과 상호작용의 부재다. 이는 대체로 내전의 결과다. 우리는 봉쇄당하고 사방에서 포위되고 세계 전체로부터, 나중에는 곡창인 남부와 시베리아와 탄전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공업을 복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전시공산주의를 도입하는 데 주저하거나 가장 극단적인 조치를 감행하기를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노동자·농민의 지배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반기아 상태, 아니 반기아보다 더한 상태를 견뎌야 했으나, 전례 없는 파탄과 경제적 교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버텨야 했다. 우리는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처럼 겁먹지 않았다(그들은 사실 겁을 먹었기 때문에 대체로 부르주아지를 뒤따랐다). 그러나 봉쇄된 나라, 포위된 요새에서 승리에 결정적이었던 요인은, 마지막 백위군 병력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된 바로 그때, 1921년 봄에 이르러 그 부정적 측면을 드러냈다. 포위된 요새에서는 모든 교환을 '자물쇠로 잠그는' 것이 가능했고 또 반드시 필요했다. 대중이 비상한 영웅주의를 발휘하면서 이는 3년간 견딜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소생산자의 몰락이 심해지고 대규모 공업의 복구는 더욱 지연되고 미루어졌다. '포위'의 유산이자 고립되고 짓밟힌 소생산자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로서 관료주의적 관행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악과 더 굳세게 싸우기 위해, 또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 위해 그것을 두려움 없이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여러 차례 이렇게 해야 할 것이고, 미완의 일을 마무리하고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을 택해야 할 것이다. 대규모 공업의 복구가 명백히 지연되는 상황에서, 공업과 농업 사이의 교환을 '자물쇠로 잠그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즉 소공업을 복구하고, 그쪽에서 일을 도우며, 전쟁과 봉쇄로 반쯤 허물어진 구조물의 그 측면을 떠받쳐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 설정한 한계(경제에서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몰수, 정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지배)는 충분히 좁고 '온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물세의 근본 사상이자 경제적 의의다.

모든 당 일꾼과 소비에트 일꾼은, 농민 경영을 즉시 개선하고 — 설령 '작은' 수단으로, 작은 규모로라도 — 소규모 지역 공업의 발전을 통해 그것을 돕는다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경제 발전에서 최대한의 지역적 창발성을 이끌어 내는 데 힘과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구베르니야에서, 더 나아가 우예즈드에서, 더 나아가 볼로스트와 마을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통합 국가 경제 계획은 이것이 관심과 '우선적' 노력의 초점이 될 것을 요구한다. 가장 넓고 깊은 '토대'에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의 일정한 개선이 대규모 공업의 더 활기차고 성공적인 복구로의 가장 빠른 이행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식량 담당 일꾼은 오직 하나의 근본 지시만을 알고 있었다. 곡물 징발분의 100퍼센트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이제 그는 또 하나의 지시를 받는다. 가능한 한 짧은 기간에 세금의 100퍼센트를 수집하고, 그다음 대규모 공업과 소공업의 재화와 교환하여 또 다른 100퍼센트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세금의 75퍼센트와 (두 번째 100 가운데) 75퍼센트를 대규모 공업 및 소공업 재화와의 교환으로 수집하는 사람은, 세금의 100퍼센트와 (두 번째 100 가운데) 55퍼센트를 교환으로 수집하는 사람보다 전국적으로 더 유용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제 식량 담당 일꾼의 과제는 더 복잡해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재정적 과제다. 즉 세금을 가능한 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거두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일반적인 경제적 과제다. 즉 협동조합을 지도하고, 소공업을 지원하고, 지역적 창발성을 발전시켜 농업과 공업 사이의 교환을 늘리고 그것을 건전한 기초 위에 올려놓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료주의적 관행은 우리가 아직 이 일을 매우 서투르게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우리가 아직 자본가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러 구베르니야, 우예즈드, 볼로스트, 마을의 실천적 경험을 비교할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크고 작은 사적 자본가들이 이만큼을 이루었고, 그것이 그들의 대략적 이윤이다. 그것이 우리가 '수업'의 대가로 치러야 할 공납이자 수업료다. 무언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치르기를 꺼리지 않을 것이다. 이웃 지역에서는 협동을 통해 이만큼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협동조합의 이윤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지역에서는 순전히 국가적·공산주의적 방법으로 이만큼이 이루어졌다(당분간 이 세 번째 경우는 드문 예외일 것이다).

현물세 납부 후 남는 잉여 재고를 위한 다양한 실험, 즉 여러 '교환' 체계를 즉시 조직하는 것이 모든 지역 경제 중심과 구베르니야 집행위원회 경제협의회의 첫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 몇 달 안에 비교와 연구를 위한 실천적 결과가 얻어져야 한다. 지역산 또는 반입된 소금,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오는 등유, 수공업적 목재 가공업, 지역 원료를 사용하여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농민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물품을 생산하는 수공업, '녹색 석탄'(전화를 위한 소규모 지역 수력 자원의 이용) 등등 — 이 모든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업과 농업 사이의 교환을 자극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한다. 설령 사적 자본주의의 수단으로라도, 설령 협동조합 없이, 또는 이 자본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직접 전화시키지 않고서라도 이 영역에서 최선의 결과를 이루는 사람은, 공산주의의 순수성을 두고 '숙고'하고 국가자본주의와 협동조합에 관한 규정과 규칙과 지침을 작성하되 상업을 자극하는 실천적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더 많이 기여할 것이다.

사적 자본이 사회주의를 돕는다는 것이 역설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실로 반박할 수 없는 경제적 사실이다. 이 나라는 운송이 극도로 붕괴된 소농의 나라이고, 운송 체계와 대규모 공업을 통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도 아래 전쟁과 봉쇄에서 벗어나고 있는 나라이므로, 첫째로 현 시점에 지역적 교환이 일급의 의의를 획득한다는 것, 둘째로 (국가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사적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주의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온다.

말꼬리를 잡지 말자.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런 것이 너무 많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실천적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더 폭넓게 연구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지역 사업의 모범적 조직이 중앙 국가 사업의 많은 부문보다 훨씬 큰 전국적 의의를 갖는다. 이것이 바로 농민 경영 일반에서, 특히 농업의 잉여 생산물을 공업 재화와 교환하는 문제에서 지금 지배적인 상황이다. 이 점에서 단 하나의 볼로스트에서라도 모범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어떤 인민위원부의 중앙 기구를 '모범적으로'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큰 전국적 의의를 갖는다. 지난 3년 반 동안 우리 중앙 기구는 어느 정도 해로운 타성을 획득할 만큼 비대해졌다.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개선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신선한 힘의 유입을 확보하고, 관료주의적 관행과 효과적으로 싸우고, 이 해로운 타성을 극복하는 일에 대한 지원은 지역과 하부 대열에서,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복합체'의 모범적 조직과 함께 와야 한다. 내가 '복합체'라 하는 것은 하나의 농장, 하나의 산업 부문,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지역에서라도 경제 관계의 총체, 경제적 교환의 총체를 뜻한다.

중앙에서 계속 일할 운명인 우리는, 아무리 겸손하고 당장 달성 가능한 규모에서라도 기구를 개선하고 관료주의적 폐해로부터 그것을 정화하는 과제를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에 대한 가장 큰 지원은 지역에서 오고 있고 또 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내가 관찰할 수 있는 한 지역의 사정이 중앙보다 낫다. 이는 이해할 만한 일인데, 당연히 관료주의의 폐해는 중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스크바는 공화국에서 최악의 도시일 수밖에 없고, 일반적으로 최악의 '지역'일 수밖에 없다. 지역에는 좋은 쪽과 나쁜 쪽 모두로 평균에서 벗어나는 편차가 있는데, 후자가 전자보다 드물다. 나쁜 쪽으로의 편차란 공산주의자에게 아첨하면서 때때로 농민에게 가증스러운 폭거와 전횡을 저지르는 전직 관리, 지주, 부르주아, 기타 쓰레기들이 범하는 남용이다. 이는 테러적 숙청, 약식 재판, 총살을 요구한다. 마르토프 같은 자들, 체르노프 같은 자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비당원 속물들이 가슴을 치며 이렇게 외치게 두라. "주여, 제가 '이들'과 같지 않고 결코 테러리즘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에 감사하나이다." 이 얼간이들이 '테러리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을 기만하는 데서 백위군의 비굴한 공범이 되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가 '테러리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대중을 백위군 테러리즘의 처분에 맡기는 자신들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에서 케렌스키 정권과 코르닐로프 반란이, 시베리아에서 콜차크 정권이, 그루지야에서 멘셰비즘이 증명했다. 이는 핀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2와 1/2'[9] 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증명했다. 백위군 테러리즘의 하인 노릇을 하는 공범들이 모든 테러리즘에 대한 부정 속에서 뒹굴게 두라. 우리는 쓰라리고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1914~18년 제국주의 전쟁 이후 전례 없는 위기, 낡은 유대의 붕괴, 계급투쟁의 격화에 시달리는 나라들에서 —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모든 나라를 뜻한다 — 위선자와 미사여구꾼들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즘은 없어서는 안 된다. 미국식, 영국식(아일랜드), 이탈리아식(파시스트), 독일식, 헝가리식 및 기타 유형의 백위군적·부르주아적 테러리즘이 있거나, 아니면 붉은 프롤레타리아 테러리즘이 있을 뿐이다. 중간의 길은 없고, '제3의' 길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좋은 쪽으로의 편차란 관료주의의 폐해와 싸우는 데서 이룬 성과, 노동자와 농민의 필요에 대한 큰 관심,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농업과 공업 사이의 지역적 교환을 자극하는 데서의 큰 배려다. 좋은 사례가 나쁜 사례보다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드물다. 그래도 그런 사례는 있다. 내전과 궁핍으로 단련된 젊고 신선한 공산주의적 힘이 모든 지역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 힘들을 아래에서 위로 규칙적으로 승진시키는 일을 아직 너무나 적게 하고 있다. 이는 지금보다 더 끈질기게, 더 넓은 규모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일부 일꾼은 중앙의 일에서 지역의 일로 옮길 수 있고 또 옮겨야 한다. 우예즈드와 볼로스트의 지도자로서 그들이 경제 사업 전체를 모범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면, 중앙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로움을 낳고 훨씬 더 큰 전국적 의의를 지닌 일을 수행할 것이다. 사업의 모범적 조직은 새로운 일꾼을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다른 지역이 비교적 쉽게 따를 수 있는 본보기를 제공할 것이다. 중앙에 있는 우리는 전국의 다른 지역들이 좋은 본보기를 '따르도록' 장려하기 위해,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것을 의무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업과 공업 사이의 '교환', 즉 세금 납부 후의 잉여를 소규모 — 주로 수공업적 — 공업의 산출물과 교환하는 사업은 그 본성상 독립적이고 유능하고 지적인 지역적 창발성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예즈드와 볼로스트에서 사업을 모범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전국적 견지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군사 문제에서, 예컨대 지난 폴란드 전쟁 때 우리는 관료적 위계에서 벗어나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위원들을 '강등'하거나 낮은 직위로 전임시키기를(중앙에서의 높은 직급은 유지하도록 허용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몇 명, 또는 콜레기움 위원이나 다른 고위 동지들을 우예즈드나 심지어 볼로스트 사업으로 전임시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설마 우리가 그것을 '부끄러워'할 만큼 '관료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중앙 기관의 일꾼 수십 명을 찾아낼 것이다. 공화국 전체의 경제 발전이 막대하게 이득을 볼 것이며, 모범적인 볼로스트나 우예즈드는 크다뿐 아니라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부수적으로, 투기와 싸우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필요한 변화를 작지만 의미 있는 사정으로서 지적해 두자. 우리는 '올바른' 상업, 즉 국가 통제를 회피하지 않는 상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투기는 '올바른' 상업과 구별될 수 없다. 거래의 자유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투기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투기를 더 이상 처벌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투기에 관한 모든 법률을 개정하고 다시 써야 하며, 모든 절취와 국가의 통제·감독·계산에 대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공공연하든 은폐되었든 모든 회피를 처벌 대상 범죄로 선언해야 한다(그리고 실제로 갑절의 엄격함으로 기소해야 한다). 문제를 이렇게 제기함으로써(인민위원회의는 이미 착수했다. 즉 반투기법 개정 작업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필요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국가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끄는 데 성공할 것이다.


정치적 총괄과 결론

이제 나는 위에서 개괄한 경제적 발전과 관련하여 정치 정세, 그리고 그것이 형성되고 변화해 온 방식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어야겠다.

나는 이미 1921년 우리 경제의 근본 특징이 1918년의 그것과 같다고 말했다. 1921년 봄은 주로 흉작과 가축 손실의 결과로, 전쟁과 봉쇄 때문에 이미 충분히 나빴던 농민의 처지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이는 일반적으로 소생산자의 바로 그 '본성'을 표현하는 정치적 동요를 낳았다. 그 가장 두드러진 표현이 크론시타트 반란이었다.

크론시타트 사건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소부르주아적 요소의 동요였다. 명확하고 규정되고 완전히 형성된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자유", "거래의 자유", "해방",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 소비에트 재선거, "당 독재"로부터의 해방 따위의 모호한 구호를 들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 모두 크론시타트 운동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빅토르 체르노프는 크론시타트로 사절을 보냈다. 그 사절의 제안에 따라, 크론시타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멘셰비키 발크는 제헌의회에 찬성표를 던졌다. 순식간에, 번개 같은 속도로 백위군은 모든 힘을 "크론시타트를 위해" 동원했다. 크론시타트에 있던 그들의 군사 전문가들 — 코즐롭스키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전문가 — 이 오라니엔바움 상륙 계획을 세웠고, 이는 동요하던 멘셰비키·사회혁명당원·무당파 대중을 겁먹게 했다. 국외에서 발행되는 50개가 넘는 러시아 백위군 신문이 "크론시타트를 위한" 광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대은행들, 금융자본의 모든 세력이 크론시타트를 지원할 자금을 모았다.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저 영악한 지도자, 카데트 밀류코프는 단순한 빅토르 체르노프에게 직접(그리고 크론시타트 사건과의 연관으로 페트로그라드에 수감된 멘셰비키 단과 로시코프에게 간접적으로) 제헌의회를 서두를 필요가 없으며 소비에트 권력은 지지될 수 있고 또 지지되어야 한다고 — 다만 볼셰비키 없이 —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물론 소부르주아적 미사여구꾼인 체르노프나, 마르크스주의로 통하도록 손질된 속물적 개량주의의 기사 마르토프 같은 자만한 얼간이들보다 영리하기는 쉽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점은 밀류코프가 개인으로서 머리가 더 좋다는 데 있지 않고, 대부르주아지의 당 지도자가 그 계급적 위치 때문에 소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 체르노프와 마르토프 같은 자들보다 사물의 계급적 본질과 정치적 상호작용을 더 분명히 보고 이해한다는 데 있다.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하에서 군주제하에서든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에서든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그리고 또한 필연적으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누리는 실제의 계급적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부르주아지, 즉 제2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모든 영웅들은 사물의 경제적 본성상 계급적 무력함의 표현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동요, 미사여구, 무력함이 나온다. 1789년에 소부르주아는 그래도 위대한 혁명가일 수 있었다. 1848년에 그들은 우스꽝스럽고 가련했다. 1917~21년에 그들의 실제 역할은, 이름이 체르노프든 마르토프든 카우츠키든 맥도널드든 그 무엇이든, 가증스러운 반동의 앞잡이이자 철저한 하수인의 역할이다.

마르토프는 자신의 베를린 잡지[10]에서 크론시타트가 멘셰비키 구호를 채택했을 뿐 아니라 백위군과 자본가와 지주의 이익에 전적으로 봉사하지는 않는 반볼셰비키 운동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선언했을 때, 자신이 속물적 나르키소스에 불과함을 드러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모든 진짜 백위군이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을 환영하고 은행을 통해 크론시타트를 위한 자금을 모았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자!" 체르노프나 마르토프 같은 자들에 비하면 밀류코프가 옳다. 그는 진짜 백위군 세력, 자본가와 지주의 세력의 참된 전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선언한다. "볼셰비키가 전복되기만 한다면, 권력의 이동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우리가 누구를 지지하든 — 아나키스트든 어떤 종류의 소비에트 정부든 — 상관없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멘셰비키에게든 아나키스트에게든, 볼셰비키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우리', 밀류코프들, '우리', 자본가와 지주들이 '스스로' 처리할 것이다. 우리가 시베리아에서 체르노프와 마이스키를, 헝가리에서 헝가리의 체르노프와 마르토프들을, 독일에서 카우츠키를, 빈에서 프리드리히 아들러 일당을 때려눕혔듯이 아나키스트 난쟁이들과 체르노프들과 마르토프들을 때려눕힐 것이다." 진짜배기 냉철한 부르주아지는 멘셰비키든 사회혁명당원이든 무당파든 이 속물적 나르키소스 수백 명을 바보로 만들었고, 모든 나라의 모든 혁명에서 수십 번 그들을 몰아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나르키소스들은 말할 것이고, 밀류코프들과 백위군은 행동할 것이다.

밀류코프가 "볼셰비키로부터 권력이 이동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조금 오른쪽이든 조금 왼쪽이든 상관없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전적으로 옳다. 이것은 모든 나라 혁명의 역사와, 중세 이래 수 세기의 근대사가 확인해 주는 계급적 진리다. 분산된 소생산자, 즉 농민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부르주아지에 의해 통일되거나(자본주의하에서 모든 나라, 모든 근대 혁명에서 늘 그러했고 또 늘 그럴 것이다),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통일된다(근대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들 가운데 몇몇의 정점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초보적 형태로 그러했고, 러시아에서는 1917~21년에 더 발전된 형태로 그러했다). 오직 나르키소스들만이 '제3의' 길, '제3의' 힘에 대해 말하고 꿈꿀 것이다.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 필사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통치할 능력이 있는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훈련시켰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고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4년간의 실천적 경험이라는 시험을 거친 뒤 러시아의 계급 세력 관계는 대낮처럼 분명해졌다. 유일한 혁명적 계급의 단련되고 담금질된 전위, 동요하는 소부르주아적 요소, 그리고 국외에서 기회를 노리며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는 밀류코프들과 자본가와 지주들. 어떤 '권력 이동'이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후자뿐이며 그들이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내가 위에 인용한 1918년의 팸플릿에서 이 점은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주적"은 "소부르주아적 요소"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통제와 계산에 종속시키든가, 아니면 그것이 노동자 권력을 전복하든가다. 그것은 바로 이 소소유의 토양에서 자라난 나폴레옹들과 카베냐크들에 의해 혁명이 전복되었던 것만큼이나 확실하고 필연적일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서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다."(1918년 5월 5일자 팸플릿에서 발췌. 위 참조)

우리의 힘은 완전한 명료함과, 러시아적이든 국제적이든 존재하는 모든 계급적 크기에 대한 냉철한 고려에,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무궁한 에너지와 철의 결의와 투쟁에 대한 헌신에 있다. 우리에게는 적이 많지만, 그들은 분열되어 있거나 (모든 소부르주아지, 모든 마르토프와 체르노프, 모든 무당파와 아나키스트처럼) 자기 마음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단결해 있다. 우리 자신들끼리 직접적으로, 그리고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와 간접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적 규모에서 무적이다. 물론 이것이 개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길든 짧든 일정 기간 패배할 가능성을 조금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소부르주아적 요소를 '요소'라 부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실로 가장 무정형하고 불확정하고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적 나르키소스들은 '보통선거'가 자본주의하 소생산자의 본성을 폐지한다고 상상한다. 실제로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교회, 신문, 교사, 경찰, 군국주의자, 그리고 천 가지 형태의 경제적 억압을 통해 분산된 소생산자를 복속시키는 것을 돕는다. 파탄과 궁핍과 가혹한 생활 조건이 동요를 낳는다. 하루는 부르주아지 편, 다음 날은 프롤레타리아트 편이다. 오직 단련된 프롤레타리아 전위만이 이 동요를 견디고 극복할 수 있다.

1921년 봄의 사건들은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역할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그들은 동요하는 소부르주아적 요소가 볼셰비키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자본가와 지주에게 유리한 '권력 이동'을 일으키도록 돕는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은 이제 '무당파'라는 가면을 쓰는 법을 배웠다. 이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오직 바보만이 이제 이를 보지 못하고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당파 협의회는 물신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무심한 대중 — 아직 정치 밖에 있는 수백만 근로자 — 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가치가 있다. 그것이 '무당파'로 위장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에게 연단을 제공한다면 해롭다. 그들은 반란을, 그리고 백위군을 돕고 있다. 공공연하든 무당파의 탈을 썼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있을 곳은 무당파 협의회가 아니라 감옥이다(또는 백위군과 나란히 외국 잡지에서다. 우리는 마르토프를 기꺼이 국외로 내보냈다). 우리는 대중의 정서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의회 놀이, 제헌의회 놀이, 무당파 협의회 놀이를 하고 싶은 자들에게 국외로 나가라고 제안한다. 거기서 마르토프 곁에서 '민주주의'의 매력을 시험해 보고 브란겔의 병사들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협의회'에서의 '반대파' 놀이를 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세계 부르주아지에 둘러싸여 있고, 그들은 '자기 사람들'을 되돌려 놓고 지주와 부르주아지를 복귀시키기 위해 동요의 모든 조짐을 노리고 있다. 우리는 공공연하든 '무당파' 가면을 썼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을 감옥에 가두어 둘 것이다.

우리는 정치에 손대지 않은 근로 대중과 더 긴밀한 접촉을 확립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다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에게, 그리고 밀류코프에게 이익이 되는 동요에 여지를 주는 수단은 예외다. 특히 우리는 소비에트 사업, 무엇보다 경제 사업에 수백 수백의 무당파 인사들을, 밀류코프에게 그토록 유리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지침을 베끼기 위해 무당파의 색깔을 걸친 자들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나온 진짜 무당파, 노동자와 농민의 평범한 대열을 열성적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수백 수천의 무당파 인사가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고, 수십 명은 매우 중요하고 책임 있는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수천 수천의 평범한 노동자를 승진시키고 시험하고, 체계적이고 끈질기게 검증하며, 경험이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면 그중 수백 명을 더 높은 직위에 임명하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행정이라는 자신의 실제 임무를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 애쓰다가 지쳐 버리고 모든 것을 감당하지 못하며, 스무 가지 일을 벌여 놓고 하나도 끝내지 못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수십 수백 명의 보조자의 일을 점검해야 하고, 자신의 일이 아래로부터, 즉 진짜 대중에 의해 점검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사업을 지도해야 하며, 지식을 가진 자들(전문가)과 대규모 생산 조직의 경험을 가진 자들(자본가)에게서 배워야 한다. 지적인 공산주의자는 군사 전문가의 10분의 9가 기회만 있으면 배신할 수 있음에도 그들에게서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현명한 공산주의자는 자본가가 군사 전문가보다 나을 것이 없음에도 자본가에게서(대규모 이권 양수자든, 수수료를 받는 대리인이든, 소자본가적 협동조합원이든)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붉은 군대에서 배신적인 군사 전문가를 적발하고, 정직하고 양심적인 자를 찾아내며, 대체로 수천 수만의 군사 전문가를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던가? 우리는 기사와 교사에 대해서도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같은 일을 배우고 있다. 다만 붉은 군대에서만큼 잘하지는 못하고 있다(거기서는 데니킨과 콜차크가 우리를 다그쳐 더 빠르고 부지런하고 지혜롭게 배우도록 강제했다). 우리는 또한 수수료 대리인,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구매인, 소자본가적 협동조합원, 이권 양수 기업가 등에 대해서도 (역시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처지는 당장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당파를 포함한 새로운 힘을 유용한 일에 투입함으로써 이를 달성할 것이다. 현물세와 그것에 연관된 여러 조치가 이를 촉진할 것이다. 그로써 우리는 소생산자의 불가피한 동요의 경제적 뿌리를 잘라 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밀류코프 외에는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정치적 동요와 무자비하게 싸울 것이다. 동요하는 자는 많고, 우리는 적다. 동요하는 자는 분열되어 있고, 우리는 단결해 있다. 동요하는 자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독립적이다. 동요하는 자는 자기 마음을 모른다. 그들은 무언가를 몹시 하고 싶어 하지만 밀류코프가 놓아두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승리할 이유다.


결론

요약하자면.

현물세는 전시공산주의에서 정상적인 사회주의적 생산물 교환으로의 이행이다.

1920년의 흉작으로 한층 심해진 극심한 파탄이, 대규모 공업을 빠르게 복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행을 긴급히 필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농민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 수단은 현물세, 농업과 공업 사이 교환의 발전, 그리고 소공업의 발전이다.

교환은 거래의 자유이며, 그것은 자본주의다. 그것은 소생산자의 분산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까지 관료주의의 폐해와 싸우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우리에게 유용하다.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는 실천적 경험이 결정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굳게 손에 쥐고 운송과 대규모 공업을 완전히 통제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투기와의 싸움은 절취 및 국가의 감독·계산·통제의 회피와 싸우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통제를 수단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자본주의를 국가자본주의의 수로로 이끌 것이다.

농업과 공업 사이의 교환을 장려하는 데서 지역적 창발성과 자주적 행동의 발전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대의 여지를 주어야 한다. 얻어진 실천적 경험은 연구되어야 하며, 이 경험은 가능한 한 다양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는 농민 경영에 봉사하고 그 개선을 돕는 소공업을 지원해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 이 지원은 국가 비축분에서 나오는 원료의 형태로 주어질 수 있다. 이 원료를 가공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은 가장 큰 범죄일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상인, 소자본가적 협동조합원, 자본가를 포함한 부르주아 전문가에게서 '배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가 군사 전문가에게서 배웠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배움'의 결과는 오직 실천적 경험에 의해, 그리고 곁에 있는 부르주아 전문가보다 일을 더 잘함으로써만 검증되어야 한다. 농업과 공업의 개선을 확보하고 그 둘 사이의 교환을 발전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노력하라. 그들에게 '수업료'를 아끼지 말라.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떤 수업료도 지나치게 비싸지 않다.

근로 대중을 돕고,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 대열에서 수백 수천의 무당파 인사를 경제 행정 사업으로 승진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하라. 크론시타트식의 유행하는 무당파 복장을 걸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에 불과한 '무당파' 인사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감옥에 안전하게 가두어 두거나 베를린으로 짐 싸 보내 마르토프와 합류시켜, 순수 민주주의의 온갖 매력을 마음껏 누리고 체르노프, 밀류코프, 그루지야 멘셰비키와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1921년 4월 21일


주석

  1. 레닌은 제10차 당대회 직후인 1921년 3월 말에 『현물세』 팸플릿 집필에 착수하여 4월 21일에 마쳤다. 그것이 신경제정책으로의 이행의 필요성을 설명했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빠른 출판과 배포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5월 초 팸플릿으로 출판되었고, 곧이어 잡지 『크라스나야 노비』 제1호에 실렸다. 이후 여러 도시에서 팸플릿 형태로 나왔고, 중앙 및 지역 신문에 부분적으로 또는 전문이 전재되었다. 1921년에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중앙위원회의 특별 결의는 모든 지역·구베르니야·우예즈드 당 위원회에 이 팸플릿을 사용하여 근로 인민에게 신경제정책을 설명하도록 지시했다.

  2. 『노바야 지즌』(새로운 삶) — 1917년 4월 18일(5월 1일)부터 1918년 7월까지 페트로그라드에서 멘셰비키 국제주의자 그룹과 잡지 『레토피스』(연대기) 기고자들이 발행한 일간지.

    레닌은 그들의 지배적 정서가 지적 회의주의였으며, 이는 무원칙성의 표현이자 그것을 덮는 가리개라고 말했다.

    이 신문은 10월 혁명과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이었다. 1918년 6월 1일부터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동시에 발행되었으나, 두 판 모두 1918년 7월에 폐간되었다.

    『브페료드』(전진) —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일간지. 처음에는 모스크바 멘셰비키 조직이,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멘셰비키) 모스크바 및 중앙 지역 위원회의 기관지로, 1918년 4월 2일부터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L. 마르토프, F. I. 단, A. S. 마르티노프 등이 편집진에 있었다. 1918년 5월 10일 반혁명 활동을 이유로 전러시아 비상위원회(체카)에 의해 폐간되고 편집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5월 14일 『브세그다 브페료드!』(항상 전진!)라는 이름으로 복간되었으나, 1919년 2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최종 폐간되었다.

  3. 마르크스, 『고타 강령 비판』 참조.
  4. 엥겔스, 『프랑스와 독일의 농민 문제』 참조(마르크스·엥겔스, 『선집』 제2권, 모스크바, 1962년, 438쪽).
  5. 푸시킨의 시 「영웅」에 나오는 구절의 의역. 그 시에서 그는 저열한 진실의 더미보다 고양시키는 거짓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6. 오블로모프 — I. A. 곤차로프의 동명 소설에 나오는 러시아 지주로, 나태와 정체와 타성을 체현한 인물.
  7. 최고의 과학자와 전문가로 구성된 국가위원회가 작성한 러시아 전화(電化) 계획을 가리킨다. 그것은 전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놓기 위한 최초의 장기 통합 국가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제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를 위해 팸플릿으로 발간되었고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8. 제8차 당대회는 1919년 3월 18일부터 23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며, 의결권을 가진 대의원 301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102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당원 313,766명을 대표했다.

    의제는 다음과 같았다. 1) 중앙위원회 보고, 2)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강령, 3)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결성, 4) 군사 정세와 군사 정책, 5) 농촌 사업, 6) 조직 문제, 7) 중앙위원회 선거.

    레닌은 대회의 개회사와 폐회사를 했고, 중앙위원회 보고와 당 강령·농촌 사업·군사 정책에 관한 보고를 했다.

    대회 앞에 놓인 핵심 문제는 레닌의 지도와 참여로 작성된 새 당 강령이었다. 대회는 레닌의 강령 초안을 승인하고 부하린의 반볼셰비키적 제안을 기각했다.

    대회는 또한 민족 문제에 관한 레닌의 강령을 지지하고, 민족자결권에 관한 항목을 강령에서 삭제하자는 퍄타코프와 부하린의 제안을 기각했다.

    당 강령에 관한 레닌의 총괄 발언 뒤 대회는 "강령 초안을 전체로서 채택"하고 최종 편집을 위해 강령위원회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레닌에게 「강령 정치 부문 제3항 초안(제8차 당대회 강령위원회를 위하여)」을 집필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후 그것을 채택했다. 3월 22일 대회는 강령의 최종 본문을 승인했다.

    또 하나의 핵심 문제는 중농에 대한 태도였다. 레닌은 연설들에서, 특히 농촌 사업에 관한 보고에서 당의 새로운 정책을 논증했다. 즉 중립화 정책에서, 빈농의 지지와 쿨라크에 대한 투쟁에 기초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동맹의 지도권을 유지하는, 노동계급과 중농의 굳건한 동맹으로의 이행이다. 레닌은 이 구호를 1918년 11월 말에 처음 제기했다. 대회는 레닌의 「중농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군사 정세, 당의 군사 정책, 붉은 군대 조직을 논의하는 동안 이른바 '군사반대파'가 중앙위원회 테제에 반대하여 나섰다(이 반대파에는 전 '좌익 공산주의자' V. M. 스미르노프, G. I. 사파로프, G. L. 퍄타코프와 몇몇 무소속 인사가 포함되었다. 내전이 한창일 때 스탈린도 이를 지지했다). 군사반대파는 일부 유격전적 방법의 유지를 옹호했고, 군대 내 엄격한 규율과 구 군사 전문가의 활용에 반대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함께 군사반대파를 성공적으로 고립시켜 전쟁 수행에 손상을 입히는 것을 막았다. 3월 21일 비공개 총회에서 레닌은 (트로츠키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 테제를 옹호하여 발언했고, 발언자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은 군사반대파를 규탄했다.

    중앙위원회 테제는 174 대 95로 기초로 채택되었고, 조정위원회가 레닌의 지침에 기초하여 군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작성했으며 대회는 이를 (기권 1표만으로) 채택했다.

    군사 문제에 관한 레닌의 사상은 당 강령에 반영되었고 군 조직의 지침이 되었다. 1918년부터 붉은 군대 조직을 맡은 트로츠키는 반혁명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관한 모든 군사·정치 문제에서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였다.

    조직 문제에 관한 결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 내에서 당의 지도를 부정한 사프로노프-오신스키 그룹을 규탄했다.

    당 조직에 관한 결정은 당의 사회적 구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노동자·비농민 요소의 입당 기준을 높일 필요를 강조했다. 1919년 5월 1일까지 전 당원의 총등록을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대회는 당 조직의 연방주의 원칙을 기각하고, 단일한 중앙위원회의 지도 아래 활동하는 통합된 중앙집권적 공산당의 원칙을 승인했다.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회는 레닌이 이끌었다. 대회는 제3(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설을 환영하고 그 강령을 채택했다.

  9. '2와 1/2 인터내셔널'이라 불린, 중앙파 정당 및 그룹들의 국제적 연합(혁명적 정서를 지닌 노동자 대중에 의해 일시적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떠나게 된 세력들). 1921년 빈에서 결성되었고, 제2인터내셔널에 재합류한 1923년에 해체되었다.
  10. 멘셰비키 망명자 잡지 『소치알리스티체스키 베스트니크』(사회주의 통보)는 L. 마르토프가 창간했다. 1921년부터 베를린에서, 이후 파리에서 발행되었다. 현재는 미국에서 발행된다.

    대의원들은 레닌에게 인사를 보내고 그를 회의에 초청했다. 레닌의 답신은 1921년 4월 20일 마지막 회의에서 낭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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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V. I. 레닌 인터넷 아카이브. 원 영역본은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GNU FDL) 조건에 따라 복제·배포가 허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