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1991

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

페레스트로이카는 왜 빵을 가져다주지 못했는가?

1987년 국영기업법1988년 협동조합법으로 시작된 경제 개혁은 계획도 시장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낳았다. 기업은 임금을 올릴 자유를 얻었지만 가격은 묶여 있었고, 돈은 늘고 물건은 줄면서 재정 적자와 상점의 빈 진열대가 함께 커졌다. 1989년 여름에는 쿠즈바스돈바스의 광부 수십만 명이 파업에 나서 비누 한 장까지 요구 목록에 올렸다. 1990년 여름 샤탈린과 야블린스키가 500일 만에 시장경제로 이행한다는 「500일 계획」을 내놓았고 옐친의 러시아공화국이 이를 지지했지만, 고르바초프리시코프 정부의 온건안과의 절충을 택했다.

개혁 이전의 개혁, 혹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에 오를 때, 그가 물려받은 경제는 겉보기에는 세계 2위의 공업 생산량을 자랑했지만 속은 이미 비어 있었다. 국민소득 성장률은 10차 5개년(1976~1980)에 연 3.8%로 떨어졌고 11차 5개년(1981~1985)에는 2.5%까지 하락했다. 생산수단(그룹 A)의 비중은 74.8%까지 올라간 반면 소비재(그룹 B)는 24.7%로 줄어, 스탈린 공업화가 시작된 1928년(그룹 B 60.5%)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상점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고, 육류·유제품 소매가격의 3분의 2는 국가가 보조금으로 메우고 있었다. 1965년 36억 루블이던 가격 보조금은 20년 만에 730억 루블로 불어났다.

이 경제 구조를 떠받치던 것은 시베리아 유전에서 뽑아낸 석유였다. 1983년 소련의 경화 수출 수입은 911억 달러로 정점을 찍었고, 그중 석유·가스 수출이 67%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4년 말부터 국제 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27달러(1985년)에서 14달러(1986년)로 반 토막이 난 가격은 소련 재정의 버팀목을 한 번에 무너뜨렸다. 소련의 경화 수출 수입은 1984년 320억 달러에서 1986년 251억 달러로 급감했고, 경화 부채는 같은 기간 220억 달러에서 410억 달러로 거의 두 배가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첫 대응은 '우스코레니예(Ускорение)', 즉 '가속화'였다. 소련 기계 제조업에 2000억 루블을 쏟아붓고 12차 5개년 계획(1986~1990)의 목표치를 고스플란에 세 번이나 되돌려 올리게 했다. 수석 경제 고문 아벨 아간베갼이 주창한 이 전략은 "과학기술 진보를 통한 생산 가속화"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소비자와 무관한 중공업 투자의 확대였다. 1986년 한 해 동안 예산 적자는 GDP 대비 1.8%에서 5.7%로 세 배 가까이 뛰었다.

설상가상으로 1985년 5월 시작된 반알코올 캠페인이 주류 판매 수입을 걷어냈다. 보드카 소비세는 전통적으로 소련 예산의 주요 수입원이었는데, 캠페인으로 포도밭이 불도저에 밀리고 양조장이 문을 닫으면서 1989년까지 275억 루블의 재정 손실이 발생했다. 동시에 체르노빌 참사(1986년 4월)는 막대한 복구 비용을 강요했고, 원유 생산량 자체도 1985년에 사상 처음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돈은 늘고 물건은 사라지는 '공급 없는 수요'의 악순환이 이때 이미 가동된 셈이었다.

1987년 1월, 고르바초프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생활 속에 정체 현상이 스며들고 있다"고 인정하며 정치·경제 전반의 개혁을 선언했다. 우스코레니예라는 구식 행정 명령이 실패한 자리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짜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기업에 자유를 주었지만, 시장은 깜빡했다

1987년 6월 30일, 최고회의는 「국영기업(연합)법」을 통과시켰다. 1988년 1월 1일 발효된 이 법은 소련 계획경제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개혁 시도였다. 기업은 더 이상 중앙이 내려보내는 의무적 계획 지표에 묶이지 않고, 국가 발주(госзаказ)를 채운 나머지 생산량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은 완전 독립채산제(호즈라스초트)와 자기자금조달로 전환하고, 손실을 내면 파산도 가능했다. 노동집단은 관리자를 선출하고 해임할 권한을 얻었다. 고르바초프는 6월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행정적 관리 방식에서 경제적 관리 방식으로의 전환"이 개혁의 본질이라고.

그러나 이 법이 내건 원칙들은 서로 충돌했다. 기업이 번 돈으로 스스로 운영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생산재 가격은 국가가 그대로 통제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했지만, 무엇을 얼마에 팔지는 여전히 중앙이 정했다. 가격이 비용을 반영하지 못하니, 독립채산제는 가상의 숫자 위에서 굴러가는 회계 게임에 가까웠다.

더 치명적인 것은 임금과 투자의 역전이었다. 법은 노동집단이 번 소득에서 재료비·납부금·기금 공제를 뺀 나머지를 임금으로 쓸 수 있게 했다(제2방식). 1986년까지 기업 이윤의 약 16%만 경제적 인센티브 기금으로 돌아갔지만, 1988년 그 비율은 41%로 폭등했고 1990년에는 49%에 이르렀다. 임금은 폭발했지만 투자는 말랐다. 국민소득 증가율 2.8%(1987년)에서 임금은 1988년 9.1%, 1989년 10.9%, 1990년 15.8%씩 뛰었다. 생산된 물건보다 시중의 돈이 훨씬 빠르게 늘어나면서, 이미 빈약했던 상점 진열대는 더욱 텅 비었다.

관리자 선출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노동집단이 뽑고 해임할 수 있는 관리자가 임금 인상을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공장 신문들은 앞다투어 "우리 공장장은 다른 공장보다 적게 올려줬다"고 보도했고, 선거를 앞둔 관리자들은 단기적 인기에 매달렸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회고록에서 "민주주의적 도취"가 일부 조항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했고, 관리자 선출제는 곧 폐지되었다.

국가 발주 체계도 현실에서는 옛 계획보다 나을 게 없었다. 각 부처는 기업 생산량의 90% 이상을 국가 발주로 묶어버렸고, 기업이 자유롭게 팔 수 있는 몫은 거의 남지 않았다. 고스플란과 부처들은 법이 빼앗아간 통제권을 국가 발주라는 이름으로 되찾아왔다. 기업은 의무는 옛날 그대로인데 책임만 늘어난 셈이었다.

법의 근본적 모순은 이것이었다. 계획경제의 통제를 풀었지만 시장의 신호 체계, 즉 자유 가격, 도매 무역, 경쟁, 파산 절차는 만들지 않았다. 부분 개혁이 오히려 완전한 체계보다 더 위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 법 하나만으로 경제가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계획도 시장도 아닌 틈새에서 기업들이 임금만 올리고 투자는 버리는 행동을 체계적으로 유도한 결정적 계기였다.

시장을 허락하고 시장을 두려워하다: 협동조합법의 역설

1988년 5월 26일, 소련 최고회의는 법률 제8998-XI호 「소련에서의 코옙에 관한 법률」을 채택했다. 이 법은 1928년 네프가 폐기된 이후 처음으로 사적 생산과 고용을 합법화했다는 점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개혁 중 가장 급진적인 조치였다. 제19조는 코옙이 "소비자와의 합의에 따라 또는 독자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고, 제25조는 임금 체계와 액수를 코옙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등록 수수료는 5루블, 과세는 수익의 3퍼센트였다.

그러나 이 시장적 자유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 위에 세워졌다. 원자재, 장비, 건물은 여전히 국가계획위원회와 국가물자공급위원회가 배급하는 '폰트'(фонды) 체계로만 접근할 수 있었고, 그 배급 명단에 코옙은 없었다. 결과는 세 갈래로 갈렸다. 첫째, 코옙은 정부 소매점에서 육류, 설탕, 직물, 건자재를 대량으로 쓸어가 자신의 제품으로 둔갑시켜 팔았다. 이미 비어가던 진열대를 더 비게 만든 셈이다. 1988년 11월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가 니콜라이 슬륀코프에게 올린 비밀 문서는 "압도적 다수의 코옙이 법을 우회하여 소매망에서 원자재와 상품을 구매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둘째, 국영기업 간부들이 자신이 관리하는 공장에 코옙을 세웠다. 값싼 국가 원자재, 공장 전기, 기계를 사용해 생산한 제품을 자유 가격에 팔고 차익을 챙기는 '간부 코옙'이었다. BBC 러시아 서비스가 2013년 회고한 대로 "사실상 노멘클라투라 사유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는 공공급식 코옙의 3분의 2가 기존 국영 식당을 개조한 것이었다. 셋째, 소수였지만 실제로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코옙은 원자재를 얻기 위해 뇌물에 의존해야 했다.

국가의 반응은 처음부터 자기모순적이었다. 법이 시행되기도 전인 1988년 3월 14일, 최고회의 간부회의는 코옙원 개인소득에 대한 누진세를 도입했다: 월 500~700루블 구간 30퍼센트, 1,000~1,500루블 구간 70퍼센트, 1,500루블 초과분에는 90퍼센트를 물렸다. 재무장관 보리스 고스테프는 "투기꾼을 양산할 필요가 없다" "부자 층은 사회적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로부터 4개월 만인 7월 29일에 세율은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 시장을 열었다가 곧바로 때려잡는 진자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1988년 12월부터 코옙이 활동할 수 있는 업종을 제한하는 각료회의 결정들이 줄줄이 나왔고, 1989년 10월과 1990년 6월에는 법 자체가 두 차례 개정되어 코옙의 가격 결정권과 대외무역권이 축소되었다.

1989년 1월, 이 모순은 한 인물을 통해 폭발했다. 모스크바의 코옙 '테흐니카'의 설립자 아르툠 타라소프가 300만 루블의 소득 중 9만 루블을 당비로 납부한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법에 따르면 모든 것이 합법이었지만, 정치 체계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타라소프 사건은 "코옙원은 얼마까지 벌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전 사회적 논쟁으로 만들었고, 레오니트 아발킨은 월 700루블이 적정 상한이라고 공개 제안했다. 이듬해 타라소프는 러시아공화국 인민대표로 당선되었다.

양적 성장은 급격했다: 1988년 중반 9천여 개였던 코옙은 1990년 2월 19만 3천 개, 종사자 470만 명으로 팽창했다. 그러나 포브스 카자흐스탄판이 2013년 평가했듯, 그 대부분은 "국영기업에 기생하는 간부 코옙이거나, 환전과 재판매로 돈을 세탁하는 덤핑 코옙"이었다. 시장경제의 이점을 가져오기는커녕, 코옙 운동은 계획경제의 배급 통로를 사적 이윤의 통로로 전환하는 거대한 펌프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뿜어져 나온 화폐 소득은 상품 공급 없이 유통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 억압된 인플레이션을 가속했다.

석탄이 쌓이고 비누가 사라졌다: 1989년 광부 대파업

1989년 7월 10일, 시베리아 쿠즈바스 탄전의 도시 메즈두레첸스크에서 셰뱌코프 광산의 야간조 약 300명이 자가구조기와 축전지를 반납하지 않고 갱도를 빠져나왔다. 이들은 야간 및 야근 수당 지급, 일요일 공동 휴무일 지정, 갱내 작업 중 식사 제공, 세제와 비누 지급 등 20여 개 요구를 광산 행정부에 제출했고, 오후에는 다른 광산들로 동지들을 찾아갔다. 다음 날 아침 메즈두레첸스크 전탄광 노동자 수천 명이 검은 작업복 차림으로 중앙광장에 모여 무기한 연좌집회에 들어갔다. 도시의 주류 판매가 금지되었고, 노동자 민병대가 질서를 유지했으며, 노동집단 대표들로 구성된 파업위원회가 실질적인 도시 행정권을 접수했다. 파업 기간 중 메즈두레첸스크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파업은 하루 만에 주변 탄광도시들로 번졌다. 12일 프로코피옙스크와 오신니키, 13일 레닌스크-쿠즈네츠키와 노보쿠즈네츠크, 14일에는 케메로보와 키셀룝스크까지. 열하루 만에 쿠즈바스 전역이 멈췄다. 16일부터는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탄전, 코미 공화국의 보르쿠타,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 탄전으로 파업이 이어졌다. 한여름 한 달 동안 소련 전역에서 약 40만 명의 광부가 일터를 떠났다. 이는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이후 소비에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노동자 집단행동이었다.

소련 당국에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셰뱌코프 광산 노동자들은 이미 1988년 12월 자신들의 요구를 소련 노동조합 중앙위원회에 우송했고, 이는 지역 노조에서 광산 조합을 거쳐 광산장 순으로 내려가다가 아무런 답변 없이 소멸했다. 1989년 봄에는 도네츠크의 리디옙카·키로프 광산에서 단기 파업이, 보르쿠타의 세베르나야 광산에서는 107명이 단식농성을 벌였다. 6월에는 도네츠크 시당 전원회의에서 샤도프 석탄공업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전문이 최고소비에트로 보내졌다. 당국은 이 모든 신호를 무시했다.

파업의 직접적 계기는 장바닥이었다. 1988년 협동조합법 이후 임금은 오르기 시작했지만 상품은 사라졌다. 쿠즈바스에서는 비누·치약·세제조차 구하기 어려웠고, 기저귀와 생리용품은 행정 당국의 특별 배급표로만 나왔다. 광부들의 분노에는 더 깊은 구조적 배경이 있었다. 탄광들은 계획손실 산업이었다. 국가가 석탄 가격을 생산비 이하로 묶고 차액을 보조금으로 메우는 구조 속에서 1970년대 이후 투자는 석유·가스로 집중되었고, 탄광의 기계는 50년 전 그대로였다. 도네츠크의 156개 광산 중 79곳이 지하 700m 이하, 15곳은 1km 이하의 심도에서 채탄했지만 환기·배수·가스 방지 설비는 만성적 부족에 시달렸다. "오늘의 기록이 내일의 기준"이 되는 스타하노프식 노동 강요와, 1987년 국영기업법 이후 도입된 독립채산제 아래에서도 석탄 가격 통제로 인해 실제 채산성을 가질 수 없었던 모순이 겹쳐 있었다.

파업의 요구는 지역에 따라 경제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쿠즈바스 파업위원회의 42개 요구가 주로 임금·휴일·주택·생태 문제에 집중된 반면, 보르쿠타의 광산간파업위원회는 「소련 헌법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 조항 삭제」, 「공공단체 몫의 대의원 선거 폐지」, 「최고소비에트 의장 직선제」를 요구했다. 경제학자 레온티예프를 소련으로 초빙하여 "경제위기 탈출을 위한 구체적 모델"을 작성할 것을 제안하는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개혁파 경제학계의 담론이 광부들 사이에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7월 14일 고르바초프는 최고소비에트 회의에서 광부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파업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모스크바도 우리 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망설이던 탄전들도 합류했다. 결국 7월 18일 정부위원단과 쿠즈바스 지역파업위원회 사이에 「사회경제적 상황 안정화를 위한 조치에 관한 의정서」가 체결되었고, 이는 각 탄전으로 확산되며 파업은 8월 초까지 소강되었다. 의정서의 합의사항 대부분(임금 인상, 지역 공급 개선, 광산 자율권 확대)은 후속 법령에 반영되었으나, 당·관료의 특권 폐지나 정치제도 개혁과 같은 요구들은 실행되지 않았다.

파업이 끝난 뒤 파업위원회들은 해산하지 않고 '노동자위원회'로 전환되었다. 이 위원회들은 1990년 4월 '노동연맹', 같은 해 10월 '독립광부노조'로 조직화되었고, 1991년 봄의 두 번째 전국적 광부 파업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골격이 되었다. 1989년 7월의 파업은 개별 기업 차원의 불만이 계획경제 전체의 모순에 대한 집단적 저항으로 응축되는 순간을 보여주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가 초래한 '개혁의 중간 지대'(임금은 자유로워졌으나 가격과 공급은 통제된 모순)가 가장 극적으로 폭발한 사건이었다.

한 달 만에 쓰고, 한 달 만에 버리다: 500일 계획의 탄생과 좌초

1990년 2월,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는 동료 경제학자 둘과 함께 「400일」이라는 프로그램 초안을 썼다. 400일 안에 가격 자유화와 사유화를 단행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초안을 받아본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는 이를 배척했고, 문서는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석 달 뒤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된 보리스 옐친에게는 모스크바 중앙과 구별되는 경제 프로그램이 절실했다. 러시아 총리 후보 미하일 보차로프가 야블린스키의 초안을 손에 넣어 "500일 안에 시장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자, 야블린스키가 항의했다. 옐친은 7월 14일 그를 러시아공화국 부총리로 임명해 돌파구를 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러시아의 독자 개혁은 연방 해체의 위협이었다. 7월 27일, 고르바초프와 옐친, 그리고 두 정부 수반 리시코프와 이반 실라예프는 공동 경제개혁 프로그램 작성에 합의했다. 8월 2일, 스타니슬라프 샤탈린을 단장으로 한 13인의 작업반이 꾸려졌고, 야블린스키가 실무를 이끌었다. 마감은 9월 1일,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이었다. 8월 30일, 「시장으로의 이행: 개념과 프로그램」이라는 400쪽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인간, 자유, 시장"이라는 말로 시작된 이 문서는 500일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첫 100일은 주택, 토지, 소규모 기업의 사유화와 대기업 주식회사화, 둘째 150일은 가격 자유화와 재정 긴축, 셋째 150일은 시장 안정화와 루블 태환, 마지막 100일은 성장 개시였다.

프로그램의 진짜 뇌관은 제3장 「주권공화국들의 경제연합」이었다. 연방이 아니라 각 공화국이 경제 주권을 가지며, 중앙은 공화국이 위임한 기능만 수행한다는 구상은 옐친에게 러시아 독자 권한의 극대화를, 연방 관료들에게는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샤탈린은 후일 이 프로그램이 "자본주의를 명백히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각, 리시코프의 지시로 레오니트 아발킨 부총리가 이끄는 팀은 '규제된 시장경제'를 표방한 「발전의 기본 방향」을 작성하고 있었다. 9월 4일 고르바초프는 아발킨과 야블린스키를 동시에 불러 양측 안을 청취했고, 아벨 아간베갼에게 두 안을 하나로 합치는 절충안 작성을 지시했다. 그러나 9월 11일, 옐친의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는 찬성 213 대 반대 2로 샤탈린 안을 채택했고, 같은 날 저녁 리시코프도 자신의 정부안을 연방 최고회의에 제출했다. 합의는 이틀 만에 무너졌다.

9월 21일, 고르바초프는 연방 최고회의에서 샤탈린 안, 아발킨 안, 아간베갼 안, 세 가지를 모두 통합하겠다고 발표했다. 급진적 시장 이행안은 사실상 폐기된 셈이었다. 야블린스키는 10월 17일 사임서를 냈다.

이 전투의 정치적 유산은 프로그램 자체보다 컸다. 고르바초프는 리시코프를 견제하는 데 500일 논쟁을 이용했고, 11월 17일 각료회의를 해산시키고 대통령 직속 내각을 출범시켰다. 옐친은 "연방이 합의를 깼다"는 명분으로 독자 노선을 가속화했다. 500일 계획은 단 한 줄도 시행되지 못했지만, 그 잔해 위에서 소련은 시장도 계획도 아닌 무정부 상태로 추락했다.

두 프로그램 사이에서 길을 잃다: 1990년 10월 절충의 대가

1990년 9월 1일까지 샤탈린-야블린스키 작업반은 「500일 계획」을, 리시코프-아발킨 정부는 「규제된 시장경제로의 이행 기본 방향」을 각각 완성했다. 두 안은 같은 질병에 대한 서로 다른 처방이었다. 500일 계획은 100일 안에 재정을 안정시키고 가격을 자유화하며 국유재산을 대규모로 사유화하는 충격요법을 제안했다. 정부안은 1995년까지 3단계로 조절된 이행을 구상했고, 가격 자유화 이전에 일회성 가격 개혁을 먼저 실시하며 연방의 조정 기능을 유지했다.

진짜 싸움은 경제학 교과서의 차이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놓고 벌어졌다. 500일 계획은 단일채널 조세제도, 즉 모든 세금이 먼저 공화국에 귀속되고 공화국이 연방 예산에 분담금을 낸다는 구상을 전제했는데, 이는 사실상 소련을 연방국가가 아닌 경제동맹으로 재편하는 발상이었다. 아발킨은 8월 21일 작업반과의 회의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연방'은 국가인가, 아닌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안은 연방세, 중앙은행, 연방 집행권력을 고수했다.

고르바초프는 처음에 500일 계획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리시코프, 아발킨,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압력에 직면했다. 9월 3일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가 500일 계획을 일방적으로 채택하자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옐친은 연방 정부를 우회하여 개혁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고, 고르바초프에게 이것은 경제 문제일 뿐 아니라 권력 문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아간베갼에게 두 안의 통합을 맡겼지만, 9월 11일 나온 초안은 샤탈린 쪽이 "99%"였고 정부는 수용할 수 없다고 버텼다. 리시코프 내각은 자신들의 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사임 성명까지 준비했다.

9월 17일 연방 최고회의는 두 안 모두 채택하지 않고 10월 15일까지 단일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아발킨이 제안한 해법은 50~70쪽짜리 짧은 문서, 즉 세부를 버리고 원칙과 방향만 담는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소련 국민경제 안정화 및 시장경제 이행 기본 방향」은 10월 19일 최고회의에서 찬성 356, 반대 12, 기권 26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절충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문서는 "단일한 전연방 시장"을 선언하면서도 공화국의 경제주권도 인정했고, 가격 자유화를 약속하면서도 시기는 명시하지 않았으며, 사유화를 언급하면서도 구체적 절차는 빠져 있었다. 세계은행은 이를 "진지한 절충 프로그램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 일반적"이라고 평가했다. 결정적으로, 공화국들은 이 문서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공화국은 이미 독자적인 500일 계획을 채택한 상태였고, 다른 공화국들도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10월 절충안의 진정한 대가는 기회의 소멸이었다. 500일 계획도, 정부안도 실행되지 못한 채 1991년을 맞이했고, 그해 소련 경제는 관리 가능한 이행이 아니라 붕괴로 접어들었다. 아발킨은 훗날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에서 성전으로 가는 길은 어째서 반드시 묘지를 거쳐야 하는지, 그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3일 동안의 충격: 파블로프 화폐 개혁이 앗아간 것

1991년 1월 22일 밤 9시, 소련 국민은 「브레먀」 뉴스를 통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1961년 발행 50루블권과 100루블권의 유통을 중단한다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행과 상점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총리로 임명된 지 8일째인 발렌틴 파블로프가 설계한 이 개혁은 23일부터 25일까지 단 사흘 동안 1인당 1,000루블까지만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해 주고, 초과분은 특별위원회 심사를 거치도록 했다. 예금 인출도 월 500루블로 묶었고, 중복 인출을 막기 위해 여권에 인출 기록을 찍었다.

파블로프는 불과 열흘 전인 1월 10일 최고소비에트 연설에서 "화폐 개혁은 준비되고 있지 않다"고 공언했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파블로프 자신이 재무장관 시절이던 1990년 12월 14일, 빅토르 게라셴코 고스방크 의장과 함께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회정치적 상황, 소비재 시장의 극도로 긴장된 상태, 개혁 이후 루블 구매력을 지탱할 상품·외환 준비금의 부재를 고려할 때 현재 압수형 화폐 개혁은 부적절하다"고 명시했던 것이다. 개혁을 실제로 추동한 것은 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였다고 고스방크 부의장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후일 증언했다. 해외로 유출된 대량의 '위조 루블'과 '그림자 자본'을 공식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본래 목표는 넘쳐나는 현금을 흡수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는 것이었다.

사흘 동안 나라는 일을 멈췄다. 사람들은 저축은행 앞에 몰려들었고, 일부는 지하철·택시·철도역 매표소에서 거액권을 급히 털어냈다. 모스크바에서만 위원회 심사를 통해 교환에 성공한 평균 현금 보유액이 2,000루블에 달했으나, 수십 년 모은 15,000~30,000루블이 하루아침에 휴지가 된 사례도 허다했다. 정부는 815억 루블을 흡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 회수액은 140억 루블, 통화량의 10.5%에 불과했다. 교환 기한은 두 차례 연장되었고, 회수 효과는 더욱 희석되었다. 유통 추정치 480억 루블 중 약 80억 루블은 아예 사라졌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이 법령의 철저한 부도덕성은 중앙정부에 대한 국민의 얼마 남지 않은 신뢰마저 앗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정부가 시민의 저축을 일방적으로 압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루블과 국가에 대한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 개혁 직후인 4월 2일, 파블로프는 소매가격을 20~24% 인상했고, 실질 구매력은 이미 내려앉은 뒤였다. 역사가들은 파블로프 개혁을 "소련의 관에 박힌 마지막 못"이라고 부른다.

합의된 것과 갈리는 것: 30년의 논쟁이 남긴 지형

1991년 12월 소련이 사라졌을 때, 왜 개혁이 실패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30년이 넘는 연구와 기록 공개 뒤에도 학계가 완전히 합의한 것은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몇 가지는 적지 않다.

가장 확고한 합의는 이것이다: 고르바초프의 부분 개혁은 계획경제의 기둥을 허물었을 뿐 시장의 기둥을 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혁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유형의 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1987년 국영기업법으로 각 부처의 일상적 통제를 철폐하고 1988년 9월 당 중앙위원회 산업부서들을 폐지했을 때, 소련 행정명령체계는 사실상 작동을 멈췄다. 폴 그레고리가 지적했듯, 소련 경제체제의 붕괴는 1991년이 아니라 1987~1988년에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후의 모든 것, 즉 재정 적자 폭증과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생산량 하락은 그 제도적 공백의 결과였다. 계획도 시장도 아닌 중간 상태는 어느 쪽보다도 나빴다. 조엘 헬만이 '부분 개혁의 역설'이라고 명명한 이 현상은, 체제 이행 연구에서 가장 안정된 발견 중 하나가 되었다.

두 번째 합의는 붕괴의 원인이 단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가 하락(1985~1986년 배럴당 30달러에서 10달러 아래로)이 외화 수입을 말렸고, 반알코올 캠페인이 예산의 10%에 달하던 주세 수입을 증발시켰으며, 군비 경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구조적 압박들만으로는 붕괴의 시점과 속도를 설명할 수 없다. 마이클 엘만과 블라디미르 콘토로비치의 『소련 경제체제의 파괴』(1998)는 내부자 증언을 집대성하여, 결정적 변수는 고르바초프 자신의 선택, 특히 가격 개혁을 미루면서 기업 자율성만 풀어준 결정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합의가 끝나는 지점부터 논쟁이 시작된다. 첫째 쟁점은 유가의 비중이다. 예고르 가이다르는 『제국의 죽음』(2006)에서 1980년대 중반 유가 폭락이 소련 경제에 '마지막 일격'이었으며, 가격 충격 없이는 어떤 개혁 시나리오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크리스 밀러는 『소련 경제를 구하기 위한 투쟁』(2016)에서 소련 경제의 진짜 문제는 석유 의존이 아니라 농업·군산·에너지 복합체라는 '불경한 삼위일체'가 모든 개혁을 막은 정치경제적 교착이라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본질적으로 '구조가 결정했는가, 선택이 결정했는가'라는 질문이며,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둘째 쟁점은 500일 계획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었을 것인가이다.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와 지지자들은 정치적 의지만 있었다면 소련을 연방으로 유지하면서 시장으로 연착륙할 수 있었다고 오늘날까지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러시아에 사유재산권, 계약 집행, 투자자 보호 같은 시장 제도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가격 자유화와 민영화만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도둑정치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1992년 옐친의 충격요법이 실제로 낳은 결과를 보면, 제도 없는 시장 이행이 어떤 참사를 부르는지는 증명되었다. 그러나 500일 계획이 실행되지 않았기에, 이 논쟁은 반사실적 추론의 영역에 갇혀 있다.

세 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쟁점은 고르바초프 개인의 권력과 책임이다. '무력한 고르바초프' 서사는 그가 군산·농업·에너지 로비에 발목 잡힌 약한 지도자였다고 본다. 그러나 제리 허프는 『민주화와 혁명』(1997)에서 고르바초프가 임기 첫 2년 동안 정치국 위원 13명 중 8명, 각료회의 구성원 83명 중 69명, 지역당 서기 150명 중 108명을 교체했다는 사실을 들어 이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허프의 표현대로 고르바초프는 '스탈린 이후 가장 강력한 소련 지도자'였으며, 그가 개혁을 일관되게 밀지 못한 것은 저항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 부족 때문이었다. 이 '무력한 고르바초프 대 무모한 고르바초프' 논쟁은 페레스트로이카 연구의 중심 균열선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코츠와 프레드 위어가 『위로부터의 혁명』(1997)에서 제기한 도발적 테제가 있다: 소련 체제는 실패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노멘클라투라 자신이 그것을 해체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계획경제 아래서 권력은 있었지만 재산은 없었던 엘리트들은, 시장 이행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사적 부로 전환할 기회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계산했다. 이 주장을 전면 수용하는 연구자는 소수지만, 구소련 엘리트의 3분의 2가 탈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경제·정치 엘리트로 재편되었다는 경험적 사실은 이 테제에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싣는다.

30년의 연구가 남긴 지형은 이렇다: 개혁이 왜 실패했는지는 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이 실패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개혁 가능했는가, 불가능했는가: 결코 끝나지 않을 질문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지도부가 내린 모든 경제 결정은 하나의 더 큰 질문으로 수렴된다. 소련 체제는 개혁될 수 있었는가, 아니면 개혁은 본질적으로 체제를 파괴하는 일이었는가. 이 질문은 500일 계획이 좌초된 순간 이미 예고되어 있었고, 1991년 12월 연방이 해체된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 논쟁이 되었다.

개혁 불가능론의 대표적 논객은 마틴 말리아스티븐 코트킨이다. 말리아는 소련 체제의 유전자 같은 이데올로기적 본질, 곧 사적 소유와 시장을 부정하는 논리가 부분 개혁을 허용하는 순간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코트킨은 페레스트로이카가 "체제를 살리려다 체제를 죽인" 자살 행위였다고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공산당을 개혁의 도구이자 대상으로 삼은 순간, 개혁은 더 이상 통제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크리스 밀러는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 정치경제학적 설명을 보탰다. 덩샤오핑의 중국은 농촌에서 개혁을 시작해 승자 연합을 만들었지만, 소련은 이미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사회였기에 농업과 군산복합체라는 거대 이익집단의 저항을 돌파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반대편에는 스티븐 코언이 서 있다. 코언은 2004년 『슬라빅 리뷰』에 발표한 논문에서 불가능론의 전제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데올로기, 공산당, 소비에트, 국영경제, 연방이라는 소련 체제의 다섯 축은 모두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해 놀라울 만큼 유연하게 반응했고, 하나하나가 실제로 변형되었다. 체제가 본질적으로 개혁 불가능했다면 왜 6년 동안 그토록 많은 것이 바뀌었는가, 라는 것이 코언의 반문이다. 아치 브라운은 여기에 개인 변수를 추가한다. 고르바초프라는 특정한 지도자의 선택이 없었다면 소련은 1991년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지도자 아래서 다른 경로의 개혁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예고르 가이다르는 이 논쟁에 또 다른 축을 세웠다. 구조적 결정론이다. 『제국의 붕괴』(2007)에서 가이다르는 1985년 배럴당 66달러이던 유가가 1986년 20달러로 폭락한 사실을 개혁 논쟁의 진짜 배경으로 놓는다. 소련 재정의 3분의 2가 석유 수출에서 나오던 구조에서 유가 폭락은 재정 파탄을 의미했고, 이 구조적 충격 앞에서는 어떤 개혁 전략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이다르 자신이 1992년 집행한 충격요법은 역설적이게도 500일 계획의 핵심 요소들, 즉 사유화, 가격 자유화, 거시경제 안정화를 그대로 실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국가도 연방도 사라진 뒤에야 가능했다.

이 논쟁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는 통제된 실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르바초프가 500일 계획을 전면 채택한 소련, 1986년 유가가 폭락하지 않은 소련, 덩샤오핑식 개혁 경로를 걸은 소련을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질문이 영원히 열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결론이다. 경제 개혁 논쟁은 단지 정책 대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명적 체제가 자신의 종말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질문이었다.

결과

절충 속에 500일 계획은 사장되었다. 1990년 12월 리시코프가 심장발작 끝에 물러나고 파블로프가 총리가 되어 1991년 1월 고액권 기습 회수, 4월 물가 인상을 단행했지만 재정과 유통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991년 소련 경제는 모든 지표에서 수축했고, 개혁이 생활을 나아지게 하지 못했다는 실망은 연방 해체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학계에서는 부분 개혁이 낳은 제도적 공백과 유가 하락, 재정 방만이 겹친 복합 위기로 설명한다.

연표

  1. 1987.06
    국영기업법

    기업 자율성은 늘었지만 가격 개혁은 미뤄졌다.

  2. 1988.05
    협동조합법

    스탈린 이후 처음으로 사적 영업이 합법화되었다.

  3. 1989.07
    광부 대파업

    쿠즈바스와 돈바스에서 수십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4. 1990.09
    500일 계획

    샤탈린·야블린스키의 시장 이행 프로그램을 러시아공화국이 채택했다.

  5. 1990.10
    절충안 채택

    고르바초프가 절충안을 택하면서 500일 계획은 사장되었다.

  6. 1991.01
    파블로프 화폐 개혁

    50·100루블권이 기습 회수되어 저축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관련 인물 18명

참여15

니콜라이 리시코프1929–2024

총리로서 「규제된 시장」의 온건 노선을 지켰다.

레오니트 아발킨1930–2011

부총리로서 정부 개혁안을 설계했다.

스타니슬라프 샤탈린1934–1997

500일 계획 작성팀의 좌장이었다.

그리고리 야블린스키1952–

500일 계획의 실무 설계자였다.

아벨 아간베갼1932–

두 안의 절충안 작성을 맡았다.

보리스 옐친1931–2007

러시아공화국 차원에서 500일 계획을 밀었다.

유리 마슬류코프1937–2010

고스플란 의장으로 정부안 쪽에 섰다.

발렌틴 파블로프1937–2003

마지막 총리로 화폐 회수와 물가 인상을 집행했다.

러시아공화국 총리이반 실라예프1930–2023

러시아공화국 총리로서 1990년 7월 27일 고르바초프·옐친·리시코프와 함께 공동 경제개혁 합의에 서명했고, 야블린스키의 국가경제개혁위원회를 정부 안에 두었다.

KGB 의장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

고스방크 부의장 보일루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해외 유통 '위조 루블' 정보를 근거로 화폐개혁을 처음 제안한 것은 KGB와 크류치코프였다.

소련 고스방크 의장빅토르 게라셴코1937–2022

파블로프와 함께 1990년 12월 개혁 반대 서한에 서명했으나 한 달 뒤 강행된 고액권 교환을 집행했다. 유통 480억 루블 중 400억 루블만 접수되었다고 보고했다.

1992년 충격요법 설계자예고르 가이다르1956–2009

1991년 11월 옐친 정부의 부총리로 가격 자유화를 단행했다. 500일 계획의 핵심 요소들은 가이다르의 손에서 실행되었지만, 국가와 연방이 이미 무너진 뒤였다.

9만 루블 당비로 파문을 일으킨 협동조합 창립자아르툠 타라소프1950–2017

타라소프는 테흐니카 협동조합의 설립자로, 1989년 1월 3백만 루블의 소득과 9만 루블의 당비 납부가 전국적 스캔들로 이어지면서 정부가 협동조합법을 두 차례 개정하게 했다.

500일 계획 공동 저자예브게니 야신1934–2023

샤탈린 그룹의 13인 중 한 명으로 500일 계획을 공동 집필했다.

500일 계획 공동 저자니콜라이 페트라코프1937–2014

샤탈린 다음으로 표지에 이름을 올린 공동 저자이다.

관련 용어

출처: Chris Miller, The Struggle to Save the Soviet Economy: Mikhail Gorbachev and the Collapse of the USSR (2016)Yegor Gaidar, Collapse of an Empire: Lessons for Modern Russia (2007)Stephen Kotkin, Armageddon Averted: The Soviet Collapse, 1970–200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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