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03

크론시타트 봉기

10월 혁명의 붉은 요새였던 크론시타트는 왜 1921년 3월 그 혁명의 정부에 총을 겨누었는가?

크론시타트 봉기는 1921년 3월 1일부터 18일까지 발트 함대의 본거지 크론시타트 요새에서 수병, 병사, 시민들이 볼셰비키 정권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종결된 후에도 전시공산주의 아래 곡물 강제징발, 배급 삭감, 정치적 탄압이 계속되자,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은 소비에트 재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정치범 석방, 농민의 토지 자유 처분권 등을 요구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를 채택하고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협상을 거부하고 봉기를 반혁명적 음모로 규정했으며, 3월 7일과 16일 두 차례의 공세 끝에 3월 18일 요새를 진압했다. 약 8,000명의 봉기 참가자가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건너 핀란드로 탈출했고, 포로가 된 2,100여 명은 즉결 처형되었다.

1921년의 수병은 1917년의 그 수병이었는가

볼셰비키 지도부가 봉기를 반혁명적 음모로 규정할 때 그 근거 중 하나는 인적 구성의 변화였다. 트로츠키는 『크론시타트를 둘러싼 소란』에서 내전 기간 동안 발트 함대에는 대규모 인적 교체가 일어났으며, "구식 수병들은 우크라이나와 서부 접경지대의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농민 징집병들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1921년의 크론시타트 수비대는 더 이상 1917년에 겨울궁전을 습격했던 그 혁명적 수병들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의 반란은 10월 혁명의 이상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농민의 불만이 군복을 입고 표출된 것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게츨러는 1983년 저서 『크론시타트 1917-1921』에서 이 주장을 함대의 징병대장으로 검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봉기 주역이었던 두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와 세바스토폴의 승조원 중 입대 연도가 확인된 2,028명 가운데 1,904명(93.9%)이 1917년 혁명 이전 또는 혁명 기간 중에 입대했으며, 그중 1,195명은 1914-1916년에 입대했다. 1918-1921년 신규 징집병은 137명(6.8%)에 불과했다. 또한 1920년 12월 1일까지 계획된 신규 충원 10,384명 중 실제 도착한 인원은 1,313명뿐이었다. 게츨러는 수비대 전체로 보아도 현역 수병의 최소 4분의 3이 1918년 이전에 징집된 구간부였다고 결론지었다. 출신 지역을 분석한 결과로도 우크라이나 출신은 약 10%에 그쳤고 80% 이상이 대(大)러시아 지역 출신이었다.

폴 에이브리치는 자신의 1970년 저서 『크론시타트 1921』에서 게츨러의 연구가 더 최신의 자료에 기초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기존 수치를 수정했다. 에이브리치는 나아가 테드 그랜트 같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장한 "반란군 성씨만 훑어봐도 거의 전원이 우크라이나인임을 알 수 있다"는 설을 반박하기 위해 임시혁명위원회 15인의 성씨와 수백 명의 참가자 성씨를 분석했다. 그 결과 압도적 다수가 대러시아계 성씨였으며, 위원회 내에서도 우크라이나계로 분류될 수 있는 성씨는 페트리첸코, 야코벤코, 로마넨코 3인뿐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이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게츨러와 에이브리치의 연구가 입증한 것은 인원의 연속성이지 정치적 태도의 연속성이 아니다. 1917년 당시에도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이미 다수가 농민 출신이었다. 1921년 공식 통계에 따르면 수병의 4분의 3 이상이 농민 출신으로, 이는 1917년에 페트로그라드 지역 산업 노동자들이 함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과는 다른 구성이었다. 같은 인간이 같은 총을 들고 있었다 해도, 내전과 전시공산주의가 4년간 러시아의 농촌을 유린하는 동안 그 인간의 정치는 바뀌었을 수 있다. 크론시타트 봉기의 지도자 페트리첸코 자신이 1920년 4월 우크라이나의 고향 마을에 귀향했다가 볼셰비키 식량 징발대의 실상을 목격하고 깊은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고 훗날 인정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볼셰비키 지도부가 주장한 대대적인 인적 교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1921년 크론시타트에서 총을 든 사람들은 대부분 1917년에 그곳에서 혁명을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4년 후 같은 총으로 같은 정부를 겨눈 이유가 그 4년의 경험에 있음을 설명하는 데는 인원의 연속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물음은 문서 기록이 아니라 그 4년의 정치경제적 변화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전쟁이 끝났는데 왜 빵 배급은 더 줄었는가

1920년 11월 브랑겔의 백군이 크림반도에서 패퇴하면서 러시아 내전은 사실상 끝났다. 3년간 800만 명 이상이 죽고 공업 생산은 1913년의 5분의 1로 곤두박질쳤지만, 볼셰비키 정권은 살아남았다.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수병들은 이제 전시 비상조치가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전시공산주의는 전쟁용 임시정책으로 시작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히려 강화되었다. 곡물 강제징발제(продразвёрстка)는 유지되었고, 무장 징발대가 마을을 돌며 종자 곡식까지 거두어갔다. 1920년 가을 레닌은 '농민에게서 잉여뿐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곡물까지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했다. 농민들은 파종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1921년 2월 체카는 전국에서 118건의 농민 봉기를 집계했다. 그중 가장 큰 탐보프의 안토노프 봉기는 5만 명의 게릴라가 참여한 준내전 상태였다. 서시베리아에서는 '공산당 타도, 소비에트 만세'라는 구호 아래 10만 명이 봉기했다.

도시 상황은 더 나빴다. 1921년 1월 정부는 모든 도시의 빵 배급을 3분의 1로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원인은 시베리아와 캅카스의 식량 비축분이 폭설과 연료 부족으로 수송되지 못한 탓이었지만, 그 설명을 받아들인 배고픈 노동자는 없었다. 페트로그라드는 특히 심각했다. 2월 11일 시 소비에트는 연료 부족으로 푸틸로프 공장과 세스트로레츠크 공장을 포함한 93개 기업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도시 인구는 1917년 250만에서 1920년 8월 75만으로 줄었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하루 200~800그램의 검은 빵으로 버텼다.

2월 23일,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트루보츠니 공장 노동자들이 '배급 증량과 방한복 즉시 지급'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다음날 아침 200~300명의 노동자가 라페름 담배공장, 발트 공장, 카벨니 공장으로 행진하며 파업을 호소했고, 곧 2,500명의 군중이 섬에 모였다. 지노비예프가 이끄는 페트로그라드 방위위원회는 2월 25일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관생도 부대로 비무장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때는 공중에 총을 쏘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파업은 도시 전역으로 번졌고, '언론·집회·선거의 자유', '소비에트 비밀 재선거', '정치범 석방' 같은 정치적 요구가 경제적 요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방위위원회 위원 라셰비치는 트루보츠니 공장을 '반소비에트 행동의 선봉'으로 지목하며 공장 폐쇄를 발표했다. 같은 자리에서 발트 함대 정치국니콜라이 쿠즈민은 더 심각한 경고를 했다. 페트로그라드의 '태업(волынка)'을 멈추지 않으면 함대에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 말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이틀이 걸렸다.

2월 27일 당국은 양보를 단행했다. 노동자와 병사 배급을 하루 빵 1.25파운드와 고기 통조림 1캔으로 올리고, 페트로그라드 주 전역의 징발 저지선을 철거했으며, 노동자들이 식량을 구하러 시골로 떠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조치로 3월 초까지 대부분의 공장이 조업을 재개했지만, 미국 영사가 기록했듯 이는 '페트로그라드의 식량 비축분에 심각한 구멍을 냈다.' 동시에 체카는 약 500명의 노동자 활동가, 멘셰비키 지도자 표도르 단을 비롯한 수백 명의 지식인과 학생, 아나키스트, 사회혁명당원들을 체포했다.

페트로그라드 파업은 표면적으로 진정되었지만, 그 파장은 핀란드만 30킬로미터 건너 크론시타트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와 세바스토폴의 수병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사를 대표하지 않는다」: 결의에서 광장까지

1921년 2월 26일, 얼어붙은 크론시타트 항구에 나란히 정박한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와 세바스토폴의 승조원들은 긴급 회합을 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군대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수병들은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파견된 사절단이 목격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공장들은 군대와 사관생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가동 중인 작업장 안에는 무장한 공산당 분견대가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훗날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것은 공장이 아니라 차르 시대의 강제노동 감옥이었다.」 사절단이 다가가자 노동자들은 침묵했다. 공장위원회 위원장이 크론시타트 사절단의 보고를 듣기 위한 집회를 소집했지만, 노동자들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움이었다.

2월 28일, 사절단은 페트로파블롭스크로 돌아와 선상 집회에서 목격한 바를 보고했다. 참석자들은 분노했다. 그 자리에서 15개 조항의 결의가 작성되었다. 첫 조항은 모든 것을 압축했다. 「현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사를 대표하지 않으므로, 사전 선거운동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비밀투표로 즉시 재선거를 실시할 것.」 이어서 노동자·농민·아나키스트·좌파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의 집회 자유, 3월 10일까지 페트로그라드·크론시타트·페트로그라드현의 노동자·적군·수병 무당파 회의 소집, 모든 사회주의 정당 정치범 및 노동운동·농민운동 관련 수감자의 석방, 수용소 사건 재심 위원회 구성, 특정 정당에 특권을 부여하는 정치부 폐지, 식량을 압수하던 도로차단분견대 즉시 철폐, 유해업종 종사자를 제외한 전 노동자 배급 균등화, 군대 내 공산당 전투분견대와 공장 내 공산당 경비대 철폐, 농민의 토지 자유 처분권과 고용노동 없는 가축 사육권, 그리고 수공업 자유 생산 허용 등이 뒤따랐다.

주목할 점은 15개 조항 중 오직 정치부 폐지 하나만이 함대 내부 사안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모두 페트로그라드의 파업 노동자들과 전국에서 봉기 중인 농민들을 위한 요구였다. 결의는 기권 2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회의 의장은 페트리첸코, 서기는 페레펠킨이 맡았다.

다음 날인 3월 1일, 크론시타트 소비에트가 소집한 대집회가 닻 광장에서 열렸다. 1만 5천에서 1만 6천 명이 모였다. 당국은 군중을 달래기 위해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미하일 칼리닌을 연사로 보냈다. 페트로그라드 당 책임자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수병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라니옌바움까지만 갔다가 감히 섬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칼리닌은 처음에는 박수를 받았지만, 그가 결의를 반대하는 연설을 시작하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군중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만둬, 칼리니치, 자넨 배불렀잖아」, 「넌 자리도 몇 개씩 꿰차고 월급도 여기저기서 받겠지」, 「우린 뭐가 필요한지 우리 스스로 안다. 이 늙은이는 마누라한테나 돌아가라.」 함대 정치위원 니콜라이 쿠즈민이 뒤이어 연단에 올라 수병들을 반혁명분자로 규탄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철권」으로 진압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군중의 환호는커녕 연단에서 쫓겨났다. 칼리닌과 쿠즈민은 전 집회에서 결의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두 사람이었다. 압도적 다수로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가 승인되었다.

칼리닌은 무사히 섬을 빠져나갔지만, 당초 반란 경비병들은 그를 내보내기를 거부했다. 그가 돌아간 직후, 쿠즈민은 크론시타트에서 모든 식량과 탄약을 빼내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틀 후인 3월 2일, 칼리닌은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가자마자 봉기가 「코즐롭스키 장군이 이끄는 백위대 음모」라는 거짓 보고를 퍼뜨렸다.

혁명위원회는 계획된 쿠데타가 아니었다: 권력 이양에서 최후통첩까지

3월 2일의 '대의원회의'는 정변을 일으키려고 모인 자리가 아니었다. 크론시타트 소비에트의 임기가 끝났으므로, 함선·부대·노조·공장 대표 300여 명은 새로운 소비에트 선거의 절차를 정하려고 교육회관에 모였다. 개회 연설자 중에는 공산당원들도 있었고, 발트함대 정치위원 쿠즈민과 크론시타트 집행위원장 바실리예프가 다시 발언권을 얻었다. 페트리첸코의 회고에 따르면 쿠즈민은 페트로그라드가 평온하다고 단언하고 폴란드의 위협을 들먹이며 '공산당은 자진해서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연설이 도리어 불만을 부채질하자 대의원들은 이들을 회의장 밖으로 내보냈다.

임시혁명위원회의 탄생을 결정한 것은 정치적 결의가 아니라 긴박한 소문이었다. 3월 1일 집회 직후부터 현지 공산당원들이 무기고에 소총과 기관총을 요구하며 무장을 시작했고, 무장한 공산당원들이 회의장으로 접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회의는 대의원단 간부회가 곧바로 혁명위원회의 임무를 맡기로 의결했고, 이로써 페트리첸코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가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도시를 이어받았다. 억류된 공산당원 326명은 현지 당원의 약 5분의 1이었고, 승조원들과 같은 배급을 받았으며 고문이나 처형을 당하지 않았다.

정부 쪽의 반응은 처음부터 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칼리닌은 봉기자들의 요구가 '약간의 수정만 거치면 수용 가능하다'고 여겼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수병들이 '반혁명 분자에게 속았다'고 달래려 했다. 그러나 3월 2일 시베리아에서 막 돌아온 트로츠키가 합류한 레닌과 함께 서명한 명령은 화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 명령은 봉기를 '전(前) 장군 코즐롭스키'가 '프랑스 첩보기관'의 손으로 꾸민 '흑백(Black Hundreds)·에스에르적' 반란으로 규정하고 코즐롭스키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페트로그라드 전주에 계엄을 선포했다.

코즐롭스키 신화야말로 이 시기 볼셰비키 선전전의 첫 발이었다. 그는 트로츠키 자신이 임명한 포병 전문가였고, 임시혁명위원회는 그의 공세 권고(오라니엔바움 공격, 얼음 깨기, 바리케이드 구축)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요새 사령관이 도망치자 그 자리를 거절하고 포병 기술 업무만 맡았다. 빅토르 세르주는 이 뒷이야기를 칼리닌이 닻 광장에서 돌아온 직후 지어냈다고 증언했다.

3월 5일, 트로츠키가 서명한 최후통첩이 섬에 투하되었다. 즉각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자고새처럼 사살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와 동시에 체카는 봉기 가담자의 가족을 인질로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내전기에 트로츠키가 써먹은 수법 그대로였다. 봉기 쪽은 '우리 수감자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페트로그라드가 가족을 인질로 잡는 한 석방하지 않겠다'고 맞받았다. 인질 작전은 결국 이 시기 유일하게 존재했던 중재 시도까지 좌초시켰다. 크론시타트는 무기를 쥐었지만, 정부가 먼저 협상의 손을 내밀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얼어붙은 만 위에서 기다렸다.

얼음이 녹기 전에, 제7군은 왜 첫 공세를 서둘렀는가

크론시타트는 바다 위의 요새였고, 3월 초의 얼음은 정부에 남은 짧은 통로였다. 얼음이 녹으면 육군은 접근할 수 없고, 봉기 측은 발트해에서 보급과 외부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가 협상을 거부한 까닭은 단순한 체면이 아니었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파업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요새의 요구가 백군의 구호가 아니라 소비에트와 사회주의의 언어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크론시타트가 버티는 시간 자체가 본토의 권력 관계를 바꿀 수 있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를 혁명의 군사적 후방에 생긴 정치적 균열로 보았고, 3월 5일 최후통첩 뒤 미하일 투하쳅스키에게 제7군을 맡겼다.

그러나 서두름은 작전상의 약점을 만들었다. 3월 7일 해안 포대와 항공기가 요새를 포격했지만, 포격만으로는 두 전함과 해안포가 지키는 섬을 침묵시킬 수 없었다. 3월 8일 첫 공격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은 개활지인 얼음 위로 나아가야 했다. 눈보라와 어둠은 진격을 가렸지만 방향을 잃게 했고, 요새의 기관총과 포탄은 얼음을 깨뜨렸다. 일부 병사들은 공격을 거부하거나 뒤로 물러났고, 몇몇 부대에서는 봉기 측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나왔다. 이는 군대가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뜻만은 아니다. 내전 직후의 병사들에게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가 같은 혁명의 수병을 쏘라고 명령한 상황은 전투 의지를 약화시키는 정치적 모순이었다.

봉기 측도 이 기회를 승리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은 요새의 화력과 방어 위치를 믿고 정부가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렸으며, 얼음 위에서 추격하거나 본토로 돌파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첫 공세의 실패는 협상으로 이어지지 않고, 양쪽의 계산을 더 가혹하게 만들었다. 정부는 망설이는 부대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해 다음 공격에 더 충성스러운 병력과 당대회 참가자들을 앞세웠고, 수병들은 포격이 자신들의 요구를 논박하는 대신 무력으로 지우려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월 7~8일의 전투는 아직 함락이 아니었지만, 혁명 내부의 논쟁이 군사적 시간표에 밀려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요새를 되찾은 뒤, 혁명은 누구를 처벌했는가

두 번째 공격은 단순히 요새 하나를 점령하는 작전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지도부가 두려워한 것은 크론시타트의 포병보다, 봉기한 수병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사이에 다시 정치적 연결이 생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격군은 병력만 늘린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강제력을 덧붙였다. 3월 16일 밤에서 17일 새벽,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부대는 흰 위장복을 입은 병사, 사관생도, 체카 분견대와 제10차 당대회에서 자원한 당원들을 앞세워 얼음 위를 여러 방향에서 건넜다. 공격자들에게 이것은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한 가혹하지만 불가피한 조치였다. 봄이 오면 얼음이 녹아 해상 보급과 방어가 가능해지고, 페트로그라드의 불안이 요새의 저항과 결합할 수 있었다. 반대로 봉기 측은 자신들이 1917년의 소비에트 권력을 회복한다고 믿었지만, 주도권을 쥐고 먼저 페트로그라드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 결과 장거리 포와 요새의 화력은 있었어도, 지친 수비대는 고립된 채 싸워야 했다. 3월 17일의 시가전에서 붉은 군대는 큰 사상자를 내며 방어선을 뚫었고, 다음 날 아침 마지막 저항이 끝났다. 공식적인 소비에트 손실은 527명 전사와 3,285명 부상이었지만, 미국 영사관의 비보도 추산은 전체 손실을 약 1만 명으로 보았다. 숫자가 갈리는 까닭은 얼음 위에서 사라진 병사와 첫 공격의 손실을 어떻게 셈하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패배가 확실해지자 약 8,000명이 얼음을 걸어 핀란드로 빠져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스테판 페트리첸코와 임시혁명위원회 구성원들이 있었고, 후퇴는 조직된 망명이라기보다 체포와 처형을 피하려는 긴급한 탈출에 가까웠다. 요새에 남은 전함 승조원들은 지도부가 배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달아난 사실을 알게 된 뒤 장교들을 체포하고 항복했다. 이 장면은 봉기가 끝까지 하나의 지휘체계로 움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핀란드로 간 피란민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가가 떠넘긴 정치적 비용을 짊어졌다. 소련은 훗날 사면을 제시했지만,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처형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요새 안의 처벌도 전투와 구별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소련 재판 통계에는 2,103명 사형 선고, 6,459명 강제노동 선고라는 수치가 남아 있으며, contemporaneous한 보도와 후대 연구는 약 2,000명이 재판 없이 즉결 처형되었다고 추산한다. 따라서 ‘진압’은 3월 18일의 군사적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반혁명 음모를 제거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처벌받은 사람들 중에는 외국의 지휘를 받은 장교들만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재선거와 좌파의 자유를 요구한 수병, 병사, 노동자도 있었다. 크론시타트의 정치적 요구 일부는 곧 경제정책의 전환 속에서 흡수되었지만, 그 요구를 제기한 주체들은 침묵시키거나 국외로 밀어냈다. 이 비대칭이야말로 1921년의 승리가 무엇을 보존했고 무엇을 폐기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양보한 곡물, 닫아 건 당: 크론시타트가 남긴 두 개의 유산

크론시타트가 모스크바의 결정을 직접 만들어 냈다고 말하면 순서를 거꾸로 놓게 된다. 곡물 강제징발을 현물세로 바꾸자는 구상은 봉기 전부터 논의되고 있었고, 제10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농민과 노동자 사이의 동맹을 회복하지 않으면 소비에트 권력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음 위에서 당원들이 자기 당의 요새를 공격하는 동안 이 결정을 통과시킨 사실은 그 구상의 정치적 의미를 바꾸었다. 3월 15일 채택된 결의는 농민이 세금을 낸 뒤 남은 곡물을 처분하고 거래할 수 있게 했다. 전시공산주의를 영구적 공산주의의 지름길로 여긴 기대를 철회하고, 소농이 생산을 다시 시작할 물질적 유인을 주자는 후퇴이자 재건 전략이었다. 트로츠키도 전시공산주의가 경제 원리가 아니라 군사적 필요가 낳은 조치였다고 설명했지만, 이 경제적 양보는 봉기자들이 요구한 소비에트의 정치적 재구성과 함께 오지 않았다.

오히려 당의 문은 더 좁아졌다. 3월 16일 〈당의 통일에 관한〉 결의는 모든 분파와 집단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고, 중앙위원회가 예외적 조치로 분파 활동자를 제명할 수 있게 했다. 레닌과 다수 지도자에게 이것은 포위된 노동자 국가에서 공개적 이견이 군사적 적에게 통로를 내주는 상황을 막는 방어선이었다. 실제로 당대회 대의원 약 300명이 크론시타트 진압에 자원했고, 그중 10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그 방어선은 당내 비판을 조직하는 제도도 함께 제거했다. 모스크바는 경제 영역에서 농민에게 제한된 시장을 돌려주면서 정치 영역에서는 소비에트와 당을 분리하자는 요구를 거부한 셈이다. 훗날 이 결의가 스탈린의 경쟁자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었다는 평가는 결과를 알고 하는 해석이지만, 1921년의 선택이 위기 대응을 넘어 권력 집중의 통로를 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소련 붕괴 뒤 국가는 이 유산을 법적으로 다시 읽었다. 1994년 1월 10일 보리스 옐친의 대통령령은 ‘1921년 봄 크론시타트 사건’ 참가자들을 복권했다. 이는 봉기자들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채택한 일이 아니라, 소비에트 법정의 판결과 처벌을 부당한 국가 탄압으로 되돌린 사후의 법적 판단이었다. 따라서 크론시타트의 결말은 두 겹이다. 1921년에는 경제 정책의 수정과 정치적 폐쇄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1994년에는 그 폐쇄가 낳은 처벌의 정당성이 뒤집혔다. 복권은 얼음 위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반혁명자였다는 공식 설명을 폐기했지만, 그들이 요구한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무엇이 끝났고, 무엇은 아직 판결되지 않았는가

크론시타트가 확정한 첫 번째 사실은 정치적이었다. 1921년 3월의 소비에트 국가는 무장한 노동자와 수병이 요구한 소비에트 재선거와 좌파의 공개 활동을 협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군사력과 형벌로 응답했다. 봉기자들이 스스로 내건 언어는 자본주의 복고의 선언이 아니었다. 3월 8일 간행된 크론시타트 임시혁명위원회 기관지의 선언은 이 봉기를 ‘노동대중의 마지막 족쇄를 끊는 제3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그들의 요구가 1917년의 약속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 관료제가 그것을 가로막았다는 판단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선택은 요새의 군사적 고립, 지도부의 지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운동의 약화라는 조건 속에서 패배와 처벌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크론시타트는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과, 혁명 정부가 혁명의 사회적 기반을 강제로 침묵시킬 수 있다는 점을 함께 확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곧바로 ‘볼셰비키 독재의 필연적 완성’이었다고 판결한 것은 아니다. 신경제정책은 봉기 전에 이미 당 지도부에서 검토되고 있었고, 크론시타트 하나가 정책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레닌이 제10차 당대회에서 농민의 불만과 크론시타트를 함께 정권의 위기로 묘사한 사실은, 봉기가 전환의 속도와 정치적 의미를 바꾸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반대로 당내 분파 금지는 경제적 양보와 정치적 폐쇄가 한 묶음으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역사가들의 불일치는 이 지점에 남아 있다. 폴 에이브리치는 봉기를 전쟁과 강제징발에 지친 대중의 자발적 반란으로 보았고, 이스라엘 게츨러는 선원 명부와 당 기록을 통해 1921년 수병들이 1917년의 주역들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트로츠키의 1938년 변론은 반대로, 당시의 군사적 위기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이탈을 들어 진압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2003년 토빈 쇼리의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봉기자들이 볼셰비키의 혁명 어휘를 사용해 ‘진정한 10월’의 대표권을 되찾으려 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남은 쟁점은 봉기자들이 선했는가 악했는가가 아니다. 그들이 실제로 건설할 수 있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범위, 외부 반혁명 세력이 제공한 위험의 크기, 그리고 군사적 필요가 정치적 탄압을 정당화할 수 있었는지를 사료가 계속 다투고 있다. 확정된 것은 진압과 양보의 이중 결과이며, 확정되지 않은 것은 그 순간 다른 선택이 가능했는가이다.

결과

봉기 진압 직후 2,10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6,459명이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졌으며, 생존자 가족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레닌 스스로 '데니킨, 유데니치, 콜차크를 합친 것보다 위험하다'고 평할 만큼 볼셰비키는 사상 최대의 내부 위기를 겪었고, 3월 8일 개회한 제10차 당대회에서 전시공산주의를 폐기하고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가속화했다. 당내 분파 활동은 금지되었고, 아나키스트·사회혁명당·멘셰비키 등 좌파 정당들은 연말까지 숙청되었다. 핀란드로 탈출한 8,000여 명 중 상당수는 후일 사면 약속을 믿고 귀국했다가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1994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명령으로 크론시타트 봉기 참가자들은 공식 복권되었다.

연표

  1. 1920.12
    내전 종결, 불만은 남았다

    백군이 패퇴하고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끝났지만, 볼셰비키는 전시공산주의 곡물 강제징발을 유지했고 도시 노동자들의 배급은 계속 줄어들었다. 1921년 2월 체카는 전국에서 118건의 농민 봉기를 보고했다.

  2. 1921.02.24
    페트로그라드 파업

    빵 배급이 3분의 1로 삭감된 페트로그라드에서 트루보츠니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다른 공장들로 확산되었다. 지노비예프의 방위위원회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무장 해산시켰다.

  3. 1921.02.28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 채택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와 세바스토폴 승조원들이 페트로그라드 파업을 조사하고 돌아와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의 의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소비에트 비밀 재선거,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아나키스트에 대한 언론·집회의 자유, 정치범 석방, 정치부 폐지, 농민 토지 자유 처분권 등 15개 요구를 채택했다.

  4. 1921.03.01
    닻 광장 16,000인 대집회

    크론시타트 닻 광장에서 15,000~16,000명이 모인 가운데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미하일 칼리닌이 연설했지만 군중은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에 권력을!'이라는 구호로 그를 압도했다. 칼리닌은 무사히 귀환했지만, 봉기에 대한 정부의 군사적 대응이 임박했음을 암시했다.

  5. 1921.03.02
    임시혁명위원회 결성, 도시 장악

    300여 대의원이 모인 '대의원회의'는 크론시타트 소비에트 의장과 함대 정치위원을 체포하고, 스테판 페트리첸코를 위원장으로 하는 5인(후일 15인) 임시혁명위원회를 선출했다. 당일 밤까지 도시, 함선, 요새가 무혈 장악되었다. 326명의 현지 볼셰비키 당원이 억류되었다.

  6. 1921.03.05
    트로츠키의 무조건 항복 요구

    레프 트로츠키가 서명한 정부 최후통첩이 크론시타트에 투하되었다: 즉각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자고새처럼 사살될 것이다.' 정부는 봉기를 '흑백·에스에르적'이라 규정하고, 구(舊) 차르 장군 알렉산드르 코즐롭스키가 주도하는 반혁명 음모라고 발표했다. 체카는 봉기 가담자의 가족을 인질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7. 1921.03.07
    제7군 편성과 포격 개시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제7군(17,600명)이 편성되었고, 세스트로레츠크와 리시 노스의 포대가 크론시타트 요새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독가스 사용 가능성도 검토했으나 기상 조건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8. 1921.03.08
    1차 공세 실패

    눈보라 속에서 북부군과 남부군이 얼음 위로 진격했으나, 많은 병사가 포격으로 깨진 얼음에 빠져 익사하거나 봉기 측으로 탈주했다. 일부 부대는 진군을 거부했고, 유일하게 포르트 '파벨 1세'만 점령한 채 공세는 좌절되었다.

  9. 1921.03.16
    2차 총공세, 크론시타트 함락

    병력을 45,000명으로 증강한 투하쳅스키 부대는 제10차 당대회에서 자원한 약 300명의 대의원과 체카 분견대, 사관생도 연대를 앞세워 오전 3시에 6개 종대로 진격했다. 3월 17일 종일 이어진 시가전 끝에 다음날 아침 최후의 저항이 진압되었다. 소비에트 측 손실은 공식적으로 527명 전사, 3,285명 부상이었으나 실제로는 약 10,000명에 달했다는 것이 미국 영사관의 추산이다.

  10. 1921.03.18
    8,000명의 핀란드 탈출과 보복

    봉기 지도부를 포함한 약 8,000명이 얼음을 건너 핀란드로 탈출했다. 전함 승조원들은 장교들이 배를 자폭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체포한 후 항복했다. 3월 20일 첫 13명의 즉결 처형을 시작으로, 이후 2,10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6,459명이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11. 1921.03.15
    제10차 당대회: NEP로의 전환과 분파 금지

    크론시타트 포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열린 제10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전시공산주의를 폐기하고 식량세로 전환하는 신경제정책(NEP)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NEP 자체는 봉기 이전에 준비된 것이었으나, 크론시타트와 탐보프 농민 봉기의 충격이 채택을 가속화했다. 동시에 '당의 통일에 관한' 결의로 당내 분파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12. 1994.01.10
    옐친의 사면과 복권

    러시아 연방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대통령령으로 '1921년 봄 크론시타트 사건' 참가자들을 복권하고, 이에 대한 볼셰비키의 탄압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2010년대까지도 크론시타트 요새 박물관은 이 복권을 전시에 반영하지 않았다.

관련 인물 8명

관련 용어

출처: Paul Avrich, Kronstadt, 192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0)Israel Getzler, Kronstadt 1917–1921: The Fate of a Soviet Democr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Pravda o Kronshtadte (Prague: Volia Rossii, 1921) — the Petropavlovsk Resolution full textVladimir Lenin, Report to the 10th Congress of the RCP(b), 15 March 1921Leon Trotsky, 'Hue and Cry Over Kronstadt' (1938)Alexander Berkman, The Kronstadt Rebellion (1922)Amos Chapple, 'Shot Like Partridges: The Crushing of the Kronstadt Uprising,' RFE/RL, 28 February 2021Russian Wikipedia, Кронштадтское восстание (1921) — with citations to Soviet archival data on repression fig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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