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진군
1919년 선거에서 5천 표도 얻지 못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은 어떻게 3년 만에 정권을 쥐었고, 붉은 2년의 노동운동은 왜 행동대의 공세 앞에서 무너졌으며, 국왕과 자유주의 국가는 왜 계엄 대신 권력 이양을 택했고, 1922년의 연립 내각은 어떻게 1926년의 일당 독재가 되었나?
1차 세계대전 뒤 「불구가 된 승리」에 대한 분노와 「붉은 2년」(1919~1920)의 파업·공장 점거 속에서, 1919년 3월 밀라노에서 무솔리니가 세운 파시스트 운동은 선거에서 참패한 뒤 지주와 산업가의 돈을 받는 행동대 운동으로 바뀌었다. 1920년 11월 볼로냐 아쿠르시오궁 학살 이후 행동대는 경찰의 묵인 아래 포강 유역의 사회주의 조직과 시정부를 부쉈고, 1921년 졸리티의 국민 블록으로 의회에 들어간 운동은 11월 국가파시스트당이 되었다. 갈라진 좌파는 무장 반파시스트 조직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지지하지 않았고, 1922년 8월의 합법 파업은 실패했다. 10월 24일 나폴리에서 무솔리니가 「우리는 이탈리아를 다스리고 싶다」고 선언하고 4인 위원이 이끈 검은셔츠단이 로마로 모이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팍타 내각의 계엄령에 서명하지 않고 10월 30일 무솔리니를 총리에 임명했다. 무솔리니는 전권 위임과 국방의용군 창설, 아체르보법과 1924년 부정 선거로 권력을 굳혔고, 마테오티 살해와 아벤티노 탈퇴의 위기를 1925년 1월 3일 연설로 돌파한 뒤 1925~1926년 특별법으로 일당 국가를 세웠다.
「불구가 된 승리」와 붉은 2년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지만, 1919년 생제르맹 조약으로 남티롤·트렌티노·이스트리아·트리에스테·차라를 얻고도 피우메와 달마치아를 얻지 못하자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불구가 된 승리」라 불렀다. 전쟁 중 돌격대 아르디티로 싸운 제대 군인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사정에 분노했다. 물가는 치솟고 대규모 동원 해제로 실업이 늘어났으며, 1918년 말에는 이탈리아가 혁명 직전에 있다고 보는 관찰자도 있었다. 1 2
1919~1920년의 「붉은 2년」 동안 이탈리아 사회당의 당원은 25만 명, 사회주의 노동총동맹의 조합원은 200만 명으로 불어났고, 아나키스트 계열의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연합도 30만~50만 명을 모았다. 1919년 12월에는 아나키스트 선전가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망명에서 돌아왔다. 산업 파업은 1913년 810건에서 1919년 1,663건, 1920년 1,881건으로 늘었고, 농촌에서도 100만 명이 넘는 농민이 파업에 나섰으며 1919년 한 해에만 2만 7천 헥타르의 유휴지가 점거되었다. 1919년 7월 20~21일에는 러시아 혁명과 연대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2
토리노와 밀라노에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러시아 소비에트의 이탈리아판으로 본 공장평의회가 생겨났다. 1920년 4월 피아트 공장의 금속 노동자들이 평의회 인정을 요구하며 파업했지만 사회당과 노동총동맹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운동은 1920년 8~9월 고용주의 직장 폐쇄에 맞서 무장한 금속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북서부 「산업 삼각지대」에서 금속 노동자 40만 명과 다른 노동자 10만 명이 참여했고, 9월 3일 토리노에서만 금속 공장 185곳이 점거되었다. 그러나 사회당 지도부는 이 운동을 전국으로 넓히지 못했고, 1921년 산업 불황과 대량 해고 속에서 운동은 가라앉았다. 2
민족주의 쪽의 무력 행동은 피우메에서 먼저 터졌다. 1919년 9월 12일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군단병」 186명을 이끌고 론키에서 피우메로 들어갔고, 곧 다른 부대가 합류해 병력은 2,500명으로 늘었다. 연합군 점령군을 몰아낸 그는 「카르나로 이탈리아 섭정국」을 세우고 스스로 두체라 칭했다. 1920년 11월 12일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라팔로 조약이 피우메를 자유국으로 정하자 단눈치오는 이탈리아에 선전포고했고, 조반니 졸리티 정부는 12월 24일 군대를 보내고 해군에 시내를 포격하게 해 그를 몰아냈다. 피우메 점령은 2년 뒤 로마 진군의 부분적인 「선례이자 영감」이 되었다. 3 4 5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행동대로
1919년 3월 23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밀라노 산세폴크로 광장의 회관에서 지지자 50~200명과 함께 「이탈리아 전투자 파쇼」를 세웠다. 전쟁 전 사회당 지도자였다가 참전론으로 당에서 쫓겨난 그는 참호에서 싸운 사람들이 새 지배 계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립 강령은 여성 참정권과 상원 폐지, 공화국 같은 좌파 요구와 피우메·달마치아 영유 같은 민족주의 요구를 한데 섞었다. 4월 15일에는 마리네티 등이 이끈 파시스트들이 사회당 기관지 『아반티!』의 사무실과 인쇄기를 부쉈고, 무솔리니는 이를 「파시스트 혁명의 첫 물질적 성과」라 불렀다. 1 6
1919년 11월 총선은 파시스트에게 참패였다. 밀라노에서 사회당이 19만 표를 얻을 때 무솔리니의 명부는 5천 표에도 못 미쳤고 의석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사회당원들은 무솔리니의 이름을 쓴 관을 메고 그의 집 앞을 지나는 모의 장례 행렬을 벌였고, 연말 파쇼의 회원은 4천 명 아래로 줄었다. 무솔리니는 정치를 그만두고 이민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사회당이 제1당이 되자 놀란 보수 세력이 새 동맹을 찾았고, 무솔리니는 파쇼를 좌파에서 전통 우파와의 동맹 쪽으로 돌려세웠다. 1 5
1920년 가을부터 파쇼는 농촌으로 눈을 돌렸다. 사회주의 농업 노동조합에 맞선 지주들의 돈과 경찰의 묵인을 업고, 대개 전직 장교가 이끄는 30~50명 단위의 행동대가 「징벌 원정」에 나서 사회당 지부와 노동회의소를 불태우고 조합 간부를 때리고 죽였다. 이들은 에티오피아 귀족 칭호를 빌린 「라스」라 불린 지역 두목의 지휘를 받았다. 페라라의 이탈로 발보, 크레모나의 로베르토 파리나치, 볼로냐의 디노 그란디가 대표적이었고, 크레모나 행동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잔혹한 축에 들었다. 1920년 하반기 일곱 달 동안 파시스트 회원은 열 배로 늘었다. 1 7 6 8
전환점은 1920년 11월 21일 볼로냐였다. 최대강령파 사회주의자 에니오 그누디의 새 시정부가 출범하던 날, 시청사인 아쿠르시오궁 앞 마조레 광장의 군중을 파시스트 행동대가 공격했다. 혼란 속에서 사회당 지지자 10명과 우파 시의원 줄리오 조르다니가 죽고 약 60명이 다쳤다. 경찰은 사태를 알고도 개입하지 않았고, 파시스트는 조르다니를 첫 「순교자」로 내세웠다. 그 뒤 포강 유역 전역에서 행동대가 사회주의 시정부와 노동조합 간부를 공격해 지방 행정을 마비시켰다. 1921년 10월 부드리오의 한 의원은 총리에게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클럽은 48시간 안에 스스로 해산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 파괴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타전했다. 9 5
국민 블록과 평화 협정, 1921년
조반니 졸리티는 1921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자유주의자와 무솔리니의 파쇼, 이탈리아 민족주의 협회를 묶은 「국민 블록」을 만들었다. 사회당의 성장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정부와 손잡은 파시스트는 처벌받지 않고 반대파를 위협했다. 경찰은 트럭을 빌려주었고 군 부대는 무기를 건넸으며 판사들은 대개 무죄를 선고했다. 선거 기간에만 정치적 살해가 207건 일어났고, 희생자는 파시스트보다 사회주의자가 훨씬 많았다. 파시스트는 득표율 7%로 535석 가운데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가 처음 의원이 되었지만, 졸리티의 명부는 19.1%에 그쳐 그는 물러났다. 4 1 7
같은 해 1월 리보르노에서 열린 이탈리아 사회당 제17차 대회에서는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투라티의 개혁파를 내쫓으라는 요구를 다수파가 거부하자,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이끄는 공산주의 분파가 퇴장해 이탈리아 공산당을 세웠다. 자친토 메노티 세라티의 최대강령파는 개혁파를 내보내면 많은 노동자를 잃는다며 분열을 미루려 했다. 노동운동은 파시스트의 공세 한가운데서 셋으로 갈라졌다. 10
1921년 6월 말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공화주의자와 일부 전직 장교들이 무장 반파시스트 조직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세웠고, 여름까지 약 2만 명이 모였다. 그러나 사회당도 공산당도 이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사회당 기관지는 이들을 비판했고, 공산당은 비공산주의자가 섞였다는 이유로 당원들에게 탈퇴를 명령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8월 글에서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통일 행동으로 칭찬하며 보르디가 노선을 비판했고, 10월에는 코민테른도 이탈리아 공산당의 「분파주의 정책」을 나무랐다. 11
8월 2~3일 무솔리니는 사회당·노동총동맹과 「평화 협정」을 맺어 서로의 폭력을 멈추기로 했다. 그는 지방 행동대와 지주 동맹자들을 「이탈리아에서 가장 우둔하고 귀먹은 비참한 계급」이라 깎아내렸다. 그러자 그란디·발보·파리나치 같은 라스들이 협정을 거부했고, 볼로냐에는 무솔리니를 「파시즘의 배신자」로 고발하는 벽보가 붙었다. 그란디와 발보는 단눈치오를 찾아가 「로마로의 봉기 진군」을 이끌어 달라고 청했다. 무솔리니는 8월 18일 지도부에서 사임하는 수까지 던졌지만, 11월 7~10일 로마의 제3차 대회에서 라스들에게 굴복했다. 운동은 행동대의 연합체인 국가파시스트당으로 재편되었고, 그 대가로 무솔리니는 의심할 수 없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당원은 1921년 말 32만 명에 이르렀고, 협정은 11월 15일 공식 폐기되었다. 12 7 5
1922년 여름: 합법 파업의 패배
1922년 초 보노미 내각이 무너진 뒤 자유주의자들은 졸리티를 다시 총리로 밀었지만 이탈리아 인민당의 루이지 스투르초가 이를 막았고, 국왕은 2월 26일 졸리티의 가까운 친구인 자유주의자 루이지 팍타에게 내각을 맡겼다. 그 사이 행동대는 북부와 중부의 도시를 하나씩 장악했고, 경찰은 개입하지 않거나 파시스트에게 무기를 대 주었다. 7월 31일 좌파 노동조합 연합인 노동 동맹은 「파시스트 폭력과 이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에 맞서는 합법 파업을 선언했다. 4 5 13
무솔리니는 정부가 곧바로 파업을 멈추지 않으면 파시스트가 직접 진압하겠다고 선언해 파시스트당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8월 2일 안코나에서는 시골에서 몰려온 행동대가 사회주의자들이 쓰던 건물을 모두 부쉈고, 제노바 등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밀라노에서는 8월 3~4일 시가전 끝에 파시스트가 『아반티!』의 인쇄기를 부수고 건물을 불태웠으며, 지역 사업가들의 지원 아래 선출된 사회당 시정부를 시청에서 몰아냈다. 파업은 실패했고, 로마의 정부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5
예외는 파르마였다. 8월 초 파시스트당이 인근 지방에서 동원한 행동대가 도시를 포위했고 발보가 지휘를 넘겨받았지만, 귀도 피첼리와 안토니오 치에리가 이끈 아르디티 델 포폴로와 주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막아 냈다. 동원 규모는 이탈리아어 위키백과가 약 1만 명, 영어 위키백과가 2만 명(수비대 350명)으로 적는다. 8월 6일 파시스트는 도시를 정복하려면 진짜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치안을 군대에 넘긴 뒤 물러났다. 파르마는 행동대에 맞선 저항이 승리한 마지막 사례의 하나로 남았다. 13 11
로마 진군
정부의 무기력은 무솔리니에게 로마 진군을 계획하게 했다. 밀라노의 근거지에서 파시스트는 「파업과 볼셰비즘, 국유화」에 맞서려는 대기업들의 자금을 모았고, 진군 이틀 전에는 이탈리아 산업총연맹 대표단이 무솔리니를 만났다. 팍타가 11월 4일 전승 기념 대집회를 단눈치오에게 맡겼다는 소식을 듣자 무솔리니는 계획을 서둘렀다. 10월 24일 나폴리의 파시스트 집회에서 그는 6만 명 앞에서 「우리의 강령은 간단하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다스리고 싶다」고 선언했다. 이튿날 그는 에밀리오 데 보노·이탈로 발보·미켈레 비안키·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 네 사람을 진군을 지휘할 「4인 위원」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밀라노로 갔다. 5
10월 26일 전 총리 안토니오 살란드라가 무솔리니가 사임을 요구하며 로마로 진군하려 한다고 경고했지만, 팍타는 무솔리니가 자기 내각의 장관 정도에 만족하리라 여겼다. 검은셔츠단이 로마 주변에 모이고 전국의 요충지를 점거하자, 이미 사의를 밝히고도 직무를 보던 팍타는 내각의 만장일치로 로마에 계엄을 선포하는 칙령을 준비했다. 그러나 10월 28일 아침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서명을 거부했다. 국왕은 군이 내전을 일으키지 않고 봉기를 막을 수 있을지 의심했다. 군의 충성과 파시스트에 우호적인 사촌 아오스타 공작의 야심을 걱정했다는 설명도 있고, 무솔리니를 넣은 살란드라 내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무력한 팍타 정부를 치우려 했다는 해석(데니스 맥 스미스)도 있다. 5 14 15
그날 밀라노에서 무솔리니는 살란드라와 타협하라고 재촉하는 산업가 대표단을 만났지만 거절했다. 그는 하급 장관 자리라도 받을 듯하다가 총리직을 요구했고, 10월 29일 내각 구성을 요청받아 30일 총리에 임명되었다. 진군한 인원은 3만 명이 안 되었으나, 2만 5천 명의 검은셔츠단이 로마를 행진했고 31일에는 무솔리니가 연립 내각을 꾸리는 동안 시가행진을 벌였다. 무솔리니 자신은 진군에 참여하지 않았고, 행진하는 모습의 사진만 찍게 했다. 5
무솔리니는 알베르토 헌장에 따라 합법적으로 권력에 올랐다. 로마 진군은 파시즘이 나중에 기념한 권력 탈취가 아니라 헌정 틀 안에서 권력 이양을 앞당긴 압력이었고, 그 이양은 파시스트의 위협 앞에서 공권력이 항복했기에 가능했다. 국왕은 군과 기업계, 우파의 지지를 받는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넘겼고, 많은 기업·금융 지도자는 처음에 자유시장과 자유방임을 강조한 무솔리니를 다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5
연립 내각에서 아체르보법까지, 1922~1924년
무솔리니의 첫 내각은 이탈리아 우파의 연립이었다. 파시스트당에서 장관급은 총리 겸 외무·내무장관인 무솔리니뿐이었고, 교육장관 조반니 젠틸레, 식민장관 루이지 페데르초니, 전쟁장관 아르만도 디아스 같은 보수·민족주의 인사와 인민당 우파, 자유주의 여러 분파가 자리를 나눴다. 11월 16일 그는 하원을 언제든 「내 행동대의 야영지」로 만들 수 있다고 위협하며 전권을 요구했다. 24일 1923년 말까지의 전권 위임안에 사회당과 공산당 의원만 반대했고,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와 조반니 아멘돌라 등 자유주의자 일곱은 기권했으며, 졸리티·살란드라·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이반오에 보노미·팍타 다섯 전직 총리는 찬성했다. 6
집권은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1922년 12월 18~20일 토리노에서는 데 베키의 부추김을 받은 피에로 브란디마르테의 행동대가 노동자 14명을 죽이고 26명을 다치게 했으며, 노동회의소와 그람시의 『오르디네 누오보』 사무실을 불태우고 부쉈다. 산업가들의 요청으로 지사는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연말에는 수천 명의 파시스트가 사면을 받았다. 1923년 2월 1일 행동대는 국방의용군(검은셔츠단)이라는 국가 민병대로 개편되었고, 같은 달 무솔리니는 내각 자리를 얻지 못한 라스들을 위한 기구로 파시스트 대평의회를 만들었다. 16 17 6 18
1923년 3월 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민족주의 협회를 흡수해 군·궁정·관료와 줄이 닿는 인사들을 얻었고, 그 가운데 알프레도 로코가 체제의 법적·이념적 토대를 놓게 된다. 4월 인민당이 토리노 대회에서 반파시스트 노선을 다시 확인하자 무솔리니는 인민당 장관들을 내보냈고, 바티칸과 상의한 스투르초는 7월 10일 당 지도자에서 물러났다. 파시스트당원은 1922년 10월 30만 명 미만에서 1923년 말 78만 3천 명으로 불어났다. 6 19
자코모 아체르보 남작이 제안해 1923년 의회를 통과한 아체르보법은 25% 이상을 얻은 최다 득표 정당에 의석의 3분의 2를 주었다. 무장한 행동대가 의사당에 버티고 선 가운데 사회당은 반대했지만 다른 정당을 모으지 않았고, 스투르초를 잃은 인민당은 기권 방침에도 14명이 찬성했으며 자유주의 소정당들은 대체로 찬성했다. 1924년 4월 6일 총선에서 파시스트와 일부 자유주의자의 「국민 명부」는 유권자 위협과 부정 속에 64.94%를 얻어 374석을 차지했다. 사회당은 123석에서 22석으로, 인민당은 108석에서 39석으로 줄었다. 이것이 1946년까지 이탈리아의 마지막 복수 정당 선거였다. 20 15
마테오티 위기와 아벤티노 탈퇴
1924년 5월 30일 통일사회당 서기장 자코모 마테오티는 하원에서 선거의 폭력과 부정을 고발하고 선거 무효를 요구했다. 열하루 뒤인 6월 10일, 의사당으로 가던 그는 테베레 강변로에서 아메리고 두미니가 이끈 파시스트 행동대에게 납치되어 차 안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무솔리니는 이튿날 의회에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만, 납치에 쓰인 차가 확인되면서 수사는 며칠 만에 총리 집무실 문턱까지 이르렀다. 시신은 8월 16일 로마 북쪽 23킬로미터 리아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21 6
6월 27일 조반니 아멘돌라와 필리포 투라티가 이끈 야당 의원 대부분이 헌정 질서와 민주적 자유가 회복될 때까지 하원 활동을 거부하는 「아벤티노 탈퇴」에 들어갔다. 이들은 봉기가 아니라 헌정적 압력으로 국왕이 무솔리니를 해임하게 하려 했다. 공산당은 따로 「반의회」를 세우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11월 의회로 돌아갔다. 경찰청장 겸 민병대 사령관 데 보노는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윗선을 끌어들이지 않은 채 1925년 무죄로 풀려났다. 22 23
그러나 국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부가 하원과 상원의 압도적 다수를 쥐고 있었고, 무솔리니를 물러나게 하면 군과 검은셔츠단의 내전이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멘돌라는 12월 27일 파시스트 지도부의 연루를 밝힌 체사레 로시의 진술서를 신문에 실었고, 보노미는 이를 국왕에게 전했지만 아무 결과도 없었다. 12월 31일 국방의용군 지휘관들이 무솔리니를 찾아와 반대파를 짓밟지 않으면 자기들이 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6 24 22
1925년 1월 3일 무솔리니는 하원 연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정치적·도덕적·역사적 책임」을 자신이 진다고 선언하고, 야당에게 정식으로 탄핵해 보라고 도발했다. 그는 「이 연설 뒤 48시간 안에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 경고했고, 내무장관 페데르초니는 곧바로 지사들에게 반대파 집회와 단체를 억누르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 연설은 마테오티 살해를 지시했다는 법적 자백은 아니었지만, 이탈리아 역사학에서 파시스트 독재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22 25 6
파시스트 특별법과 일당 국가, 1925~1926년
1월 3일 이후 야당 의원은 의회로 돌아갈 길을 잃었다. 1925년 1월 10일의 검열 법령에 이어 자유주의 대신문들은 남아 있던 반대파 편집인을 내보냈고, 1925년 12월 31일의 언론법은 정부가 꺼리지 않는 사람만 신문의 책임 편집인이 될 수 있게 했다. 7월 20일 아멘돌라는 검은셔츠단 15명에게 곤봉으로 맞았고, 그 부상으로 1926년 4월 7일 프랑스 칸에서 숨졌다. 무솔리니는 1925년부터 반파시스트들이 1923년에 만든 말인 「전체주의」를 체제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6 26 24
이른바 「파시스트 특별법(레기 파시스티시메)」이 국가를 바꿨다. 1925년 12월 24일 법은 총리를 국왕에게만 책임지는 「정부 수반」으로 만들고 의회의 의사일정을 그가 정하게 했으며, 1926년 1월 31일 법은 정부에 법률의 효력을 지닌 명령권을 주었다. 2월 4일 법은 선출 시장과 의회를 없애고 정부가 임명하는 포데스타를 세웠다. 1925년 10월 2일 비도니궁 협정으로 산업총연맹과 파시스트 조합이 서로를 유일한 교섭 상대로 인정한 데 이어, 1926년 4월 3일 법은 파업과 직장 폐쇄를 금지하고 「법적으로 인정된」 파시스트 조합에만 단체협약을 맺을 권리를 주었다. 26
1926년에는 무솔리니를 노린 암살 시도가 잇따랐다. 4월 7일 바이올렛 깁슨이, 9월 11일 아나키스트 지노 루체티가 그를 노렸고, 10월 31일 볼로냐에서는 열다섯 살 안테오 참보니가 총을 쏘았다가 그 자리에서 린치당해 죽었다. 정권은 이를 구실로 마지막 조치를 밀어붙였다. 11월 6일 공안법은 지사들에게 체제에 반하는 모든 정당과 단체를 해산하게 하고 반파시스트를 유형에 보내게 했고, 11월 9일 하원은 아벤티노에 참여한 의원 123명과 공산당 의원들의 자격을 박탈했다. 11월 25일 법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국가 방위 특별 재판소를 세웠다. 6 11 26 22
경찰은 의원 면책 특권에도 공산당 지도자 그람시를 체포했고, 검사는 재판에서 「20년 동안 이 두뇌가 작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에 있던 팔미로 톨리아티는 체포를 피했다. 투라티는 1926년 카를로 로셀리·산드로 페르티니 등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탈출했고, 스투르초는 이미 1924년 10월 런던으로 떠났다. 그 사이 무솔리니는 1926년 3월 30일 당 서기장 파리나치를 내쳐 독자적 당 독재를 노리던 강경파를 밀어냈다. 이탈리아는 1925년부터 사실상, 1926년 11월부터는 법적으로 국가파시스트당의 일당 국가가 되었고, 1928년 선거법은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고른 단일 명부를 찬반 투표에 붙이는 제도로 의회 선거를 대신했다. 27 28 29 19 6
평가
로마 진군을 「혁명」으로 볼 것인가는 지금도 쟁점이다. 파시스트 지식인들과 역사가 렌초 데 펠리체는 이 시기를 「파시스트 혁명」이라 불렀고, 에밀리오 젠틸레·제에프 스테른헬·조지 모스는 이를 우파의 「전체주의 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가에타노 아르페는 이탈리아 역사학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반박했고, 엔초 트라베르소는 전통 엘리트의 지지 없이 권력을 잡은 파시스트 운동은 없었다며 이들이 파시즘의 보수적 구성 요소를 놓친다고 비판했다. 진군 자체에 대해서는 헌정 틀 안의 권력 이양이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공권력의 항복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28 5
사회적으로 파시즘의 집권은 붉은 2년의 성과를 거꾸로 돌렸다. 경제학자 클라라 마테이에 따르면 1921년 이탈리아 산업 노동자의 평균 명목 일당은 전쟁 전의 다섯 배로 올랐지만, 1922~1928년의 파시스트 긴축 끝에 1929년 노동자의 임금 몫은 1913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행동대의 자금은 지주와 산업가에게서 나왔고, 파시스트는 농업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시정부를 하나씩 부순 뒤에야 국가 권력에 이르렀다. 역사가 스탠리 페인의 말처럼 농촌의 새 대중 파시즘은 무솔리니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솟아난 것이었다. 2 12
사회주의 운동에게 이탈리아는 첫 교훈이었다. 사회당은 행동대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보르디가의 공산당은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버렸으며, 야당은 아벤티노에서 국왕의 개입만 기다렸다. 1922년 모스크바에 간 그람시는 반파시스트 좌파 통일전선을 세우라는 지침을 받아 돌아왔고, 1926년 1월 리옹 대회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통일전선 테제를 채택했지만 이미 늦었다. 반파시스트 아멘돌라는 1923년 파시즘을 기존 독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전체주의」로 규정했고, 젠틸레는 같은 말을 긍정적으로 바꿔 썼다. 행동대는 히틀러의 돌격대에 영감을 주었고, 1923년 11월 나치당의 맥주홀 폭동은 로마 진군을 본떴다. 11 22 27 24 7 5
결과
이탈리아는 1926년 11월 모든 반대 정당이 해산되고 야당 의원 자격이 박탈되면서 국가파시스트당의 일당 국가가 되었고, 1928년부터 의회 선거는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고른 단일 명부에 대한 찬반 투표로 바뀌었다. 정부 수반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선출 지방정부와 독립 노동조합, 파업권, 언론 자유가 사라졌으며, 특별 재판소가 그람시를 비롯한 반파시스트를 가두었다. 붉은 2년의 임금 상승은 파시스트 긴축 속에 되돌려졌다. 로마 진군은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공권력과 전통 엘리트의 항복으로 이루어진 헌정 내 권력 이양이었다는 점에서 유럽 파시즘 집권의 첫 모형이 되었고, 행동대는 히틀러의 돌격대에, 진군은 1923년 맥주홀 폭동에 영감을 주었다. 반파시스트 아멘돌라가 이 체제를 「전체주의」라 이름 붙였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파시즘에 맞선 통일전선의 문제를 이탈리아에서 처음 마주했다.
연표와 지도
- 11919.03.23이탈리아 전투자 파쇼 창립
무솔리니가 밀라노 산세폴크로 광장의 회관에서 지지자 50~200명과 파시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 21919.04.15『아반티!』 습격
파시스트들이 사회당 기관지의 사무실과 인쇄기를 부쉈다. 무솔리니는 이를 「파시스트 혁명의 첫 물질적 성과」라 불렀다.
- 1919.07.20러시아 혁명 연대 총파업
20~21일 러시아 혁명과 연대하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 31919.09.12단눈치오의 피우메 점령
「군단병」 186명을 이끌고 론키에서 피우메로 들어간 단눈치오가 곧 2,500명을 거느리고 연합군 점령군을 몰아냈다.
- 41919.11.16총선, 파시스트 참패
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고, 밀라노의 파시스트 명부는 5천 표에도 못 미쳐 의석을 얻지 못했다.
- 51920.09.03공장 점거의 정점
토리노에서만 금속 공장 185곳이 점거되었다. 산업 삼각지대에서 노동자 50만 명이 참여했다.
- 61920.11.21아쿠르시오궁 학살
사회당 시정부 출범일에 파시스트 행동대가 볼로냐 마조레 광장의 군중을 공격해 11명이 죽고 약 60명이 다쳤다.
- 71920.12.24피우메 진압
졸리티 정부가 군대를 보내고 해군에 피우메를 포격하게 해 단눈치오를 몰아냈다.
- 81921.01.21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리보르노의 사회당 대회에서 보르디가가 이끈 공산주의 분파가 퇴장해 새 당을 세웠다.
- 1921.05.15국민 블록 총선
졸리티의 국민 블록에 들어간 파시스트가 35석을 얻었고 무솔리니가 처음 의원이 되었다. 선거 기간 정치적 살해가 207건 일어났다.
- 1921.06아르디티 델 포폴로 결성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가 무장 반파시스트 조직을 세웠지만 사회당과 공산당은 지지하지 않았다.
- 91921.08.03평화 협정
무솔리니가 사회당·노동총동맹과 폭력 중단 협정을 맺었지만 라스들이 거부했다.
- 101921.11.07국가파시스트당 창당
7~10일 로마의 제3차 대회에서 운동이 국가파시스트당으로 재편되고 평화 협정은 폐기되었다.
- 111922.02.26팍타 내각
인민당이 졸리티의 재집권을 막자 국왕이 자유주의자 루이지 팍타에게 내각을 맡겼다.
- 1922.07.31노동 동맹의 합법 파업
좌파 노동조합 연합이 파시스트 폭력과 국가의 무관심에 맞서 파업을 선언했다.
- 121922.08.03『아반티!』 방화
3~4일 밀라노 시가전 끝에 파시스트가 『아반티!』를 불태우고 사회당 시정부를 몰아냈다.
- 131922.08.06파르마의 바리케이드
아르디티 델 포폴로와 주민들의 저항에 막힌 발보의 행동대가 치안을 군대에 넘기고 물러났다.
- 141922.10.24나폴리 집회
무솔리니가 6만 명 앞에서 「우리는 이탈리아를 다스리고 싶다」고 선언했다.
- 151922.10.28국왕의 계엄령 서명 거부
팍타 내각이 준비한 로마 계엄 칙령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서명하지 않았다.
- 161922.10.30무솔리니 총리 임명
29일 내각 구성을 요청받은 무솔리니가 총리에 임명되었고, 2만 5천 명의 검은셔츠단이 로마를 행진했다.
- 171922.11.24전권 위임
하원이 1923년 말까지 정부에 전권을 주었다. 사회당과 공산당만 반대했다.
- 181922.12.18토리노 학살
18~20일 브란디마르테의 행동대가 노동자 14명을 죽이고 노동회의소를 불태웠다.
- 1923.02.01국방의용군 창설
행동대가 국가 민병대인 국방의용군(검은셔츠단)으로 개편되었다.
- 1923.07.10스투르초 사임
무솔리니가 성직자에 대한 보복을 위협하자 인민당의 스투르초가 바티칸과 상의해 지도자에서 물러났다.
- 191923.11아체르보법
25% 이상을 얻은 최다 득표 정당에 의석 3분의 2를 주는 선거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 1924.04.061924년 총선
위협과 부정 속에 국민 명부가 64.94%를 얻어 374석을 차지했다.
- 201924.06.10마테오티 살해
선거 부정을 고발한 통일사회당 서기장 마테오티가 두미니의 행동대에게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 211924.06.27아벤티노 탈퇴
아멘돌라와 투라티가 이끈 야당 의원 대부분이 하원 활동을 거부했다.
- 221924.12.31민병대 지휘관들의 최후통첩
국방의용군 지휘관들이 반대파를 짓밟지 않으면 직접 하겠다고 무솔리니에게 통보했다.
- 231925.01.031월 3일 연설
무솔리니가 「정치적·도덕적·역사적 책임」을 자임하며 독재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 241925.12.24정부 수반법
총리를 국왕에게만 책임지는 정부 수반으로 만들고 의회의 의사일정을 그가 정하게 했다.
- 1926.04.03파업 금지법
파업과 직장 폐쇄를 금지하고 파시스트 조합에만 단체협약 권한을 주었다.
- 251926.10.31볼로냐 암살 시도
열다섯 살 안테오 참보니가 무솔리니를 쏘았다가 그 자리에서 린치당했다.
- 261926.11.09야당 의원 자격 박탈
6일 공안법으로 모든 반대 정당이 해산된 데 이어 하원이 아벤티노 의원 123명과 공산당 의원들의 자격을 박탈했다. 25일에는 국가 방위 특별 재판소가 세워졌다.
관련 인물 26명
파시스트 운동과 국가파시스트당9명
지도부5
1919년 이탈리아 전투자 파쇼를 세우고 1921년 국가파시스트당으로 재편했다. 로마 진군 끝에 1922년 10월 총리가 되었고, 1925년 1월 3일 연설과 이어진 특별법으로 일당 독재를 세웠다.
4인 위원, 페라라의 라스이탈로 발보1896–1940페라라 파시스트 조직의 주역으로 평화 협정을 거부했고, 1922년 8월 파르마 공격을 지휘했다. 로마 진군을 이끈 4인 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4인 위원, 경찰청장에밀리오 데 보노1866–19444인 위원으로 로마 진군을 조직했고, 이후 경찰청장 겸 파시스트 민병대 사령관이 되었다. 마테오티 살해와 관련해 재판받았으나 윗선을 끌어들이지 않고 1925년 무죄로 풀려났다.
4인 위원, 토리노 행동대 지도자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1884–1959당의 왕당파·온건파를 대표하며 토리노 행동대를 이끌었고 4인 위원으로 로마 진군을 조직했다. 1922년 12월 브란디마르테의 행동대를 부추겨 토리노 학살을 일으켰다.
4인 위원, 당 서기장미켈레 비안키1883–19301921년 국가파시스트당 서기장이 되어 행동대의 습격을 승인했고, 4인 위원으로 로마 진군을 이끌었다.
집행 · 지휘2
국왕과 자유주의 국가5명
지도부3
1922년 10월 28일 팍타 내각의 계엄령에 서명하지 않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불렀다. 마테오티 위기 때도 무솔리니를 해임하지 않았다.
총리루이지 팍타1861–19301922년 2월 총리가 되어 로마 진군에 맞서 계엄을 준비했으나 국왕의 거부로 사임했다. 그해 11월 무솔리니 정부의 전권 위임에 찬성했다.
자유주의 지도자, 전 총리조반니 졸리티1842–19281920년 12월 피우메에서 단눈치오를 몰아냈고, 1921년 파시스트를 국민 블록에 끌어들였다. 처음에는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해 아체르보법에 찬성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노동운동과 반파시스트 야당10명
지도부5
1919년부터 반파시스트 연합을 주장했고, 1922년 통일사회당을 세웠으며 1924년 아벤티노 탈퇴를 이끌었다. 1926년 프랑스로 탈출했다.
자유주의 반파시스트 지도자조반니 아멘돌라1882–19261922년 전권 위임에 기권했고, 1924년 아벤티노 탈퇴를 이끌며 로시 진술서를 공개했다. 1925년 검은셔츠단에게 맞은 상처로 1926년 숨졌다.
이탈리아 인민당 지도자루이지 스투르초1871–19591922년 졸리티의 재집권을 막았고, 1923년 반파시스트 노선을 지키다 바티칸과 상의해 물러났다. 1924년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아마데오 보르디가1889–19701921년 리보르노에서 공산당을 세웠다. 비공산주의자가 섞였다는 이유로 당원들에게 아르디티 델 포폴로 탈퇴를 명령해 레닌과 코민테른의 비판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 『오르디네 누오보』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공장평의회를 러시아 소비에트의 이탈리아판으로 보았고,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주장했다. 1926년 1월 리옹 대회에서 그 테제가 채택되었으나 11월 의원 면책 특권에도 체포되었다.
참여4
1926년 모든 정당이 금지될 때 모스크바에 있어 체포를 피했다.
사회당 최대강령파 지도자자친토 메노티 세라티1872–1926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개혁파를 내쫓으면 많은 노동자를 잃는다며 분열을 미루려 했다.
아나키스트 지도자에리코 말라테스타1853–19321919년 12월 망명에서 돌아와 붉은 2년의 아나키스트 운동에 힘을 실었다.
코민테른 지도자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1921년 8월 글에서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통일 행동으로 칭찬하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보르디가 노선을 비판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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