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1949

소련 원자폭탄 개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어떻게 4년 만에 핵을 손에 넣었는가?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1943년 쿠르차토프를 책임자로 한 제2연구소에서 시작해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의 RDS-1 실험으로 결실을 맺은 사업이다. 전쟁 중에는 자원이 전선에 묶여 소규모 연구에 그쳤으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베리야를 수반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노동력·자원 동원 능력이 통째로 투입됐다. 사업은 두 축으로 굴러갔다. 클라우스 푹스를 비롯한 정보원이 넘긴 맨해튼 계획 설계 자료가 방향을 확인해 주었고, 쿠르차토프·하리톤·젤도비치·플료로프의 자체 연구가 그것을 소련의 산업 조건에서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옮겼다. 우라늄 채굴과 폐쇄도시 건설에는 굴라크 수용자와 강제 노동이 대규모로 동원됐다.

전쟁 전야의 소비에트 핵물리학

소련 핵물리학의 뿌리는 1922년 페트로그라드에 문을 연 라듐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가 설립하고 비탈리 흘로핀이 이끈 이 연구소는 방사능과 우라늄 광상 조사에서 출발해, 1937년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가동했다. 이 사이클로트론은 게오르기 가모프와 레프 미솝스키가 1932년 구상하고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건설에 참여한, 직경 1미터의 입자가속기였다.

라듐연구소와 쌍벽을 이룬 곳은 아브람 이오페의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였다. '파파 이오페'라 불린 그는 쿠르차토프, 표트르 카피차, 야코프 젤도비치, 율리 하리톤, 아브람 알리하노프 등 이후 원자폭탄 계획의 핵심이 될 물리학자 세대를 길러냈다. 1932년 LFTI 안에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핵물리학 연구실이 생겼고, 같은 해 하리콥의 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에서는 리튬 원자핵을 최초로 인공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다섯 차례의 전연방 핵물리학 회의가 열렸고, 닐스 보어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같은 서방의 거물들도 참석했다.

1938년 12월 독일에서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소련 물리학자들을 즉각 움직이게 했다. 1939년 한 해 동안 야코프 프렌켈은 핵분열의 연속역학적 계산을 처음으로 수행했고, 쿠르차토프의 팀은 우라늄과 토륨의 핵분열 실험을 재현했다. 이론물리학자 율리 하리톤과 야코프 젤도비치는 연쇄반응의 조건을 정량적으로 분석해, 우라늄-235의 임계질량이 수십 킬로그램 수준이라는 추정치를 내놓았다.

1940년 6월,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콘스탄틴 페트르자크는 우라늄이 중성자 충격 없이도 스스로 핵분열을 일으킨다는 '자발핵분열' 현상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이 발견은 연쇄반응의 출발점을 설명하는 핵심 증거였다. 같은 해 7월 베르나츠키·흘로핀·알렉산드르 페르스만의 주도로 과학아카데미 산하 우라늄위원회가 출범했다. 흘로핀이 위원장, 베르나츠키와 이오페가 부위원장을 맡고 세르게이 바빌로프·레오니트 만델슈탐·표트르 카피차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가 1940년 10월 확정한 계획은 핵분열 메커니즘 규명, 연쇄반응 가능성 검증,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법 개발, 휘발성 우라늄 화합물 제조, 국내 우라늄 광상 탐사 등 다섯 과제로 구성되었다. 제도적 틀은 갖추어졌지만 정부 차원의 자원 배분은 미미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멈췄다. 물리학자들은 전선으로 징집되거나 함선 탈자화(脫磁化) 같은 당면한 군사 과제에 배치되었다. 라듐연구소와 LFTI는 카잔으로 소개(疏開)되었고, 건설 중이던 10 MeV 대형 사이클로트론은 완공되지 못했다. 우라늄위원회는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고, 1940년 말 프리드리히 랑게와 블라디미르 마슬로프가 제출했던 원자폭탄 설계 구상도 서류함 속에 묻혔다. 학술지에서 핵분열 논문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미국, 영국, 독일은 이미 비밀리에 폭탄 개발에 착수하고 있었다. 소련은 세계적 수준의 물리학 인력을 보유하고도 국가 차원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서방 학술지가 멈추자, 최전선의 중위가 편지를 썼다

소련이 원자폭탄을 손에 넣기까지의 이야기는 흔히 1945년 8월 히로시마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소비에트 핵물리학은 세계 수준에 올라 있었다. 1937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팀은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에 건설했고, 1939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레프 루시노프는 우라늄 핵분열 시 두 개 이상의 중성자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이듬해인 1940년 6월, 플료로프와 콘스탄틴 페트르자크는 더 근본적인 발견을 한다. 쿠르차토프의 지시로 우라늄에서 나오는 중성자 흐름을 관측하던 중, 중성자원을 제거했는데도 검출기가 계속 분열 신호를 잡아낸 것이다. 레닌그라드의 혹독한 겨울밤, 두 젊은 물리학자는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깊은 곳까지 내려가 우주선의 영향을 배제한 실험을 반복했고, 마침내 우라늄이 스스로 핵분열을 일으킨다는 '자발핵분열'을 확증했다. 같은 해 7월, 과학아카데미는 비탈리 흘로핀을 위원장으로 하는 우라늄문제위원회를 설치했고,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와 아브람 이오페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진정한 추진력은 없었다. 독일과의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 원자폭탄은 너무 먼 이야기로 여겨졌다.

1941년 6월 독일군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멈췄다. LFTI는 카잔으로 대피했고, 쿠르차토프는 흑해함대에서 함정의 자기(磁氣) 소거 작업에 투입됐다. 플료로프는 민병대에 자원했다가 공군 기술장교로 배속되어 보로네시 인근에서 복무했다. 그가 이상한 점을 알아챈 것은 1941년 가을부터였다. 1940년 자신과 페트르자크의 발견을 실은 미국 『피지컬 리뷰』 이후, 서방 학술지에서 우라늄 핵분열 논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페르미도, 실라르드도, 졸리오퀴리도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플료로프는 이것이 비밀 사업의 증거라고 직감했다. 1941년 12월, 그는 쿠르차토프에게 13쪽에 달하는 편지와 함께 우라늄-235 두 덩어리를 화약으로 서로 쏘아 맞추는 포신형(gun-type) 폭탄의 설계도를 보냈다. 쿠르차토프는 답장하지 않았다.

플료로프는 멈추지 않았다. 국방위원회(GKO)의 과학 담당 전권대표 세르게이 카프타노프에게 거듭 편지를 썼고, 1941년 11월 카잔에서 열린 과학아카데미 세미나에서 "핵분열을 먼저 무기화하는 나라가 세계에 조건을 강요할 것"이라고 호소했으나, 참석자들은 전쟁 중에 그런 연구를 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절망한 플료로프는 마지막 수단으로 1942년 4월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모든 외국 학술지에서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이 완전히 사라졌다. 침묵의 봉인이 찍혔다는 사실 자체가 해외에서 얼마나 활발한 작업이 진행 중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다." 이어 "우리는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전쟁 전에 우리가 서방보다 앞서 있던 분야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편지가 실제로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기록에는 편지가 '발송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주석이 있다. 그러나 역사가 데이비드 홀로웨이의 연구에 따르면, 플료로프의 편지는 카프타노프에게 전달되었고, 카프타노프는 당시 남부전선에서 입수한 독일 장교의 우라늄 관련 수첩(일명 '스타리노프 수첩')을 함께 검토했다. 카프타노프는 자신의 회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위험은 있다. 우리는 1천만 루블, 혹은 1억 루블을 위험에 빠뜨리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우리는 원자무기를 손에 넣은 적 앞에 무방비로 서게 될 훨씬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다." 1942년 5월, 카프타노프와 이오페는 GKO에 우라늄 연구 재개의 필요성을 공식 건의했고, 스탈린은 "해야 한다"고 답했다. 1942년 9월 28일, GKO는 '우라늄 연구 조직에 관하여'라는 짧은 결의를 채택했다. 플료로프는 전선에서 소환되어 쿠르차토프의 제2연구소에 합류했다.

아무도 원하지 않던 자리, 아무도 몰랐던 연구소

1942년 9월 28일, 스탈린은 국방위원회 비밀명령 제2352сс호 「우라늄 작업 조직에 관하여」에 서명했다. 이로써 소련 원자폭탄 사업이 공식 출범했다. 그러나 이 명령으로 생긴 것은 '사업'이라기보다 과제 하나에 가까웠다. 아카데미야 나우크는 1943년 4월 1일까지 우라늄 폭탄이나 우라늄 연료의 실현 가능성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책임은 아브람 이오페에게 맡겨졌다.

이오페는 63세였다. 렌피즈테흐의 창립자이자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의 대부였지만, 그는 원자폭탄의 가까운 실현을 믿지 않았고, 전쟁 중에 거대한 사업을 지휘할 의욕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두 제자를 추천했다: 아브람 알리하노프와 이고리 쿠르차토프. 알리하노프는 이미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이자 스탈린상 수상자였다. 쿠르차토프는 39세의 박사로, 전쟁 전 핵물리학 경력은 있었으나 학계 서열은 낮았고, 스탈린조차 처음에는 "그런 학자는 모른다"고 반응했다.

실무를 떠맡은 것은 세르게이 카프타노프와 그의 조수 스테판 발레진이었다. 카프타노프는 국방위원회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플료로프의 편지, 독일군 장교의 노트, 그리고 1942년 가을 이후 입수된 영미의 정보 자료를 종합해 원자폭탄이 허황된 상상이 아님을 확신한 몇 안 되는 고위 관료였다. 그와 발레진은 후보자들을 직접 면담했다. 알리하노프는 지휘권을 강하게 원했으나, 카프타노프와 발레진의 눈에는 쿠르차토프의 에너지와 조직력, 그리고 이미 정보자료를 열람하고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광범위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 판단력이 더 무게 있게 보였다. 쿠르차토프 자신은 자신이 과연 충분한 학문적 권위를 가졌는지 의심하며 망설였다.

1943년 2월 11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국방위원회 명령 제2872сс호에 서명했다. 과학적 지휘와 책임은 쿠르차토프 개인에게, 정부 차원의 감독과 지원은 미하일 페르부힌과 카프타노프에게 맡겨졌다. 4월 12일, 과학아카데미는 비밀리에 '제2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름은 의도적으로 무미건조했다. 렌피즈테흐에는 원래 열 개의 연구실이 있었는데, 그중 2번 연구실이 공석이어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형식으로 신설 기관의 실체를 감췄다. 연구소는 형식상 아카데미야 나우크와 렌피즈테흐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인민위원회의 페르부힌에게 직속으로 보고하는 국가 기관이었다.

처음 연구소는 카잔에 피난 중이던 렌피즈테흐 인원 열 명으로 시작되었다. 1943년 봄, 명령에 따라 팀은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카프타노프와 발레진은 모스크바 거주허가 100장, 식량카드, 주택을 확보해야 했다. 연구소는 처음에 피례프스키 골목의 지진연구소 건물에 들어갔다가, 뒤에 볼샤야 칼루시스카야 거리로, 최종적으로는 1944년 4월 모스크바 북서쪽 포크롭스코예-스트레슈네보의 미완성 실험의학연구소 건물로 이전했다. 1944년 4월 25일 기준으로 연구소 인원은 74명, 그중 과학자는 25명이었다.

쿠르차토프의 권위 문제는 또 다른 경로로 해결되었다. 1943년 3월, 쿠르차토프는 통신회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회원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9월 선거에서 야코프 프렌켈과 이고리 탐을 비롯한 원로 물리학자들의 반대로 알리하노프가 유일한 공석에 당선되고, 쿠르차토프의 이름은 비밀투표 명단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에 카프타노프가 몰로토프에게 요청해 쿠르차토프를 위한 추가 정원을 확보했고, 당의 선거위원회가 학자들을 개별 설득한 끝에 9월 29일 쿠르차토프는 아카데미크가 되었다. 선출된 지 3일 후인 10월 2일, 우라늄 지질탐사 계획 회의가 열렸고, 사업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통의 전보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1945년 7월 24일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특별한 파괴력을 가진 새로운 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귀띔했을 때, 스탈린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일본에 잘 써주길 바란다"고만 답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처칠은 스탈린이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소련 정보부는 이미 7월 16일 트리니티 실험 소식을 입수했고, 스탈린은 회담장을 나서자마자 몰로토프에게 "쿠르차토프와 얘기해서 속도를 내야겠다"고 말했다. 몰로토프의 반응은 "값을 올리려는 거겠지"였다. 스탈린은 웃으며 "내버려둬. 우리가 쿠르차토프와 얘기하자"고 받았다.

그러나 진짜 충격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였다. 스탈린의 8월 6일 접견 일정표는 백지였다. 역사가 데이비드 홀로웨이는 이 빈 페이지야말로 충격의 크기를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8월 7일 스탈린은 만주 공격 개시일을 8월 11일에서 8월 9일로 앞당겼다. 히로시마가 일본의 항복을 앞당겨 소련의 극동 전리품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같은 날 스탈린은 베리야에게 원자폭탄 사업의 총괄을 맡겼다. 이때까지 이 사업은 몰로토프가 명목상 관할했으나, 몰로토프가 관리한 1942~1945년의 실적은 초라했다. 연구소 하나, 과학자 100여 명. 미국이 5만 명과 20억 달러를 투입한 것과 비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몰로토프가 "소련 외교의 얼굴"로서 국제 무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베리야는 내무인민위원부의 인력·자원·보안 기구를 수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외교관이 아니라 경찰 수장에게 이 과제를 넘긴 것이다.

8월 17일 또는 18일, 스탈린은 반니코프(탄약인민위원), 베리야, 자베냐긴(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크렘린으로 불러들였다. 반니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겠는가"를 집요하게 물었다. 전쟁 중 소련의 탄약 생산을 기적적으로 복원시킨 반니코프가 이 자리에서 사실상의 운영 책임자로 낙점됐다.

그리고 8월 20일, 히로시마에서 정확히 2주 만에 스탈린은 국가방위위원회 결의 제9887호에 서명했다. 이 문서 하나로 소련의 원자폭탄 사업은 게임의 규칙을 바꾸었다.

결의는 세 개의 기둥을 세웠다. 첫째, 베리야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 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치 쪽에서는 말렌코프(당 중앙위원회 서기)와 보즈네센스키(국가계획위원회 의장)가 들어가 자원 배분을 보장했고, 산업 쪽에서는 반니코프·자베냐긴·페르부힌(화학공업인민위원)이, 과학 쪽에서는 쿠르차토프와 카피차가 참여했다. 실무는 마흐뇨프가 비서로서 총괄했다. 둘째, 특별위원회 산하에 제1총국을 설치하고 반니코프를 국장으로 임명했다. 반니코프는 이 임명과 동시에 탄약인민위원직을 내려놓았다. 전쟁 내내 그가 운영했던 탄약 산업 전체를 이제 원자폭탄 하나로 압축하는 셈이었다. 셋째, 반니코프를 위원장으로 하고 알리하노프·이오페·카피차·키코인·쿠르차토프·하리톤·흘로핀 등 물리학계 정상급 인사 11명이 참여하는 기술평의회를 설치했다.

결의 제6조는 특별위원회에 모든 인민위원부와 기관에 대해 구속력 있는 명령을 내릴 권한을, 제11조는 외부의 어떠한 간섭도 금지하는 방탄막을 부여했다. 예산은 국가방위위원회 특별지출 항목으로 분류되어 국가계획위원회의 통상적인 통제를 받지 않았다. 제13조는 베리야에게 국가보안인민위원부와 군 정보총국 등 모든 해외 정보기관의 원자력 첩보 활동을 통괄할 권한을 주었다. 과학·산업·정보·보안의 네 갈래가 한 사람의 손에, 하나의 기관 아래 통합된 것이다.

이 구조에는 태생적 긴장이 내장되어 있었다. 카피차는 취임 3개월 만에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베리야 동무는 악보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휘자는 지휘봉만 휘두를 게 아니라 악보도 알아야 한다"고 직격했고, 1945년 12월 특별위원회와 기술평의회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의도한 바로 그 집중, 즉 과학을 정치권력과 보안기구가 완전히 감싸는 구조가 바로 4년 뒤 세미팔라틴스크의 섬광을 가능하게 한 엔진이었다.

흑연 더미 속에서 사슬이 시작되다

1946년 봄, 쿠르차토프 앞에는 하나의 결정이 놓여 있었다. 원자로의 감속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동료 학자인 아브람 알리하노프는 중수를 고집했다. 중수는 중성자를 거의 흡수하지 않아 이론적으로 우수했다. 쿠르차토프는 흑연을 밀었다. 정보 채널을 통해 입수한 페르미의 시카고 파일 CP-1 설계를 본 그는 흑연이 더 빠르고, 더 싸고, 소련의 산업 기반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논쟁은 타협 없이 격화됐고, 쿠르차토프는 결국 "흑연로가 아니면 내가 사업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국가 지도부는 쿠르차토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알리하노프는 연구소를 떠나 별도로 중수로를 개발했고, 그것은 훗날 수소폭탄용 삼중수소 생산에 쓰였다.

문제는 재료였다. 원자로에는 400톤의 흑연과 50톤의 금속 우라늄이 필요했는데, 전쟁 직후의 소련에는 둘 다 거의 없었다. 흑연은 예핌 슬라프스키가 모스크바 전극공장의 기술자들과 함께 개발한 초고순도 '아체소노프스키 흑연'으로 겨우 맞추었다. 보통 흑연에 섞인 붕소 같은 불순물은 중성자를 잡아먹어 연쇄반응을 죽인다. 우라늄은 말 그대로 그램 단위로 긁어모았다. 독일에서 압수한 산화우라늄 300톤과 금속 우라늄 약 100톤(쿠르차토프의 후일 평가로는 이것이 사업을 1년 단축시켰다)에 더해, 중앙아시아의 산속에서 당나귀 등에 실려 내려온 광석과 전기강 제12공장에서 독일인 과학자 니콜라우스 릴의 지도 아래 처음 생산된 금속 우라늄 블록이 모였다. 즈나이다 예르쇼바가 이끈 라듐연구소는 연료 블록의 화학을 책임졌다.

제2연구소 부지에는 '조립 작업장'이라는 위장 명칭으로 지하 7미터 깊이의 건물이 세워졌다. 생물학적 차폐는 거의 없었고, 안전은 땅속에 묻는다는 발상에 의존했다. 1946년 여름 건물이 완공되자 쿠르차토프는 곧바로 전면 크기의 원자로를 짓지 않고, 직경 1.8미터짜리 소형 모델부터 시작해 5개의 부분 임계 집합체를 순차적으로 조립했다. 30여 명의 연구원(4분의 1은 여성이었다)이 수백 톤의 흑연 벽돌과 우라늄 블록을 손으로 쌓고, 측정하고, 해체하고, 다시 쌓기를 다섯 차례 반복했다. 쿠르차토프 자신도 무릎으로 기어다니며 블록을 옮겼다.

11월, 마지막 62층 조립이 시작됐다. 12월 25일 오후 6시, 쿠르차토프는 대부분의 인원을 지하실 밖으로 내보냈다. 남은 것은 그 자신과 이반 파나슈크, 그리고 계측기 앞에 앉은 보리스 두봅스키와 소수 인원뿐이었다. 카드뮴 제어봉은 수동으로 10-20센티미터씩 인출됐다. 제어봉의 실제 위치는 잠망경을 통해 확인했다, 말 그대로 잠수함용 잠망경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 안전봉을 매단 케이블 옆에는 도끼가 놓여 있었다. 시카고 파일 CP-1에서 페르미가 그랬듯, 계기 고장 시 줄을 찍어 봉을 중력 낙하시키기 위해서였다.

중성자 계수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18시, F-1(첫 번째 물리 원자로)은 임계에 도달했다. 소련과 유라시아 최초의 자립 연쇄반응이었다. 쿠르차토프는 곧바로 베리야에게 보고했고, 다음 날 베리야가 직접 와서 두 번째 기동을 목격한 뒤에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은 이 소식을 듣고 "외국 정보기관이 절대 알아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F-1은 그 자체로 무기가 아니었다. 열출력 10와트에서 시작해 최대 1메가와트까지 올릴 수 있었지만, 냉각은 공기뿐이었고 장시간 고출력 운전은 불가능했다. 이 원자로의 진짜 임무는 세 가지였다. 첫째, 연쇄반응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는 것. 둘째, 중량 단위의 플루토늄을 처음으로 생산해 안드레이 보흐바르의 연구소(NII-9)에 넘겨 물리화학적 성질을 규명하는 것. 셋째, 1947년 가을부터는 우랄 지역에 건설 중인 산업용 원자로 A-1(출력 100메가와트)의 운전요원을 훈련하는 것. F-1에서 고출력 실험을 할 때면 건물 지붕에 붉은 등불이 켜졌고, 인근 직원들은 접근이 금지됐다. 원자로는 500미터 떨어진 별도 건물에서 원격 조종됐다. 이 모든 급조된 안전장치 속에서도 F-1은 2016년까지 70년간, 연료 교체 없이, 작동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가동된 원자로 기록을 세웠다.

지도에서 지워진 도시들, 굴라크가 세운 폭탄 공장

1946년 4월, 소련 각료회의는 두 개의 비밀 결의를 통과시켰다. 하나는 사로프 수도원 터에 설계국 KB-11을 설치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부 우랄의 키시팀 부근에 플루토늄 생산 단지인 콤비나트 817호를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두 결의 모두 스탈린이 직접 서명했고, 두 현장 모두 내무인민위원부(NKVD, 뒤에 내무부 MVD)가 책임졌다. 원자폭탄은 물리학자들이 만들었지만, 그것을 만들 장소는 비밀경찰이 지었다.

KB-11의 터는 예전 사로프 수도원이 있던 자리였다. 1923년 볼셰비키가 수도원을 닫고 수도사들을 처형했고, 전쟁 중에는 카튜샤 로켓탄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쿠르차토프와 하리톤이 비행기로 후보지를 답사한 뒤 이곳을 골랐다. 모스크바에서 40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철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며, 인구가 드물었다. 1946년 4월 9일 각료회의는 이곳을 '아르자마스-16'으로 지정했고(처음에는 아르자마스-60이었다가 숫자가 위치를 노출할까 봐 변경했다), 율리 하리톤을 수석 설계자로, 내무부 장성 파벨 제르노프를 소장으로 임명했다. 첫 수용자들은 그해 5월 인근 모르도비아 수용소에서 차출되어 도착했고, 1947년 말까지 1만 명 이상이 이곳에서 노동했다. 수용자들은 연구동, 실험장, 주거지를 지었고, 과학자들이 입주하기 시작한 1947년 봄부터는 연구실과 작업장도 함께 올렸다.

콤비나트 817호, 뒤에 '마야크'로 알려질 곳의 입지는 달랐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숲속이었다. 내무부 장성 야코프 라포포르트가 'T자 교차로, 숲속 두 오솔길이 만나는 지점'에 건설하라고 명령한 곳이다. 선정 이유 중 하나는 근처에 체랴빈스크 트랙터 공장(전쟁 중 '탱코그라드'로 불린 거대 전차 생산 단지)이 있어 전력과 산업 기반을 끌어올 수 있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키시팀 지역이 이미 12개의 굴라크 수용소가 밀집한 곳이라 노동력 동원이 용이하다는 점이었다. 쿠르차토프는 호수 지형이 많은 남부 우랄의 지형이, 비슷한 모양의 호수가 수십 개 흩어져 있어, 적의 공중 정찰을 혼란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10월 특별위원회는 키질타시 호수 남안에 원자로를, 이르탸시 호수 반도에 주거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건설 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콤비나트 817호에는 흑연감속 원자로(공장 'A'), 방사화학 분리 공장(공장 'B'), 금속 플루토늄 정제 공장(공장 'V'), 그리고 높이 151미터의 배기 굴뚝이 필요했다. 1946년 7월 베리야의 명령으로 첫 1만 명의 수용자가 체랴빈스크 산업지대에서 키시팀으로 이송됐고, 10월에는 수용소가 독립된 지위를 얻었다. 1947년 말 수용자 수는 20,376명에 달했으며, 1948년에는 건설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공병 부대까지 더해져 전체 건설 인원이 45,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지휘한 것은 내무부 공병 소장 미하일 차렙스키였다. 수용자뿐 아니라 '군사건설부대'로 분류된 병사들도 사실상 같은 조건에서 일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 점령지 출신이거나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해방된 뒤 '오염된 경력'으로 인해 일반 부대에 배속되지 못한 이들이었다고 생존자 아나톨리 오시포프는 증언했다.

두 도시 모두 지도에서 사라졌다. 체랴빈스크-40(우편번호에서 딴 암호명)은 행정 구역상 존재하지 않았고, 아르자마스-16은 공식 인구조사에서도 주민이 누락됐다. 경계는 철조망과 초소로 둘러싸였고, 출입은 허가제였다. 그러나 그 안의 삶은 이중적이었다. 과학자들은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나은 주거와 식량, 의료를 누렸다. 레프 알트슐레르가 '백색 군도'라 부른 특권의 섬이었다. 수용자들은 판잣집에서 살며 151미터 굴뚝 위에서 추락사하고 방사능에 노출됐다. 굴뚝 공사는 '10년 이상 중형을 선고받은 자들'만 투입됐는데, 생명 보험을 들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오시포프는 기록했다. 1948년 8월, 아르자마스-16에서는 형기를 마친 수용자 2,292명이 석방됐지만, 비밀 유지를 이유로 도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민간 노동자로 남겼다. 같은 해 12월 내무부 명령 001441호는 이들 중 2,000명을 마가단의 특별수용소 5호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풀려난 자들을 다시 가두는 문서에 '00'이 붙은 것은 스탈린의 개인 지시를 의미하는 내무부 관행이었다.

1948년 여름, 콤비나트 817호의 원자로 A-1이 첫 우라늄을 장전하고 가동을 시작했다. 사로프에서는 KB-11의 실험 공장 1호와 2호가 가동되었다. 두 폐쇄도시는 이제 폭탄을 만들 준비를 마쳤다.

7시 정각, 사막 위에 인공의 태양이 떠올랐다

베리야는 더 정교한 독자 설계(RDS-2)를 접어두고 맨해튼 계획의 '팻 맨'을 그대로 복제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작동이 입증된 설계를 따르는 편이 실패 확률을 낮춘다는 판단이었다. 하리톤과 두호프의 설계국은 소련의 기술 여건에 맞춰 탄도 외피와 전자 기폭 장치만 자체 개발하고, 내폭 렌즈·플루토늄 핵·중성자 개시제 등 핵심부는 푹스가 넘긴 자료에 최대한 가깝게 재현했다.

1949년 8월 21일, 플루토늄 장전물과 중성자 개시제 4기가 특별열차로 세미팔라틴스크에 도착했다. 쿠르차토프는 8월 29일 오전 8시(현지 시각) 실험을 명령했으나 기상 악화로 한 시간 앞당겼다. 29일 새벽 2시, 콘크리트 조립장에서 최종 장전이 시작됐고 오전 3시에 끝났다. 이어 37.5미터 철탑 꼭대기로 폭탄을 끌어올리고 뇌관을 연결했다. 베리야와 페르부힌, 마흐뇨프가 마지막 공정을 지켜봤다.

오전 6시 35분 자동화 시스템 전원이 들어왔고, 6시 48분 시험장 자동장치가 작동했다. 7시 정각, 셸킨이 관리한 기폭 장치가 32개의 폭약 렌즈를 동시에 점화했다. 섬광이 사막을 하얗게 지운 뒤 화구가 솟아올랐다. 10킬로미터 떨어진 지휘소에서 쿠르차토프는 문을 열어둔 채 폭발을 지켜봤다. 충격파가 도달하는 데 30초가 걸렸다. 그는 "작동한다! 작동한다!"라고 외쳤고, 베리야는 하리톤을 끌어안았다. 위력은 22킬로톤으로 트리니티 실험과 같았다.

현장은 철저한 무기 효과 실험장이기도 했다. 목조·벽돌 주택, 철도 교량, 터널, 급수탑이 건설됐고, 1,500마리가 넘는 개·양·돼지·토끼가 우리에 넣어졌다. T-34 전차와 야포 100문이 진지에 배치됐고, 전투기 50기도 배치됐다. 탑에서 800미터 떨어진 두 동의 3층 주택은 완전히 무너졌다. 1,538마리 동물 중 345마리가 죽었다. 철탑이 서 있던 자리에는 직경 3미터, 깊이 1.5미터의 유리질 분화구가 남았다.

베리야는 기쁨을 잠시 접고 북측 관측소에 전화를 걸었다. 1946년 미국 핵실험을 목격한 관측자에게 "미국 것과 똑같은가?"라고 물었고, "똑같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했다. 과학자들은 이것이 단순한 성공 이상임을 알았다. 실패했다면 자신들이 총살당했으리라는 말이 농담처럼 오갔다. 베리야는 포상 기준마저 그 논리로 정했다는 후문이다: 실패 시 총살감이면 영웅, 수감감이면 레닌 훈장 식이었다. 실제로 10월 29일자 비밀 포고령으로 36명이 사회주의노동영웅, 260명이 레닌 훈장, 496명이 노동적기훈장을 받았다.

소련은 실험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붙였지만, 9월 3일 일본 미사와 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WB-29 기상정찰기가 상공에서 방사능 낙진을 포집했다. 9월 23일 트루먼은 "소련에서 최근 원자폭발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타스는 9월 25일 "대규모 발파 공사"를 오인한 것이라고 받아쳤지만, 동시에 몰로토프가 1947년 11월 "원자폭탄의 비밀은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미국 정보기관이 1953년으로 예측했던 시한을 4년 앞당긴 이 폭발로, 핵무기 경쟁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케이크 한 겹'으로 만든 수소폭탄

1948년 중반, 소련 수소폭탄 연구는 두 개의 경쟁 노선으로 갈렸다. 하나는 야코프 젤도비치가 이끄는 '트루바'(Труба, 관)였다. 클라우스 푹스가 넘긴 미국 '고전적 슈퍼' 설계에 기초한 이 구상은 원자폭탄 방아쇠로 액체 중수소-삼중수소 혼합물을 점화해 열핵반응을 전파시키는 방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1948년 9~10월, 이고리 탐의 연구실에서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제안한 '슬로이카'(Слойка, 겹케이크)였다. 핵분열 물질 주위에 중수소와 우라늄-238 층을 교대로 쌓아, 중심부 핵분열이 바깥 층의 열핵반응을 일으키고, 여기서 나온 고속 중성자가 다시 우라늄-238을 핵분열시키는 구조였다. 사하로프는 이를 '첫 번째 생각'이라 불렀다.

트루바는 치명적 난관에 부딪혔다. 충격파가 열핵반응을 조기에 일으켜 중수소-삼중수소 혼합물이 흩어져 버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반면 슬로이카는 1949년 3월, 비탈리 긴즈부르크의 결정적 제안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열핵 연료를 액체 중수소-삼중수소 대신 고체 리튬-6 중수소화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이 물질은 상온에서 고체이고, 폭발 과정에서 중성자를 흡수한 리튬-6이 삼중수소로 변환되므로 비싼 삼중수소를 대량 생산할 필요가 없었다. 사하로프는 이것을 '두 번째 생각'이라 불렀다. 한 달 뒤인 1949년 4월, 정보 채널을 통해 D-T 반응 단면적 데이터가 입수되면서 리튬 경로의 우월성이 수치로 확인됐다. 이고리 쿠르차토프는 즉시 리튬-6 중수소화물의 산업적 생산을 지시했다.

1952년 11월 미국이 아이비 마이크 실험에서 10.4메가톤을 기록하자, 라브렌티 베리야는 RDS-6s 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으라고 지시했다. 시험용 RDS-6s에는 약 1,200그램의 삼중수소가 들어갔다. AI 원자로의 거의 1년 생산량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1953년 8월 12일, 세미팔라틴스크에서 폭발한 RDS-6s의 위력은 400킬로톤, 히로시마의 30배였다. 전체 에너지의 15~20%만이 핵융합에서 나왔고, 나머지는 우라늄-238 층의 핵분열이었다. 무게 약 4.5톤, 직경 1.5미터의 이 장치는 Tu-16 폭격기에 실을 수 있는 실전용 무기였다. 1952년 마이크가 80톤짜리 액체중수소 실험 장치였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8월 8일, 실험 나흘 전에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최고회의에서 '미국은 더 이상 수소폭탄을 독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낙진 분석을 통해 RDS-6s가 한스 베테의 표현대로 '과장된 부스트'이며 무한히 확장할 수 없는 설계임을 곧바로 간파했다. 그러나 슬로이카 연구는 바로 '세 번째 생각', 즉 2단계 방사선 내파 설계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화학 폭약으로는 전체를 충분히 압축할 수 없다는 한계를 마주한 사하로프와 젤도비치는 1954년 1월, '원자폭탄을 이용해 RDS-6s 초병기를 내파시키는 방안에 관하여'라는 메모를 율리 하리톤에게 보냈다. 슬로이카에서 폭약을 떼어내고 단순화한 것이 바로 2단계 열핵무기의 2차 장치가 되었다. 1955년 11월 RDS-37 실험으로 이어지는 그 경로의 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한 겹의 케이크였다.

4년의 신화, 그리고 아직 닫히지 않은 질문들

소련 원자폭탄 개발은 냉전사에서 가장 많은 신화에 둘러싸인 사건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질문은 이것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에서 터진 것은 소련 과학의 승리였는가, 아니면 첩보의 승리였는가?

데이비드 홀로웨이는 1994년 『스탈린과 폭탄』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소련은 클라우스 푹스와 데이비드 그린글래스 등이 넘긴 정보 덕분에 미국의 플루토늄 폭탄(팻 맨)의 설계를 복제할 수 있었고, 첩보가 없었다면 자체 설계로 1951년경에나 핵실험에 도달했을 것이다. 즉 첩보가 사업을 약 2년 단축했다는 계산이다. 홀로웨이의 평가는 푹스의 정보가 없었더라도 소련이 결국 폭탄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첩보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소련 과학자들의 역량을 폄하하지 않는 균형점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와 정반대 극단에 섰던 것이 1994년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회고록 『특수임무』였다. 전직 KGB 중장이었던 그는 오펜하이머, 페르미, 보어까지도 소련에 정보를 넘겼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출간 직후 역사학자들에 의해 줄줄이 반박되었다. 수도플라토프가 제시한 세부 사항 중 상당수는 이미 출판된 다른 사건의 기술을 베낀 것이거나 확립된 사실과 충돌했다. 이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옐친 대통령의 1995년 비밀해제 명령을 촉발해 『소련 원자 프로젝트』 문서집 6권의 출판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연구의 기초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수소폭탄으로 넘어가면 논쟁은 더 깊어진다. 1953년 사하로프의 '슬로이카'(RDS-6s)가 독자적 설계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문제는 1955년 실험된 '제3의 아이디어', 즉 방사선 내파 방식의 2단계 열핵폭탄 RDS-37이다. 1951년 텔러와 울람이 고안한 것과 동일한 원리인 이 설계가 어떻게 1954년 봄 사하로프와 젤도비치, 트루트네프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게르만 곤차로프는 1948년 푹스가 넘긴 보고서에 방사선 압축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이 6년 후 재발견되었다고 본다. 젤도비치의 동료였던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외부의 짧은 '힌트'가 있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 반면 겐나디 고렐릭은 사하로프가 푹스 보고서에 접근할 수 없었고, 텔러와 동일한 문제를 동일한 수준의 전문성으로 풀다가 독자적으로 같은 해법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관련 기록이 충분히 공개되지 않아 답은 아직 없다.

또 하나의 큰 질문은 인적·환경적 대가의 규모다. 조레스 메드베데프가 '원자 굴라크'라고 이름 붙인 이 문제에서, CIA는 1950년 사업 총인원을 33만~46만 명으로 추산했고 그 대부분이 광산 노동자였다. 마야크에서는 1948년부터 1958년까지 17,245명의 노동자가 방사선 과피폭을 입었고, 1957년 키시팀 방사능 폭발 사고로 수만 명이 오염 지역에서 이주했다. 그러나 강제노동 사망률, 우라늄 광산의 질병 통계, 테차 강 유역 마을의 피폭 실태는 소련 붕괴 후에도 단편적으로만 드러났다. 홀로웨이가 지적했듯 사업은 사회주의 체제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자원(열정적인 과학자들)과 최악의 자원(굴라크 수용자들)이 한데 얽힌 '기이한 결합'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업이 소련 과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1949년 3월, 물리학자들을 '서방 앞에 굴종한다'고 단죄하려던 전연방 회의가 돌연 취소된 것은 베리야와 스탈린이 폭탄을 위해 물리학을 이념에서 분리하기로 했음을 뜻한다. 생물학이 리센코에게 파괴되던 시기에 물리학은 살아남았고, 쿠르차토프와 사하로프는 이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핵실험 금지를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체중을 얻었다. 이 체중이 1963년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으로 이어졌고, 사하로프가 1968년 반체제 인사로 전환하는 발판이 되었다. 폐쇄도시 체계는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핵무기 복합체의 골격으로 남았다.

1949년 RDS-1 한 발로 미국의 핵독점은 끝났고, 두 초강대국 사이의 공포의 균형이라는 냉전의 기본 구도가 완성되었다. 4년 만에 이룩한 이 성취가 순수히 소련 과학의 산물인지, 첩보가 절반을 쥐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대가로 치른 인간의 값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21세기에도 완전히 결산되지 않았다.

결과

미국의 핵독점은 4년 만에 끝났고, 냉전은 두 초강대국이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국면으로 넘어갔다. 안으로는 물리학자들이 이례적인 지위와 자원을 얻어, 리센코주의가 생물학을 장악하던 시기에도 물리학은 이념적 개입을 상당 부분 막아냈다. 사업이 남긴 폐쇄도시와 원자력 산업은 이후 소련 과학기술의 축이 됐고, 마야크를 비롯한 시설의 방사능 오염과 노동자·주민 피폭은 오래 은폐된 대가였다. 1953년 수소폭탄 RDS-6s를 이끈 사하로프는 1960년대부터 핵실험과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자리로 옮겨 갔다.

연표

  1. 1940–1942
    플료로프의 편지

    자발핵분열을 발견한 젊은 물리학자 플료로프는 서방 학술지에서 핵분열 논문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이것이 비밀 사업의 증거라며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2. 1943.02
    제2연구소

    쿠르차토프를 책임자로 한 제2연구소가 모스크바에 설치됐다. 전선이 우선이던 시기라 인원과 예산은 작았다.

  3. 1945.08
    히로시마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직후 사업은 국가 최우선 과제가 됐다. 베리야를 수반으로 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반니코프가 실무를 총괄했다.

  4. 1946.12.25
    F-1 원자로 임계

    쿠르차토프가 이끈 유럽 최초의 원자로 F-1이 임계에 도달해, 플루토늄 생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5. 1946–1948
    폐쇄도시와 마야크

    사로프(아르자마스-16)에 하리톤과 젤도비치의 설계국이, 첼랴빈스크에 마야크 플루토늄 공장이 세워졌다. 건설과 우라늄 채굴에 수용자 노동이 대규모로 쓰였다.

  6. 1949.08.29
    RDS-1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첫 원자폭탄 RDS-1이 폭발했다. 미국이 이를 탐지해 9월 공표하면서 핵독점은 끝났다.

  7. 1953.08.12
    RDS-6s

    사하로프의 층상 설계에 기반한 RDS-6s가 실험됐다. 항공기로 투하 가능한 형태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1952년 실험 장치와 성격이 달랐다.

관련 인물 51명

주도 · 집행13

특별위원회 수반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

1945년 이후 사업 전체를 관장하며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과 수용자 노동을 동원했다.

제1총국장보리스 반니코프1897–1962

사업의 산업 부문을 총괄해 공장 건설과 자재 공급을 맡았다.

건설과 수용자 노동아브라아미 자베냐긴1901–1956

내무인민위원부 쪽에서 우라늄 채굴과 폐쇄도시 건설을 지휘했다.

중기계공업부뱌체슬라프 말리셰프1902–1957

원자력 산업을 부처로 편제해 실험 이후의 생산 체계를 세웠다.

마야크와 아르자마스-16보리스 무즈루코프1904–1979

마야크 플루토늄 공장을 맡았고 뒤에 아르자마스-16의 핵탄두 생산을 지휘했다.

시설 건설알렉산드르 코마롭스키1906–1973

군사 건설 조직을 이끌고 원자력 시설과 폐쇄도시 건설을 맡았다.

원자력 행정바실리 예멜랴노프1901–1988

제1총국에서 자재와 야금을 맡았고 뒤에 원자력 이용 부문을 이끌었다.

제1총국 부국장으로 원폭 계획 보안·방첩 담당파벨 메시크1910–1953

굴라그 책임자로 원자폭탄 건설에 강제노동 동원빅토르 나세트킨1905–1950

내무부 장관 · 건설과 노동력세르게이 크루글로프1907–1977

베리야가 위로 옮겨간 뒤 내무부를 맡아 원자력 시설 건설과 우라늄 채굴의 노동력 공급을 관장했다.

마야크 건설을 지휘한 내무부 공병 소장미하일 차렙스키1898–1963

1946년 가을부터 체랴빈스크-40(마야크) 건설 현장의 수용자 수용소와 공병 부대를 통합 지휘했으며, 1948년 건설 인원은 4만 5천 명에 달했다.

원자폭탄 사업 출범 실무 선임보좌관스테판 발레진1904–1982

1942~43년 원자폭탄 사업 출범 과정에서 쿠르차토프를 검토하고, 독일군 장교의 노트 번역을 처리했으며, 연구자들의 병역 해제와 주거 및 배급 카드 확보 등 실무를 맡았다.

사이클로트론 건설 책임자레오니트 네메노프1905–1980

쿠르차토프가 포위된 레닌그라드로 보내 물리기술연구소의 사이클로트론 부품을 회수해 2호 실험실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세웠다.

참여32

아르자마스-16 수석 설계자율리 하리톤1904–1996

폭탄 설계국을 이끌며 RDS-1의 설계와 조립을 책임졌다.

수소폭탄 설계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층상 설계로 1953년 RDS-6s를 이끌었고, 뒤에 핵실험 반대로 돌아섰다.

이론 부문야코프 젤도비치1914–1987

연쇄반응과 폭발 이론을 맡아 설계의 물리적 근거를 세웠다.

사업 착수의 계기게오르기 플료로프1913–1990

서방 학술지에서 핵분열 논문이 사라진 것을 근거로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원자로 설계니콜라이 돌레잘1899–2000

F-1에 이어 플루토늄 생산로를 설계해 원자로 계보의 출발점을 놓았다.

실험 책임키릴 셸킨1911–1968

세미팔라틴스크에서 RDS-1의 조립과 기폭을 맡았다.

우라늄 농축이사크 키코인1908–1984

기체확산법 농축을 맡아 무기급 우라늄 확보를 담당했다.

수소폭탄 이론진이고리 탐1895–1971

사하로프가 속한 이론 그룹을 이끌었다.

중수로 노선아브람 알리하노프1904–1970

중수 감속 원자로 연구를 이끌어 흑연로와 다른 경로를 맡았다.

동위원소 분리 설비드미트리 예프레모프1900–1960

전기공업 부문에서 동위원소 분리에 쓰인 설비 개발을 맡았다.

원자력 첩보 기획레오니트 크바스니코프1905–1993

대외정보 쪽에서 핵 관련 첩보 수집을 일찍 제기하고 조직했다.

대미 레지던트바실리 자루빈1894–1972

미국 주재 정보망을 운영해 맨해튼 계획 관련 자료 수집을 관장했다.

수소폭탄의 두 번째 착상비탈리 긴즈부르크1916–2009

리튬-6 중수소화물을 제안해 RDS-6s 설계를 가능하게 했다.

제1총국 부국장으로 원자력 프로젝트 행정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1906–2005

마야크(콤비나트 817호) 책임자로 첫 플루토늄 생산예핌 슬라프스키1898–1991

해외정보국장으로 원자폭탄 정보 입수 총괄파벨 피틴1907–1971

원자력 첩보 계획 및 실행나움 에이팅곤1899–1981

KB-11 부수석설계자로 첫 원자폭탄 내폭 시스템 설계니콜라이 두호프1904–1964

제2연구소(원자폭탄 계획) 쿠르차토프 부소장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1903–1994

아르자마스-16 이론물리학자로 첫 원자폭탄 개발 참여예브게니 자바바힌1917–1984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론물리학자레프 란다우1908–1968

연소·폭발 연구로 원자폭탄 계획에 기여니콜라이 세묘노프1896–1986

원자력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 후에 베리야와 갈등으로 사임표트르 카피차1894–1984

제813콤비나트에서 가스원심분리 농축 담당미하일 밀리온시코프1913–1973

F-1 첫 임계 방사선 계측 책임자보리스 두봅스키1919–2008

그는 F-1의 플루토늄 축적 계산을 수행하고 중성자 계수기를 직접 제작했으며 첫 임계 순간 원자로실에 남아 방사선 계측을 수행했다.

자발핵분열 발견으로 원자폭탄 개발의 단초를 제공한 물리학자콘스탄틴 페트르자크1907–1998

1940년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 자발핵분열을 발견했으며, 이후 플료로프와 공동으로 스탈린에게 원자력 연구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핵분열 실험 증명자레프 루시노프1907–1960

1939년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 핵분열 시 중성자 다중 방출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첫 소련 금속 우라늄 주괴를 만든 방사화학자즈나이다 예르쇼바1903–1995

쿠르차토프가 1943년 대피에서 그녀를 직접 불러왔고, 1944년 말 프로젝트용 첫 금속 우라늄 주괴를 생산했다.

특별위원회 서기바실리 마흐뇨프1904–1965

특별위원회 9인 구성원이자 서기로, 위원회 사무국을 관리했다.

우라늄 탐사 전략 설계자드미트리 셰르바코프1893–1966

1943년 보고서를 작성하고 탐사 계획을 세웠다.

F-1 원자로 이론의 기초를 세운 물리학자이사이 구레비치1912–1992

1943년 포메란추크와 함께 이종 우라늄-흑연 집합체 이론을 개발했다.

2단계 구상의 선구자빅토르 다비덴코1914–1983

1948년 젤도비치 그룹에 합류, 1953년 2단계 설계의 첫 돌파구를 마련했다.

관련 용어

출처: David Holloway, Stalin and the Bomb (Yale University Press, 1994)Encyclopaedia Britannica: Igor KurchatovAtomic Heritage Foundation: Soviet Atomic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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