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전체의 총아」, 당의 이름으로 죽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8 외교·국제활동 · 코민테른 · 코민테른
경력 연표
- 1916–17뉴욕에서 망명 신문 편집
- 1917《제국주의와 세계경제》 출간(1915년 집필)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 반대
- 1918–29프라우다 주필, 코민테른 지도부
- 1920프레오브라젠스키와 《공산주의 ABC》 공저·출간
- 1921《사적 유물론: 사회학 체계》 출간
- 1925–28네프 이론가, 「부유해지십시오」
- 1929「우편향」으로 실각
- 1934–36이즈베스티야 주필, 1936년 헌법 기초 참여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19.03–1924.06
- 정위원 1924.06–1929.11
1929.11 해임 · 1938년 처형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혁명전쟁을 주장한 반전파브레스트에서 혁명전쟁을 주장한 최좌파였다.
- 1917.12–1918.11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혁명전쟁 지지자좌파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혁명전쟁을 주장해 1월 21일 활동가 회의에서 32표를 얻었고, 조약 수용 뒤 중앙위원회 직책을 내놓고 「코뮤니스트」를 발행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당 중앙 지도자로 정책 방향 결정
- 1919–1921코민테른의 창설러시아 공산당 대표볼셰비키 대표로 창립 대회와 초기 대회에 참여했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네프의 이론가스미치카를 옹호하며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론을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문학토론」의 포문을 연 프라우다 사설의 필자1924년 10월 프라우다 사설 「10월의 역사를 어떻게 쓰지 말 것인가」로 트로츠키에 대한 '문학토론'을 개시. 이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을 이론화한 다수파 동맹자가 되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우파 반대파 지도자네프의 지속과 점진적 공업화를 주장하며 강제 집단화 노선에 반대하다 1929년 지도부에서 밀려났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우익반대파 지도자, 네프 연장론의 마지막 대변자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반대하며 네프의 점진적 연장과 농민에 대한 시장 유인책을 주장했으나, 1929년 '우익 편향'으로 제거되었다.
- 1937–1938대숙청표적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된 옛 볼셰비키 지도자였다.
1928년 7월 11일 — 카메네프와의 비밀 면담
1928년 7월 11일, 니콜라이 부하린은 스탈린의 눈을 피해 레프 카메네프의 집을 찾았다. 두 사람은 불과 3년 전 서로가 서로를 정치적으로 죽이려 했던 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통의 적 앞에 섰다.
부하린은 카메네프에게 긴급히 경고했다: 스탈린이 '대전환'을 준비하고 있으며, 농민을 짓밟고 네프를 종식시킬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노선은 재앙이다. 그는 자신을 파라오처럼 여긴다. 우리는 모두 위험하다 — 그는 우리 모두의 목을 벨 것이다.」
카메네프가 이 대화를 기록해 두었고, 그 기록은 훗날 스탈린의 손에 들어갔다. 이 비밀 면담은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929년, 부하린은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10년 후, 스탈린은 정말로 그의 목을 벨었다.
모스크바 재판에서 비신스키는 이렇게 외쳤다: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변호사가 감히 우리의 위대한 스탈린 동지를 비방하다니!」 부하린은 1938년 3월 총살되었다.
1936년 2월, 파리의 비밀 임무
1936년 2월, 대숙청이 본격화되기 직전 스탈린은 부하린을 파리에 보냈다. 히틀러가 독일 사회민주당을 해산한 뒤 당이 국외로 빼돌린 마르크스·엥겔스 문서고를 사들이기 위한 협상이었다. 그는 1934년 2월 26일부터 1937년 1월 16일까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었고, 젊은 아내 안나 라리나가 동행했다. 여행은 망명의 기회이기도 했으나 그는 소련 밖에서는 살 수 없다며 귀국을 택했다.
문서를 맡고 있던 멘셰비키, 특히 보리스 니콜라옙스키와의 대화는 류틴 사건과 키로프 암살에 관한 당대의 영향력 있는 사료 「어느 옛 볼셰비키의 편지」의 바탕이 되었다. 다만 이 편지의 진위에는 의문이 제기되어 있다. 니콜라옙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1929년 이후 당 노선을 따르도록 강요받아 온 부하린은 파리에서 스탈린 정책에 대한 속내를 처음 말했다. 집단화와 부농 계급 청산 과정에서 벌어진 "여자와 아이까지, 전혀 무방비한 사람들의 대량 살육",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한 공산주의자들이 "테러를 정상적인 행정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위로부터의 모든 명령에 대한 복종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게 되어… 끔찍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니콜라옙스키의 전언이므로 그의 증언으로 인용해야 한다.
부하린은 어린 시절 친구 일리야 예렌부르크에게 이 여행 전체가 스탈린이 놓은 덫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털어놓았다. 파리에서의 멘셰비키 접촉은 1938년 재판에서 주요 혐의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