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L. R. 라이어널 로버트 제임스

C. L. R. James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01–1989 ○ 자연사

아이티 혁명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 되살린 트리니다드 출신 트로츠키주의자이자 범아프리카주의 지식인

“크리켓만 아는 자들이 크리켓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비욘드 어 바운더리』 서문, 키플링을 뒤집으며

트리니다드 출신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블랙 자코뱅』으로 아이티 혁명을 해방사로 재구성했으며, 트로츠키와 흑인 자기결정권을 논쟁했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발전시키고 크리켓으로 제국을 분석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트리니다드 문학 서클에서 런던 마르크스주의로 — 초기 형성기 (1927–1936)

제임스는 퀸스 로열 칼리지(QRC) 장학생으로 입학해 영문학과 서양 고전을 탐독했으며, 졸업 후 동교에서 역사·영문학 교사로 일하며 에릭 윌리엄스를 가르쳤다. 1920년대 트리니다드에서는 랠프 드 부아시에르, 알프레드 멘데스, 앨버트 고미스와 함께 반식민주의 문학 서클 '비컨 그룹(Beacon Group)'을 결성해 잡지 《트리니다드》와 《비컨》에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첫 출판 소설 「라 디비나 파스토라」(1927)는 미국 《새터데이 리뷰》에 실렸고, E. J. 오브라이언의 《1928년 최우수 단편선》에 수록되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동시에 크리켓 선수이자 지역 높이뛰기 기록 보유자(1918–1922)로 활동했으며, 메이플 크리켓 클럽에서 피부색의 계급 정치를 체험했다. 노동 지도자 아서 시프리아니의 전기를 집필하며 서인도 자치 문제에 눈뜨기 시작한 제임스는 1932년 크리켓 선수 리어리 콘스탄틴의 자서전 집필을 돕기 위해 영국 랭커셔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네빌 카더스의 추천으로 《맨체스터 가디언》 크리켓 기자가 되었고, 1933년 런던으로 이주했다. 1934년 독립노동당(ILP)에 가입해 페너 브록웨이와 교류하며 마르크스주의로 급진화했고, 공개당 결성을 위해 ILP를 떠난 트로츠키주의 그룹에 합류했다. 이 시기 버지니아 울프의 호가스 출판사에서 팸플릿 《서인도 자치를 위한 변론》(1933)을 출간했고, 폴 로브슨 주연의 희곡 《투생 루베르튀르》(1936)를 웨스트엔드 무대에 올렸다. 트리니다드에서 가져온 원고 《민티 앨리》(1936)는 영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흑인 카리브해 작가의 소설이 되었다. 제임스의 1930년대 궤적은 반식민 문학청년이 세계혁명의 전망을 지닌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변모하는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소설가로서의 제임스 — 『민티 앨리』와 카리브해 사실주의 (1927–1936)

제임스의 지적 여정에서 소설 창작은 마르크스주의 정치 활동과 분리되지 않는 핵심 축이었다. 1927년 단편 「라 디비나 파스토라」가 미국 《새터데이 리뷰》에 게재되고 E. J. 오브라이언의 《1928년 최우수 단편선》에 선정되며 카리브해 작가로는 드물게 국제적 인정을 받았다. 1929년에는 트리니다드 바리오의 빈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중편 「트리엄프」를 발표했다. 두 작품 모두 포츠오브스페인의 서민 계층과 바리오(막사 마당)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이후 제임스 정치사상의 밑바탕이 된 '민중의 자발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소설가로서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1928년 집필해 1936년 세커 앤 워버그에서 출간한 유일한 장편소설 『민티 앨리』다. 흑인 카리브해 출신 작가의 소설이 영국에서 출판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주인공 헤인즈는 어머니를 여읜 교육받은 흑인 중간계급 청년으로, 포츠오브스페인의 막사 마당 '민티 앨리 2번지'에 세들어 살며 노동계급 이웃들의 생계, 사랑, 갈등, 연대를 목격하고 점차 참여하게 된다. 제임스는 민담의 트릭스터 전통을 현대적으로 활용해, 빈곤한 여성들의 삶을 특유의 유머와 연민으로 그려냈다.

제임스는 훗날 자신의 정치 활동과 세계관의 '기본 구성 요소'가 이미 『민티 앨리』의 '인간적' 측면에 담겨 있었다고 회고했다. 소설 속 바리오 공동체의 집단적 삶에 대한 탐구는 그가 1940년대에 정식화한 '대중의 자발적 자기활동' 테제의 문학적 원형이었다. 『민티 앨리』는 카리브해 지역 사회적 사실주의의 선구적 텍스트이자, 이후 서인도 문학 르네상스의 선행자로 평가받는다.

1930년대 카리브해 노동 반란 — 제임스의 분석과 연대 (1932–1938)

1937년 6월, 트리니다드 유전 지대에서 터벌 유라이어 버틀러가 이끈 파업이 전면적 총파업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미국 CIO의 연좌파업을 모방해 유전 시설을 점거했고,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봉기는 자메이카에서 바베이도스까지 카리브해 전역으로 번진 1930년대 노동 반란의 정점이었다. 제임스는 런던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 기관지 《국제아프리카 오피니언》과 트로츠키주의 주간지 《파이트》를 통해 즉각 분석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임스의 개입은 193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932년 그가 트리니다드를 떠나기 직전 출간한 『시프리아니 대위의 생애』는 이미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왕령식민지 체제를 신랄하게 해부하며, "서인도인은 자신을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식민 담론의 허구를 논파했다. 이 책은 카리브해 전역의 신문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트리니다드 총독부 관리로 하여금 1937년 반란의 원인을 검토하며 "C. L. R. 제임스의 저술이 민중을 선동하는 데 일조했다"고 지목하게 만들었다. 제임스 자신도 『비욘드 어 바운더리』에서 "트리니다드 유전 노동자들이 움직였을 때" 그 책이 "새로운 상황이 요구하는 정신적·도덕적 전환"을 젊은 지식인들에게 제공한 목록의 상위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제임스는 1937년 봉기를 분석하며 두 가지 핵심 통찰을 제시했다. 첫째, 카리브해 노동자들의 '체류 파업(stay-in strike)'은 미국 CIO의 연좌파업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것이며, 이는 세계 노동계급 투쟁의 상호연결성을 입증한다는 점. 둘째, 트리니다드의 반란은 한 작은 섬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아프리카 구리광산 파업(1935년 북로디지아)과 연결된 범아프리카적·국제주의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는 카리브해의 봉기가 "한 시대를 닫고 다른 시대를 열었다"고 선언하며, 이를 식민지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결정적 계기로 자리매김했다. 이 분석은 이후 『블랙 자코뱅』에서 아이티 혁명을 '아래로부터의 역사'로 재구성하는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다.

패드모어-제임스 축 — 범아프리카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

C. L. R. 제임스와 조지 패드모어(본명 맬컴 널스)는 트리니다드에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제임스의 아버지 로버트 제임스와 패드모어의 아버지 J. H. A. 널스는 모두 교사였고 친구 사이였다. 제임스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내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때부터 그를 알았고, 우리는 함께였던 모든 시간 동안 아프리카 해방과 흑인이 평범한 인간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데 비슷한 태도를 지녔다." 두 소년은 여름마다 아리마 강에서 수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당시에는 몰랐지만 훗날 그들의 이름은 아프리카 해방 투쟁의 역사에 함께 기록될 운명이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경로는 서로 달랐다. 패드모어는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워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코민테른 흑인노동국장으로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며 스탈린, 몰로토프와 함께 노동절 연단에 섰다. 제임스는 1932년 영국으로 건너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1935년 소련 외교정책이 반파시즘 인민전선으로 선회하여 영국·프랑스를 '민주적 제국주의'로 재분류하자, 패드모어는 코민테른을 떠났다. "독일과 일본은 아프리카에 식민지가 없는데, 가장 인종차별적인 나라는 미국이고, 아프리카 식민지를 가진 것은 영국과 프랑스다"라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그날 런던의 제임스 방문을 두드린 패드모어는 "나, 그 사람들을 떠났네, 자네도 알다시피"라고 말했다.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제임스는 트로츠키주의자로, 패드모어는 스탈린주의에서 이탈한 독립 사회주의자로 남았으며,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혁명 전략을 두고 은밀한 긴장을 지녔다) 그들은 한 번도 공개적으로 다투지 않았다. 1935년 국제아프리카친우회(IAFA), 1937년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공동으로 이끌며 런던을 범아프리카 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제임스는 IASB 기관지 《국제아프리카 오피니언》의 편집장을 맡았고, 패드모어는 전체 조직을 지휘했다. 이 네트워크가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 회의의 기초가 되었고, 나중에 콰메 은크루마의 가나 독립을 위한 인적·정치적 토대를 제공했다.

1957년, 역사의 원이 닫혔다. 영국에서 입안된 계획에 따라 패드모어는 은크루마 정부의 범아프리카 담당 비서실장으로, 제임스는 에릭 윌리엄스의 PNM 기관지 편집장 겸 서인도 연방 사무국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1959년 패드모어가 사망한 후, 제임스는 그를 역사 속에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서인도 정당 정치』(1962)에서 '반식민 민족적 재능의 전통'이라는 개념을 정식화하며, 패드모어를 흑인 급진적 전통의 결정적 기둥으로 자리매김했다. 제임스는 청중에게 전하고자 했다: 혁명가란 반드시 국가 수반이 될 필요는 없으며, 훈련된 조직가로서의 정치 교육, 선동, 선전만으로도 세계사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국제아프리카친우회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으로 — 런던 범아프리카 조직화 (1935–1939)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맞서 제임스는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친우회(IAFA)를 결성하고 의장을 맡았다. 에이미 애시우드 가비가 재무를, 조모 케냐타가 서기를 맡았으며, 곧 조지 패드모어와 라스 마코넨도 합류했다. IAFA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500명이 모인 집회를 열고 국제연맹과 영국 정부에 에티오피아 보호를 촉구했다. 이 조직은 범아프리카주의와 사회주의를 접합하려는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의 최초 진지한 조직적 시도였으며, 제임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로서 반식민 운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IAFA는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패드모어가 실질적 지도자였고 제임스는 기관지 《국제아프리카 오피니언》(International African Opinion)의 편집장을 맡았다. IASB는 하이드파크에서 매주 집회를 열어 카리브해 노동 파업과 식민지 착취를 공론화했고, 노동당 지부와 노조에 연사를 파견했으며, 의회에 질의할 의제를 제공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 낸시 큐나드 등 백인 진보 인사들이 후원자로 참여했다. IASB의 선언문 「우리가 서 있는 것」(What We Stand For)은 '국내외 아프리카인의 진보와 사회적 향상, 완전한 경제적·정치적·인종적 평등, 자결권'을 천명했다.

제임스가 IASB에서 활동한 1937~1938년은 그에게 창조적 폭발기였다. 《국제아프리카 오피니언》에 실린 그의 사설들은 아이티 혁명의 교훈을 당대 아프리카 투쟁에 적용하고, 에티오피아 저항을 세계 반식민 투쟁의 일부로 자리매김했다. 이 조직 경험은 『블랙 자코뱅』(1938)과 『흑인 반란의 역사』(1938)에 직접 스며들었으며, IASB가 구축한 인적·정치적 네트워크는 훗날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 회의와 콰메 은크루마의 가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범아프리카 운동과 가나 혁명 (1935–1960)

제임스는 1930년대 중반부터 범아프리카 운동의 핵심 조직가로 활동했다.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대응해 국제아프리카에티오피아친우회(IAFE) 의장을 맡았으며, 에이미 애슈우드 가비·조모 케냐타 등과 함께 반식민 연대를 조직했다. 1937년 소꿉친구 조지 패드모어가 이끄는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으로 개편된 후에는 기관지 『아프리카와 세계』 및 『국제아프리카 오피니언』을 편집하며 런던을 범아프리카 운동의 거점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제임스는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콰메 은크루마를 만나 패드모어에게 연결했으며, 이 연결은 훗날 가나 독립의 지적 기반을 형성했다. 1957년 가나 독립 기념식에 초청된 제임스는 은크루마의 요청으로 집권당인 관례인민당(CPP)의 전략을 분석한 『은크루마와 가나 혁명』을 집필했다. 이 책은 대중운동 정당이 어떻게 식민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지를 내부자 시각으로 기록했으나, 은크루마의 쿠데타 실각 이후인 1977년에야 출간되었다. 가나에서의 경험은 제임스에게 아프리카 탈식민화가 세계 혁명의 새로운 전선이라는 확신을 주었고, 이는 그의 후기 정치사상의 핵심 축이 되었다.

극작가로서의 제임스 — 『투생 루베르튀르』(1936)에서 『블랙 자코뱅』(1967)까지

제임스는 역사가이자 정치활동가이기 이전에 극작가로서 아이티 혁명에 처음 접근했다. 1934년 집필한 3막극 『투생 루베르튀르: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반란의 이야기』는 1936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극장에서 폴 로브슨 주연으로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흑인 극작가의 작품에 흑인 전문 배우들이 출연한 영국 무대 최초의 사례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로브슨의 투생 연기는 기립 박수를 받았고, 브로드웨이 이전 논의까지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으나, 이 공연은 흑인 연극사와 반식민 문화운동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초연 당시 제임스는 이미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이후 국제아프리카친선협회 활동을 통해 반제국주의 급진화를 겪고 있었으며, 스페인 내전모스크바 재판을 목격하며 단순한 인종적 '위인 서사'를 넘어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의식을 확립해가고 있었다. 이 정치적 성숙은 1938년 역사서 『블랙 자코뱅』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원고는 오랫동안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5년 크리스티안 회그스비에르가 헐 대학의 트로츠키주의자 조크 해스턴 문서고에서 타이프스크립트를 발견했다. 2013년 듀크 대학 출판부에서 해제·주석과 함께 결정판이 출간되었다.

30년 후인 1967년, 나이지리아 내전 직전의 이바단 대학에서 제임스는 이 극을 『블랙 자코뱅』이라는 제목으로 대폭 개작해 올렸다. 트리니다드 출신 연출가 덱스터 린더세이가 연출한 이 작품은 개별 영웅이 아닌 모이즈 장군과 흑인 하층민(생퀴로트)의 집단적 역할을 전면화했으며, 탈식민 시대의 새로운 세대를 향해 직접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을 던졌다. 이후 트리니다드, 자메이카, 뉴욕, BBC 라디오로 무대를 넓혔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지하 텍스트로 유통되었다. 역사서와 희곡 두 버전의 『블랙 자코뱅』을 가로지르는 제임스의 30년간의 개작 과정은 그가 역사쓰기와 극작을 동일한 혁명적 실천의 두 양식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세계혁명』—코민테른의 흥망에 관한 최초의 트로츠키주의 역사 (1937)

1937년 제임스는 세커 앤 워버그 출판사에서 『세계혁명, 1917–1936: 코민테른의 흥망』을 출간했다. 이 책은 트로츠키주의 관점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었다. 제임스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토대로 삼아,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스탈린주의 전체주의 관료제로 전락했는지를 추적하고, 코민테른 내 이념 투쟁(1918–1919년 독일 혁명, 중국 국민혁명의 북벌, 스페인 내전에서의 코민테른 역할)을 검토했다. 집필 과정에서 동료 트로츠키주의자 해리 윅스의 조력을 받았고 도로시 파이저가 원고를 타이핑했으며, 제임스가 당시 지도부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 그룹에 헌정되었다. 제임스는 마이클 폴라니가 『맨체스터 가디언』에 소련이 '예언자들의 사회주의는 아닐지 몰라도 작동은 한다'고 쓴 데 맞서 "그것은 예언자들의 사회주의도,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도 아니며, 정확한 의미에서 작동하지도 않는다"고 반박했다. 트로츠키는 1939년 이 책을 "아주 훌륭한 책"이라 평했고, 조지 오웰은 "대단히 유능한 책", E. H. 카는 "러시아 혁명의 경과와 그것이 잘못된 전환점에 선 지점에 대한 분석에서 제임스 씨는 칭찬할 만한 독립적 판단력과 진실에 도달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영국 식민당국이 금서로 지정했음에도 인도로 밀반입되어 마드라스 방직공장 파업 지도자 G. 셀바라자트남을 트로츠키주의로 전환시켰고, 스리랑카에서는 레슬리 구네워데네의 10년 후 저작 『코민테른의 흥망』의 토대가 되었다.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듀크 대학 출판부에서 크리스티안 회그스비에르의 해제와 함께 결정판이 출간되었다. 『세계혁명』은 『블랙 자코뱅』(1938)의 직전에 나온 제임스 최초의 본격 정치역사서로, 그를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주요 이론가로 자리매김했다.

『블랙 자코뱅』―아이티 혁명의 마르크스주의 역사 (1938)

1938년 출간된 『블랙 자코뱅』은 아이티 혁명(1791–1804)을 노예제에 저항한 흑인 대중의 자기해방 투쟁으로 재구성한 마르크스주의 역사서의 걸작이다. 제임스는 파리에서 프랑스 혁명사 기록보관소를 뒤지고 아이티 군사사가 알프레드 오귀스트 느무르와 함께 카페 테이블 위에 커피잔으로 전투 배치를 재현하며 연구했다. 이 책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영웅적 리더십과 동시에 그가 흑인 대중과의 유대를 상실하며 몰락하는 비극을 분석하고, 프랑스 혁명의 보편적 자유 선언이 노예제 식민지에서 어떻게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제임스 이전의 서사가 아이티 혁명을 폭력적 혼란으로 치부했던 것과 달리, 『블랙 자코뱅』은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과 그 후손들이 세계사적 혁명의 주체였음을 최초로 입증했다. 에드워드 사이드, 에릭 홉스봄 등 후대 역사가들은 이 책을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선구적 텍스트로 평가하며, 오늘날까지 아이티 혁명 연구의 결정적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흑인 반란의 역사』—자본주의 역사가의 페이지 밖에서 일어난 투쟁의 기록 (1938)

1938년, 제임스는 독립노동당(ILP)의 '팩트(Fact)' 시리즈 6펜스 소책자로 『흑인 반란의 역사』를 출간했다. 『블랙 자코뱅』과 거의 동시에 나온 이 저작은 생도맹그에서 마커스 가비까지, 노예선 봉기에서 아프리카 반식민 저항까지 400년 흑인 투쟁의 연속성을 간결하게 스케치했다. 제임스는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곳은 자본주의 역사가들의 페이지 안"이라고 선언하며, 노예제를 수동적 고통이 아니라 계속된 반란의 장으로 다시 썼다. 흑인 노예들이 선상에서 뛰어내리고, 선원을 제압해 배를 탈취하고, 자메이카와 쿠바의 산속에 마룬 공동체를 세우고, 가이아나 내륙에서 식민 당국과 평화조약을 맺은 사례들을 열거하며 '순종적인 흑인'이라는 신화를 박살냈다.

이 팸플릿은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쓰였으며, 제임스가 동시에 집필하던 대작들(『세계혁명』, 『블랙 자코뱅』)의 통시적 보완재 역할을 했다. 1969년 『범아프리카 반란의 역사』로 개정 증보되면서 콩고에서 남아프리카까지 탈식민 봉기를 추가했고, 흑인 급진주의 세대의 입문서가 되었다. 폴 불은 이 책이 "범아프리카 해방 투쟁의 전체 서사를 한 권에 담은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역사"라고 평했다. 헤이티 혁명이라는 단일 사건의 심층 분석인 『블랙 자코뱅』과 함께, 『흑인 반란의 역사』는 제임스를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실천한 선구적 역사가로 자리매김한 한 쌍의 저작이다.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 영국 대표로서의 참여와 세계혁명의 전망 (1938)

1938년 9월, 제임스는 파리 근교 알프레드 로스메르의 자택에서 열린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 두 명의 영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이는 그해 4월 마르크스주의 그룹과 마르크스주의 연맹의 합병으로 결성된 혁명사회주의연맹(RSL)을 대표하는 자리였다. 대회는 트로츠키가 기초한 「자본주의의 사멸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이행강령)를 채택했으며, 스탈린주의로 타락한 제3인터내셔널을 대체할 세계혁명 정당의 창건을 선언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 망명 중이라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대회를 통해 국제적 조직의 골격을 세웠다.

제임스에게 이 대회 참석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었다. 그는 같은 해 『세계혁명』과 『블랙 자코뱅』을 출간하며 제3인터내셔널의 배반을 역사적으로 실증했고,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에서 범아프리카 조직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창립대회 직후 트로츠키와 제임스 P. 캐넌의 요청으로 미국 순회강연에 나선 제임스는, 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흑인 노동자 조직화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어진 1939년 코요아칸에서의 트로츠키와의 '흑인 문제' 논쟁은 제임스가 제4인터내셔널 내에서 독자적인 이론적 입장을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임스는 1940년대에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전위당 독점에서 대중의 자발적 자기활동으로 전환하며 트로츠키주의 정통에서 이탈했지만,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그가 국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지도적 이론가로 공인된 상징적 순간이었다.

미국 망명, 추방 그리고 『선원들, 배신자들, 난파자들』 (1938–1953)

1938년 10월 트로츠키와 제임스 P. 캐넌의 권유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지도부의 초청을 받은 제임스는 흑인 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9년 1월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뉴헤이븐, 영스타운, 로체스터, 보스턴, 로스앤젤레스까지 이어진 전국 강연 투어에서 그는 '대영제국의 황혼'과 '흑인과 세계제국주의'를 주제로 강연했다. 훗날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콘스턴스 웹은 로스앤젤레스 강연을 듣고 "나는 이미 처칠루스벨트라는 두 위대한 연설가의 연설을 들었지만, 이제 세 번째를 듣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제임스는 15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SWP를 떠나 샤흐트만의 노동자당(WP)에 합류했고, 그 안에서 두나옙스카야·그레이스 리와 함께 존슨-포레스트 경향을 결성했다. 1950년대 초 매카시즘의 반공 광풍 속에서 비자 기간 초과로 체포된 제임스는 엘리스섬 이민수용소에 구금되었다. 그는 구금 중에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분석한 『선원들, 배신자들, 난파자들』을 집필하여 상원의원 전원에게 한 권씩 보냈다. 이 책에서 제임스는 에이헤브 선장을 광기에 사로잡힌 전체주의적 지도자의 알레고리로 읽으며, 미국 반공주의를 자본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의 산물로 해석했다. 결국 추방이 확정되어 1953년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이 15년간의 미국 체류는 그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흑인 자율투쟁론, 그리고 전위당 거부라는 핵심 이론의 산실이었다.

트로츠키와의 '흑인 문제' 논쟁 (1939)

1939년 4월, 제임스는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와 미국 흑인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3차례의 집중 토론을 벌였다. 제임스는 미국 흑인들이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와 달리 스스로를 미국 시민으로 정체화하며 분리 독립보다 완전한 시민권과 통합을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 다수가 자기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 혁명가가 그 구호를 내거는 것은 백인 노동자들에게 불필요한 장벽을 치는 일이며, CIO의 산업별 노조 조직화가 이미 흑백 노동자의 공동 투쟁을 촉진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트로츠키는 피억압 민족의 자기결정권은 그 자체로 방어되어야 하는 원칙이며, 혁명적 위기 속에서 흑인 대중이 스스로 분리 국가를 요구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 토론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계급과 인종, 민족 문제의 관계를 둘러싼 가장 심층적인 이론적 교환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제임스가 이후 전개한 '흑인 투쟁의 자율적 혁명 동력' 테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존슨-포레스트 경향과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1941–1951)

1940년대 초, 제임스는 트로츠키의 '타락한 노동자 국가' 테제에 근본적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라야 두나옙스카야, 그레이스 리 보그스와 함께 존슨-포레스트 경향을 결성하고 소련을 새로운 형태의 계급 사회인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이들에 따르면 소련에서 생산수단은 단일 고용주인 국가가 독점했으며, 노동자는 임금 노예로 남아 있었다. 관료제는 단순한 계층이 아니라 착취적 지배 계급이었다. 이 입장은 토니 클리프의 유사한 결론과 평행하면서도, 식민지·인종적 억압 민중의 자율적 투쟁을 혁명 동력의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독자적이었다. 1947년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떠난 이들은 1948년 대표작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발표하고, 이후 정당 형태를 해체해 서신위원회로 전환했다. 이 이론은 후대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신좌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통 트로츠키주의와의 결별 — 전위당에서 대중의 자기활동으로

제임스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적 공헌은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에 걸쳐 전개된 정통 트로츠키주의와의 이론적 결별이었다. 이 결별은 하나의 조직적 이탈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정치형식에 대한 근본적인 재사고였다.

1938년 미국에 도착해 SWP 내에서 활동하던 제임스는 막스 샤흐트만의 소련 계급성격 논쟁에 참여하며 점차 트로츠키의 '타락한 노동자 국가' 테제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1940년 라야 두나옙스카야와 함께 샤흐트만의 노동자당으로 옮긴 후 존슨-포레스트 경향을 결성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을 계기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는 독자적 분석을 완성했다. 그러나 제임스의 결별은 소련 분석에 그치지 않았다.

결정적 전환은 1948년의 『변증법 노트』에서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헤겔의 『대논리학』과 레닌의 『철학 노트』를 독해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변증법적 모순의 운동에서 찾았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노동계급이 단순한 피억압 계급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부정성'의 살아있는 체현이며, 따라서 혁명적 실천의 진정한 원천은 당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 자신의 자기활동이라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찰을 "모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근거는 개별 노동자의 의식적 활동"이라는 정식으로 압축했다.

1950년 SWP를 최종 탈퇴한 뒤, 제임스와 그의 동료들은 전위당 모델 자체를 폐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통신출판위원회(Correspondence Publishing Committee, 1951)는 당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 경험을 직접 서술하고 교환하는 수평적 네트워크로 기획되었다. 이는 1955년 두나옙스카야와의 분열로 이어졌는데, 두나옙스카야가 혁명조직의 필요성을 일부 유지한 반면 제임스는 당 형식 자체가 대중의 창조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소련 탱크에 맞선 노동자평의회의 출현은 그의 확신을 결정적으로 강화했다.

제임스는 1958년 그레이스 리 보그스 및 코닐리어스 카스토리아디스와 함께 펴낸 『현실을 직시하며(Facing Reality)』에서 이 입장을 완성된 형태로 제시했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진보적 변화의 모터는 대중의 자발적 창조적 행동"임을 선언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할 일은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자주적 투쟁을 인식하고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극소수만이 공유한 이 급진적 입장은 이후 신좌파와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중요한 선행 사례가 되었으며,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학생운동의 현장에서 부분적으로 검증되었다.

제임스의 이 이론적 여정, 즉 전위당의 마르크스주의자에서 대중의 자기활동을 유일한 혁명 동력으로 신뢰하는 정치사상가로의 이행은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레닌주의 조직론에 대한 가장 심원한 내재적 비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변증법 노트』—헤겔,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대중의 자발성 (1948)

1948년, 제임스는 존슨-포레스트 경향 내부 토론용으로 250쪽 분량의 등사본 『변증법 노트: 헤겔, 마르크스, 레닌』을 작성했다. 그는 이 저작을 평생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았으나, 그의 책들 중 가장 덜 읽힌 책으로 남아 있다. 제임스는 헤겔의 『논리학』에서 당대 혁명적 실천의 철학적 토대를 찾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헤겔의 '부정의 힘', 즉 모든 존재하는 것 안에 내재된 자기 극복의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과 함께 생겨나며 자본을 폐지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폐지한다. 이것이 변증법의 혁명적 핵심이었다. 제임스는 레닌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제네바 도서관에서 헤겔을 연구한 사례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분석과 결합하여, 노동자 대중이 어떤 전위당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새로운 사회의 형태를 창출할 능력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 입장은 1949년 그가 전위당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서신위원회로 전환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모든 요리사가 통치할 수 있다'는 테제로 요약되었다. 이 저작은 이후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미국 문명』—냉전 초입에 쓴 대중문화와 전체주의 예언 (1950)

1950년 초, 제임스는 로스앤젤레스 콤프턴의 거처에서 『미국 문명에 관한 노트』를 집필했다. 제임스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고 1993년에야 『미국 문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원고는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비견될 만한 야심작으로, 미국 문명의 핵심을 '인격의 해방'으로 보는 독창적 분석을 제시했다. 제임스는 "행복의 추구야말로 미국 발전의 중심 주제"라고 선언하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대중문화(할리우드 영화, 재즈, 만화, 탐정소설, 라디오 드라마)를 진지한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원고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휘트먼과 멜빌, 프레더릭 더글러스를 19세기 미국 민주주의의 표현으로 독해하며, 이들이 유럽 형식을 깨뜨린 지점에서 신생 민주주의의 미학을 발견한다. 후반부는 전후 미국에서 산업 노동자, 흑인, 여성의 급진적 동원 가능성을 검토한다. 두 부분을 잇는 긴 장은 대중예술에 할애되어, 제임스가 영화 속 갱스터 영웅과 연예인 숭배에서 감지한 치명적 경향(대중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패에 절망하여 폭력적 영웅을 통해 대리만족하는 문화가 정치적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예감)을 추적한다.

제임스는 "현대 대중예술의 경향과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전체주의 아래에서 폭발하는 인간 실존의 기괴한 풍자화를 예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통찰은 냉전 매카시즘과 이후 미국 정치의 스펙터클화를 놀랍도록 앞서 내다본 것이었다. 이 원고가 40년 이상 묻혀 있었기에, 제임스를 정치경제 분석가로만 기억하는 독자들은 그가 대중문화 비평의 선구자임을 놓쳤다. 『미국 문명』은 제임스의 1940년대 정치 저작과 『비욘드 어 바운더리』(1963)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로서, 그가 어떻게 계급 분석과 문화 분석을 하나의 혁명적 세계관 안에 통합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위당 거부 — 통신출판위원회에서 『현실을 직시하며』까지 (1951–1970)

1940년대 후반 제임스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레닌주의 전위당 모델 자체에 근본적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와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동료들은 사회주의가 당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기활동에서 출현한다고 보았으며, 혁명적 조직의 역할은 '지도'가 아니라 대중 투쟁의 경험을 소통하고 일반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1년 이들은 트로츠키주의를 완전히 결별하고 통신출판위원회(Correspondence Publishing Committee)를 결성했으며, 월간지 『커리스폰던스』를 발행해 웨스트버지니아 광부들의 와일드캣 파업과 같은 자생적 노동투쟁을 분석했다. 1953년 제임스가 미국에서 추방된 후 조직에는 균열이 생겼다. 1955년 라야 두나옙스카야가 이끄는 다수(또는 소수, 논쟁 중)가 분리해 마르크스적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News and Letters Committees)를 창립했다. 제임스는 영국에서 꾸준히 조언을 보냈고, 마틴 글레이버먼이 미국 측 실무를 지휘했다. 1958년 출판된 『현실을 직시하며』(Facing Reality)는 제임스, 그레이스 리 보그스, 그리고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피에르 쇼를리외라는 필명으로)가 공동 집필한 책으로, 1956년 헝가리 노동자평의회 봉기를 계기로 삼아 현대 혁명의 주체가 당이 아니라 작업장 평의회와 대중의 자발적 조직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이후 시카고의 레벨 워커 그룹과 SDS 저널 『래디컬 아메리카』를 통해 반권위주의 좌파에 널리 읽혔으며, 이탈리아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2년 그레이스 리 보그스와 제임스 보그스 부부가 제3세계주의 노선으로 이탈하자, 제임스 측은 조직명을 '페이싱 리얼리티'로 개칭하고 디트로이트를 거점으로 월간 소식지 『스피크 아웃』을 발행했다. 1970년 글레이버먼이 조직이 너무 작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해 해산을 제안했고, 제임스는 이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제임스의 정당 형태 실험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전위당 없는 혁명이라는 그의 후기 사상은 1960년대 신좌파와 그 이후 자율주의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재발견되는 유산으로 남았다.

두나옙스카야와의 결별 —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분열 (1955)

1955년, 존슨-포레스트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맞았다. 라야 두나옙스카야가 이끄는 파벌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를 떠나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News and Letters Committees)'를 결성한 것이다. 분열의 씨앗은 제임스가 1953년 두나옙스카야가 보낸 헤겔의 '절대이념'에 관한 편지들에 침묵으로 일관한 데서 이미 싹텄다. 두나옙스카야는 헤겔의 『논리학』에서 절대이념이 이론과 실천의 통일,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한다고 보았고, 이를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철학적 토대로 삼았다. 제임스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두나옙스카야가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과 신문-서신 위원회 형태의 조직론은 그의 '대중의 자기활동' 테제와 충돌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임스의 영국 추방(1953년)으로 조직 운영의 직접적 지도력이 약화된 점, 1949~1950년 광부 총파업과 1953년 동독 봉기를 둘러싼 전망 차이가 겹치며 균열은 확대되었다. 분열의 규모를 둘러싸고는 논쟁이 있다. 역사가 켄트 우스터는 두나옙스카야 측이 과반이었다고 보지만, 마틴 글레이버먼은 제임스 측이 다수였다고 반박했다. 양측 모두 과반이라고 주장할 만큼 균등한 분열이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이후 코레스폰던스는 제임스 보그스의 편집 아래 『코레스폰던스』 신문을 계속 발행했고, 1958년에는 『현실을 직시하며』를 출간했다. 두나옙스카야의 뉴스 앤 레터스는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독자적 흐름을 구축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제임스는 이후 공식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레닌주의'라 칭했으나, 두나옙스카야와의 결별은 그가 당으로 조직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결정적으로 멀어지는 전환점이었다. 이 분열은 전후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 두 갈래, 즉 자율주의적 대중 자기활동론과 조직화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으로 갈라지는 중대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1956년 헝가리 혁명과 『현실을 직시하며』 — 노동자평의회와 직접민주주의

1956년 10월, 헝가리 노동자들은 부다페스트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제에 맞서 봉기했고, 수백 개의 노동자평의회가 공장을 접수하고 생산을 통제하며 소비에트 탱크에 저항했다. 헝가리 공산당은 말 그대로 해체되었고, "사회의 단순한 토대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던 노동 인구가 현대 사회의 지도적·창조적 힘임을 스스로 입증했다"고 제임스는 기록했다. 그에게 헝가리 혁명은 대중이 전위당 없이도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다는 평생의 신념이 피로 입증된 순간이었다.

같은 해 6월, 제임스는 통신출판위원회 기관지에 「모든 요리사도 통치할 수 있다(Every Cook Can Govern)」를 발표했다. 이 글은 시민 총회가 모든 중대 결정을 내리고, 공직자가 추첨으로 선출되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이디오테스(idiotes·바보)'라 부른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분석하며, 현대 산업사회일수록 직접민주주의가 더욱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헝가리 노동자평의회는 바로 그 원리의 현대적 구현이었다.

1958년, 제임스는 그레이스 리 보그스 및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필명 피에르 쇼리외)와 함께 『현실을 직시하며(Facing Reality)』를 디트로이트에서 출간했다. 이 저작은 헝가리 노동자평의회의 실제 경험, 미국 자동차 노동자들의 와일드캣 파업, 여성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 투쟁을 하나의 틀로 엮어내며,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업"이라는 명제를 구체적 증거로 뒷받침했다. 『현실을 직시하며』는 1960년대 시카고의 레블 워커 그룹과 솔리대리티 북숍을 통해 반권위주의 좌파에게 널리 읽혔고, 이후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적 텍스트로 자리잡았다.

제임스는 훗날 「집결하는 힘(Gathering Forces)」(1967)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헝가리의 1956년 혁명은 서방 세계에 있어 쿠바가 제3세계에 대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사회화된 인간의 승리—실제 생산자들이 생산을 공동 통제 아래 두고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가치 있는 조건에서' 수행하는 것—가 바로 피비린내 나는 패배 속에서 이룩한 1956년 10~11월 헝가리 혁명의 승리다."

트리니다드 귀환 — PNM 기관지 편집과 서인도 연방을 둘러싼 결별 (1958–1960)

1958년, 제임스는 자신이 과거 퀸스 로열 칼리지에서 가르친 제자이자 당시 트리니다드 식민지 수상이었던 에릭 윌리엄스의 초청으로 2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윌리엄스는 제임스에게 집권당 인민국민운동(PNM)의 기관지 『더 네이션』 편집장을 맡겼다. 제임스는 이 자리에서 서인도 연방을 열렬히 옹호하며, 자메이카부터 가이아나까지 영국령 카리브해 전역을 아우르는 정치적 통합이야말로 진정한 탈식민 독립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인도연방노동당 사무총장으로도 활동했으며, 1958년 6월 가이아나 퀸스 칼리지에서 행한 '연방에 관한 강연'에서 인종적 분열을 넘어서는 카리브해적 정체성의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제임스는 프랭크 워렐을 서인도 크리켓팀의 첫 흑인 주장으로 임명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더 네이션』에서 주도하여 성공시켰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서인도 연방이 트리니다드의 자원과 자율성을 잠식할 것을 우려해 연방 탈퇴 쪽으로 기울었고, 두 사람의 정치적 노선은 충돌했다. 제임스가 연방 문제와 관련해 윌리엄스에게 사임 압력을 받는 지경에 이르자, 1960년 『더 네이션』 편집장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트리니다드에서의 2년은 그의 범카리브해적 비전이 독립 직전의 현실 정치와 정면으로 충돌한 결정적 경험이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결별 — 에릭 윌리엄스와의 정치적 동반과 단절 (1918–1965)

1918년 퀸스 로열 칼리지(QRC)를 갓 졸업한 제임스는 동교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며 열 살 아래의 에릭 윌리엄스를 가르쳤다. 윌리엄스는 훗날 옥스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자본주의와 노예제』(1944)를 집필했는데, 이 저작은 『블랙 자코뱅』과 함께 노예제 폐지를 경제적·지정학적 요인으로 설명한 쌍둥이 텍스트로 평가받는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사상적 빚을 제임스에게 인정했다. 1956년 윌리엄스가 인민국민운동(PNM)을 창당해 트리니다드의 집권 세력으로 성장하자, 1958년 제임스를 PNM 기관지 『더 네이션』의 편집장으로 초청했다. 제임스는 신문을 활기찬 정치 저널로 탈바꿈시켰고, 크리켓 팀에 최초의 흑인 주장 프랭크 워렐을 임명하라는 대대적 캠페인을 벌여 1960년 성공시켰다. 그러나 서인도 연방을 둘러싼 입장 차이와 윌리엄스의 권력 집중, 제임스의 비판적 논평이 충돌하며 1960년 제임스는 편집장직을 사임했다. 제임스는 연방을 통한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고, 윌리엄스는 트리니다드 단독 독립으로 선회했다. 윌리엄스 정부는 제임스의 저서 『현대 정치』를 압수했고, 1965년 제임스가 트리니다드를 재방문했을 때 6주간 가택 연금에 처했다. QRC 교실에서 시작된 지적 공생이 30여 년 만에 정치적 적대로 전환된 이 드라마는, 탈식민 국가 건설 과정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엘리트 통치가 충돌한 하나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비욘드 어 바운더리』―크리켓으로 제국을 해부하다 (1963)

1963년 출간된 『비욘드 어 바운더리』는 크리켓이라는 스포츠를 통해 식민주의, 계급, 인종, 그리고 서인도제도의 민족 정체성 형성을 분석한 독창적인 회고록이다. 제임스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구를 뒤집어 "크리켓만 아는 자들이 크리켓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묻는다. 이 책은 트리니다드에서 어두운 피부색의 학업 우수 학생으로서 중간계급 밝은 피부색 클럽 메이플에 입단한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퍼블릭 스쿨이 제국 전역에 이식한 크리켓의 '공정경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식민지 지배의 문화적 도구로 작동했는지를 추적한다. 동시에 서인도 크리켓팀이 식민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통일 팀으로서 어떻게 피식민 민중의 자존심과 독립 열망을 구현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제임스는 W. G. 그레이스에서 리어리 콘스탄틴과 조지 헤들리에 이르는 크리켓 영웅들의 사회적 의미를 치밀하게 읽어내며, 경기장 안의 질서와 바깥 세계의 권력 관계가 서로를 구성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존 알롯은 이 책을 '크리켓에 관해 쓰인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했고, V. S. 네이폴은 '서인도제도에서 나온 가장 정제된 책 중 하나'라고 평했다. 스포츠 저널리즘을 뛰어넘어 포스트식민 문화비평의 선구적 텍스트로 남아 있다.

워싱턴 D.C.의 흑인 대학에서 — 페더럴 시티 칼리지와 블랙 스터디즈 (1969–1980)

1968년 제임스는 미국 재입국이 허용되어 노스웨스턴 대학교 방문교수를 거쳐, 1969년 워싱턴 D.C.의 신생 공립대학 페더럴 시티 칼리지(FCC) 교수로 부임했다. FCC는 1968년 개교한 D.C. 최초의 4년제 공립대학으로, 학생 대부분이 노동계층 흑인(베트남 참전군인, 싱글맘, 시민권 활동가, 로턴 교도소 수감자들)이었으며, 질 스콧-헤론, 제임스 개릿 같은 급진 지식인들이 교수진으로 합류했다. 제임스는 문학, 흑인 혁명사, 일반 역사를 가르쳤고, 그의 강의는 순식간에 캠퍼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업이 되었다. 1976년 FCC가 컬럼비아 특별구 대학교(UDC)로 개편된 후에도 그는 1980년까지 강단에 섰다.

FCC 시절은 제임스 지적 생애의 '재발견'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런던의 앨리슨 & 버즈비 출판사가 1977년 『현재 속의 미래』를 시작으로 그의 저작 선집을 4권까지 펴내며 신좌파·블랙 파워 세대에게 제임스를 재소개했다. 워싱턴 D.C.는 흑인 인구 과반의 '초콜릿 시티'이자 홈룰 운동의 중심지였고, 제임스는 디트로이트의 혁명적 흑인 노동자 연맹 활동가들에게 학습 자료를 제공하는 등 학계 안팎에서 흑인 급진주의 세대와 직접 교류했다. 그의 FCC 강단은 카리브해 반식민주의의 산 경험이 미국 흑인 학생들의 자기해방 운동과 만나는 접점이었으며, 『블랙 자코뱅』과 『비욘드 어 바운더리』는 교과서를 넘어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제임스는 이곳에서 말년의 '브릭스턴 현자'로 가는 마지막 제도적 거점을 구축했고, 그의 존재 자체로 FCC를 블랙 스터디즈 운동의 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브릭스턴의 현자 — 후기 재발견과 지적 유산 (1970–1989)

제임스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자신의 저작이 전면적으로 재평가되는 '제임스 르네상스'를 목격했다. 런던 출판사 앨리슨 & 버즈비는 1977년부터 『현재 속의 미래』(1977), 『존재의 영역들』(1980), 『승리의 랑데부』(1984), 『크리켓』(1986) 등 선집 4권을 출간하며 제임스를 새로운 세대에게 재소개했다. 1981년 런던으로 최종 귀환한 그는 브릭스턴의 레이스 투데이 콜렉티브 건물 위층 작은 방에 정착했다. 이곳은 곧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활동가·학생·예술가들을 위한 순례지가 되었다. 자메이카 출신 시인 린턴 퀘시 존슨을 비롯한 레이스 투데이 구성원들이 그의 마지막 해를 돌보았다. 제임스의 조카 다커스 하우는 이 콜렉티브의 핵심 인물로, 영국 흑인 저항 운동의 주요한 목소리였다. 제임스는 레이스 투데이 지에 정기 기고하며 인종·계급·문화에 관한 예리한 단상을 계속 발표했다. 1960년대부터 런던 자택에서 매주 금요일 밤 열린 모임을 통해 리처드 스몰, 노먼 거번, 올랜도 패터슨, 월터 로드니 등 차세대 카리브해 지식인들을 멘토링했다. 사우스뱅크 폴리테크닉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채널4는 반둥 프로덕션을 통해 그의 강연 시리즈를 방영했다. 방 한가운데 놓인 텔레비전, 벽을 채운 책과 음반들 속 이 협소한 공간 안에서 제임스는 88세로 눈을 감는 순간까지 세계의 혁명적 변형을 사유했다. 그의 브릭스턴 시절은 한 혁명적 지식인이 어떻게 사상과 실천의 살아있는 연결점으로서 마지막까지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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