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소련 러시아 1897–1973 ○ 암

전선을 포위로 예술로 만든 원수, 평화 속에서는 정치군인

베를린 공세 첫날 밤, 주코프의 탐조등이 연기 속에서 아군을 비추자 코네프는 참모에게 말했다. "이웃들은 빛을 원해 탐조등을 쓴다네. 우리에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더 많은 어둠이 필요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으며, 1957년 주코프 실각을 지지했다. 미군 훈장과 영국 바스 훈장까지 받은, 소련이 가장 신뢰한 전선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주코프와의 관계: 구원과 경쟁, 배신

코네프의 군사적 운명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뗄 수 없이 얽혀 있었다. 1941년 10월 뱌지마 포위에서 서부전선군이 궤멸하자 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이끄는 국방위원회 조사단이 코네프의 처벌을 위해 도착했을 때, 그를 군사재판과 총살에서 구한 것은 주코프였다.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코네프를 자신의 부사령관으로 남겨두자고 제안했고, 며칠 뒤 코네프를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두 사령관 사이에 평등한 우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두 사람은 베를린 진격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스탈린은 양쪽 전선군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베를린을 향한 '경주'를 사실상 부추겼다. 1945년 4월,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은 누가 먼저 독일 수도를 점령하느냐를 두고 다투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로 진입했지만, 스탈린은 승리의 상징, 제국의사당에 소비에트 깃발을 게양하는 영예를 주코프에게 주었다. 코네프는 대신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미군과 토르가우에서 조우하고 프라하로 진격했다.

전후에도 긴장은 계속되었다. 1946년 코네프는 주코프의 뒤를 이어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단절은 1957년에 찾아왔다. 흐루쇼프가 주코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할 때, 코네프는 주코프 반대파의 편에 섰다. 1957년 11월 3일 『프라우다』에 기고한 글에서 코네프는 주코프를 '당의 신임을 정당화하지 못했고, 소련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모험주의적으로 이해한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고 공격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배신한 이 행위는 코네프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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