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3 ○ 암으로 사망

전선을 포위로 예술로 만든 원수, 평화 속에서는 정치군인

1945년 4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과 나란히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에 들어갔지만 제국의사당 게양의 영예는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그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5월 9일 프라하를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스텝·제2·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지휘하며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 비스와-오데르 작전, 베를린과 프라하 진격을 주도한 원수. 1944년 3월 붉은 군대 최초로 전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에 진입했고, 같은 해 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지상군 총사령관과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베리야 재판부를 이끌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고, 1957년 주코프 실각에 가담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주코프와의 관계: 구원과 경쟁, 배신

코네프의 군사적 운명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뗄 수 없이 얽혀 있었다. 1941년 10월 뱌지마 포위에서 서부전선군이 궤멸하자 몰로토프와 보로실로프가 이끄는 국방위원회 조사단이 코네프의 처벌을 위해 도착했을 때, 그를 군사재판과 총살에서 구한 것은 주코프였다.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코네프를 자신의 부사령관으로 남겨두자고 제안했고, 며칠 뒤 코네프를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두 사령관 사이에 평등한 우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두 사람은 베를린 진격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스탈린은 양쪽 전선군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베를린을 향한 '경주'를 사실상 부추겼다. 1945년 4월,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 전선군은 누가 먼저 독일 수도를 점령하느냐를 두고 다투었다. 코네프의 부대가 먼저 시내로 진입했지만, 스탈린은 승리의 상징, 제국의사당에 소비에트 깃발을 게양하는 영예를 주코프에게 주었다. 코네프는 대신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미군과 토르가우에서 조우하고 프라하로 진격했다.

전후에도 긴장은 계속되었다. 1946년 코네프는 주코프의 뒤를 이어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단절은 1957년에 찾아왔다. 흐루쇼프가 주코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축출할 때, 코네프는 주코프 반대파의 편에 섰다. 1957년 11월 3일 『프라우다』에 기고한 글에서 코네프는 주코프를 '당의 신임을 정당화하지 못했고, 소련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모험주의적으로 이해한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고 공격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배신한 이 행위는 코네프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과 1956년 헝가리

1955년 5월 코네프는 소련 국방부 제1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같은 달 14일 창설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 총사령관을 겸임했다. 이는 1953년 베리야 재판을 주재하며 흐루쇼프와 가까워진 결과였다. 그는 이 직책을 1960년 4월까지 유지했고, 뒤를 안드레이 그레치코가 이었다. 1956~1960년에는 국방부 제1차관직을 계속 맡았다.

총사령관으로서 코네프는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지휘했다. 11월 1일부터 임시 사령부를 헝가리 솔노크에 두고 작전을 지휘했으며, 부다페스트 최종 공격 계획인 '비흐리'(회오리)에 앞서 조약군 총사령관 명의의 제1호 명령을 헝가리 주둔 소련군에 하달해 11월 4일 05시 50분 공격 개시를 명령했다. 이 명령은 4일 라디오로 말레테르 팔 명의의 위장 방송으로 나가기도 했다. 작전은 11월 3~4일 밤에 시작되어 소련군 16개 사단이 국경을 넘었고, 병력 6만 명 이상과 주로 T-54로 구성된 전차 3천 대 이상이 동원됐다. 계획에는 라슈첸코 중장의 특수군단이 다뉴브 강 교량, 겔레르트 언덕, 부다 요새, 국회의사당, 코르빈 영화관 저항 거점, 코슈트 라디오 등을 장악하는 임무가 포함됐다. 소련군 사령부는 대규모 민간인 희생을 우려해 부다페스트 공중 폭격 계획을 취소했고, 코네프는 11월 6일까지 전투가 끝나리라 예상했으나 헝가리 측 저항이 거세 11월 12일까지 실질적 교전이 이어졌다. 작전 '비흐리' 자체는 국방부 장관 주코프의 지도 아래 작성되었고 11월 재진입의 총지휘도 주코프가 맡았다.

영어 위키백과는 코네프가 '헝가리 혁명과 프라하의 봄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고 서술하지만, 이는 1956년과 1968년을 혼동한 것이다. 코네프는 1960년 조약군 총사령관직을 그레치코에게 넘겼으므로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프라하의 봄 관련 서술은 근거가 없어 여기서 채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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