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페트로비치 세레브랴코프

Леонид Петрович Серебряков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레닌이 '뛰어난 노동자'라 부른 좌익 반대파 서기

그의 딸 조랴는 이렇게 회고했다: "레닌은 한 번 나의 아버지를 '뛰어난 노동자'라고 불렀습니다."

15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프라하 당 대회(1912) 대표를 지냈고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병사 봉기를 이끌었다. 중앙위원회 서기(1920–1921)와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내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으며, 이후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로 소련 철도·도로 행정을 담당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고 트로츠키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한 명으로 좌익 반대파를 이끌었으며, 1927년 제명·유배 후 1929년 복당했으나 결국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1937년 처형됐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과 죽음

세레브랴코프는 1936년 8월 17일 체포되어 1937년 1월 '평행적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 이른바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 17인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다. 비신스키 검사의 기소장은 그를 퍄타코프, 라데크, 소콜니코프와 함께 '예비 중심'(후에 '평행 중심'으로 불리게 된)의 일원으로 지목했으며, 니콜라이 예조프라브렌티 베리야에 대한 테러 미수 및 소련 철도에 대한 파괴 공작을 지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레브랴코프는 철도가 아닌 자동차·도로 운수 중앙관리국의 책임자였고, 이 엉터리 혐의는 조작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딸 조랴 세레브랴코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백하고 재판에 협조했다. 조랴는 당시 14세였고, 부모가 체포된 뒤 '인민의 적'의 자녀로서 체포·유형되었다. 세레브랴코프는 다른 많은 피고들과 달리 재판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결코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조랴는 회고했다. 1937년 1월 30일 사형 선고를 받고 2월 1일 총살되었다. 그의 집과 재산은 기소를 맡았던 비신스키가 차지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1986년 12월 4일 소련 대법원 총회의 결정으로 복권되었으며, 1987년 6월 10일 당적도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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