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1877년 9월 13일, 플레브나 세 차례 공격 실패 후 대공과 차르가 철수를 결정하자 군사회의에서 단독으로 포위 지속을 주장했다. 그의 설득으로 전선은 유지되었고, 두 달 후 플레브나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에서 20년간(1861–1881) 전쟁장관을 지내며 러시아 제국군의 근본적 재편을 주도했다. 1874년 전군 징병제를 도입해 25년 귀족 중심 징집을 전 계급 6년 복무로 대체했고, 15개 군관구 체제·사관학교 근대화·병사 기초교육으로 군대를 근대 상비군으로 전환시켰다. 형 니콜라이 밀류틴과 함께 대개혁 시대 자유주의 관료의 전형이었으나, 체르케스인 강제이주를 '적대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 옹호한 어두운 유산도 남겼다. 말년에는 러시아 제국 최후의 야전원수(1898)로 임명되었다.
1856년 모스크바 귀족들에게 한 연설: "현행 농노 소유 질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래로부터 저절로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1855년 크림전쟁의 패배 속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아래로부터 폐지되기를 기다리느니 위로부터 폐지하는 편이 낫다'며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고, 젬스트보 자치·사법 개혁·병역 개혁을 차례로 단행했다. '해방자 차르'로 불렸으나, 개혁은 급진파에게는 불충분했고 보수파에게는 지나쳤으며, 1866년 암살 미수 이후 반동으로 기울었다. 1881년 3월 13일, 로리스멜리코프 헌법 초안에 서명한 바로 그날, 인민의 의지 당원이 던진 폭탄에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대개혁 시대의 종말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으로 이어졌으며, 혁명적 테러를 러시아 정치의 결정적 방법으로 확립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1825아버지 니콜라이 1세 즉위로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다
1855차르 즉위; 크림전쟁 패배 속에 즉위
1856파리 조약으로 크림전쟁 종결; 대관식에서 정치범 사면
1861농노해방령 — 2,300만 농노 해방
1863–64폴란드 봉기 진압; 핀란드 의회 재소집
1864젬스트보(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
1874전계급 징병제 도입 — 군제 개혁
1877–78러시아-튀르크 전쟁; 불가리아 해방
1880로리스멜리코프에게 헌법 초안 위임
1881.3.13인민의 의지(나로드나야 볼랴) 소속 이그나치 그리네비츠키의 폭탄에 치명상, 겨울궁전에서 사망
스스로를 방어할 수도 통치할 수도 없는 약한 국가는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경멸당하고 끝장난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제정 러시아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언론인으로, 문예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와 일간지 『모스콥스키예 베도모스티』를 편집했다. 『루스키 베스트니크』에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주요 장편들이 연재되어 러시아 소설 황금기의 산실이 되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친영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러시아 민족주의로 선회하여 정부를 우파에서 압박했다. 포베도노스체프와 함께 알렉산드르 3세 반동적 반개혁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포베도노스체프의 말처럼 '카트코프의 참여 없이 중요한 조치가 취해지는 부처는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상세 이력 보기
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상세 이력 보기
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역사적 편지』로 인텔리겐치아의 '민중에 대한 빚'을 선언한 나로드니키 철학의 기초적 이론가
『러시아 혁명 청년에게』(1874): "러시아 사회의 재건은 인민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대중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우리 사상의 승리는 준비와 현 시점에서 가능한 것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포병장교이자 수학 교수로 출발하여 1860년대 혁명운동에 투신, 카라코조프 사건으로 유형된 볼로그다에서 『역사적 편지』(1868–69)를 집필했다. 이 저작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이 민중에 대한 지적 빚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870년대 '민중 속으로' 운동의 사상적 도화선이 되었다. 망명 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파리코뮌을 목격했으며, 제네바에서 『브페료트!』지를 발행하여 바쿠닌의 급진적 봉기론 및 트카초프의 음모적 전위당론과 논쟁하며 점진적 선전·교육 노선을 체계화했다. 후기에는 인민의지파와 협력하고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으며, '의식적 역사적 연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회학 이론을 정립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37–1842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수석 입학·졸업, 수학 재능으로 오스트로그라츠키의 최우수 제자로 꼽힘
1844–1866미하일롭스크 포병아카데미 수학 교수 — 1858년 대령 진급, 『실천철학 제문제 연구』(1860) 출간
1862–1866첫 번째 '토지와 자유' 참여, 체르니솁스키와 교류, 학생운동 지원 — 카라코조프 사건 후 체포
1867–1870볼로그다 유형 — 가명 '미르토프'로 『역사적 편지』(1868–69) 집필, 로파틴 도움으로 파리 탈출
1870–1872파리 망명 — 제1인터내셔널 가입, 파리코뮌 목격,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회견
1873–1877제네바·런던에서 『브페료트!』 잡지·신문 발행 — '라브리즘'(선전 중심 점진주의) 체계화, 바쿠닌·트카초프와 논쟁
1883–1886인민의지파와 협력, 티호미로프와 『인민의지 회보』 공동 편집
1889–1900제2인터내셔널에서 흐느착당 대표, 파리 사회주의 살롱 주재, 『사상사 주요 계기들』 저술 — 몽파르나스 묘지 안장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1891법무차관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1906.4–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1914.1–1916.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우리 진영의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부술 수 있는 것은 부숴야 한다. 타격을 견디는 것은 살아남을 자격이 있고, 산산조각 나는 것은 쓰레기다. 어쨌든 좌우로 내리쳐라, 거기서 해는 나오지 않는다.」 — 『19세기 스콜라철학』(1861)
러시아 허무주의(nihilism)의 중심 이론가이자 186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문학비평의 가장 날카로운 목소리.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와 함께 60년대 급진 지식인을 대표했으며, 『러시아어』(Русское слово)의 주필로서 미학과 관념론 철학을 공격하고 자연과학에 기초한 '현실주의'를 주창했다. 1862년 반정부 선언문 필화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어 4년 반 동안 주요 저작 대부분을 감옥에서 집필했고, 석방 2년 뒤 27세에 발트해에서 익사했다. '합리적 이기주의'와 '사고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으로 나로드니키 세대를 예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니코프, 파블로프의 과학관, 레닌의 지적 형성에 결정적 흔적을 남겼다.
「케넌 씨, 우리가 유형지에서 죽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손자들도 유형지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1885년 시베리아에서 조지 케넌에게.
귀족 출신으로 1861년 농노 해방에 참여한 뒤 1874년 '민중 속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1878년 '193인 재판'에서 정치범 최초의 여성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아 22년간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뎠으며, 조지 케넌의 르포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896년 석방 후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사회주의혁명당(SR)을 결성하고 전투조직 창설을 주도했으며, 1904년 미국 순회 강연으로 혁명 자금을 모금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상징적 원로로 귀환하여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을 맡았으나, 볼셰비키 집권에 반대해 내전 중 백군을 지지했다. 1918년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61농노 해방에 참여, 가문 영지의 농민들을 위한 학교·도서관·협동조합 설립
1873–1874키예프에서 급진적 지식인 공동체 결성; '민중 속으로' 운동 참여, 가짜 여권으로 농촌 선전 활동
1874–1878체포되어 페트로그라드 구치소 수감; '193인 재판'에서 유죄 판결, 카라 형무소 5년 카토르가형 — 여성 정치범 최초의 강제노역 선고
1878–1896카라 카토르가 복역 후 바르구진·셀렌긴스크 유형; 1881년 탈주 실패로 4년 추가 카토르가형; 22년간 수감·유형 생활, 조지 케넌과의 인터뷰로 국제적 명성
1896–1901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면으로 석방;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민스크에서 나로드니키 운동 재건, SR 결성 준비
1901–1903사회주의혁명당(SR) 공동 창립; 게르슈니와 함께 전국 비밀 조직 활동, 전투조직 창설 주도
1903–1905체포 위협으로 제네바 망명; 1904년 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대회 참석 후 미국 순회 강연 — 약 1만 달러 모금, '바부시카' 별명 획득
1905–1910러시아 귀환, 1905년 혁명 참여; 1908년 예브노 아제프의 배신으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10–1917시베리아 종신 유형 선고; 1913년 이르쿠츠크 탈주 시도 실패 후 야쿠츠크 독방 수감; 미국 여론 압력으로 이르쿠츠크 이감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케렌스키의 환영; 예비의회 최고령 의장; 볼셰비키 집권 반대, 체코슬로바크 군단 개입 호소
1918–1934블라디보스토크·일본 경유 미국 망명; 백군 지원 요청 활동; 파리 거쳐 체코슬로바키아 정착, 카르파티아 노동당 조직; 프라하 인근에서 사망
오스트리아 대사가 전쟁을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제 포크를 매듭으로 구부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대의 두세 개 군단에게 할 일이다.'
1881년 부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개혁이 혁명을 낳는다는 신념 아래 포베도노스체프의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젬스트보 약화·검열 강화·토지대장을 통한 농촌 통제 등 체계적 반개혁을 단행하며 '정교·전제·국민성'을 국시로 러시아화와 유대인 박해를 전개했다. 대외적으로는 큰 전쟁을 피해 '미로트보레츠(평화를 만드는 자)'로 불렸으나, 그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은 훗날 러시아를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이는 지정학적 틀이 되었다. 그가 재건해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물려준 전제 권력은 1905년과 1917년 혁명이 산산조각낼 구체제 그 자체였다.
「두바소프 자신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선언했다」: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인용
러일전쟁기의 제독이자 모스크바 총독으로,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 척의 기뢰정을 이끌고 터키 장갑함을 격침해 전역 첫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해군 장교였다. 1905년 11월 모스크바 총독에 임명되어 12월 무장봉기를 바리케이드 포격과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투입으로 진압했으며, 레닌이 인용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신뢰할 수 있는 병력은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사회혁명당의 두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부상으로 휴유증을 앓다 1912년 사망했다.
두르노보는 1914년 각서에서 경고했다: '러시아에서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며, 모든 혁명운동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변질될 것이다.'
표트르 두르노보는 러시아 제국 경찰국장(1884~1893)과 내무장관(1905~1906)을 지낸 보수 관료로,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해 '반혁명의 도살자'로 불렸다. 해군 장교에서 경찰 수장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녔으며, 내무장관 시절 비테 총리와 대립하다 함께 퇴진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린 각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제정의 붕괴와 사회혁명을 초래하리라 예측했고, 이 예언은 1917년 혁명으로 실현되었다.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 러일전쟁을 앞두고 세르게이 비테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이나 러시아 정교도로 성장한 플레베는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후 경찰국장으로 발탁되어 '인민의 의지'를 분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그는 농민 봉기를 무력 진압하고 지방 자치기관(젬스트보)을 옥죄었으며, 경찰 주도의 노동운동(주바토프시나)을 시험했다가 곧 폐기하는 등 일관된 강경 노선으로 체제를 방어했다. 1904년 7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은 스뱌토폴크-미르스키의 '신뢰의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 피의 일요일 직전의 정치적 전환을 촉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