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917

구체제와 그 도전자들 141명

제정 러시아를 떠받친 이들과 그 체제에 맞서 싸운 혁명가·사상가들 — 볼셰비키 권력 이전의 세계.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르노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Чер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3–1952 → 망명 · 뉴욕

사회혁명당의 창립자이자 수석 이론가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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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나로드니키 서클에서 활동, 1894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00농업사회주의동맹 공동 창립, 농민 대상 불법 출판물 배포
  • 1902사회혁명당(PSR) 공동 창립, 중앙위원, 기관지 《혁명 러시아》 편집자
  • 1905–07제1차 당 대회 주도, 제2두마 에스에르 원내대표, 혁명 진압 후 재망명
  • 1917.5–8임시정부 농업장관, 토지개혁 지연으로 농민 불만 고조
  • 1918.1제헌의회 의장 선출, 토지 사회화법 통과, 볼셰비키에 의해 의회 강제 해산
  • 1918–20반볼셰비키 투쟁, 사마라 코무치, 모스크바 지하 활동
  • 1920–52에스토니아·독일·프랑스·미국 망명, 회고록 《폭풍 전야》 집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20 ✕ 총살형

북극에서 총살형장까지, 제정의 마지막 무장 방어자

"파리에 있는 내 아내에게 내가 아들을 축복한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소?" — 1920년 2월 7일, 총살 집행대 앞에서 사령관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로 이름을 떨친 제정 러시아 해군 제독.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를 지휘했고 함대 사령관 중 유일하게 니콜라이 2세의 퇴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1월 옴스크 쿠데타로 '전러시아 최고 통치자'에 추대되어 시베리아 백군을 이끌었으나 1920년 2월 볼셰비키에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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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해군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00–1902러시아 북극 탐험대 수문학자 겸 지도제작자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구축함 세르디티 함장 → 뤼순 포대 지휘, 부상·포로
  • 1906콘스탄틴 메달 수상, 해군 참모본부 근무
  • 1914–1915발트함대 작전부장 → 기뢰부대 사령관,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 1916–1917흑해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 1918–1919전러시아 최고 통치자 겸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옴스크)
  • 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넘겨져 이르쿠츠크에서 총살

미하일 콘스탄티노비치 디테릭스

Михаил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Дитерихс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4–1937 ○ 망명 중 사망

콜차크의 참모장이자 로마노프 일가 수사 책임자, 백색 프리아무르의 마지막 통치자

“러시아는 오직 그리스도의 러시아일 수밖에 없다”: 1922년 8월, 젬스키 소보르에서 프리아무르 통치자 취임 연설.

콜차크 정권의 참모장을 지낸 제정 러시아 장군이자 독실한 군주주의자. 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작전 기획에 참여했고, 사로니카 전선의 러시아 원정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 동부전선을 지휘하고 콜차크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인 토볼스크 작전을 이끌었으며,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에 대한 소콜로프 수사를 감독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지막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해 로마노프 왕조 복위를 선언하고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에 취임했으나, 그해 10월 붉은 군대에 패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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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파제스키 군단 졸업, 근위포병여단 임관
  • 1900니콜라옙스크 참모대학 졸업
  • 1904–1905러일전쟁: 랴오양·사허·봉천 전투 참전, 중령 진급
  • 1914–1916제3군 참모장, 브루실로프 공세 기획 참여
  • 1916–1917사로니카 전선 러시아 원정군 사령관
  • 1919로마노프 일가 처형 수사 감독 → 동부전선 사령관, 콜차크 참모장, 토볼스크 공세 지휘
  • 1922프리아무르 젬스키 소보르 소집, 프리아무르 지방 통치자 → 패배 후 상하이 망명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극동부 의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댜예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рдя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4–1948 ○ 망명 중 사망

마르크스주의를 떠나 기독교 실존주의의 자유 철학을 정립한 러시아 사상가

체카의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한밤중 심문을 받으면서도 "볼셰비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당당히 맞섰다. 제르진스키는 그를 석방했다 — "보라,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 기독교 실존주의와 개인주의 철학을 정립한 러시아의 대표적 종교·정치 사상가다. 『이정표』(1909) 그룹의 주축으로서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자유 정신문화 아카데미'를 설립해 독립적인 철학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소련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과 파리에서 『러시아 이념』 『노예와 자유』 등 주요 저작을 집필했으며, 일곱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신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비창조된 자유' 개념은 전체주의 비판과 실존주의적 정치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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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학생 시위 참여로 체포·유배, 키예프대학 제적
  • 1901『사회철학에서의 주관주의와 개인주의』 출간, 관념론으로 전향
  • 1909『이정표』(Вехи) 공동 집필, 혁명적 지식인 비판
  • 1919–22자유 정신문화 아카데미 설립·주재
  • 1920모스크바대학 철학 교수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련 추방, 베를린 망명
  • 1925–40파리에서 잡지 『푸티』(Путь) 편집, 유럽 지성계와 교류
  • 1946『러시아 이념』 출간, 소련 시민권 획득

알렉산드르 알렉세예비치 반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еевич Ваннов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인 1874–1967 ○ 자연사

혁명가에서 일본 문학·철학 연구자로 변모한 사상가

그는 셰익스피어를 거쳐 마르크스에서 그리스도에게로 갔다고 자신의 사상적 전환을 표현했다.

알렉산드르 반놉스키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초기 조직가이자 일본 문학과 철학을 연구한 문학연구자였다. 그는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을 대표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에 참가했고, 이후 불법 인쇄소와 군사기술 활동으로 혁명운동을 조직했다. 1912년 당을 떠난 뒤에는 혁명적 이상과 그 결과를 기독교 사상으로 성찰하며 일본에서 러시아 문학과 일본 신화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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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모스크바 제국기술학교 학생, 혁명운동에 가담
  • 1898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1차 대회 대표, 모스크바 노동자 해방 투쟁 동맹 대표
  • 1898–1900체포와 솔비체고츠크 유형
  • 1903–1905‘의지’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리빈스크와 야로슬라블의 불법 인쇄소 운영
  • 1905–1906키예프 공병 봉기와 모스크바 12월 봉기 참여, 모스크바 군사기술국 활동
  • 1910s–1960s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 강의, 일본 신화와 셰익스피어 연구

표트르 이오아키모비치 팔친스키

Пётр Иоакимович Пальчи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소비에트 러시아인 1875–1929 ✕ 총살, 반혁명 사보타주

겨울궁전 방어를 지휘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기술관료

궁전이 함락되던 순간, 팔친스키는 돌격해 들어온 적위대 앞으로 뛰어들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의회와 소비에트 대표단이 오는 중이다"라고 외쳤다.

카잔 출신 광산 기술자로, 청년 시절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했으며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1917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 차관과 페트로그라드 총독을 거쳐, 10월 25일 키시킨의 보좌관으로서 겨울궁전 방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궁전 함락 직전 돌입해 온 볼셰비키 병력에게 각료들의 항복 결정을 전했다. 석방 뒤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하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 및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을 맡았으나, 1928년 샤흐티 재판의 후속 탄압 속에 체포되어 이듬해 '반혁명 사보타주'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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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광산 기술자, 도네츠 탄전 조사
  • 1902–1905골로빈스키 탄광 지배인, 이르쿠츠크
  • 1906–1913망명 (런던·토리노·로마), 토리노 세계박람회 광업부문 책임
  • 1915–1917중앙군수공업위원회 간부
  • 1917.03–10임시정부 통상·산업 차관, 페트로그라드 총독 (8–9월)
  • 1917.10.25겨울궁전 방어 책임자, 체포
  • 1918–1928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
  • 1928–1929체포, 사형 선고, 총살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코노발로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Конова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5–1949 ○ 자연사 · 파리

9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자본가, 차르 체제를 뒤흔든 진보블록의 설계자

1917년 5월 16일, 군산업위원회 대회 연설에서 그는 경고했다: "반국가적 경향이, 대중을 최면에 빠뜨리는 구호로 자신의 본질을 위장하며, 러시아를 거대한 걸음으로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최대 섬유 자본가 중 한 명으로, 1900년에 이미 9시간 노동제와 노동자 주택·학교·병원을 도입한 선구적 산업가였다. 진보당 창립자이자 4대 두마 부의장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진보블록을 조직하여 차르 체제에 맞선 의회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부 장관을 두 차례 지냈고, 마지막 내각에서는 케렌스키의 부총리로서 10월 혁명 당일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밀류코프의 『최신소식』 발행을 이끌며 러시아 망명 사회의 좌파 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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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5가업인 콘스탄틴 직물 공장 경영, 1900년 9시간 노동제·노동자 주택·학교·병원 도입
  • 1905–12통상산업당 공동 창립, 모스크바 증권거래소 부위원장
  • 1912–14진보당 공동 창립, 4대 두마 의원(코스트로마), 두마 부의장
  • 1915–17.2중앙군산업위원회 부의장, 진보블록 조직, 두마 임시위원회 위원
  • 1917.3–5임시정부 통상산업부 장관(1차), 노사 타협 추진하다 사임
  • 1917.9–10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 10월 25일 겨울궁전에서 각료 회의 주재 중 체포
  • 1918–40프랑스 망명, 『최신소식』 이사회 의장, 진보적 망명 단체 지도
  • 1941–49미국 거주 후 파리 귀환, 1949년 사망

로만 바츨라보비치 말리놉스키

Роман Вацлаво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폴란드 1876–1918 ✕ 총살형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오흐란카 비밀요원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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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이즈마일롭스키 근위연대 복무
  • 1906–1909상트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서기
  • 1910오흐란카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 포섭됨
  • 1912프라하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선출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분파 지도자
  • 1914.5강제 사임, 해외 도피
  • 1914–1918독일군 포로수용소 수감
  • 1918.11귀환, 베르호프니 트리부날 사형 판결, 총살

그리고리 니키티치 바쿨렌추크

Григорий Никитич Вакуленчук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1877–1905 ✕ 봉기 중 사살

장교의 총탄에 쓰러져 포툠킨 반란을 촉발하고, 장례는 오데사 혁명 시위가 된 수병

「지체하는 것은 혁명을 실패시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공동의 투쟁에 나서야 한다.」

볼린 지방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898년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포툠킨함의 포병 부사관이 되었다. 1903년 RSDLP에 입당하고 세바스토폴 수병 중앙위원회(첸트랄카) 결성을 주도한 선동가로, 전함에 붉은 기를 숨겨 두고 함대 전체 봉기를 준비했다. 1905년 6월 27일 썩은 고기에 항의하는 수병들 앞에서 기량롭스키 부함장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고, 이틀 뒤 오데사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정치 시위로 전환되어 포툠킨함이 육상 포격으로 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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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흑해함대 징집
  • 1900기뢰·포술학교 졸업, 전함 포툠킨 포수 배치
  • 1903RSDLP 입당, 세바스토폴 수병 첸트랄카 결성 참여
  • 1905.06.27포툠킨 반란 중 기량롭스키 부함장에 치명상, 함상에서 사망

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

Иван Платонович Каля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7–1905 ✕ 교수형 (, 슐리셀부르크)

폭탄을 든 혁명 시인, 마차 속 가족을 보고 폭탄을 거둔 '윤리적 테러리스트'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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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 1899학생 파업 주도로 예카테리노슬라프 유배
  • 1902베를린에서 혁명 문헌 운반 중 체포, 러시아로 송환되어 야로슬라블 유배
  • 1903제네바에서 SR 전투조직 가입 (아제프 휘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작전 감시팀 참여
  • 1905.2.4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세르게이 대공 폭탄 암살
  • 1905.4.5원로원 특별재판에서 전제정치 고발 연설, 사형 선고
  • 1905.5.23슐리셀부르크 요새 교수형 집행

게오르기 스테파노비치 흐루스탈료프-노사리

Георгий Степанович Носарь
반혁명 세력 러시아 러시아 1877–1919 ✕ 혁명위원회에 의해 처형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무소속 노동 변호사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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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11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 14일 만장일치 선출
  • 1905.11–1906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시베리아 탈출, 런던 당대회 참석 후 망명
  • 1909–1914RSDLP 탈당, 파리에서 신디칼리즘·출판 활동
  • 1915–1917귀국 후 체포, 3년 카토르가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8–1919페레야슬라프 공화국 지도자, 반볼셰비키 활동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엥겔하르트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нгельгардт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877–1962 ○ 자연사, 리가에서

수비대를 막사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으로 명령 제1호를 촉발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1916년 파리에서 옛 동창에게 "혁명적인 수단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좌파'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으로, 파제스키 군단과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졸업한 참모장교였으며,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건강 문제로 제대했다가 1912년 제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2월 28일 밤 병사들에게 막사 복귀와 장교 복종을 명령하는 포고문을 기초해 로댠코 명의로 발표했고, 이 명령은 수비대를 공포에 빠뜨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급히 채택하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첫 혁명 사령관을 지냈고, 10월 이후 백군 선전부에서 활동했으며, 프랑스와 라트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소련에 체포되어 중앙아시아 유형을 거친 뒤 리가에서 통역사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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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3파제스키 군단·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근위 울란 연대 복무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1만주군 사령부 근무
  • 1908건강 문제로 제대, 모길료프 현 지방 자치 활동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원, 10월당·진보블록
  • 1917.02두마 군사위원회 위원장, 페트로그라드 혁명 사령관
  • 1918–1919백군 의용군 대표부 정치부장(키예프·오데사), 남러시아군 선전부
  • 1920–1940프랑스·라트비아 망명, 택시 기사·경마 조련사
  • 1940–1962소련 체포·호레즘 유형(1946년까지), 이후 리가에서 통역사

보그단 미르자자노비치 크누냔츠

Богдан Мирзаджанович Кнунянц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1 ○ 옥사

제2차 대회의 이스크라 다수파, 감옥에서 스러진 캅카스 볼셰비키 선구자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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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 1907–1910바쿠 지하 활동
  • 1910.09체포, 바일로프 감옥 수감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8–1918 ✕ 체카에 피살

하루 동안의 차르가 될 수 있었으나 제헌의회에 양보한 마지막 로마노프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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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3기병 총감
  • 1917.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 1918.3–6페름 유형, 체카에 납치·살해됨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브란겔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8–1928 ○ 급사 · 독살 의혹

'흑남작', 이미 진 전쟁을 넘겨받아 개혁으로 돌파를 시도한 백군 최후의 총사령관

"주여, 군대를 구원하소서" — 1928년 4월 브뤼셀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으며 남긴 마지막 말.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광산 기사로 출발했으나, 러일전쟁에 지원 입대하며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카우셴 전투의 기병 돌격을 이끌어 전쟁 최초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자 중 한 명이 되었고, 1917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0년 데니킨의 뒤를 이어 남러시아 백군 총사령관이 되어 '러시아군'으로 재편하고, 농민의 토지 점유를 인정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적군에 패배한 뒤 14만 5천 명 이상을 크림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대규모 대피 작전을 조직했으며,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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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광산기사 졸업, 기마친위대 지원입대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아르군 코사크 연대 복무, 훈장 수훈
  • 1910–1914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기마친위대 중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4카우셴 전투에서 기병 돌격 지휘,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5–1917제1네르친스크 코사크 연대장 → 소장, 제7기병사단장 → 통합기병군단장
  • 1918–1919의용군 입대, 제1기병사단장 → 캅카스 의용군 사령관, 차리친 점령
  • 1920남러시아군 총사령관, '러시아군'으로 재편, 크림 철수 작전
  • 1924–1928러시아 전군연합(ROVS) 창설, 망명 백군 운동 지도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압크센티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Авксенть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8–1943 ○ 콜차크에 축출, 망명 중 사망

SR당 창건자이자 콜차크에게 전복된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마지막 의장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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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SR 분파 지도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07SR 중앙위원 선출; 오브도르스크 유형 후 해외 탈출
  • 1907–1917파리 망명 중 SR 기관지 《즈나먀 트루다》 편집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7전러시아 민주회의·예비의회(임시평의회) 의장
  • 1918우파 국가회의 의장,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수반
  • 1918–1940파리 망명, 프리메이슨 활동, 《소브레멘니예 자피스키》 발행
  • 1940–1943뉴욕에서 잡지 《자 스보보두》 발행

바실리 비탈리예비치 슐긴

Василий Витальевич Шульгин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무국적) 러시아 1878–1976 ○ 자연사

차르의 퇴위를 직접 받아내고 백군 이데올로그가 된 두마의 군주제 보수주의자

프스코프 역의 차르 전용 열차에서, 나흘째 면도도 씻지도 않은 슐긴에게 황제의 측근이 말했다: '이 피자크 차림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오.'

바실리 슐긴은 러시아 제국 말기 두마(II·III·IV대)의 핵심 보수정치인이자 《키예블랴닌》 편집자로, 강력한 러시아 민족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했다. 1917년 3월 알렉산드르 구치코프와 함께 프스코프로 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직접 받아냈으나, 혁명의 파국을 막지는 못했다. 남북전쟁기 백군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으며, 1944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12년간 수감되었다. 1956년 사면 후 소련에 남아 회고록을 집필하고 1965년 다큐멘터리 《역사의 심판》에 출연하여, 패배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구체제의 산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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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II·III·IV대 두마 의원 (볼린현)
  • 1913–1917《키예블랴닌》 편집자
  • 1915진보블록 공동창설, '진보적 민족주의자' 그룹 지도
  • 1917.3구치코프와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8–1920백군 운동 선전가·이데올로그, 《로시야》·《벨리카야 로시야》 편집
  • 1920–1944유고슬라비아 망명, 회고록 《날들》·《삼도시》 집필
  • 1947–1956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25년형 수감 (12년 복역)
  • 1956–1976사면 후 블라디미르 거주, 《레닌의 실험》 집필, 영화 《역사의 심판》 출연

아파나시 니콜라예비치 마튜셴코

Афанасий Николаевич Матюшенко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79–1907 ✕ 교수형

포툠킨 반란을 지휘하고 루마니아로 망명한 흑해함대 병참장

포툠킨이 콘스탄차에 입항했을 때 라코프스키를 맞으며 말했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하르코프 근교의 전농노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구두 수선을 시작했다. 1905년 전함 포툠킨에서 썩은 고기에 항의하다 무장봉기로 전환해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일간 붉은 기 아래 흑해를 항해하며 오데사에서 혁명 접합을 시도했다. 루마니아 망명 후 스위스, 미국, 프랑스를 전전하며 레닌과 고리키를 만났으나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았고,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왔다가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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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징집, 흑해함대 복무
  • 1902전함 포툠킨 기뢰 병참장
  • 1905.06포툠킨 반란 주도, 함상위원회 의장
  • 1905.06–1907.06루마니아·스위스·미국·프랑스 망명
  • 1907.06러시아 귀국, 체포
  • 1907.11.02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 집행

알렉산드르 일리치 두토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Дут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 1879–1921 ✕ 체카 요원에 암살

오렌부르크 카자크를 이끌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투르키스탄 사이를 차단한 백군 아타만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고 있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아타만이자 백군 중장. 1917년 11월 소비에트 권력을 불인정한 최초의 군사 지도자로서 오렌부르크-타슈켄트 철도를 차단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20개월간 갈라놓았다. 콜차크 휘하에서 오렌부르크 독립군을 지휘했고, 패배 후 '기아 행군'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1921년 체카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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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콜라이 기병학교 졸업,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배속
  • 1908총참모부 아카데미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지휘
  • 1917.09오렌부르크 카자크군 아타만에 선출
  • 1917.11볼셰비키 권력 불인정, 무장봉기 주도
  • 1918–1919콜차크 휘하 오렌부르크 독립군 사령관
  • 1919–1920악토베 패배 후 '기아 행군', 중국 망명

지노비 야코블레비치 리트빈-세도이

Зиновий Яковлевич Литвин-Седо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계 1879–1947 ○ 자연사

프레냐 노동자 전투부대의 조직자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홀로다.”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공장 노동과 체포·유배를 거치며 혁명운동의 실천가가 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프레냐 전투부대의 지휘를 맡아 바리케이드 방어와 무장 노동자 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패배의 조건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봉기를 결정하고 싸웠다는 점을 강조한 회고를 남겼다. 1917년 뒤에는 소비에트 국가의 교통·교육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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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혁명운동에 참가
  • 189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
  • 1905모스크바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
  • 1906스베아보르그 수병 봉기에 참여
  • 1917–1918키예프 소비에트와 항공부대 당 조직에서 활동
  • 1919–1921군사교통 중앙관리국과 교통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1939모스크바 12월 봉기 기념 면방직 기술학교 교장
  • 1939–1947연금 생활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알렉신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Алексинский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79–1967 ○ 망명 중 자연사

혁명적 국제주의에서 전시 애국주의로 선회한 논객

1917년 7월, 그는 《Живое слово》에 레닌의 독일 간첩설 자료를 실었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는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가이자 제2국가두마 의원으로 부상했지만, 전쟁과 혁명의 압박 속에서 사회애국주의로 급선회했다. 1917년 그는 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에 합류해 볼셰비키를 공격했고, 7월에는 에르몰렌코의 불충분한 증언을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주장으로 포장해 대중 언론에 올렸다. 이 폭로는 군대와 소비에트 안에서 반볼셰비키 정치를 강화했지만, 그가 혁명가에서 반볼셰비키 망명자로 바뀐 경로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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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모스크바대학교 학생, 학생운동 참가
  • 1905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선동가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볼셰비키 출판물 필자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사회민주파 볼셰비키계 연설자
  • 1909–1914좌익 볼셰비키계 《전진》 그룹 지도자
  • 1914–1917전쟁 지지 사회민주주의자, 파리 《호소》 공동 편집자
  • 1917플레하노프의 《통일》 그룹 지도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
  • 1919–1967러시아 망명 정치가·논객, 파리 러시아 평의회 의장

미하일 이사코비치 리베르

Михаил Исаакович Либер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계 유대인 1880–1937 ✕ 총살, 1958년 사후 복권

혁명을 지키려다 혁명의 방향과 충돌한 멘셰비키

1917년 6월 위기 뒤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며 혁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미하일 리베르는 본명 미하일 골드만으로, 유대인 노동운동의 조직인 분트에서 성장해 멘셰비키의 주요 지도자가 된 혁명가였다. 그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분트의 조직 자율성을 주장했고, 1917년에는 혁명적 방어주의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임시정부와의 연립을 옹호했으며, 6월 10일 시위 위기 뒤 볼셰비키에 대한 강경 조치를 요구하는 다수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0월 봉기와 볼셰비키와의 협상에 반대한 그는 이후 체포와 유배를 거듭했고, 1937년 처형된 뒤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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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
  • 1897–1902분트 창립 세대의 활동가, 1902년 중앙위원
  • 1903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 분트 대표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노동자대표 집행위원
  • 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
  • 1917.02–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분트 우파 지도자
  • 1917.06–10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상임위원회 위원·부의장
  • 1917.09–10러시아 공화국 임시평의회, 예비의회 위원
  • 1922–1923멘셰비키 중앙위원회 국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젠지노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ензин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0–1953 ○ 자연사

망명과 기록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킨 사회혁명가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간부이자 언론인, 북극 시베리아를 기록한 민족지학자였다. 그는 1905년 혁명부터 1917년 혁명까지 반복된 체포와 유배를 겪었고, 유배지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를 책으로 남겼다. 1918년 사마라의 제헌의회 의원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했으며, 11월 옴스크 쿠데타 때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파리와 뉴욕의 사회주의 망명 언론에서 활동하며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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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사회혁명당 입당
  • 1905–1906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 활동, 모스크바 봉기 참여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
  • 1917–1918제헌의회 의원, 사마라 제헌의회 의원위원회 위원
  • 1918우파 디렉토리 위원
  • 1918–1919옴스크 쿠데타 뒤 체포·중국 추방
  • 1919–1939유럽 사회주의 망명 언론 활동
  • 1940–1953뉴욕에서 망명 언론인·회고록 작가

이라클리 게오르기예비치 체레텔리

ირაკლი წერეთელი
비소련 혁명가 그루지야 그루지야 1881–1959 ○ 자연사 · 뉴욕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의 설계자,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의 상대역

1917년 6월 4일,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체레텔리가 "권력을 우리 손에 달라고 말하는 정당은 러시아에 없다"고 선언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닌이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루지야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를 주창하고 임시정부 내무장관을 지냈다. 레닌의 유명한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 반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10월혁명 후 그루지야 독립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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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2모스크바대 법학부 입학, 학생운동 지도자로 체포·시베리아 유형
  • 1903–1906RSDLP 입당, 멘셰비키파 합류. 주간지 『크발리』 주필. 베를린 수학 후 1906년 귀국
  • 1907제2두마 의원(쿠타이시 현),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두마 해산 후 5년 강제노동형, 시베리아 유형
  • 1915–1917.2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 주도, 『시베리아 잡지』 편집. 이르쿠츠크 혁명위원회 참여
  • 1917.3–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혁명적 수호주의 노선 주도
  • 1917.5–8임시정부 체신장관(5~7월), 내무장관 겸임(7~8월)
  • 1918–1921그루지야 독립선언 서명, 제헌의회 의원, 파리 강화회의 대표
  • 1921–1959프랑스 망명, 제2인터내셔널 집행위원. 1940년 미국 이주, 1959년 뉴욕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