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917

구체제와 그 도전자들 141명

제정 러시아를 떠받친 이들과 그 체제에 맞서 싸운 혁명가·사상가들 — 볼셰비키 권력 이전의 세계.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1–1970 → 망명 · 뉴욕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려 나간 웅변가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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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7두마 의원(트루도비키), 정치재판 변호사로 명성
  • 1917.3임시정부 법무장관, 정치범 사면, 사형 폐지
  • 1917.5육해군장관, 6월 공세 강행과 실패
  • 1917.7–10총리, 코르닐로프 사건, 10월에 실각
  • 1918–70파리·뉴욕 망명, 저술과 강연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주린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зур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82–1906 ✕ 교수형 (군법회의, )

모스크바 무장봉기 전투지휘자이자 최대주의자당의 창립 지도자

타간카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긴 마지막 말: "어머니께 내가 평온하게 죽었다고 전해주게."

사회주의혁명당(PSR)에서 분리된 급진좌파 '최대주의자'(SSRM)의 창립 지도자 중 한 명으로, 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당시 카잔 철도의 전투부대를 지휘했으며, 1906년 3월 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에서 87만 5천 루블을 탈취한 유명한 '엑스'를 주도했다. 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학생으로 1904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월 선언 사면으로 풀려나 즉시 무장투쟁에 복귀했으며, PSR의 단계적 혁명론을 거부하고 전면적 사회화와 '노동자 공화국'을 요구한 최대주의자들의 실천적 핵심이었다. 1906년 8월 체포 시 무장 저항하다 중상을 입고 며칠 만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24세의 나이로 타간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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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4모스크바 대학 자연과학부 입학, 사회주의혁명당(PSR) 입당
  • 1904모스크바 선전활동으로 체포, 7년형 선고
  • 1905.1010월 선언 사면으로 석방
  • 1905.12모스크바 무장봉기 — 카잔 철도 전투부대 지휘, 치스티예 프루디·프레스냐 전투 참가
  • 1906.3모스크바 상호신용조합 탈취 작전 지휘 (87만 5천 루블)
  • 1906사회주의혁명당-최대주의자 동맹(SSRM) 공동 창립
  • 1906.8–9아크바리움 정원 인근에서 체포 시 무장저항·중상, 군법회의 사형선고, 타간카 감옥 교수형

아브람 라파일로비치 고츠

Абрам Рафаилович Гоц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2–1940 ○ 1922년 사형, 수용소 사망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를 이끈 지도자, 4월 위기에 마리인스키 궁전으로 파견된 혁명적 방어주의자

수하노프는 그를 두고 '탁월한 기술자, 조직가, 행정가일지는 몰라도 정치가는 전혀 아니었다'고 평했다.

모스크바의 부유한 유대계 차 상인 집안 출신으로, 형 미하일을 따라 사회혁명당에 합류해 1906년 전투조직에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의 실질적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4월 위기 때 스코벨레프와 함께 마리인스키 궁전 앞 시위 병사들을 설득하러 파견되었으나 실패했고, 6월 VTsIK 의장에 올랐다. 10월 혁명 후 '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으로 무장 저항을 이끌었고, 1922년 쇼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거듭하다 1940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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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R 전투조직 가입, 테러 계획 참여
  • 1907체포, 8년 카토르가(중노동형) 선고
  • 1915–1917이르쿠츠크주 우솔리예 유형지 정착, '시베리아 치머발트파' 활동
  • 1917.03–0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SR 분파 지도자, 집행위원
  • 1917.06–10제1차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VTsIK) 의장
  • 1917.10–1918조국과 혁명 구원 위원회 의장, 융커 봉기 지휘
  • 1918–1920내전기 SR 무장분대 조직, 볼셰비키·백군 양면 전선
  • 1922SR 재판 주피고인, 사형 선고 후 감형
  • 1925–1937심비르스크(울리야놉스크) 유형, 경제계획 업무
  • 1937–1940대숙청 중 체포, 25년형 선고, 크라스노야르스크 라게리에서 사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시미트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Шмит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83–1907 ✕ 부티르카 옥중 의문사

프레스냐 봉기의 심장이 된 가구공장의 젊은 상속인

체포된 시미트는 세묘놉스키 연대 진영으로 끌려가 벽 앞에 총살 위협을 받았고, 며칠 밤잠 못 이루는 심문 끝에 마침내 자백했다.

모스크바 가구공장을 물려받은 청년 사업가로, 1905년 혁명에 투신해 공장을 노동자 전투대의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바꾸고 프레스냐 무장봉기의 물적 거점을 제공했다. 9시간 노동제와 임금 인상을 도입했으며,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을 쾌척했다. 12월 봉기 진압 뒤 체포되어 고문 끝에 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했으며, 유산 약 28만 루블은 볼셰비키의 핵심 재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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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부친 사망, 가구공장 상속
  • 190421세로 공장 경영권 인수
  • 19059시간 노동제·임금 인상 도입, RSDRP에 무장 자금 2만 루블 기부, 공장을 혁명 거점으로 전환
  • 1905.12프레스냐 무장봉기: 공장이 무기고·병원·시체안치소로 기능, 세묘놉스키 연대 포격으로 파괴됨
  • 1905.12.18체포되어 고문과 협박 받음
  • 1907.02.13부티르카 감옥에서 의문사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

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스웨덴계) 1883–1920 ○ 동상 · 폐렴 사망

백군 최고의 '병사들의 장군', 얼음 행군을 이끌다 사라진 카잔의 정복자

“병사들에게 전하라, 내가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죽는 것이 그 증거라고.”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에 참여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맞서 코무치 인민군 소규모 의용대를 이끌고 기동전으로 카잔을 점령, 적군의 동부전선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으며 '작은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콜차크 휘하에서 동부전선 총사령관이 된 후, 붕괴하는 전선을 수습하며 바이칼까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을 이끌었고, 도중 동상과 폐렴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관은 부하들의 손에 끝까지 운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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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니콜라옙스크 기병학교 졸업, 제54용기병연대 코르네트
  • 1913니콜라옙스크 참모아카데미 1등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 참여, 중령
  • 1918.6코무치 인민군 제1의용대 지휘관
  • 1918.7–8시즈란·심비르스크·카잔 점령, 대령 진급
  • 1918.11소장 진급
  • 1919제1볼가군단장 → 볼가집단사령관 → 제3군사령관 (콜차크군)
  • 1919.12–1920.1동부전선 총사령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 지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일리인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Ильин
이론가 러시아 제국 (1923년 박탈, 이후 무국적·스위스) 러시아 1883–1954 ○ 망명 중 자연사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백군 이민 사상으로 전향한 헤겔주의 법철학자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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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사립강사
  • 1918모스크바대학 법학 교수, 헤겔 연구로 석·박사 학위 취득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에서 추방, 베를린 망명
  • 1923–1934베를린 러시아 학술연구소 교수
  • 1927–1930『루스키 콜로콜』(러시아의 종) 편집자·발행인
  • 1938나치 독일 떠나 스위스 정착, 라흐마니노프 재정 지원
  • 1948–1954사후 『우리의 과업』으로 묶인 정치 에세이 집필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Виктор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5–1920 ✕ 총살형

콜차크 독재를 설계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선 카데트 정치인

1919년 9월 22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녹스 장군이 내게 왔다. 처칠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지원하라고 훈령했다.」 붕괴 직전의 정권 내막을 기록한 총리의 목소리다.

제정 러시아의 카데트당 소속 두마 의원으로, 1918년 11월 옴스크에서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차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붕괴 직전의 백색 정부를 이끌었고, 정권의 유일한 충성파 정치인으로서 최후까지 콜차크 곁에 남았다. 1920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정치중앙에 넘겨졌고, 2월 7일 새벽 레닌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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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카데트당 소속 제4대 국가두마 의원 (톰스크현)
  • 1914–1917제3 시베리아 위생·급식대 대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02–05임시정부 크론시타트 항구 사령관 겸 정부위원
  • 1918.08–11시베리아에서 군사독재 수립 운동 주도, 옴스크 쿠데타 조직
  • 1918.12–1919.05콜차크 정부 경찰국장 → 내무차관
  • 1919.05–11콜차크 정부 내무장관
  • 1919.11–1920.01각료회의 의장 (총리)
  • 1920.01–02체코군단에 넘겨져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수감, 총살

미하일 이바노비치 스코벨레프

Матвей Иванович Скобеле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85–1938 ✕ 총살 · 모스크바

4월 위기 속 군중을 달래러 보내진 멘셰비키 노동장관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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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바쿠 노동자 파업 지도
  • 1906–1912빈 망명,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 빈 공과대학 졸업(1912)
  • 1912–1917제4두마 의원(자캅카스 러시아인 대표), 멘셰비키파
  • 1917.2–5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 집행위원
  • 1917.5–9임시정부 노동장관, VTsIK 부의장(6월~)
  • 1919–1920바쿠 거주, 적군 식량 지원 활동
  • 1920–1925프랑스·영국 망명, 비공식 소련 무역대표
  • 1925–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국가계획위원회·전연방라디오위원회 근무

막심 막시밀리아노비치 필로넨코

Максимилиан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Филоненко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85–1960 ○ 망명 중 자연사

혁명 정부의 질서 회복을 밀어붙인 에스에르 관료

막심 필로넨코는 변호사 출신의 에스에르 정치인으로, 1917년 혁명 정부가 군대의 붕괴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압박한 인물이다. 전선과 최고사령부의 정부 комиссар로서 코르닐로프사빈코프와 협력해 사형제 부활과 군율 강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7월의 억압적 전환을 상징했다.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했지만 결국 코르닐로프 봉기 국면에는 케렌스키 편에 섰다. 10월 이후에는 반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고, 망명 뒤에는 변호사와 법학 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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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조선학과 수학
  • 1914제1차 세계대전 참전, 근위 척탄병연대 소위
  • 1917.06제8군 임시정부 комиссар
  • 1917.07–08코르닐로프 휘하 최고사령관부 정부 комиссар
  • 1917.08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의 중재 시도, 이후 케렌스키 지지
  • 1917–1918페트로그라드 반볼셰비키 지하조직 참여
  • 1918–1919아르한겔스크 북부 지역 임시정부의 시의원
  • 1933–1940브뤼셀대학교 로마법 교수

블라디미르 사벨리예비치 보이트인스키

Владимир Савельевич Войти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계 1885–1960 ○ 자연사

혁명과 경제학 사이에서 방향을 바꾼 사회민주주의자

북부전선에서 병사들이 더는 공세를 원하지 않는 현실을 케렌스키에게 보고했다.

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는 러시아 혁명가이자 경제학자로, 노동운동과 시장 이론을 함께 탐구했다. 1905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활동과 시베리아 유형을 거쳐 1917년에는 멘셰비키로 전향해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을 모색했다. 북부전선 위원으로서 6월 공세 준비에 관여했지만, 병사들의 전쟁 피로와 명령 거부를 직접 마주하며 혁명적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10월 이후 망명한 그는 국제 노동·경제 연구자로 활동하며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길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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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위원회 활동, 실업자 소비에트 조직
  • 1908–1912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체포, 강제노동형과 시베리아 유형
  • 1914–1916시베리아 짐머발트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활동
  • 1917.04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위원회 기관지 편집진
  • 1917.06–10북부전선 위원, 6월 공세 준비와 전선 정치 업무 담당
  • 1918–1935그루지야 민주공화국 대표·유럽 사회주의 언론인, 국제노동기구 활동
  • 1935–1960미국 인구조사국·사회보장위원회 등에서 경제·노동 연구
  • 1960워싱턴에서 사망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

Николай Степанович Гумилёв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6–1921 ✕ 체카에 의해 처형

아크메이즘을 창시하고 체카의 총에 쓰러진 실버 에이지의 시인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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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첫 시집 『정복자들의 길』 출간
  • 1908『낭만의 꽃』 출간; 파리서 잡지 『시리우스』 발행
  • 1909–1910잡지 『아폴론』 공동 창간; 첫 아프리카 탐험
  • 1911–1912고로데츠키와 『시인들의 길드』 결성, 아크메이즘 선언; 『진주』와 『낯선 하늘』 출간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기병으로 자원 입대, 성 게오르기 훈장 2회 수훈
  • 1918–1920『모닥불』·『천막』 출간; 고리키의 『세계문학』 출판사 근무; 전러시아 시인연합 의장
  • 1921『불기둥』 출간; 8월 3일 체포, 8월 26일 처형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Роман Фёдорович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발트 독일인 (러시아 제국) 1886–1921 ✕ 총살형

몽골을 해방하고 칭기즈 칸 제국의 부활을 꿈꾼 백군의 광신적 군벌

나의 이름은 증오와 공포에 둘러싸여 있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신화인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의 발트 독일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믿은 백군 장군. 시베리아에서 그리고리 세묘노프 휘하의 아시아 기병사단을 이끌며 붉은 군대와 싸우다 1920년 몽골로 넘어갔다. 1921년 2월 중국 점령군을 몰아내고 복드 칸의 신정 군주제를 복원시켜 '다르한 호쇼이 친 왕'의 작위를 받았으나, 유대인과 볼셰비키 동조자에 대한 잔혹한 숙청으로 공포 통치를 펼쳤다. 같은 해 8월 몽골인 부대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넘겨진 뒤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6시간의 재판 끝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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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아르군 코사크 연대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5회 부상,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1918그리고리 세묘노프와 함께 특별만주부대 결성
  • 1918.11소장 진급, 다우리아에 아시아 기병사단 창설
  • 1921.02우르가 점령, 중국군 축출, 복드 칸 복위
  • 1921.02복드 칸으로부터 '다르한 호쇼이 친 왕' 작위 수여
  • 1921.08몽골인 부대에 체포되어 붉은 군대에 인도됨
  • 1921.09.15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공개 재판 후 총살형

피티림 알렉산드로비치 소로킨

Питир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рокин
비소련 혁명가 미국 (1930년 귀화) 러시아 1889–1968 ○ 망명 중 자연사

차르와 볼셰비키 모두에게 투옥된 에스에르 지도자에서 하버드 사회학과 창설자로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에스에르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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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에스에르당 입당, 키네슈마에서 체포·투옥
  • 1909–1914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 졸업, 범죄학 전공
  • 1917에스에르 지도자, 케렌스키 총리 비서, 제헌의회 의원
  • 1919–1922페트로그라드대 교수, 러시아 최초 사회학과 창설
  • 1922소비에트에서 추방 ('철학의 배')
  • 1924–1930미네소타대 교수
  • 1930–1959하버드대 교수, 사회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65미국사회학회 회장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우스트랴로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Устрял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국가볼셰비즘을 창시하고 볼셰비키의 국가주의적 전환을 예견한 망명 법학자

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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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 1925『혁명의 기치 아래』 출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지노비예프의 공개 논쟁
  • 1925–1934КВЖД 교육부장(1925–28), 도서관장(1928–34); 중국학 서지 편찬
  • 1935–1937귀국,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 1937년 6월 체포, 9월 14일 총살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세묘노프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90–1946 ✕ 교수형

일본군에 기대어 자바이칼을 지배하고 콜차크와 맞선 백군 아타만

「…태동하는 내전의 조건에서, 모든 온정과 인간애는 버려져야 한다」: 회고록 『나 자신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백색 테러 정책을 정당화한 말.

자바이칼 코사크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유능한 기병 장교였다. 1917년 말 특별만주부대(OMO)를 조직해 시베리아 내전의 첫 전선을 열었고, 일본군의 군사·재정 지원을 등에 업고 자바이칼 지역을 장악해 '동부 변경' 정부를 수립했다. 콜차크의 권위를 거부하며 독자 세력화했고, 그의 통치 아래 자행된 대규모 백색 테러는 미군 정보 당국의 조사 대상이 될 정도로 잔혹했다. 1920년 패주 후에도 일본의 후원 아래 만주에서 반소 활동을 이어가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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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1오렌부르크 코사크 사관학교 졸업,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4급·게오르기 무기 수훈, 에사울 진급
  • 1917.12–1918특별만주부대(OMO) 조직, 자바이칼에서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18–1919치타 점령, 자바이칼 코사크 군 아타만 선출, 콜차크와 충돌 후 화해
  • 1920.1–10러시아 동부 변경 전권 통치자, 극동군 편성 → 10월 패주, 비행기로 만주 도피
  • 1921–1945일본·만주 망명, 일본군과 협력, BREM 의장(1943–1945)
  • 1945.8–1946.8소련군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교수형

아나톨리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Анатолий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제정·백색진영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891–1938 ✕ 총살, 1989년 복권

27세에 장군이 된 백군 지휘관, 야쿠티야 원정으로 내전을 끝내다

「나는 내 정치적 신념을 모른다. 나는 당파적이지 않다. 나는 인민에게 선과 행복을, 러시아 인민이 친절하고 평화로우며 강하고 위대한 인민이 되길 바란다」: 야쿠티야 원정 중 일기에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의 최연소 장군 중 하나로, 27세에 소장 계급을 받고 '시베리아의 수보로프'로 불렸다. 1918년 12월 페름을 함락시켜 2만 명의 붉은군대 포로를 석방했으며, 콜차크 휘하에서 제1시베리아군을 지휘했다. 내전이 패배로 기운 후에도 하얼빈에서 목수와 마부로 생계를 이어가다 1922년 9월 자원대를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에 나섰으며, 1923년 6월 아얀에서의 항복으로 끝난 이 원정은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대숙청기인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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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 진급,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수훈
  • 1918.05–08톰스크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제1중앙시베리아군단 지휘
  • 1918.09–12소장 진급(27세), 페름 함락, '시베리아의 수보로프' 별칭
  • 1919중장 진급, 제1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0–1922하얼빈 망명, 목수·마부로 생계
  • 1922.09–1923.06시베리아 의용대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 아얀에서 항복
  • 1924–1938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1936년 석방, 1938년 대숙청으로 총살

아나톨리 그리고리예비치 젤레즈냐코프

Анато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Железняков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95–1919 ✕ 전사 · 24세

"경호대는 피곤하다" 한마디로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아나키스트 수병: 24세에 전사한 혁명의 아이콘

1918년 1월 5일 새벽 4시, 타브리다궁전. "경호대는 피곤하다. 회의를 중지하고 전원 퇴장하라." 이 한마디로 13시간 동안 이어진 제헌의회는 영원히 문을 닫았다.

발트함대 수병 출신 아나키스트 혁명가. 1917년 10월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했고, 1918년 1월 5일 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으로서 "경호대는 피곤하다"는 한마디로 러시아 제헌의회를 해산시켜 혁명의 신화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기관총 사수와 장갑열차 지휘관으로 돈·크라스노프·데니킨 부대와 싸웠으며, 볼셰비키당에 가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19년 7월 데니킨군 포격에 전사한 뒤 소련 문화에서 노래·시·영화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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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제2발트함대 승무원으로 징집, 기관학교 입학
  • 1916체포 우려로 탈영, 흑해 상선에서 가명으로 화부·기관조수로 근무
  • 1917.5제1차 발트함대 대회(중앙발트) 대표 선출
  • 1917.6두르노보 저택 방어전 가담, 체포되어 14년형 선고; 9월 크레스티 교도소 탈옥
  • 1917.10해군혁명위원회 위원, 겨울궁전 습격 및 아드미랄테이스트보 점령 지휘
  • 1918.1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 — 제헌의회 해산
  • 1918.3비르줄라 요새화 지구 사령관, 오스트리아-독일군과 교전
  • 1918.6–9키크비제 사단 예하 제1옐란스키 보병연대장, 차리친 전선에서 크라스노프 코사크군과 교전
  • 1918.10–1919.4오데사 지하활동(빅토르스 가명), 봉기 후 상선노조 위원장
  • 1919.5–7장갑열차 후댜코프호 지휘관;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데니킨 전선 전투 중 포격 전사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폴란드계 생몰년 미상 ○ 생몰년 미상

혁명의 첫날 기록에 남은 의장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첫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보구스와프 즈보로프스키는 1905년 혁명기에 활동한 노동운동가로, 상세한 개인 이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905년 10월 13일 창립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첫 의장을 맡았고, 다음 날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에게 자리를 넘겼다. 짧은 재임이었지만 소비에트가 파업 속에서 노동자 대표를 정치적 조직으로 묶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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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페테르부르크 노동운동 활동가
  • 1905.10.13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창립 의장
  • 1905.10.14의장직 교체

세묜 아로노비치 클리반스키

Семён Аронович Кливански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 소련 유대계 러시아인 1879 – 1944 이후 → 아르한겔스크 유배, 이후 생애 불명

병사들 속에서 명령 제1호의 초안을 쓴 멘셰비키 분트 출신 지식인

1917년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그는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다.

1890년대 분트에 입당해 1905년 리가 총파업을 지휘하고 1907년 런던 당대회에 분트 대표로 참석한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다. 1917년 망명에서 귀국해 멘셰비키 '방위주의자'로 활동했고,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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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분트(유대인 노동자 총동맹)에 가입
  • 1899분트 제3차 대회 대의원
  • 1905리가 총파업 지휘
  • 1907RSDRP 제5차 런던 대회 분트 대표
  • 1917.03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분과 회의에서 명령 제1호 핵심 조항 작성
  • 1917멘셰비키 '방위주의자' 신문 『덴』(День) 편집 참여
  • 1917.11제헌의회 의원 선출
  • 1918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
  • 1923OGPU 체포, 사건 종결 후 석방

스테판 니콜라예비치 할투린

Степан Николаевич Халтур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56/1857–1882 ✕ 교수형

겨울궁전을 폭파한 목수 혁명가,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창립자

"이 길에서는 돌아올 수 없다"며 눈물로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만류했으나, 스스로 겨울궁전 지하에 다이너마이트를 쌓았다 — 동료의 증언.

뱌트카 출신 목수로, 1878년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을 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창립했다. 1880년 겨울궁전에 목수로 위장 취업해 황제 식당 아래에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폭파했으나 알렉산드르 2세는 지각으로 살아남았다. 1881년 3월 이후 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이 되었고, 1882년 오데사에서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에 가담해 체포·처형당했으며, 레닌은 크렘린 사무실에 마르크스와 나란히 할투린의 고부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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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1875뱌트카 사범학교 입학, 성적 불량으로 퇴학; 목수 기술 습득
  • 1875–1877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공장들에서 목수로 일하며 혁명 서클 가입; 카잔 시위(1876) 참가 후 비합법 지위로 전환
  • 1878빅토르 옵노르스키와 함께 '북러시아 노동자 동맹' 창립, 강령 작성 —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조직
  • 1879.9스테판 바티시코프라는 가명으로 겨울궁전 목수로 취업, 다이너마이트를 매일 조금씩 반입
  • 1880.2.5겨울궁전 지하실에서 폭탄 폭파 — 귀빈 지각으로 황제는 무사했으나 근위병 11명 사망, 56명 부상
  • 1880–1881모스크바로 도피, 노동자 선전 활동 지속
  • 1881.3인민의 의지당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882.3.18오데사에서 니콜라이 젤바코프와 함께 스트렐니코프 검사 암살; 마부로 위장했으나 체포
  • 1882.3.22오데사에서 가명으로 군사재판 후 교수형 — 겨울궁전 폭파범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처형

티모페이 이바노비치 키르피치니코프

Тимофей Иванович Кирпичн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러시아인 1892–1917/1918 ✕ 백군 내부에서 처형

제정군의 명령을 거부한 병사 지도자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겠는가? 나는 가지 않겠다.”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는 제정 러시아군의 하급지휘자였지만, 전선의 경험과 병사들 사이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명령의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했다. 1917년 2월 26일 시위 진압 뒤 부하들에게 노동자에게 발포하지 말자고 설득하고, 다음 날 볼린스키 연대의 봉기를 이끌어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연쇄적인 가담을 촉발했다. 그는 임시정부에게 혁명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으나, 10월 이후에는 볼셰비키에 맞섰고 백군 내부의 처형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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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부상
  • 1916–1917페트로그라드 주둔 예비부대, 볼린스키 연대 훈련대 선임 하사관
  • 1917.02.27볼린스키 연대 훈련대의 명령 불복종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봉기 주도
  • 1917.04임시정부에 의해 혁명의 영웅으로 선전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선출
  • 1917.04–05임시정부 지지 병사 시위 조직, подпрапорщик 및 прапорщик으로 승진
  • 1917.10–1918볼셰비키에 맞서 남부로 이동, 백군 진영에서 처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