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2월 17일 두마 연단에서 곡물 징발의 정당성을 역설했으나 야당의 냉소만 샀다. 닷새 뒤 페트로그라드의 빵 가게 앞에 선 여성들이 혁명을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농업장관으로, 1916년 11월 29일 곡물 강제 징발령(продразвёрстка)에 서명했고 1917년 1월 말 페트로그라드의 제분소 공급을 하루 3만 5천 푸드로 제한했다. 이는 빵 부족과 줄서기 공황을 촉발해 2월 혁명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원래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핵심 설계자였던 유능한 관료였으나, 전시 경제의 수송 붕괴와 인플레이션 앞에서 도구를 잘못 쥔 개혁가로 역사에 남았다.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1909년 《베히》 서문에서, "우리는 총검과 감옥으로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바로 그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고 썼다.
러시아 문화사가이자 수필가로, 1909년 지식인의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한 논쟁적 저작 《베히》(Vekhi)의 발기인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인텔리겐치아가 외적 사회 형태의 재편에 매몰되어 내적 정신의 자각을 외면했다고 보았으며,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총검과 감옥의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는 도발적 문장으로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후에는 전러시아 작가연합 초대 의장과 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을 지냈으며, 푸슈킨 연구(《푸슈킨의 지혜》, 1919)와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연구로 중요한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1917년 11월 트로츠키에게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항하지 않겠다'는 가석방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이튿날 바로 돈 지역으로 탈출해 반소비에트 투쟁에 합류했다.
돈 카자크 장군 가문 출신의 제국 육군 중장으로, 1918년 아타만에 선출되어 독일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반볼셰비키 국가 '전대돈군주'를 세웠다. 망명 후 다작 소설가로 1926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카자크 중앙관리국을 이끌며 소련에 대항하는 카자크 부대를 조직했다가 종전 후 소련으로 송환되어 1947년 처형되었다.
1921년 기근 속에서 그녀는 폼골의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듬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예카테리나 쿠스코바는 혁명적 인민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주의를 거쳐 자유주의적 개혁사회주의로 이동한 정치활동가·저술가였다. 1899년의 《크레도》는 노동운동의 경제투쟁과 민주적 개혁을 앞세우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1905년 이후 그녀는 해방동맹, 협동조합 운동, 여성 평등 운동과 여러 신문을 통해 정당 독점에 맞선 민주적 연합을 모색했고, 1917년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코르닐로프 세력을 비판했다. 1921년 기근 때에는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함께 폼골의 비볼셰비키 구호 활동을 조직했으나, 위원회가 해산된 뒤 체포·추방되어 망명지에서 글을 계속 썼다.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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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1901–1902분산된 에스에르 그룹들을 단일 사회주의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1916년 11월 19일 두마 연설에서: "라스푸틴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 직후 유수포프 공작이 암살 음모를 제안했다.
흑백당과 '미하일 대천사 동맹'을 창립한 제정 러시아의 대표적 극우 군주주의 정치인. 2·3·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반유대주의·반의회주의 연설과 의사당 내 물리적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1916년 12월 궁정의 '어둠의 세력'을 제거해 군주제를 구하려는 신념으로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했고, 직접 권총을 발사했다. 혁명 후 백군에 합류해 반볼셰비키 지하조직을 이끌다 체포·사면되었으며, 노보로시스크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소콜로프가 책상에 앉아 쓰고 있었다. 병사들이 둘러싸고 서서 구술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쏟아냈다. … 작업을 마치고 종이 위에 「명령 제1호」라고 썼다. 수하노프, 『혁명의 기록』
궁정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반독재 변호사로 삶을 바꾸었다. 1917년 3월 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서기로서 병사분과 회의를 주재해 군대 민주화의 신호탄이 된 「명령 제1호」를 기초했다. 혁명 초기 가장 분주한 비공식 지도자였으나 당파에는 속하지 않았고, 내전 후 소비에트 법률 고문으로 조용히 살다 얄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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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1896법률·정치경제학 논문 발표, 『미르 보지』 『오브라조바니예』 『지즌』 등에 기고
1894–1898나로드나야 볼랴 사건 연루 조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담 체포(1896); 레벨 유형(1898)
“페도세예프는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비상한 호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시대 혁명가의 전형이었다” — 레닌, 1922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1888년 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해 젊은 레닌과 고리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레닌과 이론 서신을 교환했으며, 농노제 붕괴의 경제적 원인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과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령 초안을 집필했다. 나로드니키 이론가 미하일롭스키와의 논쟁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나로드니키 논쟁의 장을 열었고, 그의 강령은 레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평했지만,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동료의 중상에 시달리다 27세로 생을 마감했다.
알렉산드르 크리모프는 러시아 제국군의 기병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결단력 있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7년 혁명 뒤 그는 군대의 규율과 강한 국가 권력을 중시하는 장교 진영에 섰고, 임시정부와 두마 야권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개입에도 연루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명령으로 제3기병군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향했지만 병사들의 동요와 철도 노동자들의 저지로 진군은 무너졌다. 케렌스키와 면담한 뒤 체포와 굴욕을 피하려고 자살했으며, 그의 죽음은 군부의 질서 회복 시도가 혁명의 이중권력과 충돌한 결과를 상징한다.
네 살배기 아들 이반의 장례식에서 불가코프는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깨달았다'고 기록했고, 이 신비체험을 정교회 귀환의 결정적 계기로 삼았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법적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출발해 관념론을 거쳐 사제 서품에 이르는 20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대표적 전향 궤적을 그렸다. 1890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나, 《자본주의와 농업》(1900)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칸트와 솔로비요프 철학을 경유해 교회로 복귀했다. 1909년 《이정표》에 기고한 「영웅주의와 금욕주의」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무신론적 혁명주의를 비판했고,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된 후 파리에서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을 공동 설립하여 소피아론 신학 체계를 완성했다.
1917년 7월 4일, 그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겨냥한 반역 혐의 자료의 언론 공개를 승인했다.
파벨 페레베르제프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사건을 변호한 법률가로, 혁명기에는 법무 행정과 임시정부의 질서를 맡았다. 그는 1917년 7월 볼셰비키와 독일의 연계를 주장하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해 정치적 탄압의 분위기를 키웠고, 자료의 신뢰성과 해석은 이후에도 논쟁으로 남았다. 공개가 정부와 조율되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 사임한 뒤 내전과 망명을 거쳐 프랑스에서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 참여했다.
“소매상은 예전에도 투기했고 지금도 투기하지만, 예전에는 물가가 높지 않았고 지금은 높다.”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는 통계와 정치경제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농업·노동·협동조합 문제를 연구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수정주의적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로 이동했지만, 국가가 시장을 조절해야 한다고 보며 노동과 농민의 생활 문제를 계속 다뤘다. 1917년 임시정부의 식량장관으로서 전시 동원, 운송 혼란, 농촌의 곡물 유보가 겹친 위기 속에서 고정가격과 국가 곡물독점의 한계를 마주했다. 이후 기근 구호 활동으로 체포·추방되었고, 망명지에서 소련 경제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1915년 7월 7일, 후퇴하던 12보병사단의 전열에 균열이 생기자 한진은 직접 예비 대대를 이끌고 틈새로 달려가 후퇴하는 부대를 멈춰 세웠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포병 장교로, 루소-일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포병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내전기에는 시베리아 백군의 우랄 군단을 창설하고 콜차크 휘하 서부군 사령관으로 1919년 3월 전략적 돌파를 이끌어 볼가 강 30km 앞까지 진격했으나, 과신장된 전선이 프룬제의 남부군집단 반격에 노출되어 부굴마·부구루슬란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었다. 실각 후 콜차크 정부의 마지막 군무장관을 지냈고, 중국 망명을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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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893오렌부르크 사관학교 →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 졸업, 코룬지 임관
1899미하일롭스카야 포병 아카데미 수석 졸업
1904–1905러일전쟁: 제3 동시베리아 포병여단 제4포대장, 4급 성 게오르기 훈장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제19포병여단장 → 제12보병사단장 → 제8군 포병감, 브루실로프 공세 포병 기획 주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1899년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부당하게 명단에서 제외되자 황제에게 탄원했다. 주변에서 청원을 취하하면 조용히 배려해 주겠다고 했을 때의 답: "나는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내 권리인 것만을 요구할 뿐이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국 육군 중장으로, '철의 여단'을 이끌며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에 섰다. 1918년 코르닐로프 사후 의용군 사령관을 이어받아 남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백위대 최대 병력을 지휘했고, 1919년 여름 모스크바 공세로 오룔까지 진격해 소비에트 정권을 가장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통일되고 불가분의 러시아'라는 경직된 구호로 민족·농민 문제에 실패했고, 통제 불능의 포그롬은 국제적 신뢰를 무너뜨렸다. 망명 후 5권의 『러시아 혼란기 수기』를 집필해 혁명과 내전의 기초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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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5러일전쟁 참전, 참모 장교로 무공을 세워 대령 진급
1914–16제4소총 '철의 여단'(후 사단) 지휘,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루츠크 2회 점령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대주교이자 페트로그라드 교구의 지도자로, 혁명 뒤 교회의 교육과 신자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백색운동과 거리를 두면서도 국가가 교회의 자율성과 성물을 침해하는 데에는 맞섰다. 1922년 볼가 기근 때 성물이 아닌 교회 재산의 자발적 기부와 교회가 통제하는 구호를 제안했지만, 당국이 강제 몰수로 전환하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유죄 판결 뒤 처형되었고 1992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세묜 레온티예비치 마슬로프는 에스에르 계열의 농업경제학자이자 농민 협동조합 운동의 조직가였다. 그는 토지개혁을 지지했지만 농민의 지주지 무단 점거에는 반대하며 법적 개혁과 농촌 자치를 결합하려 했다. 1917년 10월 농업장관으로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시간을 맞았고, 겨울궁전에서 체포된 뒤에도 제헌의회와 협동조합의 길을 지지했다. 훗날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옹호한 그는 1938년 처형되었다가 1988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