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과학자들이 인간 비행을 비웃을 때, 주콥스키는 1891년 강연 「새의 비상에 관하여」에서 글라이더의 '죽음의 루프' 가능성을 수학으로 증명했고, 22년 후 네스테로프가 하늘에서 그 증명을 완성했다.
러시아 항공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유체역학의 아버지. 새의 비행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양력의 순환이론을 정립했고, 1902년 모스크바대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건설했다.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쿠치노에 세웠고, 1918년에는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소련 항공·우주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제자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등이 소련 항공 산업을 이끌었으며, 치올콥스키의 고립된 이론을 국가적 연구 역량으로 전환시킨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콥스키의 학교였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다: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불꽃이 없었다.'
제정 러시아 해군의 중장으로, 러일전쟁에서 제2태평양함대를 지휘해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철갑함대를 이끄는 전례 없는 항해를 완수했으나,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함대에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그는 이 원정이 무모한 모험임을 처음부터 직감했지만, '여론을 만족시켜야 한다'며 출항을 강행했고, 훗날 '시민적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이 마지막 함대를 학살터로 보내지 말라고 온 세상에 외쳤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된 그는 귀환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고 은둔 속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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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1873해군사관학교 및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베스타호 포병장교로 터키 철갑함과 교전
1883–1885불가리아 해군 사령관
1891–1893주영국 해군무관
1898–1903소장 진급, 발트함대 포병훈련대 사령관, 해군참모총장
1904–1905중장,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 발트해에서 쓰시마까지 18,000해리 항해, 쓰시마 해전 참패
1906년 4월 27일 첫 국가두마 개회사: "국가두마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대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민의 의지가 불변의 법에 기초한 입법 기관으로 표현됩니다."
로마법 학자이자 카데트 창립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무롬체프는 러시아 헌정주의의 얼굴이었다.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법사회학을 개척했고, 법률학회 회장으로 사법 개혁을 주도했다. 1906년 제1대 국가두마 의장에 당선되어(426/436표) 러시아 최초의 입헌적 대의기관을 이끌었으나, 의회 해산 후 비보르크 호소에 서명해 수감되었다. 1910년 그의 장례식은 1905년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반체제 시위로, 헌정사에 신화로 남았다.
'레닌과 나는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 — 1919년 망명 직전, 반세기 동지였던 볼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하다.
마르크 나탄손은 1870년대 차이콥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권리'의 공동 창립을 주도하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을 지낸, 러시아 혁명운동의 조직적 골격을 반세기 동안 연결한 핵심 조직가이다. 탁월한 결집력으로 '혁명의 이반 칼리타'로 불렸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치메르발트·킨탈 회의에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레닌과 협력했다.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과 혁명적 공산당 창립을 주도했으나, 일당 독재로 기운 볼셰비키에 환멸을 느끼고 '나는 더 이상 레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긴 채 망명했다.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1878년 메젠초프 암살 직전, 크라프친스키는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설교했다 — 이제 증오를 불러낼 때가 왔다. 무자비한 피의 복수가 이제부터 너희 악행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혁명운동과 서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작가이자 혁명가.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활동하고 1878년 헌병대장 메젠초프를 단검으로 암살한 후 망명하여, 런던에서 『지하 러시아』(1883)를 출판하고 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과 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를 창립해 망명 반체제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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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1873차이콥스키 서클(대선전회) 가입,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대상 사회주의 선전
1873–1874‘민중 속으로’ 참여 — 트베리·툴라 농민 선전, 체포 후 탈출
1875–1876헤르체고비나 반오스만 봉기 참전; 제네바 바쿠닌계 기관지 『라보트니크』 기고
1877이탈리아 베네벤토 무장봉기 참가(말라테스타·카피에로와 함께), 체포 후 사면
1878토지와 자유당 입당, 기관지 편집; 8월 4일 메젠초프 암살; 11월 해외 망명
1883『지하 러시아』(Underground Russia) 출판 — 서구 최초의 러시아 혁명운동 종합 보고서
1889소설 『니힐리스트의 생애』(안드레이 코주호프) 출판
1890–1895러시아 자유의 벗 협회·자유 러시아 출판 기금 창립, 월간 『자유 러시아』 편집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나는 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믿으며, 이 믿음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나를 지탱한다… 내 생각이 나와 함께 죽지 않고 인류와 함께 남을 것을 알며 평온히 죽음을 맞으리라」 — 1881년 3월, 감옥에서 작성한 유언 편지.
러시아 혁명가이자 '인민의 의지'의 수석 폭발물 기술자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사용된 투척 폭탄을 설계·제조했다. 사형을 앞둔 감옥에서 분말 추진제, 짐벌식 추력 제어, 안정 날개를 갖춘 세계 최초의 유인 로켓 비행 장치를 설계했으며, 이 구상은 1918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공개되어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선배로 꼽았다.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범죄적 무리'라 맹비난한 뒤 이렇게 끝맺었다: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흐느끼며 말씀드립니다. 가장 고통 없는 탈출구는 이미 제시된 조건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사하로프는 제정 러시아의 기병대장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의화단 진압,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50년 군 경력에서 제국 군사 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다. 1915년 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보조 축을 맡아 브로디를 점령하고 수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1916년 가을 루마니아 전선의 두너이군 사령관으로 파견되어 페르디난드 1세의 보좌관으로 사실상 전선을 지휘했다. 2월 혁명 직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에서 국가두마를 맹비난하면서도 퇴위를 권고한 장면은 군주제 장교단의 분열된 충성을 보여준다. 혁명 후 해임되었고 내전기 크림에서 백군에 가담, 1920년 녹색군에게 체포·처형되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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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12기병사단은 죽어야 한다. 단번에 죽지 말고 저녁까지 죽어라 — 1914년 8월 29일, 카레딘 사단장에게 내린 브루실로프의 명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로 평가되는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의 설계자이자 지휘관이다. 전선 전역에 동시 타격을 가하는 새로운 돌파 전술을 고안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이 공세는 이후 소련 군사학에서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되었다. 1917년 혁명기에는 러시아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나 군대 해체를 막지 못했고, 러시아 내전 후 볼셰비키의 적군에 합류해 기병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제정 장교단 출신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한 그의 행보는 망명 백군 진영에서 배신으로, 소비에트 측에서는 실용적 애국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니콜라이 2세는 유형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모든 적과 박해자를 용서할 힘을 신에게서 받았지만, 루즈스키 부관장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갈리치아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은 제정 러시아의 보병대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제3군과 북서전선·북부전선을 지휘했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프스코프에 주둔한 북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의 열차를 맞았고, 알렉세예프 참모총장과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며 차르에게 책임내각 도입과 퇴위를 압박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논쟁 끝에 니콜라이 2세의 뜻을 꺾은 결정적 순간은, 군부가 더 이상 왕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쟁 말기 붉은 군대 입대를 '러시아인끼리의 전쟁'이라 거부하고 광천수 휴양지에 머물다, 1918년 백인민 체카에 의해 인질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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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고르니 두브냐크 요새 공격 중 부상
1881니콜라예프 참모대학 졸업, 이후 키예프·빌노 군관구 참모 역임
1904–1905제2만주군 야전참모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1909보병대장 진급, 군사평의회 위원, 1912년 야전규정 공동 저자
1914.07–09제3군 사령관, 갈리치아 전투에서 리보프 점령
1914.09–1915.03북서전선 총사령관
1915.08–1917.04북부전선 총사령관, 1917년 3월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압박
푸리슈케비치 씨가 무라비요프의 목걸이라 부르는 그것을, 그의 후손들은 아마도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트베리 지방의 진보적 젬스트보 활동가로 출발해 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에 참여했고 4회 연속 국가두마 의원을 지낸 러시아 자유주의 정치인이다. 두마 최고의 연설가 중 하나로 불렸으며, 1907년 11월 17일 연단에서 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를 비판하며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을 남겨 격분한 총리의 결투 신청을 받고 사과해야 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의 핀란드 담당 위원을 지냈고 10월 혁명에 반대하여 백군 진영에 가담했으며, 패배 후 망명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탄약을 아끼지 말라」는 초안을 읽은 모솔로프가 "제정신이냐"고 묻자, 트레포프는 답했다. "제정신이네. 내일이면 발포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어. 이 불행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 문구라네."
악명 높은 페테르부르크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경찰을 거쳐 1905년 혁명기 제국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 내무차관, 경찰 및 헌병대 사령관을 동시에 겸하며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1905년 10월 "빈 총알 쓰지 말고 실탄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바로 그 순간 그가 밀어붙인 10월 선언은 시민적 자유를 약속했다. 선언 이후 궁정 경비사령관으로 밀려났지만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신임받는 조언자로 남았고, 1906년 심부전으로 급사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동료 유형수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마호메트의 추종자라고 선언했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하여 '검은 재분할'을 거친 후 1883년 스위스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 해방' 그룹을 창립했다. 조직의 실무자로서 불법 출판물의 간행과 러시아 밀반입을 총괄했으며, 1884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러시아에 인도된 후 13년간 카라 강제노동형을 복역했다. 1901년 탈출 후 《이스크라》 편집진에 합류하고 RSDLP 제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로 서서 당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말년에는 회고록 《반세기》(За полвека)로 러시아 혁명운동사의 1차 사료를 남겼다.
1905년 10월, 니콜라이 2세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다. "폐하께서 비테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제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니콜라이 2세의 숙부였던 그는 로마노프 왕조 말기 군부에서 가장 신망을 얻은 대공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차르가 군사독재를 택하려 하자, 권총을 꺼내 들고 자살하겠다며 맞서 니콜라이 2세가 비테의 개혁안과 10월 선언을 수용하게 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어 동부전선을 지휘했으나 탄넨베르크 참패와 보급난 속에 1915년 차르에게 직책을 넘겨주고 캅카스 총독 겸 전선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혁명 후 크림반도에 은거하다 1919년 영국 전함으로 탈출했고, 망명 중 백군 잔존 세력에 의해 잠시 황제로 추대되기도 했다.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1917년 3월 2일, 알렉세예프는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한데 모아 차르에게 전송하며 '폐하께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소서'라고 썼다.
러시아 제국군의 참모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최고사령부(스타프카) 참모총장을 맡아 동부전선 전체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갈리치아 공세를 입안하고 1915년 대후퇴를 조직적으로 이끌어 러시아군을 붕괴에서 구한 전략가였으며, 2월 혁명 당시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요구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를 이끌어냈다. 혁명 후 남러시아에서 의용군의 모체인 '알렉세예프 조직'을 창설해 백군 운동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을 놓았으나, 내전이 본격화되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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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89064 카잔 연대 장교, 러시아-튀르크 전쟁 참전, 니콜라이 참모아카데미 수석 졸업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발포를 명령하고 수비대 통제력을 상실한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2월 26일 하발로프는 도심을 봉쇄하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나, 다음날 볼린스키 연대가 이를 거부하며 수비대 전체가 봉기했다.
오세티야계 출신의 제정 러시아 군인으로, 미하일롭스코예 포병학교와 니콜라예프 참모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다. 모스크바 군사학교와 파블롭스크 군사학교 교장을 거쳐 1916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진압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비대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혁명 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고, 내전 후 남러시아에 남아 예센투키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