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1918년 2월 11일, 마지막 정부회의에서 방어를 위한 총검이 147자루뿐임을 듣고 사임한 그날, 알렉세예프에게 남긴 유서: 「카자크가 자기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브루실로프 공세의 선봉을 맡아 루츠크를 돌파한 제국 육군 기병대장. 1917년 6월 돈 카자크 최초의 선출 아타만이 되었고,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을 전면 거부하며 돈 지역을 독립시켜 남부 백군의 첫 거점을 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 돌아온 카자크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1918년 2월 의용군마저 돈을 떠나려 하자 「카자크가 아타만을 따르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러시아 백위대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 볼셰비키를 러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유일한 강령은 볼셰비키 타도뿐이다!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육군에서 가장 꾸준한 승리를 거둔 지휘관으로, 캅카스 전선에서 사르카미시·에르주룸·트레비존드 전투를 지휘하며 오스만 제3군을 궤멸시켰다. 2월 혁명 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의해 해임되었고, 내전기에는 북서군을 이끌고 1919년 가을 페트로그라드 외곽 풀코보 고지까지 진격했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에스토니아로 패주했다.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자로, 망명 후에는 백계 정치에서 물러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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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87알렉산드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05제18소총연대장으로 러일전쟁 참전, 산데푸·무크덴 전투에서 부상
1913–15캅카스 군관구 참모장 → 캅카스군 참모장 → 보병대장 진급 및 캅카스군 사령관
1916에르주룸·트레비존드·에르진잔 점령, 러시아 제국 최후의 성 게오르기 2급 훈장 수훈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는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의 황실 열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로부터 퇴위 조서를 받았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그 열차 안에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10월 17일 동맹'(옥토브리스트)을 이끌며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 개혁을 지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제3대 두마 의장과 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라스푸틴과 궁정을 공개 비판하며 니콜라이 2세의 적이 되었다. 1917년 3월 2일 바실리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받아냈으며, 임시정부 초대 육군해군장관이 되었으나 4월 위기로 사임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백군을 후원했다. 보어전쟁 의용군, 티베트 여행, 수차례 결투로 점철된 모험가적 삶을 살았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0월 혁명 당일 밤, 트로츠키가 보낸 체포대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자택 문을 두드렸다. 부르체프는 반볼셰비키 신문 《나셰 옵셰예 델로》를 그날 아침 발행한 직후였다.
나로드나야 볼랴 출신의 혁명가이자 출판인으로, 예브노 아제프를 비롯한 오흐라나의 도발자들을 연쇄적으로 폭로하여 '러시아 혁명의 셜록 홈스'로 불렸다. 역사 저널 《빌로예(Былое)》를 창간해 19세기 러시아 혁명운동의 기록을 체계화했으며, 베른 재판에서 《시온 장로 의정서》가 오흐라나의 조작임을 증언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일 트로츠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의 첫 정치범이 되었고, 이후 망명지 파리에서 반볼셰비키·반파시즘 투쟁을 이어갔다.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1917년 3월, 점심 식사 중 미하일 대공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말없이 옆방으로 걸어가 권총 자살했다.
모스크바 오흐라나 국장(1896–1902)과 경찰국 특별부장(1902–1903)을 지내며, 유럽식 비밀수사 체계를 러시아에 도입한 정치경찰 근대화의 주역이다. 혁명 이론에 정통했던 그는 탄압만으로 혁명을 막을 수 없다고 보아, 노동자 경제투쟁을 정부가 중재하는 친정부 합법노조, 이른바 '주바톱시치나(경찰사회주의)'를 창안했다.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실험이 무너지고 플레베에게 축출되었으나, 사회개혁을 통한 전제체제 유지라는 그의 구상은 혁명 전야 구체제가 내놓은 가장 독창적인 대응으로 평가된다.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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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1917.3–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1917.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1918–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1921–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1923–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1922년 교회 귀중품 논쟁에서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와 성물의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티혼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이자 1917년 복원된 총대주교직의 첫 보유자로, 혁명 뒤 교회와 새 국가의 충돌을 대표한 인물이다. 그는 1921~1922년 기근 구호를 호소했지만, 1922년 2월 법령 뒤 성물의 일괄 인도가 교회법을 침해한다고 보아 자발적 기부와 강제 압수를 구분했다. 이 입장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방어였지만, 성직자 탄압과 교회 재산 압수로 이어지는 대립을 막지는 못했다.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어머니의 사면 청원 권유에: "결투를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한쪽은 이미 총을 쐈습니다. 아직 쏘지 않은 상대에게 총을 쓰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레닌의 친형.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촉망받는 동물학도였으나, 1886년 돌연 혁명에 투신하여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 분파'를 조직하고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의 주모자가 되었다. 1887년 3월 1일('제2의 3월 1일') 암살 미수로 체포되어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17세 동생 블라디미르(훗날 레닌)를 혁명의 길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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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심비르스크 고전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1883–1886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 수상
1886인민의 의지당 가입, '테러 분파' 조직: 이념가이자 폭탄 제조자
1887.02테러 분파 강령 작성, 알렉산드르 3세 암살용 폭탄 준비
1887.03–053월 1일 체포, 4월 15–19일 재판,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관료 경력 없이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도 혁명의 위협을 부정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에 무능했으며, 각료와 총리의 거듭된 사임 요구를 무시했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체포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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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시미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 「…각하께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며, 더 이상 각하의 대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함대 사령관 P. 시미트.」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세바스토폴 해군 봉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순양함 오차코프에 적기를 올리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봉기는 90분 만에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베레잔 섬에서 총살당했지만, 그 이름은 소비에트 전역의 거리·함선·기념비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통해 '시미트 중위'로 불멸화되었다.
의용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무리한 전선과 알코올 의존으로 무너진 백군 장군
1919년 여름, 영국 사절단은 '하리코프 장군'에게 수여하라는 훈장을 들고 의용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하리코프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고, 세인트마이클·세인트조지 훈장은 하리코프 주둔 사령관인 마이-마옙스키에게 주어졌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정 러시아 중장으로, 1918년 의용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뒤 빠르게 사단장으로 올랐고 1919년 5월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세에서 하리코프·쿠르스크·오룔을 연이어 점령하며 백군 중 가장 깊숙이 볼셰비키 수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과 돈군과의 협조 실패, 후방의 마흐노 봉기로 공세는 붕괴했고, 악화된 알코올 의존 탓에 1919년 11월 데니킨이 브란겔로 교체했다. 1920년 11월 크림 철수 중 세바스토폴에서 사망했으며, 권총 자살로 추정된다.
나는 그들에게 분노도 복수심도 없으며, 그저 무엇에든 선동될 수 있는 불쌍한 회색 무리일 뿐이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의 제정 러시아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올랐다. 내전기에는 아르한겔스크 북부정부의 수반 겸 북부 백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미국 간섭군의 지원을 받으며 볼셰비키에 맞섰으나, 연합군 철수 후 홀로 싸우다 1920년 2월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으로 반소 활동을 이끌었으며, 1937년 파리에서 NKVD 요원 니콜라이 스코블린의 함정에 빠져 납치되어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1939년 5월 NKVD 내부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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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