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폐렴)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66.04 퇴임

관련 역사 사건

1936년 미국 시찰 — 소련의 식탁을 바꾼 여행

1936년 여름,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2개월간 미국을 시찰했다. 소련 식품공업인민위원으로서 그는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를 돌며 통조림 공장, 냉동 식품 라인, 자동판매기, 햄버거 생산 공정을 샅샅이 살폈다. 그는 아이스크림 대량생산 기술과 냉동 패티 공법을 소련에 들여왔다.

이 여행의 결과로 소련에 도입된 것들: 아이스크림 공장, 코카콜라의 소련판, 햄버거(당시에는 '미코얀식 커틀릿'), 냉동식품. 미코얀은 소련인의 식탁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지만,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에서 배운 것이었다.

미코얀의 정치적 생존력은 전설적이다. 레닌 시대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그는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스탈린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으면서도 1956년 헝가리 진압을 반대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백채널 역할을 했다. 미코얀의 생존 비결은 적응력 — 그리고 언제나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실용주의였다.

1960~1962년 쿠바: 카리브 위기를 끝낸 비밀 협상가

소련 정부는 1959년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가 무너진 것을 환영했다. 카리브해에 소련의 동맹이 생길 가능성을 본 흐루쇼프는 라틴아메리카 최고위 외교관의 한 사람인 미코얀을 파견했다. 소련 정보장교들을 제외하면 그는 혁명 이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고, 새 정부와 중요한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59년 흐루쇼프의 쿠바 방문을 준비하면서 그는 미국에도 다녀왔고, 피델 카스트로와는 소련-쿠바 관계 수립을 협상했다. 쿠바 혁명 지도부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카스트로에 대해서는 "그렇다, 그는 혁명가다. 우리와 같다. 마치 청춘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협상 상대로서의 체 게바라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게바라가 "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아르메니아어로 체는 '아니오'라는 뜻"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긍정적인 인상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소련 미사일의 쿠바 이전을 처음으로 흐루쇼프에게서 들은 사람도 미코얀이었다. 1962년 5월 미코얀은 핵무기를 쿠바에 비밀리에 보내는 데 반대한 유일한 간부회의 위원이었으나 그의 입장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1936년과 1959년의 미국 방문을 통해 미국의 정치 체제를 알았고, 미국 인근에 비밀리에 배치된 핵미사일에 대한 반발이 매우 격렬할 수 있음을 이해했다.

1962년 10월 28일 케네디-흐루쇼프 교환 이후에도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쿠바에 주둔한 소련군 집단에는 미국 상륙을 격퇴할 목적의 전술핵무기 약 100기가 있었다. 미코얀은 이 극비 임무를 맡았고, 쿠바 지도부 전체와 유례없이 신뢰하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바나 체류 첫날 아내 아시켄이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나 그는 장례를 위해 돌아가지 않고 아들 세르고를 대신 보낸 뒤 카스트로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3주 넘게 그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쿠바 지도자들을 설득해 흐루쇼프의 결정이 합리적임을 받아들이게 했다. 카스트로는 미사일을 남겨야 한다고 완강했고, 워싱턴과의 전면적 대결을 피하려 한 미코얀은 그와 다른 논거를 폈다. 몇 주간의 긴장 끝에 카스트로가 물러섰고 미사일과 Il-28 폭격기는 그해 12월에 철수했다.

역설적이게도 미코얀은 처음부터 반대했던 결정을 쿠바인들과 미국인들, 쿠바 주둔 소련군 앞에서 변호해야 했다. 전술핵무기가 원래 계획대로 남지 않고 쿠바에서 철수한 것은 미코얀의 판단에 힘입은 것이며, 동맹국에 전술핵무기를 넘기지 않는다는 결정은 선례로 남아 소련은 이후 다른 나라에 핵무기를 이전하지 않았다.

1936년 여름,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2개월간 미국을 시찰했다. 소련 식품공업인민위원으로서 그는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를 돌며 통조림 공장, 냉동 식품 라인, 자동판매기, 햄버거 생산 공정을 샅샅이 살폈다. 그는 아이스크림 대량생산 기술과 냉동 패티 공법을 소련에 들여왔다.

이 여행의 결과로 소련에 도입된 것들: 아이스크림 공장, 코카콜라의 소련판, 햄버거(당시에는 '미코얀식 커틀릿'), 냉동식품. 미코얀은 소련인의 식탁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지만,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에서 배운 것이었다.

미코얀의 정치적 생존력은 전설적이다. 레닌 시대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그는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스탈린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으면서도 1956년 헝가리 진압을 반대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흐루쇼프와 케네디의 백채널 역할을 했다. 미코얀의 생존 비결은 적응력, 그리고 언제나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실용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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