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총독, 자신은 반대파로 보르쿠타에서 처형된 코시오르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0–1922 사회운동·조직
- 1921 사회운동·조직 · 민주집중파
- 1923– 사회운동·조직 · 좌익반대파
경력 연표
- 190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9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 1920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제14군 정치부 부부장
- 1920–1922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 1922–1924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8당에서 제명, 포크로프스크 유배
- 1936수용소 5년형, 우흐타-페치라크 수감
- 1938보르쿠타에서 처형
관련 역사 사건
보르쿠타 단식투쟁과 1938년 3월의 처형
1936년 여름, 우흐타-페치라크 수용소가 있던 보르쿠타 광산에 3천 명이 넘는 정치범이 새로 들어왔고, 그중 가장 큰 무리는 행정 유배와 정치격리소, 다른 수용소에서 옮겨온 투옥 전부터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로고빈의 반대파 연구가 인용한 발라쇼프의 회고는 이 집단의 지도자로 소크라트 게보르캰, 블라디미르 이바노프, 멜나이스, 옛 트로츠키 비서 포즈난스키와 함께 코시오르를 꼽는다.
이들은 먼저 '볼셰비키-레닌주의자' 선언에 서명을 모은 뒤 1936년 가을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선언은 내무인민위원회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행정 유배에서 수용소로 옮긴 결정을 취소하고 정치적 반대자의 사건을 특별회의가 아니라 공개 법정에서 심리할 것, 수용소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할 것, 식량을 노동 규범 달성 여부와 분리하되 규범은 빵 배급이 아니라 금전 보상으로 장려할 것, 정치범을 형사범과 분리해 수용하고 배치할 것, 극지 수용소의 장애인과 여성, 노인을 기후가 나은 곳으로 이주시킬 것을 요구했다.
단식투쟁은 1936년 10월 27일에 시작되어 132일 동안 이어졌고 약 천 명이 참여했으며 그 절반은 광산에 있었다. 강제 영양 공급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건졌지만 죽는 사람도 늘었고, 인접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잇따라 합류하면서 수용소 생산 계획 자체가 위협받았다. 1937년 3월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모스크바의 전보가 도착한 뒤에야 단식이 끝났고, 이후 참가자들은 갱도가 아니라 지상 작업과 사무직에 배치되었으며 노동시간과 배급도 조정되었다.
양보는 오래가지 않았다. 1937년 겨울부터 수감자들이 보르쿠타 광산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옛 벽돌 공장에 비밀리에 모였고, 이어진 1938년 3월의 처형은 단식투쟁 지도부를 없앴다. 아르한겔스크주 내무인민위원회 3인 심의회가 서명한 집행 기록에는 1938년 3월 351명의 처형이 남아 있으며 그 명단에 코시오르와 포즈난스키, 지노비예프의 누이 라도미슬렌스카야가 있다. 그가 1937년 12월 10일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된 일은 보르쿠타 반대파에 대한 이 진압과 같은 국면에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