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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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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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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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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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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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1918년 슈티네스와 노사 협정을 맺고 1920년 카프 폭동에 총파업으로 맞선 독일 자유노조 지도자
마리엔부르크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선반공이 되었다. 188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890년부터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1893~1898년과 1903~1920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13년 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의 우파를 이끌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는 성내 평화와 파업 포기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15일 후고 슈티네스와 협정을 맺어 고용주가 처음으로 노조를 노동자 대표로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와 사업장 노동자위원회를 받아들이게 했으나, 노조는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1919년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되었고,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맞서 총파업을 조직했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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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사회민주당 입당
- 1890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 1893제국의회 의원
- 1913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
- 1918.11.15슈티네스-레기엔 협정
- 1919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 1920.03카프 폭동에 맞선 총파업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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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1918년 베를린 경찰청장을 지냈다
“내 직책은 혁명에서 받았으니, 혁명에 의해서만 내놓겠다.”
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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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사회민주당 전임 간부가 되어 드레스덴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 1903–1911독일 제국의회 바덴 제9선거구 의원
- 1908–1917베를린 사회민주당 언론국 책임자
- 1917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하다
- 1918–1919베를린 경찰청장으로 재직하다
- 1919–1920바이마르 국민의회 베를린 의원
- 1920–1925독일 공산당에 가입하고 국가의회 의원으로 일하다
1918년 11월 뮌헨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다가 이듬해 암살된 언론인
1918년 11월 바이에른 혁명을 조직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국을 선포했으며, 1919년 2월 사임하러 가던 중 암살되었다.
베를린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 평론가와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고, 뒤에 뮌헨으로 옮겼다. 전쟁에 반대해 USPD에 들어갔고, 1918년 1월 군수 파업을 이끌다 투옥되었다. 11월 7일 테레지엔비제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병영을 돌아 이튿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하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전쟁 책임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를 공개해 우파의 증오를 샀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사임하러 가던 2월 21일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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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1895『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고 편집자로 활동했다.
- 1898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 1900–1905『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다.
- 1907–1910뉘른베르크의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 1917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 1918군수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혐의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 1918–1919바이에른 인민국 초대 공화파 총리를 지냈다.
연합국의 최후통첩 아래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사회민주당 총리
동프로이센 다르케멘에서 태어나 변호사 사무원으로 일하다 사무직 노동조합을 세웠고, 1908~1918년 자유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12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노동장관이 되었다. 1919년 6월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해 사임하자, 조약을 비판해 왔으면서도 후임 총리를 맡아 조약 비준을 이끌었다. 재정 개혁과 사회보험 확대를 펼쳤으나, 1920년 3월 카프 폭동 때 반란군과 협상한 일로 정부가 물러났다. 뒤에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바르마트 부패 사건으로 1925년 의원직을 내놓았다. 1944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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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1918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
- 1912제국의회 의원(사회민주당)
- 1918노동장관
- 1919–1920독일 총리
- 1921–1922부총리 겸 재무장관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표를 던진 의원, 혁명의 첫 순교자
“주적은 우리 안에 있다.” — 반전 팸플릿(1915)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차관에 유일하게 반대한 제국의회 의원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단·독일공산당을 창립했다. 1919년 1월 봉기 후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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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출간 — 이 저술로 요새금고형
- 1912–1916제국의회 의원 — 1914년 12월 전쟁공채 표결의 유일한 반대표
- 1916노동절 반전 시위로 체포, 징역형
- 1918.1111월 혁명 — 베를린 왕궁에서 '자유사회주의공화국' 선포
- 1918.12–1919.01스파르타쿠스단·KPD 공동 창립, 1월 봉기
- 1919.01의용군에 체포되어 룩셈부르크와 함께 살해
11월 혁명의 혁명정부를 이끌며 평의회 운동을 의회 민주주의로 돌리고 초대 대통령이 된 SPD 지도자
1918년 11월 혁명 때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고 국민의회 선거를 추진했다. 1919년 초대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25년까지 재임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마구공으로 일하다 브레멘에서 당 활동가가 되었고, 1913년 베벨의 뒤를 이어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전쟁 중 전쟁공채와 「성내 평화」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9일 재상직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고, 그날 밤 그뢰너 장군과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좌우의 봉기를 군과 자유군단, 헌법 제48조의 긴급명령으로 눌렀다. 1925년 임기 중 맹장염 수술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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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 1905SPD 당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 1912독일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 1913SPD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11월 혁명 때 국가수상 막스 폰 바덴에게서 국정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다.
- 1919국민의회에서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252월 28일 맹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화가와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1917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8~1919년 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고, 1919년부터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당 대표단으로 참석했으나 코민테른 가입 조건과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재통합된 뒤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1933년 나치 집권 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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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19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9–1922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
- 1920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독립사회민주당 대표로 참석
- 1922–1933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공동대표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당 지도부에 올랐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외무장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처음 총리가 되어 좌파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장애인 고용, 초등교육, 실업급여와 노동자 사회보호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다시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었으며, 대공황과 실업보험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속에 연정이 붕괴하자 1930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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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16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 1919–1920외무장관을 지내고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 1920총리로 재임했다.
- 1928–1930대연정 총리로 재임했다.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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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혁명 봉기를 취소한 KPD 의장이자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공동 창립자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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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카자흐스탄 유배, 모스크바 VSNKh 근무
- 1929KPD 제명, 탈하이머와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국제적 우익반대파 형성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주창
- 1949–1956서독 귀환,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 창립·지도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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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독일공산당의 주요 이론가이자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 분석가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세대의 대표적 이론가로, 파시즘을 금융자본에 종속된 도구가 아니라 계급 대립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집행권력으로 본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론의 창시자. 1929년 KPD에서 축출된 뒤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해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와 거리를 둔 독자 노선을 지키며 망명 속에서도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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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좌파 언론 편집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반전 선전으로 징집·투옥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초기 주요 이론가
- 1923브란들러와 함께 KPD 공동 지도, '독일 10월' 실패로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모스크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쑨원대학에서 연구·강의
- 1929KPD에서 제명,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이론 활동 지속
11년 독방에서도 굴하지 않은 히틀러의 개인적 정치수
“힌덴부르크를 찍는 자는 히틀러를 찍는 것이고, 히틀러를 찍는 자는 전쟁을 찍는 것이다.” — 대통령 선거(1932)
독일공산당(KPD) 의장. 함부르크 항만 노동자 출신으로 당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중정당으로 성장시켰다. 나치 집권 후 체포되어 11년 독방 끝에 1944년 부헨발트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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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1920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 SPD, USPD를 거쳐 KPD로
- 1925–1933KPD 의장, 적색전선전사동맹 지도
- 1925대통령 선거 출마
- 1932대통령 선거 출마
- 1933게슈타포에 체포 — 11년 독방
- 1944.08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부헨발트에서 총살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독일 공산당을 대표해 창립에 기권하고, 뒤에 대숙청으로 총살된 공산주의자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에벌라인은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위임에 따라 즉각 창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레닌의 설득으로 개인 의견은 바뀌었지만, 위임을 따라 반대표 대신 기권했다.
튀링겐 잘펠트 출신의 설계 기술자로 SPD에 들어갔고, 전쟁 중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세웠다. 1919년 3월 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서둘러 새 인터내셔널을 세우면 볼셰비키가 지배하게 된다는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권고에 따라 창립 표결에 기권했다. 창립 뒤에는 코민테른과 독일 당에서 조직·재정 일을 맡았고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37년 체포되어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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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스파르타쿠스단의 지하 정치 조직화에 참여하다.
- 1918독일 공산당(KPD) 창당에 참여하다.
- 1919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창립 표결에 기권하다.
- 1921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다.
- 1937소련에서 체포되어 수감되다.
- 1941모스크바에서 총살되다.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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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
파업 노동자 처벌에 반대했다가 1953년 해임·투옥된 동독 초대 법무장관
베를린의 공구공 출신으로 1910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8~1933년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나치 시기 저항 단체에 가담해 두 차례 투옥되었다. 전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강제 합당을 지지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49년 10월 동독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다. 글라도프 일당 재판에서 사형이 가능하도록 성인 형법을 위법하게 적용하게 했다. 1953년 6월 30일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인터뷰에서 6월 17일 파업 참가자를 혐의만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가 「국가와 당의 적」으로 몰려 해임·제명·체포되었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56년 석방·사면되고 1958년 복당했으며, 1973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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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사회민주당 입당
- 1928–1933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49–1953동독 법무장관
- 1953해임·제명·체포
- 1956석방과 사면
- 1958복당
당 중앙통제위원장으로 1953년 울브리히트 편에 선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원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사회민주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에 들어갔고 마그데부르크·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를 지냈다. 1933년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망명했고, 소련에서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에 참여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1946년까지 작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당 규율을 맡았고 정치국원·인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봉기 뒤 정치국 다수가 울브리히트를 내치려 할 때 호네커와 함께 그의 편에 섰다. 1971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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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독립사회민주당 입당, 노동자·병사 평의회
- 1931–1933공산당 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
- 1945–1946작센 공산당 제1서기
- 1948–1971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장
- 1950–1971정치국원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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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파리·프라하·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활동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