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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와 파리 강화회의 때 프랑스 총리로 헝가리에 가혹한 조건을 밀어붙인 급진파 정치가

방데 출신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 1870년 파리 18구 구청장이 되었고 이듬해 파리 코뮌과 정부 사이의 타협을 시도했다. 독립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1906년 내무장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06~1909년과 1917~1920년 총리를 지냈다. 1917년 11월 전쟁이 가장 어려울 때 총리가 되어 독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 냈다. 헝가리를 독일처럼 약화시키려 해 트리아농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낳았다. 1929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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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파리 18구 구청장
  • 1906내무장관
  • 1906–1909프랑스 총리
  • 1917–1920프랑스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의장

페르디낭 포슈

Ferdinand Foch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51–1929 ○ 자연사

1918년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반격을 이끌고 휴전 조건을 받아 낸 프랑스 원수

타르브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914년 마른 전투에서 제9군을 지휘해 이름을 얻었다. 1918년 3월 독일의 춘계 공세 앞에서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프랑스·영국·미국군을 조율했고, 제2차 마른 전투 뒤 원수가 되어 전쟁을 끝낸 반격을 이끌었다. 11월 콩피에뉴에서 독일의 휴전 서명을 받았다. 강화회의에서 라인란트 분리를 주장했으나 15년 점령에 그치자 베르사유 조약이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에 조언해 폴란드 원수 칭호를 받았다. 1929년 파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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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마른 전투 제9군 사령관
  • 1918연합군 총사령관(3월 26일), 프랑스 원수(8월)
  • 1918콩피에뉴 휴전
  • 1923폴란드 원수

필리프 페탱

Philippe Pétain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56–1951 ○ 반역죄 유죄 · 종신형

베르됭의 영웅에서 비시의 협력자로 전락한 원수

1940년 6월 17일, 페탱은 프랑스에 전투를 중지하겠다고 방송했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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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6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 1916베르됭 전투 프랑스군 지휘
  • 1917–1918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4전쟁장관
  • 1939–1940주스페인 프랑스 대사
  • 1940.06프랑스 각료회의 의장
  • 1940–1944비시 프랑스 국가수반
  • 1945–1951반역죄 유죄 판결과 종신 구금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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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871–1950 ○ 자연사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1940년 권력 이양에 서명한 국가원수

1940년 6월 16일 레이노 내각이 물러난 뒤 그는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페탱은 다음 날 휴전을 요청했다. 그는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고 다음 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광산공학을 전공한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1900년 뫼르테모젤에서 29세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1906년부터 26년간 뫼르테모젤주의회 의장을 지냈다. 1911~1914년 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1917~1919년 봉쇄·해방 지역 장관을 지냈고 1920년 상원에 들어가 1931년 상원의장이 되었다. 1932년 폴 두메르 암살 후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39년 재선되었으나 직접적 권한은 좁았다. 1940년 6월 16일 페탱을 지명했고 7월 10일 569대 80으로 통과된 헌법법에 서명했으며 다음 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사임하지 않았고 1943년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1950년 3월 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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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1광산공병, 베술·낭시
  • 1900–1920하원의원, 브리에
  • 1911–1914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 1917–1919봉쇄·해방 지역 장관
  • 1920–1931상원의원, 상원 부의장·의장
  • 1932–1940프랑스 대통령,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 19407월 10일 헌법법 공포, 사임 없이 권력 이양

레옹 블룸

Léon Blum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남긴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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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 1914–1919전시 사회당 각료 비서실장, 종전 후 하원의원 당선
  • 1920.12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낡은 집」 사수 연설
  • 1921–1936SFIO 재건, 『르 포퓔레르』 주필, 원내 지도자
  • 1936.02왕당파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에게 폭행당해 중상
  • 1936.06–1937.06인민전선 정부 총리, 마티뇽 협정·유급휴가·주 40시간제
  • 1938.03–04제2차 블룸 내각, 상원의 벽에 다시 막혀 한 달 만에 붕괴
  • 1940.07비시에서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표를 던진 80인 중 한 명
  • 1942–1945리옴 재판에서 인민전선을 변호, 이후 부헨발트 인근 특별수용소 억류
  • 1946.12–1947.01과도정부 총리, 전후 재건과 미국 차관 교섭(블룸-번스 협정)
  • 1950.03주이앙조자스에서 사망

모리스 가믈랭

Maurice Gamelin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72–1958 ○ 자연사

방어선과 전진 사이에서 결단을 잃은 총사령관

1940년 5월 16일 파리에서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가믈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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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 1906–1914조프르 장군 참모 및 전쟁계획 보좌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9보병사단 지휘
  • 1919–1924브라질 프랑스군사사절단 단장
  • 1924–1929레반트 프랑스군 사령관
  • 1931–1939육군 참모총장, 육·해·공군 최고 조정
  • 1939–1940프랑스군 총사령관, 사르 공세와 딜 계획 지휘
  • 1940해임 및 비시 정권의 구금

페르낭 빅스

Fernand Vix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알자스) 1876–1941 ○ 사망

협상국 부다페스트 군사사절단장으로 1919년 3월 빅스 각서를 전달한 프랑스 장교

알자스 출신의 프랑스 직업 군인으로, 1898년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식민지 부대의 참모장교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베오그라드의 프랑스 동방군 사령부에 있던 그는 1918년 11월 26일 중령으로서 협상국 군사사절단장이 되어 부다페스트에 왔고, 파도바 휴전협정과 베오그라드 군사협정의 이행을 감시했다. 헝가리 정부에 여러 차례 철수 요구 각서를 전달했으며, 1919년 3월 20일 카로이 대통령에게 건넨 각서로 정부가 이튿날 사임했다.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된 뒤 사절단은 괴롭힘을 받다가 3월 26일 기차로 세게드로 떠났다. 그 뒤 레반트 등지의 식민지 부대에서 복무해 1933년 사단장급 장군이 되었고, 1941년 뇌이쉬르센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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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생시르 사관학교 졸업
  • 1918–1919협상국 부다페스트 군사사절단장
  • 1928여단장급 장군
  • 1933식민지 부대 사단장급 장군
  • 1939제54보병사단장

장 시아프

Jean Chiapp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8–1940 ✕ 격추사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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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로베르 투숑

Robert Touchon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78–1960 ○ 자연사

산악전 경험과 구식 지휘체계의 긴장을 드러낸 프랑스 장군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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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1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알프스 엽병 대대 지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다수 표창
  • 1928–1930제159보병연대 지휘관, 브리앙송
  • 1932–1935생마상 보병·전차 응용학교 교장
  • 1938–1939리옹 군정장관 및 제14군관구 사령관
  • 1939.11–1940.02제23군단 사령관
  • 1940.02–07제6군 사령관, 엔강 방어와 몽코르네 반격 시기
  • 1941–1942비시 국가평의회 위원 및 리옹 국가재판소 판사

폴 레노

Paul Reynaud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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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샤를 들레스트랭

Charles Delestraint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79–1945 ✕ 처형

기갑전과 지하군을 잇고 사라진 장군

1943년 6월 9일, 지하군 지휘관 비달은 파리 라뮈에트역에서 체포되었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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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독일군 포로
  • 1923–1936기갑부대 지휘관, 대령
  • 1936–1939제3기갑여단장, 준장
  • 1939–1940제7군 전차부대 및 제1기갑집단 지휘관
  • 1942–1943비밀군 초대 지휘관, 암호명 비달
  • 1943–1945나츠바일러와 다하우 수감, 처형

샤를 욍치제르

Charles Huntziger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1 ○ 추락사

패전과 정전의 군사적 논리를 대표한 장군

그는 1940년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를 대표해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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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생시르 졸업, 식민보병 소위
  • 1918동부연합군 작전참모, 바르다르 공세 계획
  • 1924–1928톈진 프랑스 조계 주둔군 사령관
  • 1934–1938레반트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9–1940제2군 사령관, 세당 방면
  • 1940제4군집단 사령관, 6월 22일 정전 프랑스 대표단 의장
  • 1940–1941비시 국방장관, 정전군 총사령관

에메 두멩크

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8 ○ 등산 사고사

수송·기계화·모스크바 협상의 장군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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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 1907–1909고등전쟁학교 수학
  • 1916–1918자동차수송국 지휘, 베르됭 보급·교대 조직
  • 1925리프 전쟁 참전
  • 1928독립 기갑사단 구상 제시
  • 1938최고전쟁위원회 위원
  • 1939모스크바 프랑스 군사대표단 단장
  • 1940–1942육군 총사령부 소장, 국가재건 총감, 현역 이탈

피에르 라발

Pierre Laval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83–1945 ✕ 처형

공화정 정치가에서 비시 협력의 설계자로 변한 인물

1942년 노동력 동원을 호소하며 그는 독일의 승리를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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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22사회주의 운동가·변호사
  • 1914–1919하원의원
  • 1923–1944오베르빌리에 시장
  • 1931–1932각료회의 의장
  • 1934–1936외무장관·각료회의 의장
  • 1940.06–12비시 부각료회의 의장
  • 1942.04–1944.08비시 정부 수반
  • 1945고등법원 재판·처형

에두아르 달라디에

Édouard Daladier

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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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40국방장관, 1938년부터는 총리 겸임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0–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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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로제 살랑그로

Roger Salengro

극우 언론의 중상에 목숨으로 답한 인민전선의 내무장관

죽기 직전 블룸에게 남긴 유서: "그들이 나를 망신시킬 수 없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의 책임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탈영병도, 배신자도 아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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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 1925–1936릴 시장
  •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 1936.11.17릴 자택에서 자살, 장례에 수십만 추모
프랑스 국가기관 민족주의 프랑스 프랑스 1890–1970 ○ 자연사

패배 속에서 프랑스의 전쟁 지속을 선언한 국가 지도자

“희망은 사라져야 하는가? 패배는 endgült적인가? 아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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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육군 보병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독일군 포로
  • 1932–1937국방최고회의 사무국 장교, 기갑전과 기동전 저술
  • 1940.05–06제4기갑사단 지휘, 준장 승진, 국방·전쟁 담당 국무차관
  • 1940–1943런던의 자유 프랑스 지도자, 프랑스군과 해외 위원회 조직
  • 1943–1944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공동의장 및 의장
  • 1944–1946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의장
  • 1958–1959국무총리, 제5공화국 헌법 제정 주도
  • 1959–1969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후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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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레오 라그랑주

Léo Lagrange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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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902–1947 ✕ 추락사

자유 프랑스의 기갑 지휘관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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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25–1939기병 장교, 모로코 복무 및 전쟁대학 수료
  • 1940자유 프랑스 합류, 드골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파견
  • 1940–1943카메룬·차드 군사 지휘관, 쿠프라·페잔 전역 지휘
  • 1943–1945제2기갑사단 지휘, 노르망디·파리·스트라스부르 해방전 참가
  • 1945–1946극동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일본 항복식 프랑스 대표
  • 1946–1947북아프리카 육군 감찰관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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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폴랑 시장
  •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앙리 롤탕기

Henri Rol-Tanguy

파리 봉기를 지휘한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지도자

1944년 8월 21일, 그는 파리 전역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라는 명령을 게시했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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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탈보 금속공장 노동자, 공산주의 청년동맹 가입
  • 1936파리 지역 금속노동조합 CGT 서기
  • 1937–1938스페인 국제여단 제14여단 정치위원, 에브로 전투 참전
  • 1941–1942파리 지역 무장조직 책임자, FTP 창설 지도부
  • 1943파리 지역 FTP 재편, FFI 지역 참모부 합류
  • 1944파리 지역 FFI 사령관, 파리 봉기 지휘
  • 1945–1962프랑스 육군 중령, 전후 군사 보직
  • 1962–1987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