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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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47–1934 자연사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야전원수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육군을 지휘했고,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34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대 초 의회 지지를 얻지 못한 내각이 대통령 비상명령에 의존하는 통치를 하도록 승인했고,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정부는 곧 테러와 정치적 조작을 통해 권력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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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다
  • 1925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 1933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다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Hermann von Eichhorn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으로 있다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된 독일 원수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된 프로이센 원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의 폭탄 공격으로 암살됐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고 제18군단장까지 오른 프로이센 장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915년 1월부터 제10군을 이끌며 코브노와 그로드노를 점령했고, 1916년부터는 아이히호른 집단군도 지휘했으며 1917년 12월 원수가 되었다. 1918년 4월 3일 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되었고, 7월 30일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가 마차에 던진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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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914프로이센군 입대, 1866·1870–71년 전쟁 참전, 제9사단장(1901–1904)·제18군단장(1904–1912)
  • 1915–1918제10군 사령관, 코브노·그로드노 점령, 1916년부터 아이히호른 집단군 사령관, 1917년 원수
  • 1918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우크라이나 군정총독, 7월 30일 키예프에서 암살

알프레트 티르피츠

Alfred von Tirpitz

영국 해군에 맞설 대양함대를 건설해 건함 경쟁을 부르고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한 독일 제독

브란덴부르크주 퀴스트린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1916년 제국해군청 장관으로 작은 제국 해군을 영국 해군을 위협할 세계적 해군으로 키웠다. 「위험 이론」에 따른 1898~1912년 함대법으로 독일 해군은 세계 2위가 되었지만, 값비싼 건함 경쟁을 부르고 영국을 프랑스 쪽으로 더 가깝게 밀었다. 그는 해군력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진정제」가 되리라 보았다. 전쟁 중 대양함대가 영국의 해상 봉쇄를 깨지 못하자 무제한 잠수함전을 거세게 주장했고, 1916년 3월 사임했다. 1917년 협상에 의한 강화에 반대하는 극우 조국당을 함께 세워 의장이 되었고, 전후 독일국가인민당 의원을 지냈다. 1930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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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16제국해군청 장관
  • 1898–1912함대법으로 대양함대 건설
  • 1917독일 조국당 공동 창당·의장
  • 1924–1928독일국가인민당 제국의회 의원

빌헬름 2세

Wilhelm II.
독일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독일 독일 1859–1941 → 망명지에서 사망

7월 위기에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1918년 퇴위해 망명한 마지막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세자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맏딸 사이에서 태어나 1888년 황제가 되었고,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했다. 1900년 의화단 진압군에게 훈족처럼 싸우라고 연설했고, 함대 증강과 모로코 개입으로 독일을 고립시켰다. 1914년 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군사 지원을 보장했다. 전쟁 중에는 결정을 최고사령부에 넘겨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군사독재가 섰다. 1918년 11월 9일 퇴위가 발표되자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네덜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그의 인도를 거부했다. 1941년 도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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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독일 황제·프로이센 국왕 즉위
  • 1890비스마르크 해임, 「신노선」
  • 1914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지원 보장
  • 191811월 9일 퇴위 발표, 네덜란드 망명

독일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1918년 베를린 경찰청장을 지냈다

“내 직책은 혁명에서 받았으니, 혁명에 의해서만 내놓겠다.”

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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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사회민주당 전임 간부가 되어 드레스덴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 1903–1911독일 제국의회 바덴 제9선거구 의원
  • 1908–1917베를린 사회민주당 언론국 책임자
  • 1917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하다
  • 1918–1919베를린 경찰청장으로 재직하다
  • 1919–1920바이마르 국민의회 베를린 의원
  • 1920–1925독일 공산당에 가입하고 국가의회 의원으로 일하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Erich Ludendorff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5–1937 ○ 자연사

힌덴부르크와 함께 독일의 전쟁을 지휘하고 전후 맥주홀 폭동에 가담한 장군

포젠주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나 참모본부에서 일했고, 1914년 리에주와 탄넨베르크로 이름을 얻었다. 1916년 8월 힌덴부르크와 함께 최고사령부를 넘겨받아 제1병참총감으로서 사실상의 군사독재 아래 전쟁을 지휘하고 힌덴부르크 계획을 밀어붙였다. 1918년 3월 미하엘 작전으로 춘계 공세를 열었으나 실패했고, 9월 즉각 휴전을 요구한 뒤 10월 해임되었다. 전후 비수설을 퍼뜨렸고 1920년 카프 폭동과 1923년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에 가담했다. 1924~1928년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의원을 지냈다. 1937년 뮌헨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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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리에주 공략, 탄넨베르크 승리
  • 1916–1918제1병참총감
  • 1918춘계 공세(미하엘 작전), 10월 해임
  • 1920카프 폭동 가담
  • 1923맥주홀 폭동 가담
  • 1924–1928제국의회 의원(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필리프 샤이데만

Philipp Scheidemann
독일 국가기관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5–1939 → 망명지에서 사망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총리가 된 SPD 정치가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카셀의 인쇄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들어갔다. 11월 9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해 에베르트의 노여움을 샀다. 인민대표평의회 위원을 거쳐 1919년 2월 총리가 되었으나, 베르사유 조약 수락을 거부하며 6월 사임했다. 1920년대 카셀 시장을 지냈고 1922년 극우의 청산가리 테러를 피했다. 1933년 망명해 코펜하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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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제국의회에 진출해 사회민주당(SPD) 의원단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 1917SPD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6월 제국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사회민주당 장관이 되었다.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혁명기 과도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에 참여했다.
  • 19192월 13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수반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내각과 함께 사임했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

Rüdiger von der Goltz

핀란드와 발트에서 독일의 동방 영향력을 지키려 한 자유군단 사령관

백군 병참장군 하네스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두고 "핀란드의 사실상의 섭정"이라 불렀다.

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도운 뒤 1919년 라트비아에서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해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다. 체시스 패배 뒤 소환되었고 바이마르 시기 극우 퇴역군인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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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대장성(대참모부) 배속
  • 1914제76보병연대 지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
  • 1918발트해 사단장, 핀란드 백군 지원 후 '주핀란드 독일군 장군'
  • 1919제6예비군단장, 리가 탈환 후 체시스(벤덴)에서 패배하고 소환
  • 1920카프 쿠데타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
  • 1924–1933독일 조국단체연합(VVVD) 의장

1918년 11월 뮌헨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다가 이듬해 암살된 언론인

1918년 11월 바이에른 혁명을 조직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국을 선포했으며, 1919년 2월 사임하러 가던 중 암살되었다.

베를린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 평론가와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고, 뒤에 뮌헨으로 옮겼다. 전쟁에 반대해 USPD에 들어갔고, 1918년 1월 군수 파업을 이끌다 투옥되었다. 11월 7일 테레지엔비제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병영을 돌아 이튿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하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전쟁 책임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를 공개해 우파의 증오를 샀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사임하러 가던 2월 21일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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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5『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고 편집자로 활동했다.
  • 1898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 1900–1905『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다.
  • 1907–1910뉘른베르크의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 1917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 1918군수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혐의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 1918–1919바이에른 인민국 초대 공화파 총리를 지냈다.

막스 폰 바덴

Max von Baden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29 ○ 자연사

1918년 휴전을 요청하고 황제의 퇴위를 발표한 뒤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긴 독일 제국 마지막 재상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의 혁명적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막스 폰 바덴은 황제의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바덴 대공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프로이센 군 장교를 지냈고, 전쟁 중에는 적십자와 전쟁 포로 구호 활동으로 온건파의 신망을 얻었다. 1918년 10월 3일 재상이 되어 SPD를 처음 입각시키고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했으며, 제국을 의회 책임 군주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이끌었다. 11월 9일 베를린이 시위대로 가득 차자 황제의 동의 없이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긴 뒤 물러났다. 1920년 쿠르트 한과 함께 잘렘 기숙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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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0.03독일 제국 재상에 취임해 SPD와 다수파 정당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 1918.10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하고 제국 헌법 개정을 추진해 의회 책임 정부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 1918.11.09황제의 퇴위를 발표한 뒤 재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39 ○ 자연사

1918년 에베르트와 비밀 협약을 맺어 장교단을 지키고, 뒤에 바이마르 국방·내무장관을 지낸 장군

1918년 11월 10일 에베르트와 비밀 전화 협약을 맺어 군의 새 정부 지지를 약속하고 장교단의 지휘권을 보전했다.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참모 장교로 철도 수송 전문가였고, 전쟁 중 전시청을 맡아 군수 생산과 노동 동원을 지휘했다. 1918년 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부 제1병참감이 되었고, 11월 황제에게 군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알렸다. 11월 10일 밤 에베르트와 전화로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와 장교단 지휘 체계의 유지를 맞바꾸었다. 뒤에 교통장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지냈고 1932년 나치 돌격대 금지령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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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육군에 입대했다.
  • 1912참모본부 철도부장이 되어 전시 병력 수송과 보급을 맡았다.
  • 1918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제1병참감이 되었고, 휴전 뒤 에베르트와 협력해 병력 귀환 및 혁명 진압용 의용군 편성을 추진했다.
  • 1920–1923교통장관을 지냈다.
  • 1928–1932국방장관을 지냈다.
  • 1931–1932내무장관을 지냈다.

구스타프 노스케

Gustav Noske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키워 1919년 좌파 봉기를 진압한 SPD 국방장관

1919년 베를린 봉기 진압을 지휘해 자유군단과 군대를 투입하고, 3월 사격 명령으로 군의 즉결 처형을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바구니 제조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1906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군사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1918년 11월 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 봉기를 수습하고 총독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위기 뒤 USPD가 떠난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를 맡았고,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조직해 1월 봉기와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19년 2월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1920년 카프 폭동 뒤 물러났다. 하노버 주지사를 지냈고 1944년 7월 음모 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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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바구니 제조공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협회 의장을 지냈다.
  • 1906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해군·육군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 1918.11–12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들과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이끌었고, 12월 28일 군·해군 전국위원이 되었다.
  • 1919.02–1920라이히스베어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유군단과 군대를 동원해 1월 봉기 및 베를린의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20년 카프 폭동 뒤 사임했다.
  • 1920–1933프로이센 하노버 주의 고등행정관을 지냈으며, 1933년 9월 직업공무원 복구법에 따라 해임되었다.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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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 1918.02–03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지휘,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종 조약 강요
  • 1919–1920폴란드 국경 여단장, 이후 퇴역
  • 1920–1927반소비에트 연합군 개입을 주장하는 호프만 계획 추진, 회고록 집필

구스타프 바우어

Gustav Bauer

연합국의 최후통첩 아래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사회민주당 총리

동프로이센 다르케멘에서 태어나 변호사 사무원으로 일하다 사무직 노동조합을 세웠고, 1908~1918년 자유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1912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노동장관이 되었다. 1919년 6월 샤이데만이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해 사임하자, 조약을 비판해 왔으면서도 후임 총리를 맡아 조약 비준을 이끌었다. 재정 개혁과 사회보험 확대를 펼쳤으나, 1920년 3월 카프 폭동 때 반란군과 협상한 일로 정부가 물러났다. 뒤에 부총리 겸 재무장관을 지냈고, 바르마트 부패 사건으로 1925년 의원직을 내놓았다. 1944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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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8노동조합 총위원회 부의장
  • 1912제국의회 의원(사회민주당)
  • 1918노동장관
  • 1919–1920독일 총리
  • 1921–1922부총리 겸 재무장관

헤르만 뮐러

Hermann Müller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당 지도부에 올랐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외무장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처음 총리가 되어 좌파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장애인 고용, 초등교육, 실업급여와 노동자 사회보호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다시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었으며, 대공황과 실업보험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속에 연정이 붕괴하자 1930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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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16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 1919–1920외무장관을 지내고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 1920총리로 재임했다.
  • 1928–1930대연정 총리로 재임했다.

빌헬름 쿠노

Wilhelm Cuno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76–1933 ○ 자연사

루르 점령에 소극적 저항으로 맞서다 초인플레이션 속에 물러난 무당파 총리

튀링겐 줄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재무부 관리로 1차 세계대전 초 독일의 식량 공급을 조직했다. 1917년 해운회사 함부르크-아메리카 노선에 들어가 사장이 되었다. 1922년 11월 의회 표결 없이 대통령령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최초의 무당파 총리가 되어 「실무 내각」을 꾸렸다. 1923년 1월 프랑스·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소극적 저항을 호소했고, 그 비용을 주로 돈을 찍어 대면서 초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파업의 물결 속에 8월 사회민주당이 낸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1932년 히틀러의 경제 자문에 참여했고 1933년 1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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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6제국 곡물청 책임자
  • 1917함부르크-아메리카 노선 입사
  • 1922–1923독일 총리
  • 1926함부르크-아메리카 노선 사장

빌헬름 리터 폰 레프

Wilhelm Josef Franz Ritter von Leeb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76–1956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를 지휘한 독일 국방군 원수

그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도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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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바이에른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및 세르비아 전역 복무
  • 1930–1933제7사단 사령관
  • 1939–1941C집단군 사령관
  • 1941.06–1942.01북부집단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공격과 봉쇄 지휘
  • 1948최고지휘부 재판 유죄 판결,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

에리히 레더

Erich Raeder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76–1960 ○ 전범 유죄, 1955년 석방

대양함대 구상을 끝까지 밀어붙인 나치 독일 해군 지휘관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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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제정 독일 해군 입대
  • 1912–1918고위 해군참모,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8–1935국가해군 해군지휘부장
  • 1935–1939전쟁해군 총사령관, 상급제독
  • 1939–1943대제독, 전쟁해군 총사령관
  • 1943총사령관직 사임 및 퇴역
  • 1946–1955뉘른베르크 재판 유죄, 종신형 복역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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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Gustav Stresemann

1923년 총리로 소극적 저항을 끝내고 외무장관으로 로카르노 조약을 맺은 정치가

베를린에서 태어나 1907년 국민자유당 의원이 되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토 병합과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했다. 패전 뒤 독일인민당을 세웠고 점차 공화국을 받아들였다. 1923년 8월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루르의 소극적 저항을 끝내고, 공산당이 들어간 작센·튀링겐 정부를 군대로 몰아냈으며, 렌텐마르크로 초인플레이션을 잡았다. 11월 불신임으로 물러났지만 죽을 때까지 외무장관으로 남아 도스안과 로카르노 조약, 국제연맹 가입을 이끌었고 192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29년 뇌졸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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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제국의회 의원(국민자유당)
  • 1917국민자유당 대표
  • 1918독일인민당 창당
  • 1923총리 겸 외무장관
  • 1923–1929외무장관
  • 1925로카르노 조약
  • 1926노벨 평화상

바이마르 공화국 재무장관을 지내고 1945년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을 세운 농업 정치가

쾰른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농학을 공부했고, 1911년부터 로마의 국제농업연구소에서 일했다. 1920년 가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식량장관이 되었고, 1922년부터 1923년 8월 쿠노 내각이 물러날 때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다. 나치 집권 뒤 체포되었고 콜롬비아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귀국한 뒤 괴르델러 일파와 이어져 7월 20일 사건 뒤 체포되었고, 1945년 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아내가 집행을 늦춰 붉은 군대의 베를린 점령으로 살아남았다. 1945년 6월 베를린과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의 첫 의장이 되었으나, 보상 없는 토지개혁을 비판해 12월 군정청에 의해 물러났다. 서독으로 옮겨 농민연맹 의장을 지내며 통일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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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4로마 국제농업연구소 부장
  • 1920독일 식량장관
  • 1922–1923독일 재무장관
  • 1945나치 법정에서 사형 선고
  • 1945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의장, 12월 해임
  • 1948독일 농민연맹 의장

발데마르 파프스트

Waldemar Pabst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0–1970 ○ 자연사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하고 카프 폭동에 가담한 자유군단 장교

1919년 1월 근위기병소총사단 참모장교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했다. 1920년 카프-뤼트비츠 폭동을 조직하고 오스트리아 향토방위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1월 최대 자유군단 부대인 근위기병소총사단의 참모 장교로, 붙잡혀 온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심문한 뒤 살해를 명령했다. 뒤에 「내가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고 자랑했다. 1920년 카프 폭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가 오스트리아로 가서 우익 향토방위대 조직을 도왔고 추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나치당과 느슨한 관계에 머물며 공적 무대에서 물러났다. 1962년 인터뷰와 회고에서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살해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고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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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3프로이센 참모본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 1914–1918대위 겸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 1918–1919근위기병소총사단의 제1참모장교로 베를린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체포 후 심문을 거쳐 살해를 명령했다.
  • 1919–1920민족주의 단체 국민연합의 상무이사로 카프-뤼트비츠 폭동의 기술·조직 준비를 맡았다. 폭동 실패 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 1921–1930티롤 향토방위대의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연방참모장이 되었다. 1930년 체포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 1930–1943베를린 라인메탈-보르시히에서 무기부문 책임자로 일했고 1938년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1943년 스위스에 남아 정치적 망명을 받았다.
  • 1955–19701955년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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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으로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장군이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수장으로서 그는 범죄 명령에 서명하고 나치의 학살과 전쟁 수행에 책임을 졌다.

카이텔은 1938년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군 통수권 아래서 정책을 전달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동부 지역에서의 독일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한 관할권 명령, 소련 정치장교의 즉결 처형을 요구한 정치장교 명령, 야간과 안개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과 포고에 서명했다. OKW 수장으로서 그는 소련에서 아인자츠그루펜과 군대의 민간인 학살 협력 및 소련군 포로의 가혹한 처우에 책임이 있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네 혐의 모두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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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프로이센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다.
  • 1938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에 임명되었다.
  • 19455월 독일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