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1799년 11월 9–10일 브뤼메르 쿠데타로 그는 탈레랑·시에예스 등과 결탁해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총재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제1통령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코르시카의 이탈리아계 가문 출신으로 1785년 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1789년 혁명을 지지했으며, 1793년 툴롱과 1795년 방데미에르에서 왕당파를 제압해 승진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고 1799년 11월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해 제1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과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무너져 1814년 엘바로 유배되었고, 1815년 백일천하 뒤 워털루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에서 1821년 사망했다. 나폴레옹 법전과 공교육 같은 개혁을 남긴 한편 점령지 약탈, 언론 폐쇄와 비판자 탄압, 식민지 노예제 부활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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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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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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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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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