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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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러시아 제국 국가기관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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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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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0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이반 로그기노비치 고레미킨

Иван Логгинович Горемыкин

무위(無爲)로 전제를 지켰다 믿은 제국 최후의 수석대신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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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 1891법무차관
  •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 1906.04–0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 1914.01–1916.0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 1916제1급 추밀고문(제국 최후의 수훈자), 해임
  • 1917.12소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됨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골리친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Голицын

스스로 무능을 고백한 제국의 마지막 총리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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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1879내무부 관료, 폴란드령에서 농민 담당
  • 1879–1885아르한겔스크 부지사, 내무부 경제국 부국장
  • 1885–1903아르한겔스크·칼루가·트베리 지사
  • 1903–1915원로원 의원, 국가평의회 의원
  • 1915–1916러시아 포로구호위원회 의장
  • 1917.01–03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스뱌토폴크-미르스키

Пётр Дмитрие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신뢰의 시대"를 약속했으나 피의 일요일로 끝난 비운의 내무장관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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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펜자 주지사
  • 1897–1900예카테리노슬라프 주지사
  • 1900–1902내무차관 겸 헌병단장
  • 1902–1904빌나·코브노·그로드노 총독
  • 1904.08–1905.01내무장관, '신뢰의 시대'
  • 1905.01피의 일요일 후 사임, 정계 은퇴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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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02–0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게오르기 예브게니예비치 리보프

Георгий Евгеньевич Львов

류리크 왕조의 후예, 제국의 마지막 자유주의 총리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다." — 임시정부 총리로서 리보프는 자신이 이끄는 정부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이의 이중권력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은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제국 말기 젬스트보 자유주의 운동의 상징적 지도자였다. 러일전쟁 시기 의료여단을 이끌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과 젬고르를 이끌며 군수·의료 지원을 조직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초대 총리 겸 내무장관에 취임하여 보통선거·언론의 자유·사형 폐지·종교·계급·인종 차별 철폐 등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으나, 소비에트와의 이중권력 속에서 실질적 권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7월에 사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게 정권을 넘긴 후, 10월 혁명으로 체포되었다 탈출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 파리에서 가난하게 회고록을 쓰다 192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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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3툴라 현 젬스트보, 기근 구호 활동
  • 1900–1906툴라 현 젬스트보 행정위원회 의장
  • 1904–1905러일전쟁: 젬스트보 의료여단 조직·지휘, 전국적 영웅
  • 1906제1대 국가두마 의원(카데트), 의료·식량위원회 위원장
  • 1914–1917전러시아 젬스트보 연합 의장, 육군 의료·보급망
  • 1915–1917젬고르 공동위원회 지도자, 전시 군수·구호 총괄
  • 1917.03–07임시정부 총리 겸 내무장관: 보통선거·사형폐지 등 개혁
  • 1918–1925체포·탈출, 미국 거쳐 파리 망명, 회고록 집필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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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19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9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0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0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세르게이 예피모비치 크리자놉스키

Сергей Ефимович Крыжановский
러시아 제국 국가기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62–1935 ○ 자연사

1907년 「뻔뻔한」 선거법으로 두마를 길들인 제국의 법률 설계사

자신이 초안한 세 가지 선거법 중 채택된 두 번째 안을 두고 크리자놉스키는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의석을 배정해놓고 실제로는 지주들이 그 대표를 골라내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법률가이자 관료로, 1905년과 1907년의 국가두마 선거법을 설계한 인물이다. 내무차관으로서 그는 1907년 선거법 초안을 세 가지 작성했고, 그중 채택된 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 불렀다. 노동자·농민 쿠리아에 최소 의석을 보장하면서도 실제 대의원 선출권은 지주가 장악한 도 선거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1911년부터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 국무장관을 지냈고, 혁명 후 망명하여 파리에서 군주제 회고록을 편집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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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1896내무성 경제국 과장
  • 1904–1906내무성 지방경제총국 부국장
  • 1906–1911내무차관 (스톨리핀의 오른팔)
  • 1907상원의원 · 추밀고문관
  • 1911–1917제국 국무장관 (마지막 재임자)
  • 1917국가평의회 의원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볼로고츠키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Вологодский
러시아 백색운동 반혁명 세력 러시아인 러시아인 1863–1925 ○ 자연사

타협으로 백색 시베리아를 묶은 변호사 정치가

콜차크에게 그는 군 지휘관의 자의와 정부의 무능으로 권위가 시간마다 떨어진다고 직언했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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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7시베리아 사법기관 서기관·판사·검사보
  • 1897–1917톰스크 변호사, 도시 두마 의원
  • 1902–1907톰스크 사회혁명당 조직과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 지도자
  • 1917톰스크 губер니야 комиссар, 옴스크 사법원장
  • 1918.01–06자치 시베리아 임시정부 외무장관
  • 1918.06–11시베리아 임시정부 의장
  • 1918.11–1919.11러시아 정부 각료회의 의장
  • 1920–1925중국 망명, 법률·교민 업무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키시킨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ишкин

10월 혁명 당일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전권자로 임명된 카데트 장관

10월 25일 오후 4시, 각료회의는 키시킨에게 수도 전역의 군·민 기관을 지휘할 전권을 부여했다. 그는 즉시 폴콥니코프 대령을 "무활동"으로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

모스크바 출신 의사에서 카데트 좌파의 중앙위원이 된 정치인으로, 1차 세계대전 중 전러시아 도시연합의 부총책임자로 활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를 거쳐 9월 마지막 내각의 사회복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 25일 오후 페트로그라드 치안 회복의 특별 전권을 부여받아 폴콥니코프를 해임하고 바그라투니를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으나, 그날 밤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겨울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내전 후 의사로 복귀했고 1921년 프로코포비치·쿠스코바와 함께 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체포와 유배를 거듭하다 193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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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02카데트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시두마 의원, 전러시아 도시연합 부총책임자
  • 1917.03–09모스크바 임시정부 코미사르
  • 1917.09–10임시정부 사회복지 장관
  • 1917.10.25페트로그라드 질서 회복 특별 전권자, 폴콥니코프 해임·바그라투니 임명, 겨울궁전에서 체포
  • 1918–1921석방 후 의사 복귀, 1919년 '전술중앙' 사건으로 체포·석방
  • 1921–1923전러시아 기근 구제 위원회(포모골) 공동 조직, 체포·볼로그다 유배 후 사면
  • 1923–1930보건인민위원부 요양부서 근무, 연금·식량 배급 박탈, 193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러시아 제국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처형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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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08–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0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년대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관료·경찰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환각과 정신병 증세를 겪으면서도 혁명의 위협을 무시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를 풀지 못했으며, 각료들과 총리의 사임 요구에도 자리를 지켰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투옥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처형되었다. 그의 몰락과 오판은 300년 왕조의 붕괴를 앞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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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04–0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09–1917.0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0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러시아 제국 국가기관 러시아 러시아 1878–1918 ✕ 살해

하루 동안의 차르가 될 수 있었으나 제헌의회에 양보한 마지막 로마노프

1917년 3월 16일, 미하일은 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우리 위대한 국민이 보통선거로 선출한 제헌의회가 정부 형태를 결정하여 나에게 그 권력을 부여할 때에만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아들로, 형 니콜라이 2세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제위 계승 1순위에 있었으나, 평민과의 모르가나틱 결혼을 감행해 스스로 왕조의 변방으로 물러났다. 1917년 3월 15일 니콜라이 2세가 아들 대신 그에게 양위했을 때, 이튿날 그는 제헌의회가 국민 투표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때까지 제위 수락을 유보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사실상 끝났고, 그는 가치나로 물러나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18년 6월 페름에서 현지 체카 요원들에게 납치·살해되어 볼셰비키 손에 죽은 첫 로마노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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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4황태제(추정상속인), 국무회의 의원
  • 1912나탈리야 브라소바와 모르가나틱 결혼, 모든 공직 해임과 국외 추방
  • 1914–1916카프카스 원주민 기병사단('야생사단') 및 제2기병군단 지휘,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7.01–03기병 총감
  • 1917.03.15–16니콜라이 2세의 양위로 미하일 2세로 선포됐으나 제헌의회까지 제위 수락 유보
  • 1918.03–06페름 유형, 체카에 납치·살해됨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트빌리시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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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트빌리시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압크센티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Авксентьев

SR당 창건자이자 콜차크에게 전복된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마지막 의장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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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SR 분파 지도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07SR 중앙위원 선출; 오브도르스크 유형 후 해외 탈출
  • 1907–1917파리 망명 중 SR 기관지 《즈나먀 트루다》 편집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7전러시아 민주회의·예비의회(임시평의회) 의장
  • 1918우파 국가회의 의장,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수반
  • 1918–1940파리 망명, 프리메이슨 활동, 《소브레멘니예 자피스키》 발행
  • 1940–1943뉴욕에서 잡지 《자 스보보두》 발행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갈려 나간 웅변가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연단에서 법무장관 취임을 알리며 외쳤다. "나는 인민 없이 살 수 없다. 여러분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를 죽여라!" 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와 병사들은 열광했다.

1917년 임시정부의 얼굴이자 마지막 총리. 8월에는 코르닐로프를 막기 위해 감옥의 볼셰비키까지 무장시켰고, 10월에는 그를 지키러 올 군대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장 탈출설은 소비에트의 날조다. 그는 반세기를 망명지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가」를 강연하며 살다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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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7두마 의원(트루도비키), 정치재판 변호사로 명성
  • 1917.03임시정부 법무장관, 정치범 사면, 사형 폐지
  • 1917.05육해군장관, 6월 공세 강행과 실패
  • 1917.07–10총리, 코르닐로프 사건, 10월에 실각
  • 1918–1970파리·뉴욕 망명, 저술과 강연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세르게예프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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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노만 첼레비지한

Номан Челебиджихан
민족주의 러시아 제국 1885–1918 ✕ 살해

크림 인민공화국 초대 의장이자 선거로 뽑힌 첫 크림 무프티, 크림 타타르 국가 가사를 쓴 시인

1885년 장코이 근처 비유크수나크 마을에서 이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이스탄불로 가 법학과 신학을 배우며 「청년 타타르 작가 협회」와 비밀 조직 「바탄」(조국)을 만들었고, 1912년 크림으로 돌아왔다. 1917년 3월 크림 무슬림 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내무장관의 임명이 아닌 선거로 뽑힌 첫 크림 무프티가 되었다. 6월 반정부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5천 명의 항의 서명으로 풀려났다. 쿠룰타이를 준비해 12월 크림 인민공화국 디렉토리 의장 겸 법무 국장이 되었으나, 1918년 1월 볼셰비키에게 체포되어 2월 23일 세바스토폴에서 재판 없이 수병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시 「안트 엣켄멘」은 크림 타타르의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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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이스탄불에서 법학·신학 수학, 「바탄」 결성
  • 1913페테르부르크 정신신경학 연구소 법학부
  • 1917크림 무슬림 집행위원회 의장, 크림 무프티
  • 1917–1918크림 인민공화국 디렉토리 의장 겸 법무 국장

물라누르 바히토프

Мулланур Вахи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비에트 러시아 1885–1918 ✕ 처형

카잔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를 이끌고 소비에트 무슬림 업무 위원부 초대 의장이 된 타타르 혁명가

1885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출생지는 카잔과 페름 현 카자예보로 엇갈린다. 1905년 혁명에 참여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을 거쳐 1912년 정신신경학 연구소 법학부로 옮겨 미하일 프룬제 등과 만나고 무슬림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2월 혁명 뒤 카잔에서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를 이끌며 신문 「크즐 바이라크」를 냈고, 10월 카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뽑혔다. 1918년 1월 레닌의 권유로 무슬림 업무 위원부(무스콤) 의장이 되어 불라크 너머 공화국 진압에 수병 부대를 보냈다. 7월 볼가 비상 식량 위원이 되었고, 8월 코무치 인민군이 카잔을 점령한 뒤 붙잡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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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경제학부 입학
  • 1912정신신경학 연구소 법학부, 무슬림 학생 서클 조직
  • 1917카잔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 지도, 카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무슬림 업무 위원부(무스콤) 의장
  • 1918볼가 지역 비상 식량 위원

빅토르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Виктор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콜차크 독재를 설계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선 카데트 정치인

1919년 9월 22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녹스 장군이 내게 왔다. 처칠은 오직 최고 통치자만 지원하라고 훈령했다.」 붕괴 직전의 정권 내막을 기록한 총리의 목소리다.

제정 러시아의 카데트당 소속 두마 의원으로, 1918년 11월 옴스크에서 군사 쿠데타를 조직해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콜차크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붕괴 직전의 백색 정부를 이끌었고, 정권의 유일한 충성파 정치인으로서 최후까지 콜차크 곁에 남았다. 1920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의해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정치중앙에 넘겨졌고, 2월 7일 새벽 레닌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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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카데트당 소속 제4대 국가두마 의원 (톰스크현)
  • 1914–1917제3 시베리아 위생·급식대 대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02–05임시정부 크론시타트 항구 사령관 겸 정부위원
  • 1918.08–11시베리아에서 군사독재 수립 운동 주도, 옴스크 쿠데타 조직
  • 1918.12–1919.05콜차크 정부 경찰국장 → 내무차관
  • 1919.05–11콜차크 정부 내무장관
  • 1919.11–1920.01각료회의 의장 (총리)
  • 1920.01–02체코군단에 넘겨져 콜차크와 함께 이르쿠츠크 수감, 총살

마트베이 이바노비치 스코벨레프

Матвей Иванович Скобелев

4월 위기 속 군중을 달래러 보내진 멘셰비키 노동장관

1917년 4월 20일, 밀류코프의 각서에 격분한 15,000명의 무장 군중이 마린스키궁 앞에 집결하자, 고츠와 함께 파견된 스코벨레프는 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바쿠의 유복한 몰로칸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빈에서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을 도우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에 올랐고, 4월 위기 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궁 앞 군중을 진정시키러 파견되었으며, 5월 5일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10월혁명에 반대했으나 1922년 귀국·입당하여 대외무역 분야에서 일했고, 대숙청 속에 1938년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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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바쿠 노동자 파업 지도
  • 1906–1912빈 망명, 트로츠키의 『프라우다』 편집, 빈 공과대학 졸업(1912)
  • 1912–1917제4두마 의원(자캅카스 러시아인 대표), 멘셰비키파
  • 1917.02–05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 집행위원
  • 1917.05–09임시정부 노동장관, VTsIK 부의장(6월~)
  • 1919–1920바쿠 거주, 적군 식량 지원 활동
  • 1920–1925프랑스·영국 망명, 비공식 소련 무역대표
  • 1925–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국가계획위원회·전연방라디오위원회 근무

아흐메트제키 발리디

Әхмәтзәки Вәлиди
소련공산당·볼셰비키 민족주의 러시아 제국 → 튀르키예 1890–1970 → 망명지에서 사망

바시키르 자치를 선포하고 바시키르 군을 이끌다 소비에트 쪽으로 넘어간 바시키르 민족운동 지도자

1890년 우파 현 쿠쟈노보에서 태어나 카잔의 카시미야 마드라사에서 투르크 역사를 가르쳤다. 1917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고, 샤리프 마나토프와 바시키르 중앙 슈로를 꾸려 바시키르 자치를 선포하고 바시키르 군 사령관이 되었다. 1918년 2월 볼셰비키에게 체포되었다가 4월 풀려나 두토프·콜차크 편에서 싸웠으나, 1919년 2월 군을 소비에트 쪽으로 넘겼다. 1920년 바시레프콤 의장이 되었지만 6월 자치 축소에 반발해 사퇴하고 투르키스탄에서 바스마치 운동을 이끌었다. 1923년 망명해 1925년 튀르키예 국적을 얻었고, 이스탄불 대학 교수와 빈 대학 박사가 되었다. 1970년 이스탄불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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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5카잔 카시미야 마드라사 교사
  • 1915–1917국가 두마 무슬림 의원 지원국
  • 1917–1919바시키르 중앙 슈로 부의장, 바시키르 군 사령관
  • 1919–1920바시레프콤 군사 인민위원·부의장, 1920년 의장
  • 1920–1923투르키스탄 바스마치 운동 지도자
  • 1927이스탄불 대학 튀르크사 교수
  • 1935빈 대학 철학 박사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시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929–2024 ↓ 퇴임 1991

페레스트로이카 경제개혁기의 총리

1990년 5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최고회의에서 빵과 식료품 가격이 인상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1989~1990년 수백 개 도시에 배급제가 도입된 물자 부족 상황에서, 이 발언은 리시코프 내각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929년 9월 28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도네츠크주 딜레예프카 마을의 광부 집안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우랄마시 총지배인과 고스플란 제1부의장을 거쳐 1985년 9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각료회의가 폐지될 때까지 재임했으나 파블로프가 취임한 1991년 1월 14일까지 형식상 정부 수반으로 남았다. 199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약 1,336만 표를 얻어 옐친에 이어 2위를 했다. 1995년 국가두마 의원, 2003년부터 연방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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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91.01각료회의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