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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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드 스미스

Gerard C. Smith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4–1994 ○ 자연사

핵시대의 협상가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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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

William Westmoreland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4–2005 ○ 자연사

1964~1968년 남베트남 주둔 미군을 지휘하며 소모전과 사살 집계를 앞세운 미국 육군 장군

웨스트모얼랜드는 베트남전에서 소모전과 ‘수색·섬멸’을 채택하고 적 사살 집계를 성과의 핵심 척도로 삼았다. 미군 병력은 50만 명을 넘었지만, 적은 손실을 보충했고 전쟁 승리라는 그의 낙관적 주장은 1968년 뗏 공세 뒤 신뢰를 잃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1936년 웨스트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2차 대전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64년 1월 남베트남에 파견되어 6월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를 맡았다. 해병대 상륙 뒤 방어 위주에서 벗어나 미군이 직접 적을 찾아 섬멸하는 소모전을 주장했고, 대규모 포격과 공습을 썼다. 1967년 11월 「끝이 보인다」고 말했으나 1968년 뗏 공세 뒤 20만 명 증파 요청이 알려지면서 3월 교체되었다. 1968~1972년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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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 1942–1945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34야전포병대대를 지휘하고, 이후 제9보병사단 참모장을 지냈다.
  • 1958–1963제101공수사단장에 이어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지냈다.
  • 1964–1968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소모전을 지휘했다. 뗏 공세 뒤 미국으로 돌아와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 1968–1972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아서 룬달

Arthur C. Lundah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5–1992 ○ 호흡부전

U-2 정찰사진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문을 연 사진판독의 대부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 1962년 10월 15일,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미사일을 확인하며

시카고 출신의 지질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사진판독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 CIA에 합류해 사진판독부를 이끌었고, 1961년 국가사진판독센터(NPIC)의 초대 소장이 되어 U-2 정찰기와 초기 정찰위성의 영상 분석을 총괄했다. 1962년 10월 15일, NPIC 분석관들이 쿠바 상공 U-2 사진에서 소련 SS-4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지를 식별했을 때 룬달이 직접 확인하고 '내 생애 이보다 옳았으면 싶었던 적은 없다'는 말과 함께 CIA 본부에 보고했으며, 다음 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이를 브리핑했다. 1973년 퇴임까지 NPIC를 이끌며 냉전기 미국의 영상정보 역량을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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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시카고 대학 지질학 학사·석사
  • 1942–1945미 해군 사진판독 장교
  • 1946–1953해군사진판독센터 측량과장
  • 1953–1961CIA 사진판독부장
  • 1961–1973국가사진판독센터(NPIC) 초대 소장
  • 1973국가안보훈장 수상 및 퇴임

그레이스 리 보그스

Grace Lee Boggs
볼셰비키에 대한 좌파 비판 미국 중국 1915–2015 ○ 자연사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자에서 디트로이트 혁명의 철학자로

“우리가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지도자다.” — 90대 디트로이트 인터뷰에서

중국 이민 노동자의 딸로 브린마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나 인종차별로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C.L.R. 제임스, 라야 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3인 핵심으로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공저했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를 최초로 영역했다. 1953년 흑인 자동차 노동자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고 흑인해방 중심의 공동체 혁명 실천으로 전환, 90대까지 『다음 미국 혁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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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중국 이민자 식당 주인의 딸로 출생, 중국명 위핑(玉平)
  • 1935바너드 칼리지 졸업
  • 1940브린마 칼리지에서 조지 허버트 미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 1940–1945시카고 대학 철학 도서관에서 저임금 사서로 근무, 세입자 권리 운동으로 노동자당 입당
  • 1945–1947C.L.R. 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
  • 1947SWP에 합류, 필명 '리아 스톤'으로 존슨-포레스트 경향 저술 활동
  • 1950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 공동 저술
  • 1951SWP 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참여
  • 1953흑인 자동차 노동자·정치 활동가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디트로이트로 이주
  • 1962C.L.R. 제임스와 결별, 부부 독자 노선으로 코레스폰던스 이끌며 디트로이트 공동체 운동 집중
  • 1964맬컴 엑스에게 미 상원 출마를 설득하려 시도했으나 무산
  • 1970디트로이트 아시아 정치연합 공동 창립
  • 1974제임스 보그스와 『20세기의 혁명과 진화』 출간
  • 1979전미혁명기구(NOAR) 창립 참여
  • 1992다문화 세대 간 청년 프로그램 '디트로이트 서머' 창립
  • 1998자서전 『변화를 위한 삶』 출간
  • 201195세에 스콧 쿠라시게와 『다음 미국 혁명』 출간
  • 2015디트로이트에서 100세로 사망, 오바마 대통령 애도 성명 발표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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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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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아서 M. 슐레진저

Arthur M. Schlesinger Jr.
미국 미국계 1917–2007

자유주의를 변호한 역사가이자 권력의 내부 기록자

피그만 침공 뒤 그는 결정적 회의에서 더 크게 경고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나는 몹시 자책했다"고 회고했다.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는 미국 자유주의와 대통령 권력의 역사를 탐구한 역사가이자 공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행정부의 특별보좌관으로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연설문을 다루며 피그만 침공에 반대했지만, 결정적 회의에서 침묵한 책임도 훗날 인정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이 아니었으나 유엔 주재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위기 발표 작성을 도왔다. 1965년의 『A Thousand Days』는 케네디의 위기 관리를 정교한 지도력의 서사로 각인시켰고, 이후 연구자들은 그 영웅적 기억이 배제한 쿠바와 소련의 행위, 비밀 합의, 구조적 위험을 다시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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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하버드대학교 학사, 최우등 졸업
  • 1939–1942하버드대학교 펠로
  • 1943–1945전략정보국 분석관
  • 1946–1962하버드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61–1964케네디 대통령 특별보좌관
  • 1966–1994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인문학 교수
  • 1965『A Thousand Days』 출간, 1966년 퓰리처상 수상

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9–1996 ○ 심장마비

쿠바 미사일 위기 첫날 밤,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한 국가안보보좌관

레이 클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걱정해온 그것들,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번디가 물었다. '확실한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1961–1966)으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베트남전 확전의 핵심 설계자였다. 1962년 10월 15일 저녁 CIA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증거를 보고받았으나, 비밀 유지와 준비 부족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6년 퇴임 후 포드재단 회장을 지냈고, 말년에는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를 주창하며 핵군축 논의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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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예일대학교 수학 학사
  • 1943–1946미군 정보장교
  • 1949–1953하버드대학교 정부학 교수
  • 1953–1961하버드대학교 문리학부 학장
  • 1961–1966미국 국가안보보좌관
  • 1966–1979포드재단 회장
  • 1979–1989뉴욕대학교 역사학 교수

발터 슈텔레

Walter Stoessel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0–1986 ○ 자연사

데탕트의 현장을 지킨 직업 외교관

1974년 3월 4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했다.

발터 슈텔레는 냉전기 미국 외교관으로, 소련과 유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서 데탕트 국면의 미소 협상을 현장에서 지켜봤고, 헬싱키 협정으로 이어진 외교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후 서독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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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미 육군 복무
  • 1947–1953국무부 동유럽·소련 담당
  • 1963–1965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 공사
  • 1968–1972폴란드 주재 미국대사
  • 1972–1974유럽·캐나다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74–1976소련 주재 미국대사
  • 1976–1981서독 주재 미국대사
  • 1982–1983미 국무부 부장관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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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게일 할보르센

Gail Halvorsen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0–2022 ○ 자연사

선의의 행동을 국제적 상징으로 만든 공군 조종사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비행기를 알리는 방법을 묻자 날개를 흔들겠다고 약속했다.

게일 할보르센은 미국 공군 조종사로, 1948년 베를린 공수작전에 참여해 서베를린의 생존을 뒷받침한 수송 임무를 수행했다. 템펠호프 공항 철책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껌을 건넨 뒤 손수건 낙하산으로 사탕을 떨어뜨린 일은 Operation Little Vittles로 확대되어 공수작전의 물자 수송에 인간적 얼굴을 더했다. 이 자발적 행동은 미군의 규정과 냉전 선전의 경계에 놓였지만, 베를린 주민과 미국 어린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서방의 정치적 호소력을 키웠다. 그는 이후에도 공군의 항공·우주 개발과 베를린 템펠호프 지휘를 맡았고 197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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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미 육군항공대 입대, 조종사 훈련
  • 1948–1949베를린 공수작전 C-54 조종사, Operation Little Vittles 창시
  • 1952–1957라이트 항공개발센터 항공화물기 연구개발 담당
  • 1958–1962공군 체계사령부 우주체계 부문 근무
  • 1965–1969공군 본부 우주·기술국, 유인 재사용 우주선 계획 담당
  • 1970–1972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제7350 공군기지단 지휘관
  • 1974미 공군 대령으로 퇴역

게이브리얼 잭슨

Gabriel Jackson
미국 미국계 1921–2019 ○ 자연사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을 해석한 미국 역사학자

1948년 FBI 요원이 동급생들의 정치 활동을 밀고하라고 요구하자 잭슨은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답을 거부했다.

게이브리얼 잭슨은 미국의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이자 역사가, 저널리스트였다. 1965년 저서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은 영어권에서 제2공화국과 내전을 종합적으로 다룬 초기 연구로, 공화파 내부의 정치적 갈등까지 분석한 작업이었다. 그는 공화파의 제도적 개혁과 PCE의 전쟁 수행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 반면, POUM과 혁명적 좌파의 전략을 비현실적으로 보았으며, 이 해석은 내전사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매카시즘으로 학문 경력이 지연되었지만 UC 샌디에이고에서 현대 유럽사를 가르쳤고, 은퇴 뒤에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역사에 관한 저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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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하버드대학교 역사·문학 학사
  • 1942–1946미군 복무, 항공기 정비·사진 판독·지도 제작
  • 1950스탠퍼드대학교 현대사 석사
  • 1952툴루즈대학교 현대·현대사 박사
  • 1965–1983UC 샌디에이고 현대 유럽사 교수
  • 1965–1969UC 샌디에이고 역사학과장
  • 1969–1971UC 샌디에이고 교수평의회 의장
  • 1983–2019명예교수·스페인 역사 저술가
미국 폴란드 1923–2018 ○ 자연사

10월 혁명을 '쿠데타'로 규정한 냉전기 러시아사의 대표적 보수 해석자

1917년 10월에 일어난 것은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였다... 거짓 구호 아래 현대 국가의 신경 중추를 은밀히 장악한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가로, 소련학 '전체주의 학파'의 지적 설계자였다. 그의 2권짜리 대작은 10월 혁명이 대중 봉기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 지식인들의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 통치는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팀B(1976) 책임자와 레이건 행정부 NSC 소련·동유럽 국장(1981~82)을 지내며 자신의 학문을 대소 강경 정책으로 옮겼고, 이는 훗날 소련 붕괴를 앞당긴 요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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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96하버드 대학교 러시아사 교수
  • 1968–1973하버드 러시아연구소 소장
  • 1976CIA 팀B 책임자, 소련 전략역량 경쟁분석
  • 1981–1982레이건 NSC 소련·동유럽 담당 국장
  • 1990『러시아 혁명』 출간
  • 1994『볼셰비키 치하의 러시아』 출간
  • 1997『러시아 혁명의 세 가지 의문』 출간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독일 1923–2023 ○ 자연사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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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마틴 에드워드 말리아

Martin Edward Malia
미국 미국인 1924–2004 ○ 자연사

소련 붕괴를 예견한 역사 해석자

그는 ‘Z’라는 이름으로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의 모순을 넘지 못하리라 썼고, 훗날 그 글의 필자를 인정했다.

마틴 말리아는 러시아와 유럽의 지성사를 연구한 미국 역사가로, 버클리에서 러시아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그는 《소련의 비극》에서 레닌주의 사회주의의 자기완결적 설계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함께 잠식해 소련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에는 ‘Z’라는 필명으로 「스탈린 묘에 부쳐」를 발표해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공산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해석은 소련 붕괴를 설명하는 강력한 한 극을 이루었지만, 사회주의의 역사적 가능성을 이념 자체의 결함으로 환원한다는 논쟁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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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예일대학교 프랑스어 학사
  • 1951하버드대학교 역사학 박사
  • 1954–1958하버드대학교 역사학 조교수
  • 1955미 의회도서관 러시아 도서 교환 특별 보좌
  • 1958–1991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역사학 교수
  • 1991–2004버클리 명예교수, 저술 활동
  • 1994《소련의 비극》 출간

스튜어트 슈람

Stuart R. Schram
미국 미국 1924–2012 ○ 자연사

『마오쩌둥의 정치사상』과 10권짜리 『마오의 혁명 노정』을 편찬한 마오 연구의 개척자

마오의 공과를 저울질한 연구자. 토지개혁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를 반혁명 진압의 처형, 대약진 운동 후의 기아, 문화대혁명의 참상과 견주며 "나는 마오 개인을 천국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보다 그의 사상의 장래 영향에 더 관심이 있다"고 했다.

미네소타 출신의 물리학도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뒤 정치학으로 옮겨 파리에서 가르쳤고, 런던 SOAS 현대중국연구소를 이끌었다. 1963년 『마오쩌둥의 정치사상』으로 마오의 사상을 원문에 근거해 체계적으로 분석한 첫 서구 연구자였으며, 마오 사상이 소련 마르크스주의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중국의 조건에 맞춘 독자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만년에는 하버드 페어뱅크센터에서 1912~1949년 마오의 저작을 원문 그대로 모은 『마오의 혁명 노정』을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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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89SOAS 현대중국연구소 소장 · 정치학 교수

몰타에서 고르바초프와 냉전 종식을 선언했지만, 신중함이 거의 역사를 놓칠 뻔했던 미국 대통령

몰타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는 말했다.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으며 동서 관계를 지속적 협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 의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한 미래입니다.'

조지 H. W.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해군 조종사에서 석유 사업가를 거쳐 미국 제41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CIA 국장·유엔 대사·중국 주재 대표를 두루 지낸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마지막 4년을 이끌었다. 1989년 취임 직후 대소 정책 재검토라는 '부시 휴지기'로 고르바초프를 조바심나게 했으나, 그해 12월 몰타 회담에서 두 정상은 냉전의 종식을 공동으로 확인했고, 이듬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유럽의 새 질서를 다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는 다국적군을 조직해 걸프전으로 응수했으나, 불황 속에 '새로운 세금은 없다'는 공약을 깨면서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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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매사추세츠주 밀턴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출생
  • 1942–1945해군 뇌격기 조종사로 58회 출격, 지치지마에서 격추되어 잠수함에 구조
  • 1953–1966자파타 오프쇼어 석유회사 창업, 텍사스의 백만장자
  • 1967–1971텍사스주 하원의원, 두 차례 상원 선거 낙선
  • 1971–1977유엔 대사, 공화당 전국위 의장, 중국 주재 대표, CIA 국장
  • 1981–1989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
  • 1989–1993제41대 대통령: 몰타 회담으로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지지, 걸프전
  • 2018휴스턴에서 94세로 사망

지미 카터

Jimmy Cart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4–2024 ○ 자연사

데탕트의 정점과 종말을 모두 품은 미국의 39대 대통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카터는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외부 세력의 지배 시도는 미합중국의 중대한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루지야 땅콩 농장에서 자란 침례교도로, 해군 핵잠수함 장교를 거쳐 남부의 인종차별 철폐를 공약한 '뉴사우스' 주지사가 되었다. 1976년 워싱턴 아웃사이더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파나마 운하 반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켰다. 1979년 6월 빈에서 브레즈네프와 SALT II에 서명하며 데탕트를 정점으로 이끌었으나, 같은 해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조약 비준을 철회하고 카터 독트린을 선언하며 데탕트의 종막을 알렸다.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해 인권과 공중보건, 분쟁 중재에 헌신했으며,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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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1967그루지야주 상원의원
  • 1971–1975제76대 그루지야 주지사
  • 1977–1981제39대 미국 대통령
  • 1982카터 센터 설립
  • 2002노벨 평화상 수상

형 대통령의 최측근 법무장관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 타결의 실무자가 된 정치인

그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전면 기습 공격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역(逆)진주만이 되어 전 세계의 눈에 미국의 이름을 더럽히리라는 점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남동생이자 가장 신임받는 정치 고문으로, 35세에 법무장관이 되어 조직범죄 소탕과 시민권 보호에 앞장섰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초기에는 침공을 선호했으나, 해상 봉쇄 측으로 전환한 뒤 위기 후반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하며 타결의 열쇠가 되었다. 형의 암살 후 상원의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와 빈곤 퇴치에 나섰고, 1968년 대선 경선 중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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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존 F. 케네디 상원 선거 캠프 매니저
  • 1953–1955상원 상설조사소위원회(매카시 위원회) 법률고문
  • 1957–1959상원 노동부패조사위원회(매클렐런 위원회) 수석법률고문
  • 1961–1964제64대 미국 법무장관
  • 1965–1968뉴욕주 상원의원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5–2020 ○ 자연사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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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로버트 빈센트 대니얼스

Robert Vincent Daniels
미국인 미국계 1926–2010 ○ 자연사

혁명의 다원성과 스탈린주의의 형성을 추적한 소련사 연구자

대니얼스는 공산주의를 고정된 체제로 본 모델에 맞서, 그 운동을 상황이 빚은 진화적 산물로 해석했다.

로버트 빈센트 대니얼스는 미국의 소련사 연구자이자 교육자로,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정치의 여러 가능성을 추적했다. 대표작 『혁명의 양심』은 초기 공산당의 다원성을 분석해 스탈린의 집단화와 권력 집중을 혁명의 필연적 결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반대파의 산업화 구상과 스탈린의 폭력적 실행을 구별하면서도, 두 진영의 대외정책 차이를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연구와 교과서로 소련사의 쟁점을 여러 세대에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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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46출생, 미 해군 복무와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학사
  • 1950하버드대학교 역사학 박사
  • 1950년대베닝턴 칼리지와 인디애나대학교에서 강의
  • 1956–1988버몬트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60『혁명의 양심』 출간
  • 1967『붉은 10월』 출간
  • 1973–1982민주당 소속 버몬트주 상원의원
  • 1992미국 슬라브·동유럽 연구 학회 회장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

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미국 러시아 1926–2011 ○ 결장암

스탈린의 외동딸이자 크렘린을 버린 최초의 목격자

201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는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 — 문학 공부를 거부하고 카플레르를 체포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의 외동딸로, 1967년 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크렘린 내부를 서방에 최초로 증언한 회고록으로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아버지의 사적 면모와 소비에트 지배층의 삶을 폭로한 기록으로 평가되며, 이후 귀환과 재망명을 거듭하면서도 평생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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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 졸업
  • 1954문헌학 후보학위 취득
  • 1956–1967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번역가
  • 1967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출간
  • 1978미국 시민권 취득, 라나 피터스로 개명
  • 1984–1986소련 귀환 후 재차 미국으로 이주

리처드 하이저

Richard Heys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7–2008 ○ 뇌졸중

6분 동안 928장을 찍어 세계를 핵전쟁 직전으로 몰아넣은 U-2 정찰 조종사

「나는 내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평판을 원하지 않았다.」, 2005년 AP 통신 인터뷰에서

플로리다주 아팔라치콜라 출신으로 17세에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한 미 공군 조종사였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쿠바 상공을 6분 동안 비행하며 촬영한 928장의 사진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 확인되었고, 이 사진이 케네디 대통령의 책상에 올라가며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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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미 육군항공대 입대
  • 1952공군 조종사 훈련 시작, 한국전쟁 전투 출격
  • 1957U-2 기종 전환 훈련 수료 (50번째 U-2 조종사)
  • 1957–1962제4080전략정찰비행단 U-2 조종사
  • 1962.10.14쿠바 상공 정찰비행(임무 3101), 소련 미사일 포착
  • 1960년대베트남전쟁 두 차례 전투 배치
  • 1974중령으로 30년 복무 후 퇴역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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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