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1930년 OGPU 심문에서 "정치·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 어떤 정치적 경력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에게도 금지될 수 없다"고 답하며 유죄를 부인했다.
철학자·경제학자·번역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처음 완역(1907–1909)했고, 마흐주의 경험비판론의 대표 논객으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정면 반박했다. 1921년부터 고스플란에서 그로만과 함께 보그다노프 텍톨로지에 기초한 유전적-목적론적 계획 방법론을 제창했으며, 소련 최초 15개년 종합계획을 제안했다. 1930년 체포·5년형 선고, 19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다 1939년 폐렴으로 사망. 1990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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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04사회민주당 입당, 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중퇴 후 베를린대학 철학부 수학, 두 차례 체포·유배
1904–1907볼셰비키 당원, 제4차 당대회 대의원, 중앙기관지 『당 소식』 편집위원
1907–1909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 전3권 러시아어 최초 완역 출간
1908–1911마흐주의 철학 논쟁 주도, 『현실주의 세계관 에세이』 등 출간; 레닌 비판에 공개 반박
1917『노바야 지즌』 편집자·주필, RSDLP(국제주의파) 공동 창립 이념가, 여름에 RSDLP 탈당
1921–1927고스플란 경제통계분과 부의장(1924), 노동문화분과 의장 겸 상임간부회 위원(1927)
1926–1929그로만과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 제창, 산업성장 미분방정식 정식화, 최초 15개년 종합계획 제안
1930–1935스탈린 공개 비판 후 '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5년형; 1932년 조기 석방, 사라토프·캅카스 유형
1935–1939모스크바 귀환, 에커만·몽테뉴 번역; 1939년 폐렴 사망, 1990년 복권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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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크렘린 공격 중 성 바실리 대성당이 포격으로 파괴된다는 소문에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인민위원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자 철회하고 1929년까지 재임했다.
1875년 폴타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혼인한 바실리 루나차르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성과 부칭이 여기서 왔다는 기록이 전하나 그를 폴란드 민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1909년 전진파 결성으로 분파에서 제명되어 카프리·볼로냐의 당 학교를 운영했다. 1917년 메즈라욘치를 거쳐 10월 혁명 뒤 초대 계몽인민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 소련과학원 회원이 되었고, 스페인 대사 부임을 준비하던 1933년 프랑스 망통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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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1904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취리히에서 아베나리우스에게 사사, 문예비평가로 성장
1905–1914볼셰비키 합류와 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1914–19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후 7~8월 볼셰비키와 통합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1929–19331929년 가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이동, 이듬해 학술원 회원, 1933년 스페인 대사 임명 뒤 사망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1887년 코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904년 흐라마다에 들어가 『나샤 니바』에 기고했다. 1913년부터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일하며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 1918년 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로서 빌헬름 크노린과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에 맞서 벨라루스 공화국 수립을 주장해 레닌과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1월 1일부터 2월 3일까지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을 지냈다. 뒤에 출판·문화 기관을 이끌고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나 1931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모길료프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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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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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