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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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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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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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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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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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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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바자로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за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39 ○ 폐렴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을 제안한 고스플란의 마흐주의 철학자-경제학자

1930년 OGPU 심문에서 "정치·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 어떤 정치적 경력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에게도 금지될 수 없다"고 답하며 유죄를 부인했다.

철학자·경제학자·번역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처음 완역(1907–1909)했고, 마흐주의 경험비판론의 대표 논객으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정면 반박했다. 1921년부터 고스플란에서 그로만과 함께 보그다노프 텍톨로지에 기초한 유전적-목적론적 계획 방법론을 제창했으며, 소련 최초 15개년 종합계획을 제안했다. 1930년 체포·5년형 선고, 19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다 1939년 폐렴으로 사망. 1990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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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4사회민주당 입당, 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중퇴 후 베를린대학 철학부 수학, 두 차례 체포·유배
  • 1904–1907볼셰비키 당원, 제4차 당대회 대의원, 중앙기관지 『당 소식』 편집위원
  • 1907–1909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 전3권 러시아어 최초 완역 출간
  • 1908–1911마흐주의 철학 논쟁 주도, 『현실주의 세계관 에세이』 등 출간; 레닌 비판에 공개 반박
  • 1917『노바야 지즌』 편집자·주필, RSDLP(국제주의파) 공동 창립 이념가, 여름에 RSDLP 탈당
  • 1921–1927고스플란 경제통계분과 부의장(1924), 노동문화분과 의장 겸 상임간부회 위원(1927)
  • 1926–1929그로만과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 제창, 산업성장 미분방정식 정식화, 최초 15개년 종합계획 제안
  • 1930–1935스탈린 공개 비판 후 '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5년형; 1932년 조기 석방, 사라토프·캅카스 유형
  • 1935–1939모스크바 귀환, 에커만·몽테뉴 번역; 1939년 폐렴 사망, 1990년 복권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

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40 ✕ 처형

생체역학의 창시자, 무대 위에서 혁명을 실현한 연극의 건축가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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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 1908–1917알렉산드린스키·마린스키 극장 연출가 — 레르몬토프 〈가장 무도회〉, 몰리에르 〈돈 후안〉, 글루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1918볼셰비키 입당 및 마야콥스키 〈미스테리야 부프〉 초연 (페트로그라드)
  • 1920–1938국립 메이예르홀트 극장(고스찜) 예술감독 — 생체역학 체계와 구성주의 무대 전성기
  • 1920–1921나르콤프로스 연극부(TEO) 책임자 — 루나차르스키 하에서 소비에트 연극 정책 주도
  • 1923공화국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22–1924혁명 극장 예술감독 겸임 — 파이코 〈류리 호수〉 초연
  • 1926–1930고골 〈검찰관〉, 마야콥스키 〈빈대〉·〈목욕탕〉 — 쇼스타코비치·로드첸코 협업의 걸작들
  • 1938–1939고스찜 폐쇄 후 스타니슬랍스키 오페라 극장 수석 연출가로 〈리골레토〉 작업

아나톨리 바실리예비치 루나차르스키

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Луначар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5–1933 ○ 자연사

러시아 혁명가·초대 계몽인민위원·문예비평가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취임 8일 만에 루나차르스키는 크렘린 공격 중 성 바실리 대성당이 포격으로 파괴된다는 소문에 사임을 발표했다. 다음 날 인민위원회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자 철회하고 1929년까지 재임했다.

1875년 폴타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당시 혼인한 바실리 루나차르스키는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성과 부칭이 여기서 왔다는 기록이 전하나 그를 폴란드 민족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다. 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1909년 전진파 결성으로 분파에서 제명되어 카프리·볼로냐의 당 학교를 운영했다. 1917년 메즈라욘치를 거쳐 10월 혁명 뒤 초대 계몽인민위원이 되어 1929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 소련과학원 회원이 되었고, 스페인 대사 부임을 준비하던 1933년 프랑스 망통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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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1904189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취리히에서 아베나리우스에게 사사, 문예비평가로 성장
  • 1905–1914볼셰비키 합류와 전진파(Vpered) 논쟁, 혁명문화와 예술정책 구상
  • 1908–1911전2권 《종교와 사회주의》 출간
  • 1914–19171차대전 반대 국제주의 입장, 망명 중 반전 활동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후 7~8월 볼셰비키와 통합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1929계몽인민위원, 학교·박물관·극장·출판 행정 총괄
  • 1918–1921전위예술 후원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초기 소비에트 문화정책 조정
  • 1923인물평 모음 《혁명적 실루엣》 출간
  • 1929–19331929년 가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학술위원회 의장으로 이동, 이듬해 학술원 회원, 1933년 스페인 대사 임명 뒤 사망
  • 1930소련과학원 회원 선출(2월 1일)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ок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0–1921 ○ 병사

10월 혁명을 받아들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열둘』을 완성한 뒤 일기에 '오늘 나는 천재다'라고 적었다.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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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 출간
  • 1906희곡 『꼭두각시극』 발표
  • 1917임시정부 차르 대신 특별조사위원회 편집자
  • 1918『열둘』과 『스키타이인』 발표, 사회주의 아카데미 참여
  • 1921푸시킨 추모 연설 「시인의 소명에 관하여」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보론스키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Воронский

《크라스나야 노비》 편집장,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1921년 크렘린의 레닌 자택. 《크라스나야 노비》 창간 회의에서 고리키가 인도 설화집을 보이자 레닌은 "이걸 황금 외화로 사고 있다. 올해는 기근이 든다"고 잘랐다. 보론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두 진리가 충돌했다 —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와 '그러나 빵이 없다면'."

《크라스나야 노비》를 창간해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예술을 삶의 인식으로 보는 미학으로 RAPP에 맞서 페레발을 이끌었다. 좌익반대파 가담 후 1937년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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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탐보프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06–1910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년 독방, 야렌스크 2년 유형
  • 1912프라하 당대회 대의원; 서기로 회의록 작성, 대중노동자신문 창간 주장
  • 1917–1920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당위원장,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1–1927《크라스나야 노비》 창간·편집장; 《프로제크토르》 편집; 출판사 '크루크' 설립; 문학그룹 '페레발' 결성·주도
  • 1923'46인 성명' 서명, 좌익반대파에 가담
  • 1927–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출당, 리페츠크 유배; 1929년 반대파 활동 철회 선언, 1930년 복당
  • 1930–1935국립문학출판사 고전문학부 편집자; 자전적 소설 집필
  • 1937대숙청 중 체포(2월 1일), 스탈린 서명 사형명단 등재, 8월 13일 15분 재판 후 총살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37 → 사망

금지된 미래의 설계자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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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기술자 생활
  • 1921『우리들』 완성과 금지
  • 1920년대풍자소설·문학비평 활동
  • 1931출국 허가
  • 1932–1937파리 망명 생활

블라디미르 예브그라포비치 타틀린

Владимир Евграфович Татлин
소비에트 러시아 1885–1953 ○ 사망

건설되지 않았지만 혁명적 유토피아의 가장 지속적인 상징이 된 탑의 창조자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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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모스크바에서 성상 화가로 경력 시작
  • 1913파리에서 피카소의 작업실 방문, 구호부조 제작 시작
  • 1915마지막 미래파 전시 '0.10'에서 반(反)부조 전시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 설계 및 모형 전시
  • 1925–1927키예프 예술대학 교수
  • 1927–1930모스크바 브후테마스 교수
  • 1930–1932개인 비행 장치 '레타틀린' 제작
  • 1948반공산주의적이라는 비판으로 해고, 그러나 숙청되지 않음

즈미체르 질루노비치

Зміцер Жылунові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7–1937 구금 중 사망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의 노동자 시인으로 소비에트 벨로루시 첫 정부를 이끈 볼셰비키

1887년 코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904년 흐라마다에 들어가 『나샤 니바』에 기고했다. 1913년부터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일하며 「치시카 하르트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썼다. 1918년 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로서 빌헬름 크노린과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에 맞서 벨라루스 공화국 수립을 주장해 레닌과 스탈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1월 1일부터 2월 3일까지 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을 지냈다. 뒤에 출판·문화 기관을 이끌고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나 1931년 당에서 제명되었고, 1936년 체포되어 1937년 모길료프의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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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페트로그라드 「불칸」 공장 노동자
  • 1918벨라루스 민족위원부 비서
  • 1919벨로루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 1920–1931벨로루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28벨로루시 과학아카데미 회원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차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Чая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농민 경제의 도덕적 논리를 탐구한 농업경제학자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모든 노동경제에는 그 산출의 한계가 있으며, 그것은 연간 노동과 농가의 욕구 충족 정도 사이의 비례에 의해 정해진다"고 썼다.

1888년 1월 17일(구력 29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37년 10월 3일 알마아타에서 사망한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농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세우고 조직-생산학파를 이끌었다. 「노동경제 이론 시론」(1912~1913)에서 농민가족농이 이윤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하며 소비 필요와 노동의 고역 사이에서 자기착취의 정도를 정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7월 '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5년 유형이 연장된 뒤 1937년 10월 3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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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 1921–1923농업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겸 고스플란 대표
  • 1930–1935'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5년형 선고, 유형지 알마아타로 이감
  • 1937알마아타에서 재체포, 당일 총살 — 1987년 전면 복권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아로세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Аросев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처형

크렘린 포격명령을 내린 혁명가이자 30권을 쓴 프롤레타리아 작가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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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포격 명령
  • 1918주공군총국(Gлаввоздухфлот) 커미사르
  • 1920우크라이나 최고혁명재판소 의장
  • 1921–1927레닌 연구소 부소장; 체카·OGPU 근무; 프랑스·스웨덴 외교관
  • 1927–1928리투아니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9–193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4–1937VOKS(전연방 대외문화교류협회) 의장

엘 마르코비치 리시츠키

Эль Маркович Лисицкий
소련 러시아 1890–1941 ○ 결핵

절대주의를 건축으로 전환한 구성주의의 공동 창시자, 혁명 아방가르드의 국제적 연결고리

1920년, 붉은 쐐기가 백색 원을 찢고 들어가는 포스터 한 장. 리시츠키는 단 두 개의 도형과 세 가지 색만으로 내전의 모든 것을 말했다.

소비에트 화가·건축가·디자이너. 프로운(PROUN) 시리즈로 절대주의를 입체 공간으로 확장했고, 〈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는 혁명 그래픽의 상징이 되었다. 아방가르드와 서유럽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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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다름슈타트 공과대학 건축학부 수학, 우등 졸업
  • 1915–1918리가 공과대학(모스크바 피난) 편입, 공학건축사 학위 취득
  • 1919–1920비텝스크 인민예술학교 교수, 말레비치의 UNOVIS 그룹 핵심 멤버
  • 1920〈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 발표, PROUN 시리즈 시작
  • 1921–1925베를린·스위스 체류, 에렌부르크와 《베쉬》 발행, 데 스테일 가입
  • 1921Vkhutemas 및 Vkhutein 교수
  • 1926–Vkhutemas 및 Vkhutein 교수
  • 1927–1928전연방 인쇄 전시회 및 쾰른 프레사 소비에트관 설계
  • 1930–1941〈건설중인 소련〉 레이아웃, 포토몽타주, 오고뇰크 인쇄소 설계

빅토르 리보비치 세르주

Виктор Львович Серж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문학으로 증언한 코민테른의 작가-혁명가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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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푸르마노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Фурма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26 ○ 뇌막염

차파예프를 신화로 만든 정치위원 출신 작가

1920년 6월 베르니 수비대 봉기 때, 푸르마노프는 반란군과 직접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었다. 반란군 지휘관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동안 충성 부대가 도착해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 출신 작가. 소설 《차파예프》(1923)는 혁명적 영웅 서사의 전범이 되었고, 1934년 바실리예프 형제의 영화로 각색되어 소비에트 대중문화의 기념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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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모스크바 대학교 문헌학부 수학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 준위 복무
  • 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19제25소총사단 정치위원 (차파예프 휘하)
  • 1919–1920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장 · 세미레치예 RVS 대표
  • 1920쿠반 상륙부대 정치위원, 울라가이 상륙 격퇴 — 적기훈장 수훈
  • 1923소설 《차파예프》 출간
  • 1924–1925MAPP(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 서기
  • 1925소설 《먀테시》(반란) 출간

오십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

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소련 폴란드 1891–1938 ✕ 옥사

기억으로 살아남은 시인

「러시아에서만 시가 존중받는다—시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시가 살인의 동기인 나라가 또 어디 있나?」 아내 나데즈다의 회고록 『희망, 희망을 거슬러』에 기록된, 스탈린 시대 시인의 운명을 응축한 말.

아크메이즘의 핵심 시인이자 산문가로, 스탈린 체제의 언어와 공포를 시에 새겼다. 체포와 유배 뒤 다시 체포되어 극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내와 친구들이 암기해 지킨 시편들보다 먼저 수용소 이송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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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시집 『돌』 발표
  • 1920년대시·산문·번역 활동
  • 1934–1937체포와 보로네시 유배
  • 1938재체포, 극동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
소련 러시아 1891–1940 ○ 병사

출판되지 않은 악마의 작가

1930년, 출판이 모두 막히자 『거장과 마르가리타』 초고를 벽난로에 던졌다. 훗날 소설 속 악마는 불탄 원고를 꺼내며 말한다. '원고는 타지 않는다.' 불가코프는 죽을 때까지 다시 썼고,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의사 출신의 소설가·극작가로, 소비에트 일상의 관료제와 공포를 환상과 풍자로 비틀었다. 희곡이 금지되고 출판 길이 막힌 채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죽을 때까지 고쳤으며, 이 소설은 사후 검열본으로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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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9의사로 복무
  • 1921모스크바로 이주, 작가 활동
  • 1925–1929소설·희곡 발표과 검열
  • 1928–1940『거장과 마르가리타』 집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드첸코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одченко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56 ○ 자연사

구성주의의 창시자, 소비에트 디자인·광고·사진의 선구자

1921년, 노랑·빨강·파랑 세 개의 단색 캔버스를 전시하며 선언했다: "나는 회화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붓을 놓고 생산 예술로 향했다.

소비에트 화가·디자이너·사진가. 구성주의 창시자로서 추상 회화에서 '생산 예술'로 전환, 소비에트 디자인과 사진의 기초를 세웠다. 급진적 앵글의 사진과 마야콥스키와의 포스터로 혁명기 시각 문화를 혁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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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4카잔 예술학교 수학
  • 1916모스크바로 이주, 타틀린의 〈잡화점〉 전시 참가
  • 1918–1921인민교육위원회 미술국 박물관 사무소장
  • 1920–1930Vkhutemas-Vkhutein 교수
  • 1921–1924예술문화연구소(Inkhuk) 활동, 칸딘스키 후임 의장
  • 1923–1928LEF 및 Novy LEF 잡지 아티스트, 마야콥스키와 협업
  • 1925파리 만국박람회 〈노동자 클럽〉으로 은메달 수상
  • 1928–1932사진 그룹 '10월(Oktyabr)' 창립 멤버
  • 1933벨로모르 운하 건설 촬영, 〈건설중인 소련〉 디자인
  • 1938–1942서커스 연기자 촬영 및 회화로 복귀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1–1979 → 수용 10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끈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의 개척자

벤야민은 『일방통행로』(1928)를 이렇게 헌정했다: 「이 거리는 아샤 라치스 거리라 이름 붙여졌다, 기술자로서 이 거리를 저자를 관통해 낸 그녀의 이름을 따서.」

라트비아 출신 연극연출가.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을 개척했고, 1924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었으며 브레히트·피스카토어와 협업했다. 수용 10년 후 발미에라 극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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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모스크바 코미사르젭스키 연극학교 수학; 라트비아 난민학교 교사
  • 1918–1920오룔 실험아동극장 설립·운영, 프롤레타리아 아동극 방법론 개척
  • 1920–1924리가 인민대학 연극스튜디오 책임자; 뮌헨에서 브레히트 『에드워드 2세』 조연출; 카프리에서 벤야민과 만남
  • 1925–1930리가·베를린·모스크바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아동영화관·소련 영화 수출 활동
  • 1930–1935피스카토어 영화 『산타바바라 어부들의 반란』 조감독; 라트비아 국립극장 연출; 『독일 혁명연극』 출간
  • 1938–1948체포되어 카자흐스탄에서 10년간 수용·유형
  • 1950–1957발미에라 드라마극장 주임연출; 1955년 복권, 1956년 당적 회복

마리나 이바노브나 츠베타예바

Марина Ивановна Цветаева
소련 러시아 1892–1941 ✕ 자살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시를 밀어붙인 은시대의 시인

1939년 귀환은 망명 작가가 스탈린 시대 소련으로 되돌아온 대가를 보여 준다.

러시아 은시대의 시인·산문가·번역가다. 내전 뒤 망명해 베를린·프라하·파리에서 창작했고,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온 뒤 전쟁 피난지 옐라부가에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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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첫 시집 《저녁 앨범》 자비 출간
  • 1922–1939베를린·프라하·파리 망명 생활
  • 1939소련 귀환
  • 1941옐라부가 피난지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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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