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1996년 결선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지지를 받아 미르차 스네구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표트르 루친스키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 관료로 성장해 소비에트 말기의 공화국 정치와 독립 이후 몰도바 국가 형성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1989년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독립 뒤에는 러시아 주재 대사와 의회 의장을 거쳐 1996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몰도바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제도권의 연속성과 새 국가의 주권·대외노선 조정이 한 정치가에게 겹친 과정을 보여준다.
1987년 8월 23일 정오, 히르베파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열두 시가 되자 2천에서 5천 명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파레크는 회고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했어요.」
에스토니아 장교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건축가로 일하던 중 반체제 사미즈다트 활동으로 1983년 체포되어 4년간 수용소에 갇혔고, 석방 7개월 만에 MRP-AEG를 공동 창립해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했다. 이 집회가 발트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듬해 에스토니아 최초의 비공산 정당 ERSP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회복 후 첫 내각의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1993년 풀라패 위기로 사임했고,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스탈린주의 희생자 추모비 건립을 주도했다.
1991년, 그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다가오던 때에도 소련 연방을 지지하는 정치국에 합류했다.
렘비트 아누스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모스크바계 지도자로, 민족 독립과 연방 유지를 둘러싼 분열의 한복판에 섰다. 그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당이 금지될 때까지 КПСС 강령을 지지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고, 1991년에는 КПСС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해체 뒤에도 프라우다 특파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정치에 남았다.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동방학을 전공한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기자로, 소비에트 개혁의 국제적 의미와 내부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1991년 8월 쿠데타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겸 마지막 대통령 공보비서가 되어, 연방을 보존하려는 협상과 국가기구의 해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고록과 공개한 개인 문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주화 약속이 연방 붕괴의 가속과 맞물린 긴장을 증언한다.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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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1991년 8월 26일 최고회의에서 아카예프는 신연방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가연합을 요구했다.
물리학자이자 키르기스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정치가인 아카예프는 당 관료가 아니었던 인물로서 1990년 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소련 말기의 민족 갈등과 주권 요구 속에서 다당제와 시장 개혁을 내세웠고, 1991년 쿠데타를 신속히 비판하며 키르기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도 공화국의 주권을 중시해 8월 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국가연합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임 후반에는 대통령 권한의 연장과 가족·측근 중심의 통치, 부패 의혹이 커졌고 2005년 대중 봉기로 실각했다.
1990년 당이 갈라졌을 때 실라리는 소련 공산당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세력의 제1서기가 되었다.
엔아르노 실라리는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해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중앙·도시 조직을 거친 당 관료였다. 1990년 당이 에스토니아의 주권 노선을 택한 다수파와 소련 공산당에 남은 세력으로 갈라지자, 그는 후자를 이끌며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와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운동의 존속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1990~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자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였으며,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이후에도 당을 이끌었지만 1992년 선거 패배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전환했다.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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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 당시 아찰로프는 공수부대의 모스크바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봉쇄 임무를 맡았다.
1945년 11월 13일 타타르 자치공화국 아트닌스키 구의 아타마시 마을에서 태어나 2011년 6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66년 카잔 전차학교, 1973년 장갑병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7근위공수사단장(1978), 제8근위군 사령관(1985~1987), 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1987~1989)을 지냈으며 1980년 소장이 되었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공수군을 지휘하고 1990년 12월부터 1991년 9월까지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으며, 1989년 상장으로 진급했다. 1991년 8월 17일 KGB 시설 회의에서 권력 장악에 합의한 국방차관 중 한 명으로 기소되었고, 1993년에는 루츠코이의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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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아만바예프는 농업 전문가 출신의 키르기스 공산당 간부로, 당 조직과 지역 행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소련이 해체로 향하던 1991년 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두 직책은 연방 붕괴와 함께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는 이후 독립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정부 업무를 맡아 소비에트 당 관료와 새 국가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었다.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