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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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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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1937.0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1933년, 소련 전역이 대기근에 시달리던 때 골레프는 하리코프에 파견되어 국가 수확고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이후 그가 다룰 모든 재정 숫자들 뒤에는 이 장면이 놓여 있었다.
야코프 골레프는 소련의 재정·은행 기술관료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국가은행(고스방크) 총재를 지냈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제정군 포병으로 1차 대전을 겪고 내전기에 붉은 군대에 복무했으며, 이후 지역 재무 부서를 거쳐 중앙 재정 기구로 진입한 전형적인 소비에트 승진 경로를 밟았다. 고스방크 총재 임기 동안 그는 전시 경제에서 평시 재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1947년 화폐 개혁 직전까지의 신용·발권 체계)를 관리했으며, 이는 전후 소련 재정 안정화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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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러시아 제국군 포병 복무
1918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19붉은 군대 복무
1920–1924피야티고르스크 식량위원회 · 볼로콜람스크 현 재무과 근무
1924–1930모스크바 주 재무국 근무
1930–1933과학연구 콜호스 연구소 대학원생
1933–1935국가 수확고 위원회 위원장 (하리코프) · 전권위원 (체르니고프, 스탈리노)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1948년 11월 혁명기념일 리셉션에서 폴리나 젬추지나는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의 딸 사라를 끌어안고 이디시어로 속삭였다. 「몸조심하렴. 너희에게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온 세상 유대인에게도 잘 풀릴 테니까.」
소련 최초의 여성 산업인민위원(1939, 수산공업)으로서 소비에트 여성의 정치적 진출에 이정표를 세웠다.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 내전기 정치장교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향수공장 「노바야 자랴」 책임자와 글라브파르퓌메리야 총책임자를 거쳐 식품공업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아내이자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절친으로 스탈린 가문의 내밀한 삶을 공유했으나, 전쟁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냈다. 1948년 이스라엘 공사 골다 메이어와의 이디시어 대화가 빌미가 되어 1949년 체포·출당·유배되었고, 1953년 스탈린 사후 풀려나 1970년 자연사했다.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0년 5월 16일, 흐루쇼프의 화폐개혁이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 평가절하라고 보고 재무장관직을 내려놓았다. 원자재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기울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지방 재정기관에서 성장했다. 1938년 38세로 소련 재무인민위원이 된 뒤 22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며 대조국전쟁 군수 재원 조달, 국채 발행, 1942년 원자력 개발용 라듐·백금 지급을 감독했다. 1947년 전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킨 화폐개혁을 설계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새로운 화폐개혁 방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스탈린과 흐루쇼프 두 체제를 관통한 유일한 장기 재무수장이었다.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준비 과정에서 카가노비치·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숙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위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부로프는 미코얀과 함께 반대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소련의 핵심 경제계획 관료로, 고스플란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전후 공업 재건과 제5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국가계획의 중심에 서서 중공업 우선 노선과 소비재 균형 논쟁 속에서 실무를 책임졌다. 1957년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반당 그룹에 가담했다가 상임위에서 제명되고, 이후 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다.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준 일이 스탈린에게 밀고되자, 아무 설명도 없이 당과 장관직에서 쫓겨났다.
이반 코발료프는 위대한 조국전쟁 중 붉은 군대 군사수송을 총괄하고 인민교통위원(1944–1948)을 지낸 소비에트 군수송 지도자였다. 농민 출신으로 철도부대에서 경력을 시작해,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반격에서 대규모 병력의 비밀 재배치를 성공시켜 스탈린으로부터 전략작전 지휘에 비견된다는 평가와 함께 수보로프 훈장과 쿠투조프 훈장 1급을 받았다. 전후 철도 복구와 포츠담 회담 수행 후 1948년 스탈린의 개인 대표로 마오쩌둥에게 파견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기 양국 지도부 사이의 비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아내 생일에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선물한 일이 밀고되어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참모대학교 교수와 IMEMO 연구원으로 일했다.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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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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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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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