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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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밀류코프

Павел Милюков
입헌민주당 제정·백색진영 소련 러시아 1859–1943 ○ 자연사

입헌민주당(카데트)의 지도자: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1916년 11월 두마 연단에서 그는 정부의 실패를 하나하나 열거한 뒤 매번 같은 후렴구를 던졌고, 의원들은 "반역이다!"라고 외쳐 답했다.

입헌민주당(카데트) 지도자이자 역사가. 1916년 '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로 차르 체제를 뒤흔들었고, 외무장관 시절 4월 위기를 촉발했다. 망명 후 파리에서 신문을 발행했으며, 대독소전 때 소련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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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입헌민주당(카데트) 창당
  • 1906비보르크 선언 기초 — 의회 해산에 대한 저항 촉구
  • 1907–1917제3·4대 두마 의원, 카데트 원내대표
  • 1915진보블록(Progressive Bloc) 결성 주도
  • 1916.11'어리석음인가 반역인가' 연설 — 슈튀르메르 정부 맹비판
  • 1917.03–05임시정부 외무장관 — 밀류코프 비망록으로 4월 위기 촉발 후 사임
  • 1917.08코르닐로프 사건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대립 속 혼란 가중
  • 1920–1940파리에서 망명 신문 『최신소식』 발행
  • 1941–1943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 지지 —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기뻐함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5–1946 ○ 자연사

소련의 장기 공식 국가원수

1921년 3월 1일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 칼리닌은 아내와 함께 무장 없이 요새로 들어가 앵커광장에서 박수로 맞았으나 수병들의 야유와 고함으로 연설은 중단되었다.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 금속 노동자가 된 볼셰비키로, 1919년부터 1946년 사망까지 27년간 소련의 공식 국가원수로 있었다. 대숙청기의 핵심 법령들, 즉 1932년 8월 7일 국가재산 보호에 관한 법령, 1934년 12월 1일 테러 사건 신속처리 법령, 1935년 4월 7일 형사책임 연령을 12세로 낮춘 법령에 서명했다. 벨라루스 제1서기가 3천 명 총살과 9천 8백 명 추방을 제안한 전문에도 '칼리닌 찬성'으로 기록되었고, 1940년 3월에는 폴란드 장교·수감자 2만 5천 7백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1932년 5월 4일 농민 3만 8천 가구 추방 표결에서는 근거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고, 2주 뒤 정치국의 결정 번복으로 이미 시작된 조치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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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46중앙집행위원회 ·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예멜리얀 미하일로비치 야로슬랍스키

Емельян Михайлович Ярослав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3 ○ 위암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린 당의 수석 무신론자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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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트란스바이칼 철도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5–1907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군사전투조직 지도, 제4·5차 당대회 대의원
  • 1907–19175년 카토르가형 후 야쿠티아 유형, 야쿠츠크 향토박물관장 역임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초대 군사위원
  • 1918–1919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
  • 1921RKP(b) 중앙위원회 서기, 조직국 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
  • 1925–1943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중앙평의회 의장, 반종교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아도라츠키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Адорат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45 ○ 병사

IMEL 소장, 스탈린을 이론가로 공인한 첫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닌은 내 순진함 때문에 나를 '아두라츠키'라고 놀렸다.」 — 가족 회고록

카잔 출신 볼셰비키 철학자. 1929년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이론가'로 찬양한 첫 인물로, 1931년 IMEL 소장이 되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을 편찬, 공산권의 정전 독법을 수십 년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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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대학 수학과 입학 후 법학과 전환, 1900년 혁명운동 참여, 1903년 졸업 후 해외 망명
  • 1904–1908제네바에서 RSDLP 가입(1904), 귀국 후 체포·아스트라한 유형; 1905년 카잔에서 불법 볼셰비키 신문 『라보치』 발간
  • 1908–1918파리·런던·베를린 망명; 뮌헨에서 1차대전 민간인 포로로 억류, 레닌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 1920–1928중앙기록관리국 부국장, 모스크바대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1922) 등 첫 저작 출간
  • 1928–1931레닌 연구소 부소장; 1929년 『이즈베스티야』에 「이론가로서의 스탈린」 발표, 부하린 실각 후 『레닌 전집』 편집 인수
  • 1931–1939IMEL 소장;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러시아어판 15권·독일어판 8권 편집, 서한집 발간 준비
  • 1936–193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겸임; 마르크스-엥겔스 아카이브 매입 위원회 위원장
  • 1939–1945건강 악화로 소장직 사임, IMEL 책임편집자; 대조국전쟁 중 알마아타로 대피, 194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보리스 사빈코프

Борис Савинков
사회혁명당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소련 러시아 1879–1925 ✕ 처형/의문사

테러리스트에서 반혁명가로: 혁명의 검은 기사

1924년 재판정에서: '나는 플레베와 세르게이 대공 암살의 사빈코프다. 평생 인민을 위해 일했으나, 이제 노동자·농민 정권에 총을 겨누었다고 기소되었다.'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을 지휘하며 제정 고위관료 암살을 주도한 혁명가·작가. 『창백한 말』로 테러의 심리를 소설화했다. 10월 혁명 후 반볼셰비키 투쟁을 이끌었고, OGPU에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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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SR 전투조직에 합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기획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지휘
  • 1909『창백한 말』 출간 — 테러리즘의 심리적 해부
  • 1917.04러시아 귀환, 제7군 정치위원 임명
  • 1917.07임시정부 전쟁차관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중개
  • 1917.08코르닐로프 사건으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 SR당 제명
  • 1918조국과 자유수호동맹(SZRiS) 창설,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20–1921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측에 서서 반소 군사활동
  • 1924OGPU의 트러스트 작전에 속아 소련 귀환, 체포
  • 1925루뱐카 감옥에서 사망 (공식: 투신자살, 의혹: OGPU 살해)

그리고리 콘스탄티노비치 오르조니키제

Григор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ерго) Орджоник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그루지야 1886–1937 ✕ 총상 사망, 자살로 추정

대전환의 공업 사령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1936년 10월 50세 생일 무렵, 퍄티고르스크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그는 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에 충격을 받아 참석하지 않았고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자리를 지켰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로, 1912년 프라하 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캅카스 소비에트화와 트랜스캅카스 연방 수립을 이끌었으며, 1926~30년 중앙통제위원회와 노농검열인민위원회를 이끌고 1930~32년 국민경제최고회의를 거쳐 1932년부터 중공업인민위원으로 제1·2차 5개년계획을 지휘했다. 중공업인민위원으로서 자기 부문의 대량 탄압에 반대해 간부들을 감쌌고, 1937년 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숙청된 측근과 가족, 죽음의 정황은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이견과 함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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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 1921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 「그루지야 사건」 논란
  • 1926–1930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0–1932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 5개년 계획의 공업 총괄
  • 1924–1926트랜스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북캅카스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26–1930노농검열인민위원, 소련 인민위원회 부의장
  • 1930–1937정치국 정위원
  • 1935스타하노프 운동을 전국적 캠페인으로 전환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7–1938 ✕ 처형

법정에서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한 라트비아 볼셰비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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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0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0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발레리안 블라디미로비치 쿠이비셰프

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5 ○ 자연사

제1차 5개년계획기의 계획 관료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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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혁명과 내전기 당·군 행정에서 성장
  • 1920년대노동자농민검사와 최고경제회의 등 경제감독 기관을 거침
  • 1930–1934고스플란 의장, 제1차 5개년계획기 지표와 공업화 행정 관리
  • 1934–1935당·국가 경제 원로로 남았으나 이른 사망
  • 1935 이후도시·공장명에 이름이 붙은 스탈린식 공업화 상징이 됨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Шверни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70 ○ 자연사

스탈린 말기의 공식 국가원수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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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0년대노동조합과 당 행정에서 성장
  • 1938–1946민족소비에트 의장, 스탈린기 공식 연방대표제의 한 축
  • 1946–195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명목상 국가원수
  • 1953–1956스탈린 사후 노조·국가 행정 원로로 이동
  • 1956 이후당통제위원회 등에서 복권·징계 문제에 관여

빌헬름 게오르기예비치 크노린

Вильгельм Георгиевич Кно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38 ✕ 처형

코민테른 선전기구의 설계자이자 당사(黨史) 편찬자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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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민스크 소비에트 서기, 『즈뱌즈다』 편집자
  • 1920–1922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국 서기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7–1928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보선전부장
  • 1932–1935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
  • 193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 선전선동부 부장

로베르트 인드리코비치 에이헤

Роберт Индрикович Эйх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40 ✕ 처형

시베리아 대숙청의 설계자, 고문 속에서도 자백을 철회하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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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08–1911영국 망명: 탄광부·선박 화부
  • 1917–1919리가 소비에트 간부 → 라트비아 소비에트 식량인민위원
  • 1920첼랴빈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25–1929시비르 변경 집행위원회 의장
  • 1929–1930시비르 당 제1서기
  • 1930–1937서시비르 당 제1서기 — 집단화·쿨라크 숙청 지휘
  • 1935정치국 후보위원
  • 1937NKVD 트로이카 위원 → 농업인민위원
  • 1938–1940체포 → 고문 → 자백 철회 편지 → 총살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86 ○ 자연사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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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19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1949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3–1956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출당
  • 198422년 만에 복당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총살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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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 1907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07.04'독일 첩보기관 요원'과 반소련 파괴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02.26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에서 사형 판결, 당일 총살; 1955년 복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르초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Сырц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시베리아에서 스탈린에게 반기를 든 러시아 총리

1930년 11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소 생산성 문제입니다, 스탈린 동지"라고 답한 시르초프는 곧바로 정치국에서 강제 집단화를 공개 비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대에서 볼셰비키가 되어 내전기 돈 지역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다. 1926–1929년 시베리아 당 제1서기로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을 추진했고, 1929년 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1930년 로미나제와 함께 반대파를 조직,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비판했다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1937년 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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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7.10–1918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돈 소비에트공화국 부의장
  • 1918–1919제12군 정치위원, 돈 지역 탈코사크화 참여
  • 1921–1923중앙위원회 등록배치부장 — 노멘클라투라 제도 구축
  • 1924–1926중앙위원회 선동선전부장, 《공산주의 혁명》 편집자
  • 1926–1929시베리아 당 제1서기 — 네프적 협동조합 노선, 곡물 위기 때 스탈린과 갈등
  • 1929–1930러시아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30로미나제와 반대파 조직 — 「무언가 해야 한다」, 스탈린 비판으로 전직 해임

니콜라이 마트베예비치 골로데트

Николай Матвеевич Голодед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94–1937 ✕ 심문 중 투신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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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 1937.06.14모스크바에서 체포, 민스크 이송; 6월 21일 NKVD 심문 중 사망
  • 1956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40 ✕ 처형

‘피의 난쟁이’, 당 인사기구가 키운 대숙청의 집행자

“그보다 더 이상적인 집행자는 모른다. 그에게는 멈출 줄 모른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다.” 그의 후원자 이반 모스크빈이 사위 레프 라즈곤에게 한 말

예조프는 1895년 코브노 현에서 툴라 출신 농민 아버지와 리투아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2·1924년 서류에는 페테르부르크 출생의 러시아 노동자 가정, 입당 시기도 1917년 3월로 적혔지만 기록과 본인의 심문 진술은 어긋난다. 실제로는 1917년 8월 3일 비테프스크에서 입당해 당 인사기구에서 성장했다. NKVD 수장으로서 스탈린 지도부 아래 1937~38년 대량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했다. 1936~38년 국가 범죄로 최소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1692명이 처형되었으며 굴라크 수용자는 68만 5201명 늘었다. 경력 체키스트는 아니었으나 고문에 가담했고, 1939년 4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1998년 복권은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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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 1934–19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 1936.09내무인민위원
  • 1936–19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 1937–1938대숙청 집행: 「예조프시나」
  • 1938.11수리교통인민위원으로 전보(사실상 실각)
  • 1939체포
  • 1940처형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을 20년간 통치한 스탈린 시대의 당 서기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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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6–1948 ○ 자연사(사인 논쟁)

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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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비사리온 비사리오노비치 로미나제

Виссарион Виссарионович Ломинадзе

광주 봉기의 코민테른 설계자, 스탈린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

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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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페트로그라드 군사조직에서 활동, 쿠타이시 당비서
  • 1918–1920트빌리시·바쿠 위원회, 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 간부
  • 1921–1922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여,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구 당 조직자
  • 1922–192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25–1929코민테른 청년인터내셔널 서기, 1927년 중국 대표로 8·7 긴급회의 및 광저우 봉기 주도
  • 1930자캅카스 당 제1서기, 시르초프와 함께 '좌우 블록' 결성 — 중앙위원에서 해임
  • 1933–1935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서기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기칼로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Гикал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7–1938 ✕ 처형

그로즈니 방어전을 지휘한 내전 영웅,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로 공업화·집단화를 추진했다

1933년 2월, 기칼로는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트락토로첸트르 체계의 '쿨라크 및 백위대 음모' 사건을 트로이카가 심리하게 해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 공화국 당수가 직접 숙청 가속을 청원한 장면이다.

오데사 출신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내전기 그로즈니 방어전(1918)을 지휘해 적기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1929년부터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벨로루시 세 공화국 당 제1서기를 연이어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벨로루시에서는 당원 수가 절반 가까이 줄 만큼 대대적 숙청을 주도했다. 1934년 중앙위 후보위원이자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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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트빌리시 군의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8RSDLP(b) 입당, 그로즈니 시당위원장 겸 집행위원장, 그로즈니 방어전 지휘, 적기훈장 수훈
  • 1919–1921카프카스 지방위원, 테레크·다게스탄 반란군 사령관, 페르시아 적군 사령관
  • 1921–1927고르스키 주당위 책임서기, 남동부 중앙위 뷰로 위원, 북카프카스 지방위 선전부장·서기·제2서기
  • 1927–1930중앙아시아 뷰로 조직부장,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1929),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29–1930)
  • 1930–1932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모스크바 주·시 당위원회 서기
  • 1932–1937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 중앙위 후보위원(1934–1937), NKVD 트로이카 참여
  • 1937–1938하리코프 주·시 당위원회 제1서기, 체포(1937.10.11), 총살(1938.4.25), 1955년 복권

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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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그루지야 공산당 테라비 현위원회 선전부장 ·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마르크스 국민경제연구소 수학 (중퇴)
  • 1927–193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촌 담당
  • 1931–193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서기국원
  • 1934–1937트빌리시 시당위원회 서기 (제1서기 → 제2서기)
  • 1937–1953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1–1945자캅카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 1953–1955예레반 근교 국영농장(소프호스) 의장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블라소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Власов

모스크바 방어전의 영웅에서 나치 협력자로 전향한 러시아 해방군 지도자

1942년 6월, 제2충격군이 포위되었을 때 사령부는 비행기로 탈출할 것을 제안했다. 블라소프는 거부하고 부하들과 함께 독일군 점령지에 숨었다가 열흘 뒤 농부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붉은 군대 중장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20군을 지휘해 '모스크바의 수호자'로 불렸으나, 1942년 류반 작전에서 포로가 된 후 나치 독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 해방군(ROA)과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의 지도자로서 반스탈린주의 민주 러시아를 표방했고, 1944년 프라하 선언을 통해 민족자결과 기본적 자유를 내건 강령을 발표했다. 나치는 그를 선전 도구로만 이용했으나, 전쟁 말기 ROA 제1사단은 프라하 봉기에 가담해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비밀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역사학과 기억 정치에서 첨예한 논쟁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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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백군·마흐노 세력과 교전
  • 1930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 1938–1939중국 파견, 장제스 군사고문으로 복무
  • 1940–1941제99소총사단장(최우수사단 선정), 이어 제4기계화군단장
  • 1941제37군 사령관(키예프), 제20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솔네치노고르스크 탈환
  • 1942제2충격군 사령관, 류반 작전 중 포위·포로, 나치에 협력 전향
  • 1944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KONR) 의장, 프라하 선언 발표
  • 1945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

니콜라이 카로탐

Nikolai Karotamm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901–1969 ○ 자연사

1944~1950년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비호」로 해임된 당 지도자

1901년 패르누 지방에서 태어나 1925년 네덜란드로 건너가 공산당에 들어갔고, 1926년 소련에 정착해 서방소수민족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1938년 대숙청 때 체포되었다가 기소 없이 풀려났다. 독일 점령기에는 사실상 에스토니아 공산당을 이끌며 에스토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부장을 지냈고, 1944년 9월 28일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섬멸대대 중앙참모부를 이끌었고, 1949년 3월 추방에 앞서 각 군의 전권위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950년 제8차 전원회의 뒤 해임되어 요한네스 캐빈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경제학자로 일하며 1964년 박사 학위를 받았고, 캐빈과의 불화로 에스토니아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69년 모스크바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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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네덜란드 공산당 입당
  • 1928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1에스토니아 공산당 제2서기
  • 1944–1950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
  • 1950제8차 전원회의 뒤 해임
  • 1964경제학 박사

뱌체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 말리셰프

Вячесла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ыш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57 ○ 자연사

전차와 원자력 산업을 잇는 생산 관료

1939년, 스탈린의 호출에 트럭이 두 번 펑크 나 1시간 30분 늦었다. '콜롬나에서 트베리 경유로 오셨나?'라는 빈정거림에 서른일곱 살 공장장은 '기술도 사람이 못 따라가면 배신합니다'라고 답했다. 중기계 인민위원 임명을 사양하자 보로실로프가 팔을 붙잡았다: '모루 위의 보드카는 어디 갔나?'

스탈린 시대 소련 군수공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계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소련 원자력 산업 전체를 관장하는 중형기계공업부 초대 장관을 지냈다. 기관차 설계사에서 출발해 전차, 조선, 핵무기, 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소련 군수-기술 행정의 정점을 두루 거친 '스탈린의 인민위원' 세대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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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기계공업과 전차공업 행정에서 성장
  • 1941–1945전차공업 인민위원, T-34 등 전시 전차생산 총괄
  • 1945–1953수송기계·중형기계공업 지도부, 군수와 원자력 행정의 접점에 있음
  • 1953–1957중형기계공업 장관, 원자력·미사일 산업 행정에 관여
  • 1957젊은 생산 관료 세대의 핵심 인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