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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레오니도비치 두호프

Николай Леонидович Дух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64 ○ 자연사

KV·IS 중전차에서 핵탄두까지: 전차와 핵무기 양대축을 설계한 소련 군산복합체의 기둥

하리톤은 두호프를 두고 “그의 설계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다”라고 평했다.

세 번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무기 설계자. 키로프 공장에서 KV·IS 중전차를 설계해 대조국전쟁 승리에 기여했고, 1948년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KB-11에서 최초의 소련 핵무기 내폭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후 분과 1호 연구소(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로서 열핵탄두와 17종 운반체용 핵탄약을 설계해 소련 핵전력의 공학적 기초를 세웠다. 전차와 핵무기를 모두 주도한 유일무이한 경력은 소련 군산복합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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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키로프 공장 엔지니어 — 트랙터·자동차 설계
  • 1936–1941SKB-2 수석설계자 — KV-1·KV-2 중전차 개발
  • 1941–1948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 수석설계자 — KV·IS 전차, T-34 개량, 자주포
  • 1948–1954KB-11 부수석설계자 — 최초의 소련 원자폭탄 내폭 시스템
  • 1954–1964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 — 열핵탄두 및 핵탄약 설계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마흐뇨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Махн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1904–1965 ○ 자연사

비밀 원자력 행정의 조직자

첫 소련 원자탄의 이름을 정할 때 마흐뇨프는 'РД'(반응 엔진)에 이니셜 'С'를 덧붙여 'РДС', 곧 '스탈린의 반응 엔진'이 되게 했다고 전해진다.

바실리 마흐뇨프는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군수 행정가로서 전쟁기의 동원 체계와 전후 원자력 프로젝트를 잇는 실무자였다. 그는 1945년 GKO 결정 9887로 설치된 특별위원회의 9인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기로, 위원회 장치를 운영하고 과학·산업 과제를 국가 행정으로 연결했다. 그의 역할은 과학자의 발견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었던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가 비밀주의와 집중 동원 속에서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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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4노동자·농민 감독기관에서 근무
  • 1934–1940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지역 전권대표
  • 1940–1941소비에트 통제위원회 부위원장,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 1941–1945군수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GKO 위원 대리
  • 1945–1953소련 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위원·서기
  • 1953–1956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정보·국제관계국장
  • 1956–1965원자력 이용 국가위원회 과학기술정보·전시국장

빌리스 테니소비치 라치스

Вилис Тенисович Лацис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04–1966 ○ 자연사

울마니스의 총애를 받은 작가에서 라트비아 소비에트화의 설계자로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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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리가 시립도서관 사서
  • 1935–1940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 기자
  • 1940.06–08라트비아 SSR 내무장관
  • 1940–1959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52–196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4–1958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6라트비아 작가동맹 부의장·이사

세르게이 로마노비치 사브첸코

Сергей Романович Сав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66 ○ 실각 1955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 해체한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대외첩보 책임자

흐루쇼프와 사브첸코는 1947년 스탈린과 아바쿠모프에게 롬자 주교가 '바티칸의 비밀 사절'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암살 허가를 요청했고, 이후 롬자는 독극물 주사로 살해되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17년간 국경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1943–1946)과 국가보안장관(1946–1949)을 지냈다. 1946년 리보프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에 통합시키는 '통합 공의회'를 직접 지휘했고, 1947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무카체보 교구의 테오도르 롬자 주교 암살 허가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1949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에 올랐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과 함께 해임되고 1955년 '직무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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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니콜라예프 현 체카 특별부서 작전요원으로 보안기관 입문
  • 1922–1939국경부대에서 작전·참모·학교 교관으로 17년 복무, 1939년 우크라이나 국경군 제5과장 겸 부사령관
  •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인민위원
  • 1941–1943우크라이나 내무부인민위원. 1941년 말 세르기옌코 인민위원의 이탈로 사실상 NKVD 지휘
  • 1943–1946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6–1949우크라이나 국가보안장관. 1946년 리보프 공의회로 그리스가톨릭 교회 강제 통합 주도
  • 1949–1951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제1부의장, 사실상 소련 대외정보 총괄
  • 1951–1953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
  • 1953베리야 체포 후 MVD 제2총국 제1부국장으로 좌천, 곧 해임
  • 1955'직무 부적합'으로 강제 전역

아브람 이사코비치 알리하노프

Абрам Исаакович Алих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4–1970 ○ 자연사

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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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사포노프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Сафо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2 ○ 자연사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하고 베리야 체포를 거부하며 물러난 소련 검찰총장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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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5레닌그라드 기업 법률고문·법률국장, 소비에트법 연구소 민법 강사
  • 1935–1939레닌그라드주 오쿨롭카군·키롭스키구 검사
  • 1939소련 검찰청 민사소송부장
  • 1939–1948소련 부검사장·제1부검사장 (1946년부터 검찰총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검찰단 참여
  • 1948–1953소련 검찰총장
  • 1955–1957모스크바 지방교통검찰청 부검사
  • 1957–1968러시아 SFSR 검찰청 형사재판감독부 차장·수사관리국 검사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4 ○ 자연사

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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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북드비나 소함대 입대 (나이를 두 살 높여 지원)
  • 1926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우등 졸업
  • 1933–1936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 1936–1937스페인 공화국 해군 수석 고문 (돈 니콜라스 레판토)
  • 1938–1939태평양함대 사령관
  • 1939–1946해군인민위원 (34세,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
  • 1948소장으로 강등, 극동 해군 부사령관으로 전출
  • 1951–1953해군장관으로 복귀 (계급은 중장)
  • 1953–1955국방제1차관·해군총사령관,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 1956중장으로 재강등 및 강제 퇴역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골로바노프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Голов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5 ○ 자연사

붉은 군대 최연소 원수: 스탈린의 직속 전략폭격 사령관

스탈린이 내외투를 벗겨주자 원수는 당황했고, 스탈린은 말했다. "당신은 내 손님이오."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붉은 군대 역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이자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에 이은 두 번째 항공 총원수였다. 1919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해 제59소총연대 정찰병으로 복무했고, 1924년 10월부터 OGPU에서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에 가담했으며, 이후 아에로플로트 조종사로서 백만 킬로미터 비행 조종사로 불렸다. 1942년 2월부터 스타프카 직속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했고, 1944년 12월 ADD가 제18항공군으로 재편되자 그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8년 5월 해임되었다. 1952년 공수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스탈린주의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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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붉은 군대 정찰병, 제59소총연대 (동부·남부전선)
  • 1924–1931OGPU 특별부서 요원,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가담; 알마아타 근무
  • 1932–1941아에로플로트 조종사·기장·특수비행대 지휘관, 백만 km 무사고 비행
  • 1939할힌골 전투 참전, 고위 지휘부 수송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약 400시간 전투비행
  • 1941.02제212장거리폭격연대장 (중령)
  • 1941.08제81장거리항공사단장,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폭격 지휘
  • 1942.02–1944.12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스타프카 직속
  • 1943.08항공원수 진급, 붉은 군대 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
  • 1944.08항공 총원수 진급
  • 1944.12–1946.04제18항공군 사령관 (1944년 12월 6일 ADD에서 재편)
  • 1946.04–1948.05소련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1948년 5월 해임
  • 1948–1950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수학 (금메달 졸업)
  • 1952–1953공수군단장 (TASS·«로디나»는 프스코프의 제15근위공수군단,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제37근위공수군단으로 기록)
  • 1953예비역 편입
  • 1958–1966민간항공연구소 비행부문 부소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샤후린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5 ○ 자연사

전시 항공공업을 지휘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한 인민위원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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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7모스크바 전기기술자·콤소몰 간부
  • 1927–1932모스크바 공학경제연구소 학생
  • 1933–1938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및 항공공장 당조직자
  • 1938–1940야로슬라블·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40–1946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
  • 1946–1953수감 — '항공사건'으로 7년형
  • 1953–1959항공공업 차관·제1차관; 대외경제관계 국가위원회 부의장

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페르부힌

Михаил Георгиевич Первух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뇌졸중), 모스크바

첫 원자폭탄 시험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7년 흐루쇼프에 맞서 좌천된 인물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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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이후 장관), 1942년 2월 26일 임명, 부총리 겸임,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5년 8월 20일부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 1958–1962주동독 특명전권대사
  • 1965–1978고스플란 부서장·위원, 원자력발전소 인수 국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이반 테렌티예비치 페레시프킨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Пересып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를 연결한 통신의 설계자, 최초의 통신병과 원수

1941년 7월 22일 밤, 스탈린은 가피치 장군을 면전에서 해임한 뒤 페레시프킨에게 말했다: 「당신을 통신총국장으로 임명합니다. 체신인민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시오.」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국방부인민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수은 광부의 아들로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키예프 군사정치학교와 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를 거쳐 통신병과 장교로 성장했고, 1939년 불과 35세에 소련 체신인민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전쟁 한 달째인 1941년 7월 22일, 스탈린은 그를 국방부인민위원과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에 추가 임명해 전시 민간·군사 통신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24차례 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에서 스타프카와 야전군 사이의 안정적 통신을 보장했고, 1944년 39세의 나이로 사상 첫 통신병과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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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25재입대, 키예프 군사정치학교 졸업, 제1기병사단 통신대대 복무
  • 1937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 졸업, 통신연구소 군정위원
  • 1938–1939붉은 군대 통신국 군정위원, 이후 부국장 (대령)
  • 1939–1944소련 체신인민위원
  • 1941–1944국방부인민위원 겸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
  • 1944–1946통신병과 원수,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
  • 1946–1957육군 통신병과 사령관
  • 1957–1978국방부 차관 과학고문, 국방부 감찰총감단

보리스 글레보비치 무즈루코프

Борис Глебович Музру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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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키로프 공장 기술자 → 주임 야금기사
  • 1939–1947우랄마시 공장장
  • 1947–1953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제4총국장
  • 1955–1974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모로조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T-34·T-54·T-64를 설계한 소련 전차의 얼굴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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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 1926–19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 1928–19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 1936–19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 1938–19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 1940–19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 1941–19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 1951–1966하리코프 기계제작 설계국 수석설계자, T-55·T-64 개발
  • 1966–1976하리코프 기계제작 설계국장 겸 수석설계자, T-64A 완성
  • 1976–1979하리코프 설계국 고문·소련 방위산업부 과학기술위원회 위원

표도르 페도토비치 쿠즈네초프

Фёдор Федот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GRU에서 글라프PUR까지: 전시 정보와 말기 스탈린 군 정치를 모두 지휘한 상장

1944년 8월, 스탈린은 아바쿠모프, 메르쿨로프, 쿠즈네초프, 수도플라토프를 불러 모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소련 후방에 대규모 독일군 잔류 부대가 있다고 믿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표도르 쿠즈네초프는 소련 군사정보기관과 군 정치기관을 두루 거친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 총참모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대독 승전의 정보적 토대를 관리했고, 1950년부터 스탈린 사망까지 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으로서 전군의 사상통제를 총괄했다. 메흘리스의 측근으로 대숙청기 군 정치장교 숙청에 관여했으나, 정보 분야로 전환한 뒤에는 전략적 기만 작전 수립에 직접 참여했다. 스탈린 사후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국방부 인사국장,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북부군집단 정치국장을 거쳐 1969년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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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프롤레타르스키 구당위 제1서기
  • 1938붉은군대 총정치국 간부부장
  • 1938–1942붉은군대 총정치국 부국장
  • 1942–1943제60군·보로네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3–1945총참모부 정보국장 — 총참모부 부참모장
  • 1945–1947총참모부 정보총국(GRU)장 — 소비에트군 총참모부 부참모장
  • 1947–1949소련 각료회의 산하 정보위원회 부의장
  • 1950–1953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
  • 1953–1957소련 국방부 총인사국장
  • 1957–1959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 1959–1969북부군집단 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스테판 아파나시예비치 발레진

Степан Афанасьевич Балез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4–1982 ○ 자연사

카프타노프 밑에서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린 GKO 과학실 선임보좌관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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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초등학교 교사·고아원장, 비르스크 현 콤소몰 지도자
  • 1925–1932게르첸 사범대학 졸업, 적색교수대학원 이수, 카르포프 연구소 연구원
  • 1936–1938쿠이비셰프 의과대학 물리·콜로이드 화학 주임
  • 1938–1941레닌 사범대 화학과장, 고등교육위원회 대학부장
  • 1941–1943GKO 과학 전권위원 선임보좌관: 원자폭탄 사업 출범 실무
  • 1944–1948볼셰비키당 중앙위 간부국 대학·과학기관 부부장
  • 1948–1967레닌 사범대 일반·분석화학 주임, 금속 부식 억제제 연구실 창설
  • 1967–1982유네스코 인도 교육 개혁 고문, 『학교에서의 화학』 편집위원장

세묜 데니소비치 이그나티예프

Семён Денисович Игнать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83 ↓ 실각 1953

스탈린 말기의 마지막 MGB 장관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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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1940년대당 조직·선전 라인에서 성장, 중앙위 관료로 승진
  • 1951–1953MGB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보안기관 수장
  • 1952–1953의사 음모 수사와 말기 반유대주의 공포 국면에 관여
  • 1953스탈린 사후 베리야에게 공격받고 MGB에서 축출
  • 1950년대–1960년대처형은 피하고 지방 당직으로 밀려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샤탈린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Шатал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4–1984 ○ 실각 1955

말렌코프의 간부 책임자: 스탈린 사후 보안기관을 감독하다 흐루쇼프에게 밀려난 당 조직가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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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복무
  • 1923–1929콤소몰 · 소비에트 · 교사 활동 (모스크바주 카시라)
  • 1933–1935국영농장 정치부장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 1935–1938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대학원 · 강사 · 학장 직무대행
  • 1938–1939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당기관부 지도원 · 부부장
  • 1939–1944중앙위 간부국 제1부국장
  • 1944–1947중앙위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담당 국장 겸 간부국 제1부국장
  • 1946–1952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국원
  • 1947–1950『파르티나야 지즌』 주필 겸 하바롭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50–1953중앙위 계획재정부장 · 간부배치부장
  • 1953–1955소련 공산당 중앙위 서기 · 내무성 제1차장 (1953년 7월)
  • 1955–1956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
  • 1956–1958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 1958–1959소련 각료회의 ·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60–1984연금생활 · 국가계획위 산하 계획규범연구소 부소장

야코프 예르몰라예비치 차다예프

Яков Ермолаевич Чад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85 ○ 자연사

전시 정부 법령에 스탈린과 함께 서명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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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미하일 보리소비치 흐랍첸코

Михаил Борисович Храпч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4–1986 ○ 자연사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공세에 희생된 문화행정 수장, 고골·톨스토이 연구로 부활한 문학학자

1948년 2월 10일 정치국 결의는 "소련 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흐랍첸코 동지)와 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원회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에게 이질적인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고 못 박았다.

스탈린 시대 최고 문화행정가로, 1939년부터 194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후 각료회의) 산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모든 연극·음악·미술 기관을 총괄했고 스탈린상 예술·문학 분과 위원을 겸했다. 1948년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우정〉을 둘러싼 지하노프의 반형식주의 캠페인 때 '형식주의적 경향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문학연구자로 전향하여 고골·톨스토이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고, 196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에 선출되어 196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문학·언어 분과의 아카데미크-서기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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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스몰렌스크 대학 졸업, 중등학교 교사
  • 1928–1931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보로네시 대학 문학사 강사
  • 1931–1936공산아카데미 문학예술연구소 교무주임, 붉은교수문학연구소 러시아문학 주임
  • 1938–1939소련 인민위원회 예술문제위원회 부의장
  • 1939–1948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예술문제위원회 의장, 스탈린상 예술·문학분과 위원
  • 1948–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4–1957잡지 《옥탸브리》 편집장
  • 1967–1986소련 과학아카데미 문학·언어 분과 아카데미크-서기(분과장)

세르게이 이그나티예비치 루덴코

Сергей Игнатьевич Руден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904–199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제16공군을 지휘한 공군원수

1945년 5월 2일 밤, 베를린. 부관이 루덴코를 깨웠다. "창밖을 보십시오, 저 불빛을! 전쟁이 끝난 게 틀림없습니다." 거리로 나서자 대공포와 소총이 허공에 꽂히고 있었다 — 패배한 제국의 수도 위로 번쩍이는, 즉흥적인 승리의 축포였다.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923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를 거쳐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0월부터 종전까지 제16공군 사령관으로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작전에서 항공지원을 지휘하며 대전 최고의 소련 공군 지휘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944년 벨로루시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5년 공군원수로 진급했다. 전후에는 공수부대 사령관, 공군 주참모장,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공군 제1부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68년부터 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을 맡아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년에는 국방부 감찰총감단에서 복무하며 회고록 『승리의 날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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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붉은군대 자원입대, 키예프 항공학교 생도
  • 1927전투기 조종사, 항공대 지휘관
  • 1932–1941항공여단·항공사단 지휘관, 주콥스키 공군아카데미 졸업
  • 1942제16공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 1948–1949공수부대(VDV) 사령관
  • 1950–1953장거리항공대 사령관 겸 공군 부총사령관
  • 1953–1968공군 주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 1968–1973가가린 공군아카데미 교장, 교수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랴스노이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Рясно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계 1904–1995 ○ 자연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반군 진압을 지휘한 NKVD 내무인민위원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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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3투르크메니스탄 콤소몰·당 활동; 모스크바 전연방 공업아카데미
  • 1933–1937MTS 정치부장, 스탈린그라드 지역구 당 서기
  • 1937–1941GUG NKVD 방첩부 요원 → 과장
  • 1941–1943고리키주 NKVD/NKGB 국장
  • 1943–1946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
  • 1946–1952소련 내무제1차관 → 내무차관
  • 1952–1953소련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
  • 1953–1956모스크바·모스크바주 MVD 국장

율리 보리소비치 하리톤

Юлий Борисович Харито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4–1996 ○ 자연사

46년간 소련 핵무기 설계국을 이끈 수석설계자

"우리 일에 사소한 것은 없다." 하리톤은 모든 문서의 글자 하나까지 증거를 요구했다. "어차피 전쟁하지도 않을 텐데"라는 말에 그는 분노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전부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과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1939–1941년 야코프 젤도비치와 함께 세계 최초로 우라늄 연쇄반응을 계산했다. 1946년부터 1992년까지 KB-11(아르자마스-16)의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로서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과 1953년 첫 수소폭탄 개발을 지휘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 세 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소련 핵억지력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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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세묘노프 지도)
  • 1926–1928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 연수 (러더퍼드·채드윅)
  • 1931–1946화학물리연구소 폭발물 연구실장
  • 1939–1941젤도비치와 우라늄 연쇄반응 최초 계산
  • 1946–1992KB-11(아르자마스-16) 수석설계자 겸 과학책임자
  • 1953–199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92–1996VNIIEF 명예 과학책임자

잘만 이사예비치 파소프

Зельман Исаевич Пас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40 ✕ 처형

대숙청기 외국정보를 이끈 폴란드 작전 책임자

예비 조사에서 자신의 특별부서 근무를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가을부터 부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혁명 분자 집단을 적발하고 제거해 왔다. 부서는 거의 항상 백 명의 체포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GPU에 입문해 군사방첩 특별부서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7~1938년 '폴란드 작전' 당시 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로 소련 전역의 폴란드계 시민에 대한 대량 체포·고문·처형을 지휘했다. 1938년 3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대외정보국(제5부서) 책임자로 전임되었으나, 예조프 숙청의 파고 속에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되었다. 1957년과 2013년 두 차례 사법 심사에서 사건 조작과 불법 수사 방법을 이유로 재활이 거부된 몇 안 되는 NKVD 고위 간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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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연소로 제대
  • 1920–1922군사령부 서기, 스타라야루사
  • 1922–1928GPU 스타라야루사·노브고로드·프스코프·포르호프
  • 1928–1929OGPU 고등국경학교 과정, 레닌그라드 군관구 특별부
  • 1929–1934OGPU 중앙기구: 방첩부 → 특별부서 제3과 부과장
  • 1934–1936GUGB NKVD 특별부서 제7분과 부과장 → 제11분과장
  • 1936–1937GUGB NKVD 제3(방첩)부서 폴란드과장, 곧 부서장 보좌
  • 1937.09–1938.03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
  • 1938.03–10NKVD 제5(외국)부서 책임자
  • 1940.02.15총살형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나세트킨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Насед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자연사

전시 굴라그를 지휘한 수용소 제국의 관리자

나세트킨은 1944년 8월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전쟁 3년간 GULAG 수감자 97만 5천 명을 붉은군대에 넘겼으며 '다섯 명의 전직 수감자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적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 간부로, 1941년부터 1947년까지 GULAG(교정노동수용소 본부) 책임자를 지냈다. 교사의 아들로 헤르손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21년부터 체카-OGPU-NKVD 체계에서 수송·경제 부문 요직을 거쳤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전선 인근 수용소 27곳과 식민지 210곳, 수감자 75만 명을 후방으로 소개시켰으며, GULAG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총동원했다. 전시 내내 수감자들을 '완전 노동 활용' 원칙 아래 혹사시키면서도 1944년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GULAG의 전쟁 기여를 상세히 기록했다. 1945년 국가보안 중장이 되었으나 전후 쇠락하여 1948년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195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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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군대 입대, 사령부 서기
  • 1921체카 기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 시작
  • 1931OGPU 모스크바주 전권대표부 경제과
  • 1935GUGB NKVD 수송(6)부 과장 보좌
  • 1937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9NKVD 중앙경제관리국 부국장 겸 6과장
  • 1941–1947GULAG NKVD/MVD 책임자
  • 1948예비역 편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