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1942년 첼랴빈스크 외곽 페르신스카야 부지에 들판의 말뚝 하나에서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이끌어, 1943년 4월 19일 첫 쇳물을 뽑아냈다.
모스크바 운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들을 건설한 군사 기술자이자 국가 행정가이다. 1944년부터 NKVD/MVD 산업건설수용소총국(글라프프롬스트로이) 국장으로서 수용소 노동력으로 특수 시설을 지었고, 체랴빈스크-40(마야크)과 콤비나트 817호를 비롯한 원자력 시설 건설을 지휘해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을 거쳐 1963년부터 국방부 차관으로 군사 건설 체계를 맡았으며, 1972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49), 스탈린상(1951), 레닌상(1968)을 수상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 얼음길 '생명의 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그는 직접 호송대를 검열하며 빙판 위를 오갔다.
즈다노프의 측근 정치일꾼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를 책임졌으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을 맡아 전후 소련군 정치·이념 체계의 수장이었다. 셰르바코프 사후 그 자리를 이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실각했고, 체포는 면했지만 군 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당 중앙기관에서 복무했으며, 1960년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했으나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1년 만에 소환되어 당-국가 통제 기구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7–19391927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가입, 크룹스카야 공산대학 졸업(1931),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 이후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 서기
1939–1941붉은 군대 정치일꾼으로 전환, 군 전기기술 아카데미 정치부장(1939), 레닌그라드 군관구 정치선전국 부국장(1940~1941)
1941–1942북부전선 군사회의 위원,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 정치국장 —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 책임
1942–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선전선동국장 겸 부국장, 셰르바코프 아래에서 전시 군 정치사업 지휘
1945–1949붉은 군대·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 1945년 9월 대장군 진급, 극동 소련군 최고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겸임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1951년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말리크는 말했다. "교전국들이 38도선에서 상호 철군하는 휴전과 정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의 평화를 위해 치르기에 너무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야코프 말리크는 두 차례 유엔 상임대표(1948~1952, 1967~1976)를 지낸 소련의 대표적 외교관이다. 하리코프 주 농민 가정 출신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고 당 간부를 거쳐 1937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했다. 1951년 6월 유엔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전쟁 휴전과 38도선 상호 철군을 제안해 정전 협상의 물꼬를 텄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안보리에서 정당화했다. 일본·영국 대사와 외무차관을 두루 거친 말리크의 유엔 외교는 스탈린 말기부터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소련의 국제적 입장을 관철하는 핵심 통로였다.
스탈린이 카라간다 탄광 증산을 명하자 멜니코프는 현지어를 모른다고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 「시장에 가서 노래하는 늙은 아킨을 찾아라. 그가 도와줄 것이다.」 아킨은 노래했고, 광부들은 일했다.
도네츠크 탄광 지대에서 성장한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종군한 뒤 카라간다 탄전 증산 임무를 완수하며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4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전후 복구와 서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 척결 운동을 지휘했으며, 반유대주의 캠페인에서 강경 노선을 취하며 흐루쇼프와 결별했다. 1952년 10월 확대된 당 중앙위 간부회의 정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6월 '민족정책 왜곡'을 이유로 해임되고 루마니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건설부 장관, 카자흐스탄 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1966년부터 사망까지 15년간 소련 국가산업안전감독위원회 의장으로 일하며 산업 안전 체계를 정비했다.
시인 미하일 스베틀로프는 그를 두고 "나는 문화부 장관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장관의 문화가 무섭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콤소몰 기관지 편집장을 거쳐 32세에 소비에트 청년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전시 세대 청년들에게 스탈린을 위한 자기희생을 주입한 '영웅 개척자' 서사의 설계자였으며, 스탈린 말기에는 당 선전부장·상임위원까지 올랐다. 해빙기 문화장관(1955~1960)으로서는 검열을 유지하면서도 제한된 개방을 허용해야 하는 모순된 위치에 섰고, 말년에는 폴란드·인도네시아 대사와 국가출판위원장을 지내며 조용히 퇴장했다.
안토노프는 자신의 가장 큰 성공으로 거대 수송기가 아닌 An-2 복엽기를 꼽았다. "An-2는 나의 가장 위대한 성공작입니다. 세계 항공 기술에 아날로그가 없는, 오직 우리의 조건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입니다."
소련의 수송항공을 한 세대 앞서 이끈 항공기 설계자.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OKB-153(후일 안토노프 설계국)을 창설하고, 50년 이상 양산된 유일한 항공기 An-2 복엽기로 출발해 An-12 군용수송기, An-22 안테이, An-124 루슬란, An-225 므리야에 이르는 중량물 수송기 계보를 완성했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 가능한 실용적 설계로 소련 전역과 수십 개국에서 민군 겸용으로 채택되었다. 글라이더 설계로 출발해 야코블레프의 제1부설계사를 거친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했으며,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공학과 미학의 일치를 추구했다. 영국 타임스는 An-22를 두고 "소련이 항공기 제작에서 모든 나라를 앞서게 했다"고 썼다.
상세 이력 보기
1924–1930글라이더 설계 시작, OKA-1 「골루비」로 전연방 글라이더 경연대회 1등상
1931–1938모스크바 글라이더 공장 수석설계사, 30종 글라이더 개발
1938–1943야코블레프 설계국 수석 엔지니어, A-7 군용 글라이더 개발
1943–1946야코블레프 설계국 제1부설계사, Yak-3 전투기 개량
1946–1952OKB-153 설계국장(노보시비르스크), An-2 첫 비행(1947), 스탈린상(1952)
1952–1984안토노프 설계국 총설계사(키예프), An-12·An-22·An-124 계열 개발
스탈린이 말했다: '자네 생각을 말하게, 부끄러워 말게 — 자네는 젊지만 우린 자네를 믿네. 과거의 실수와 연루되지 않았으니, 우리를 항공의 수렁으로 이끈 옛 전문가들보다 객관적일 걸세.'
2차대전 소련 전투기의 3분의 2를 담당한 Yak-1·Yak-3·Yak-7·Yak-9의 설계자. '비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콥스키 사관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으나 글라이더 경연으로 돌파해 1932년 독자 설계국을 세웠다. 1940년 항공공업 부인민위원과 OKB-115 수석을 겸임: 소련 항공설계자 중 유일한 행정·설계 권력의 결합이었다. 전후 Yak-15(소련 최초 제트전투기), Yak-25(전천후 요격기), Yak-28(초음속 폭격기)에 이어 Yak-40·Yak-42 여객기까지 아우르며, 43년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으로서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스탈린상 6회·레닌상·레닌 훈장 10회를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24–1931AVF-10 글라이더, AIR-1 경비행기 설계; 주콥스키 사관학교 졸업
1932–1939항공제39공장에서 경항공기 설계국 창설; 주임설계자로 승진
1940–1946항공공업 부인민위원 겸 OKB-115 수석; Yak-1·Yak-7·Yak-9·Yak-3 전투기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김일성이 수상직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푸자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남겼다: 「김일성 본인도 수상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농민의 아들로 국가통제 기관에서 관료 경력을 쌓은 후 스탈린의 전후 세대교체 구상 속에서 1952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겸 CPSU 중앙위 간부회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스탈린 사후 간부회에서 배제되고 흐루쇼프의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이관에 반대해 1956년 강등된 후 외교관으로 전환, 조선·유고·불가리아·아프가니스탄 대사를 역임했다. 평양에서는 집단지도체제 권고를 밀어붙이지 않아 김일성의 1인 독주를 방치했고, 카불에서는 아민을 폭군으로 묘사한 보고로 소련의 군사개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1940년 4월 소련-핀란드 전쟁 참패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프로스쿠로프는 패배의 원인을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해석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 폭격비행대를 지휘해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폭격기 조종사 출신 군사정보 수장. 1939년 4월부터 1940년 7월까지 GRU(소련 군사정보국) 국장 겸 국방부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직후 독일의 소련 침공 준비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핀란드 전쟁 후 열린 군사평의회에서 정보 실패 탓으로 돌리는 스탈린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0월 28일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1949년 8월 13일, 로디오노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을 나서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다시 자유를 보는 일은 없었다.
고리키(現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 교사와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당 기구에서 성장한 실무형 당료였다. 1940년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가 되어 대조국전쟁 기간 주방위위원장과 국방위원회 전권위원으로서 이 지역의 군수 생산을 총괄했으며, 고리키를 소련의 주요 병기창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46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의 표적이 되어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사무실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러시아 분리주의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총살되었다.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사형선고 후 유서에 "5발의 확산탄으로 쏴 달라. 보통 총알 한 발로는 죽지 않을 테니"라고 썼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안겼던 자의 마지막 떨림이었다.
소련 MGB 대령, 국가보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수사관으로 악명 높다. 1937-38년 대숙청기 NKVD에 들어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고문 살해하고, 이삭 바벨과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를 심문했다. 전기 케이블로 그리고리 시테른의 눈을 적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1년 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1955년 총살형.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1941년 가을, 서른넷의 수호돌스키는 자보론코프, 치무토프와 함께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에 올랐다. 전선의 붉은 군대가 철수한 텅 빈 도시에서, 그가 조직한 노동자 연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45일간 막아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에서 복무한 장교로,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결정적 시기에 툴라 주 NKVD 국장을 맡았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위원으로서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시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Abwehr)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전후 보로네시 주 MGB 국장과 불가리아 주재 소련 고문을 지냈다. 1950년 보로네시에서 발생한 청년 반스탈린 조직 'KPM' 사건을 처리한 책임으로 1957년 당에서 제명되고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사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전쟁 전 몇 년 동안 해외에 약 40개의 거점을 꾸리고 200명 이상의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다수의 직업 체키스트를 비합법 공작에 투입했다. 이는 즉각 성과로 나타났다.» — 파벨 피틴, 회고록에서, 예조프시나로 초토화된 해외정보국을 2년 만에 재건한 성과에 대해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은 1939년 31세로 소련 해외정보국장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정보수장이다. 예조프시나로 붕괴된 해외 공작망을 2년 만에 40여 개 거점으로 재건했고, 1941년 영국 핵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작전명 '에노르모즈'를 주도하여 소련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앞당겼다. 전쟁 중 독일 침공 경고 100여 건을 스탈린에게 올리고 쿠르스크 전투 계획을 입수했으며, 1946년 해임 후에는 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을 지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여파로 연금 없이 해고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32–1938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후 국영출판사 셀호즈기즈 편집자·부편집장
1938.08–11NKVD 특수목적학교 수료, 제5과 실습생 → 9분과장 → 부과장
1939–1946소련 해외정보 총책임자: GUGB NKVD 제5과장 → NKGB·NKVD·MGB 제1총국장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 시테멘코는 스탈린을 수행해 매일 아침 전황을 브리핑했다. 스탈린이 연합국 수뇌들 앞에 펼쳐 보인 작전지도는 시테멘코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르게이 시테멘코는 스탈린 시기 소련군 작전기획의 핵심이자 최연소 참모총장을 지낸 군사 엘리트였다. 돈 카자크 출신으로 1926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포병·기갑 장교를 거쳐 참모로 성장했다. 독소전쟁 중 작전총국장으로서 스탈린그라드·캅카스·벨라루스·만주 작전의 구체적 기획을 주도했고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을 수행했다. 1948년 41세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1952년 경질되고 베리야 연루로 강등되었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 연합군 참모장으로 복귀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고, 회고록 『전쟁 시기 참모본부』는 소련 군사사의 고전이다.
전후 11년간 내무기관을 이끌다 해임·박탈·제명을 겪은 크루글로프는 1977년 프라우다 승강장 부근 선로에서 사망했는데, 사망일은 6월 6일설과 7월 6일설로, 사인은 사고·자살·심장마비설로 갈려 확정되지 않았다.
가난한 농민·대장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으로 일하다 동양학을 공부한 크루글로프는 1938년 베리야 취임 뒤 국가보안 기관에 들어갔다. 1945년 12월 내무인민위원, 1946년 3월 내무장관이 되어 굴라그를 최대 규모로 운영했고, 1944~1945년 체첸인·인구시인 강제이주를 조직한 주요 책임자였다. 1953년 베리야 체포 이후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KGB 창설을 주도했으나, 1956년 초 해임되고 1959년 장성 연금과 전용 아파트를 박탈당했으며 1960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1977년 프라우다 승강장 부근 선로에서 사망했으나 사망일은 6월 6일설과 7월 6일설로 갈리고 사인도 사고·자살·심장마비 등으로 엇갈려 확정되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37–1938당 조직인사부(ORPO) 책임조직원, 이후 NKVD 특별전권대표로 발탁
1939–1941NKVD 인사 담당 부인민위원 겸 간부국장
1941–1945NKVD 제1부인민위원, 전쟁 중 방어선 건설과 군사평의회 활동
1945.12–1946.03마지막 NKVD 내무인민위원
1946–1953MVD 내무장관: 굴라그 최대 규모, 원폭 건설, 민족 강제이주
1953.03–06베리야의 제1차관, 이후 베리야 체포에 가담
1953.06–1956.01재임명된 MVD 장관, KGB 분리 창설 주도
1956–1977좌천과 퇴직, 연금·주택 박탈, 당 제명, 1977년 기차 사망(사인 미확정)
1942년 8월 9일, 엘리아스베르크가 굶주림 속에서 재편한 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을 레닌그라드에 울려 퍼뜨렸다.
카를 엘리아스베르크는 바이올린 연주에서 출발해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소련 음악가였다. 레닌그라드 봉쇄로 단원 대부분이 굶주림과 전선 때문에 사라지자, 그는 남은 연주자들을 찾아 모으고 군악대원까지 보충해 오케스트라를 재편했다. 1942년 8월 9일 그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을 지휘했으며, 이 연주는 굶주린 도시의 문화적 지속과 방어 의지를 알리는 방송이 되었다. 전후에는 레닌그라드 중심부에서 활동할 기회가 줄어 지방 순회 지휘자로 일했지만, 봉쇄기의 작업은 그의 삶을 규정한 역사적 장면으로 남았다.
1954년 2월, 고르셰닌은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반혁명죄로 사형·유형·수용된 자의 정확한 숫자를 담은 증명서를 올렸다. 스탈린 사후 처음 나온 그 숫자는 해빙기 복권의 출발점이었다.
알라티리의 철도 노동자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소비에트법 연구소를 졸업하고 노동법 학자로 출발했다. 1943년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시 사법을 총괄했고,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하는 한편 블라소프·크라스노프 재판과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준비를 주도했다. 1948~1956년 소련 법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 제도 정비를 이끌었고, 1954년 2월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대숙청 희생자 통계를 담은 공식 증명서를 제출했으며, 1956년 주코프·루덴코와 함께 옛 포로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앙위원회 결의를 공동 발의했다. 법무부 폐지 후에는 전연방 법학연구소 소장으로 학계에 복귀하여 소비에트 노동법전 편찬 작업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