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1948년 2월 장관 사임을 이끌고 망명해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를 이끈 국민사회당 의장
1948년 2월 공산당의 헌정 질서 변경을 막으려 비공산당 장관들과 사임했다.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서방으로 탈출해 망명 정치를 이끌었다.
보헤미아 타보르의 소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37~1939년 프라하 시장을 지냈다. 독일 점령 뒤 체포되어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갇혔다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장으로 다시 프라하 시장이 되었고, 1946년 선거에서 제2당을 이끌어 부총리가 되었다. 1947년 9월 마사리크·드르티나와 함께 폭발물 상자를 받았다. 1948년 2월 다른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했고, 쿠데타 뒤 감시를 피해 망명해 1949~1974년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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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그는 1936년 국제연맹 연단에서 '신과 역사는 여러분의 심판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에티오피아를 근대화하고 국제연맹 연설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된 20세기의 군주였다. 섭정 시절부터 개혁을 이끌어 1931년 헌법과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고, 이탈리아로부터의 망명을 거쳐 1941년 영국군과 함께 귀환해 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부의 리스트·구울트 토지와 남부의 토지수여제를 그대로 둔 채 귀족·교회와 타협한 근대화는 농민의 소작 굴레를 풀지 못했고, 1972년 웰로 기근으로 민심이 이탈했다. 1974년 9월 데르그에 폐위된 그는 이듬해 3월 자신의 토지제도를 폐지한 국유화가 내려진 직후인 8월, 군부의 명령으로 목졸려 죽었다.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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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1955년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남베트남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가족을 정권 요직에 기용하고 반대파를 투옥·처형했다. 1963년 불교도 시위가 확산하자 미국은 지원을 거두었고,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후에의 가톨릭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식민지 관리를 지낸 반공 민족주의자였다. 1954년 6월 제네바 회의 도중 바오다이가 베트남국 총리로 임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55년 국민투표로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네바 협정이 약속한 1956년 통일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가족 중심의 권위주의 통치와 불교도 탄압으로 반발을 샀고, 1963년 미국 중앙정보국이 지지한 쿠데타 때 붙잡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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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바오다이 황제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프랑스가 개혁을 거부하자 사임했다.
1954–1955바오다이의 요청으로 베트남국 총리를 지냈다.
1955–1963정부가 통제한 국민투표에서 바오다이를 축출한 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으로 통치했다. 1956년 전국 자유선거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이행하지 않았다.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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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맥나마라가 전황 측정 지표에 적어둔 'X 인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랜스데일은 '베트남 농촌 서민들의 감정'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연필로 그 항목을 지워버렸다.
미 공군 소장으로, 광고계에서 군 정보장교로 전향한 후 필리핀 훅발라합 반란 진압에서 심리전을 무기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군사임무단을 이끌며 응오딘지엠 정권을 뒷받침했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몽구스 작전의 6단계 계획을 제출해 그해 10월 쿠바 내 반란과 정권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엠 축출에 반대하며 1963년 강제 전역했고, 말년에는 심리전과 대분란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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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7육군 군사정보대 및 OSS 복무, 소령 진급
1947–1950미 공군 대위로 전군, 전략정보학교 교관
1950–1954필리핀 합동군사원조단, 훅발라합 반란 진압 심리전 지휘, 막사이사이 대선 승리 지원
1954–1957사이공 군사임무단장, 지엠 정권 수립 지원, 북부 가톨릭 남하 작전 주도
1957–1961국방부 특수작전 부차관보, 해외 대분란전 기획
1961–1963몽구스 작전 작전책임자,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 제출(1962.2)
1982년 6월 2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시아누크·크메르루주와 함께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를 세우고 총리를 맡아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 유지에 기여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이자 반공 저항세력 지도자다. 1911년 프놈펜에서 크메르 크롬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하고 1935년 공직에 들어갔다. 1946~48년 부총리와 재정을, 1950~51년 외무를 맡았고 1955~68년 캄보디아 국립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1967~68년 총리가 되었다. 1970년 쿠데타 뒤 가택 연금되었다가 프랑스로 망명해 1978~79년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을 결성했고 1982년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1992년 불교자유민주당을 창당해 1993년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3년 국회의장을 지낸 뒤 1997년 파리로 떠나 2000년 12월 1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86년 10월 12일 오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모든 핵무기를 2000년까지 폐기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40분 뒤, SDI 연구를 실험실에 가두라는 고르바초프의 조건을 레이건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무너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이 된 인물로, 레이거노믹스와 대규모 군비 증강으로 1980년대를 열었다. 취임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대결을 고조시켰으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하여 고르바초프와 네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6년 레이캬비크에서 전면 핵폐기 합의 직전까지 갔지만, 전략방위구상(SDI)을 양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막판에 결렬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하여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을 통째로 폐기했고, 냉전은 그가 퇴임한 지 몇 달 만에 막을 내렸다.
키라이 벨러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론 놀은 캄보디아 군과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70년 3월 노로돔 시아누크를 축출한 쿠데타의 주요 설계자였다. 총리로 새 정부를 이끌고 시아누크의 중립 노선을 폐기해 미국·남베트남과 밀착했으며, 양국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에서 작전하도록 허용했다. 1972년 권력을 장악해 대통령이 되었고, 크메르루주가 수도에 접근하자 1975년 4월 캄보디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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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프랑스 식민지 행정에 들어가 치안판사로 근무했다
1951지방 총독과 경찰청장을 지냈다
1952군에 입대해 캄보디아 내 베트남 공산 게릴라전에 지역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1955캄보디아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60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63부총리를 지냈다
1966–1967총리를 지냈다
1968–1969국방장관을 지냈다
1969–1972시아누크 정부의 총리였고, 1970년 3월 쿠데타 뒤 새 정부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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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1945년 퇴위했다가 프랑스가 내세운 베트남국의 국가원수가 된 인물
1945년 8월 퇴위한 바오다이는 1949년 베트남국 국가원수로 복귀했지만, 1955년 응오딘지엠 정부의 국민투표로 축출됐다.
응우옌 왕조의 13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1926년 즉위해 프랑스 보호령 안남·통킹의 명목상 군주였다. 1945년 3월 일본이 프랑스 행정을 무너뜨리자 일본 아래 베트남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1945년 8월 혁명 뒤 30일 후에에서 퇴위해 호찌민 정부의 「최고 고문」이 되었다. 곧 망명했다가 1949년 엘리제 협정으로 프랑스가 내세운 베트남국의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프랑스와 너무 가깝고 나라 밖에서 지내는 일이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5년 국민투표로 응오딘지엠에게 쫓겨났고 1997년 파리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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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응우옌 왕조 황제로 즉위했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안남·통킹 보호령을 다스린 명목상 군주였다.
1945일본이 비시 프랑스 행정을 축출하고 베트남 제국을 선포하자 황제로 남았으며, 일본 항복 뒤 8월 퇴위했다.
1945–1946퇴위 후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의 최고 고문을 지냈다.
1949–1955프랑스가 지원한 베트남국의 국가원수를 맡았고, 1955년 응오딘지엠 총리가 주도한 국민투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