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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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Чиче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6 ○ 자연사

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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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0외무인민위원
  • 1898–1904제정 러시아 외무성 관리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52 ○ 자연사

여성 해방을 혁명의 의제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각료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때를 두고 콜론타이는 «내 생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장군 미하일 도몬토비치의 딸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핀란드 제재소주의 딸이었다. 1917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복지인민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반대해 곧 사임했다. 1919년 여성부(제노트델)를 세우는 데 앞장서 여성 문맹 퇴치와 노동·가족 제도 개편을 알리는 일을 맡았고, 1920년 노동자반대파에 가담했다가 패배했다. 1922년부터 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의 외교 사절로 나가 1943년 대사로 승진했는데, 이 임무는 사실상의 유배여서 국내 정치 활동은 막혔고 195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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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망명, 여성 노동운동 조직
  • 1909《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출간
  • 1917–1918복지인민위원: 세계 첫 여성 각료
  • 1919–1922여성부(제노트델) 지도
  • 1920–1921노동자반대파 참여
  • 1921팸플릿 《노동자 반대파》 발표
  • 1923–1945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 공사·대사: 세계 첫 여성 공사
  • 1923《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 발표
  • 1944소련-핀란드 강화 교섭 중개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포툠킨

Владимир Петрович Потём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4–1946 ○ 자연사

폴란드 국가의 사망을 선언한 외교관, 교육인민위원이 되다

1939년 9월 17일 새벽 3시, 포툠킨은 폴란드 대사에게 "폴란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읽어주었다. 소련군은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포툠킨은 교사와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에서 출발해 외교관으로 전환, 1939년 9월 폴란드 대사에게 국가 소멸을 통보한 인물이다. 이후 러시아 교육인민위원으로 교육학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3권의 『외교사』를 편찬해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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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7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김나지움 교사, 지하 마르크스주의 선전원
  • 1919–1920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남부전선 정치국장
  • 1924–1932주이스탄불 총영사 → 주그리스 전권대표
  • 1932–1934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33년 소련-이탈리아 우호조약 서명)
  • 1934–1937주프랑스 전권대표 (1935년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37–1940제1외무인민부위원
  • 1940–1946러시아 교육인민위원 · 교육학 아카데미 초대 총재

솔로몬 아브라모비치 로조프스키

Соломон Абрамович Лозовс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8–1952 ✕ 처형

프로핀테른을 이끈 볼셰비키,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와 함께 총살되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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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 1909–1917파리 망명, 프랑스 사회당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
  • 1918–1921전러시아 섬유노조·철도노조·모스크바 주 노조평의회 책임자
  • 1921–1937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37–1939국립문학출판사(고슬리티즈다트) 소장
  • 1939–1946소련 외무부인민위원(부장관)
  • 1941–1948소빈포름뷰로 부책임자(1941–1945), 책임자(1945–1948)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재판, 총살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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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9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9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19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19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19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19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야코프 자하로비치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2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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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 1934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 주도
  • 1934–1937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 초기 나치 시대 독소 경제 관계 관리
  • 1937–1940프랑스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국제연맹 소련 대표단원
  • 1940프랑스 정부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40–1945외무인민위원부 고문, 대사급 외교관
  • 1946–1947브라질 주재 초대 소련 전권대사
  • 1948은퇴

알렉산드르 안토노비치 트로야놉스키

Александр Антонович Троя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5 ○ 자연사

차르의 포병 장교에서 스탈린의 첫 주미 대사로: 혁명과 외교를 오간 러시아 귀족

백악관 리셉션에서 루스벨트가 말했다. "트로야놉스키 씨가 달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면, 신사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을 믿겠습니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는 1933년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후 초대 주미 소련 전권대표(대사)로 부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와의 협력 기반을 닦은 소련 외교관이다. 세습 귀족 출신이자 차르 포병 장교였던 그는 1904년 볼셰비키에 가담했다가 1914년 멘셰비키로 전향, 1918년 멘셰비키 중앙위원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2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스탈린의 대외무역·외교 라인에 편입되었다. 주일 전권대표(1927~1933)를 거쳐 워싱턴에 부임한 그는 1935년 미소 무역 협정 체결을 주도했고, 스탈린에게 나치 독일에 맞선 대미 협력의 필요성을 누차 건의했다. 그의 아들 올레크 트로야놉스키 또한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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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RSDLP(볼셰비키 분파) 입당, 키예프 군사조직 활동
  • 1909–1910예니세이현 유형, 탈출 후 망명
  • 1914–1917멘셰비키 방위파, 망명 중 레닌·스탈린과 협력
  • 1918멘셰비키 중앙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8–1921붉은 군대 복무, 교관
  • 1923RKP(b) 입당
  • 1924–1927RSFSR 국가무역청(Gostorg) 청장,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 1927–1933주일 소련 전권대표
  • 1933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33–1938주미 소련 전권대표 — 초대 대사
  • 1939–1955고등외교학교 교수, 소비에트정보국 활동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83–1927 ✕ 자살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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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 1917.11–1918.0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 1918.0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 1922–1923주중 소비에트 대표, 쑨원-이오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의 길을 열다
  • 1924–1925주오스트리아 소비에트 전권대표
  • 1925.06–1927트로츠키가 의장인 중앙양보위원회 부의장
  • 1919–192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국고통제 인민위원·노동국방위원회 위원
  • 1920–19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 폴란드와 리가 조약 체결
  • 1922제노바 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일원
  • 1923–1927좌익반대파 활동
  • 1927모스크바 대학 소비에트 법학부 교수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유대계 아버지·러시아계 어머니)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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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재판, 시베리아 유형
  • 1917프라우다 편집, 4월 테제와 10월 봉기에 반대
  • 1918–192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2–1924레닌 병중 정치국 주재, 트로이카
  • 1936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재판, 처형

이반 미하일로비치 마이스키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Май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4–1975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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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 1906–19081905년 혁명 참여로 체포, 토볼스크 유배
  • 1912뮌헨 대학 경제학부 졸업, 런던으로 이주
  • 1917임시정부 노동부 차관
  • 1918사마라 KOMUCh 정부 노동상; 멘셰비키당 제명
  • 1920–1921볼셰비키 전향 선언, RKP(b)에 입당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언론국장
  • 1929–1932핀란드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2–1943영국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대사
  • 1941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 서명,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 복원
  • 1943–1946외무인민부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참여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53–1955간첩 혐의로 체포·투옥, 스탈린 사후 석방 및 복권
  • 1957–1975당적 회복, 학술 활동 재개; 회고록 및 외교 일기 집필

표트르 라자레비치 보이코프

Пётр Лазаревич Вой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27 ✕ 암살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한 볼셰비키 외교관: 바르샤바에서 암살당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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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멘셰비키
  • 1906얄타 경찰서장 겨냥 폭탄 테러 기도 실패, 도피
  • 1907–1917제네바 망명, 제네바 대학교 수학·화학 전공, 멘셰비키-국제주의파 활동
  • 1917.08볼셰비키 합류, 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및 군사혁명위원회 참여
  • 1918.01–12우랄 지역 소비에트 공급위원
  • 1918.07우랄 소비에트 특별회의에서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 황산 공급 서명
  • 1919–1920식량인민위원부 분배국 근무, 첸트로소유스(중앙소비자협동조합) 부의장
  • 1920–1921대외무역인민위원부 이사, 수출위원회 참여
  • 1924–1927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전권대사)
  • 1927.06.07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백계 망명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에게 암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8 ✕ 처형

「당 전체의 총아」, 당의 이름으로 죽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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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뉴욕에서 망명 신문 편집
  • 1917《제국주의와 세계경제》 출간(1915년 집필)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 반대
  • 1918–1929프라우다 주필, 코민테른 지도부
  • 1920프레오브라젠스키와 《공산주의 ABC》 공저·출간
  • 1921《사적 유물론: 사회학 체계》 출간
  • 1925–1928네프 이론가, 「부유해지십시오」
  • 1929「우편향」으로 실각
  • 1934–1936이즈베스티야 주필, 1936년 헌법 기초 참여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86 ○ 자연사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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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19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1949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3–1956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출당
  • 198422년 만에 복당

표도르 표도로비치 라스콜니코프

Фёдор Фёдорович Расколь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9 → 사망

볼가 소함대 사령관에서 망명 비판자로: 스탈린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외교관

1918년 12월, 구축함 스파르타크 호에서 영국군에 나포될 때 — 에스토니아인 선원으로 위장하고 감자 자루 속에 숨었으나, 에스토니아어를 한마디도 못해 정체가 탄로났다.

내전기 볼가·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낸 볼셰비키 해군 지휘관.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38년 소환을 거부하고 망명, 1939년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대숙청을 공개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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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 1912–1914《즈베즈다》·《프라우다》 문학 담당 기자
  • 1917크론시타트 소비에트 부의장, 7월 사건 후 체포·투옥, 10월 석방
  • 1918해군참모부 정치위원, 볼가 소함대 사령관 — 카잔 탈환, '죽음의 바지선' 포로 432명 구출
  • 1919–1920영국군 포로(런던 브릭스턴), 교환 후 볼가-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엔젤리 상륙작전 지휘
  • 1920–1921발트함대 사령관, 두 차례 적기훈장 수훈
  • 1921–1924아프가니스탄 주재 전권대표
  • 1928–1930글라브레페르트콤 의장, 《크라스나야 노비》 주필
  • 1930–1938에스토니아·덴마크·불가리아 주재 전권대표
  • 1938–1939소환 거부, 파리 망명; 1939년 8월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그리고리 나우모비치 보이틴스키

Григорий Наумович Войтинс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3–1953 ○ 자연사

중국 공산당 창당을 산파한 코민테른 첫 중국 특사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와 당 건설 문제를 논의하며 "중국의 신사조 운동은 분분하지만 아니키즘, 생디칼리즘, 사회민주주의, 길드 사회주의가 난립해 주류가 없고, 글 쓰고 공론만 할 뿐 실천이 전혀 없다. 이래서는 중국 혁명을 추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코민테른의 첫 중국 대표로 1920년 리다자오·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했다. 소환 후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중국학의 창시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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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8미국·캐나다 이주 노동, 미국 사회당 활동
  • 1918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백군 체포, 사할린 종신 유형, 수감자 봉기로 탈출
  • 1920–1927코민테른 집행위 극동부장·중국 대표, 중국 공산당 창당 지원
  • 1926코민테른 극동국(상하이) 의장
  • 1927–1929이르쿠츠크 경제 부문 근무
  • 1929–1934모스크바 동양학, 적색노조인터내셔널 태평양서기국 서기
  • 1934–1953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소련과학원 연구원, 중국학 저술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아스타호프

Георг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стах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42 ✕ 옥사

독소 접근의 비밀 통로를 연 베를린 소련 대리대사

7월 26일 슈누레와의 만찬에서 '대화가 너무 멀리 나아가기 시작한다고 느꼈다'고 일기에 적었을 때까지, 이 비밀 통로의 주인공은 모스크바의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귀족 집안의 문인으로 출발해 소련 외교관이 된 인물.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언론·외교를 오갔고, 1928년에는 소련 최초로 아랍 국가인 예멘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1939년 봄 베를린 대리대사가 되어 바이츠제커·슈누레·리벤트로프와 독소 접근의 신호를 주고받은 일이며, 7월 29일 몰로토프의 지시를 받고 소련의 태도 변화를 전한 뒤 조약 직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1940년 체포된 채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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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볼셰비키당 입당
  • 1918–1920베를린 통신사 특파원, 블라디카프카스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2–1928터키·독일·일본 전권대표부 언론 부서 근무
  • 1928예멘 파견, 소련 최초의 아랍국 조약(소-예멘 우호) 체결
  • 1930–1935터키·영국 전권대표부 고문
  • 1936–1937외무인민위원부 언론국장
  • 1937–1939독일 주재 소련 대사관 고문·대리대사
  • 1940체포, 15년형 선고 (1942년 수용소에서 사망)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자루빈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Заруб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58 ○ 자연사

캐나다·영국·미국, 냉전기 서방 3대 수도에서 소련을 대표한 외교관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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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붉은 군대 복무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35산업아카데미 원장
  • 1935–1938경공업인민위원부 교육기관 총국장
  • 1938–1940뉴욕 세계박람회 소련관 부총감독·예술위원회 의장
  • 1940–1941외무인민위원부 영사국장
  • 1941–1944외무인민위원부 중남미국장
  • 1944–1946주캐나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46–1952주영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8소련 외무부 차관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1–1938 ✕ 처형

28인의 볼셰비키를 키워낸 코민테른의 중국 전문가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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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쿠즈네초프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90 ○ 자연사

세 번의 권력 공백기를 메운 임시 국가원수, 그로미코의 22년 1차관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직후, 81세의 쿠즈네초프는 임시 국가원수로서 소련 국민에게 신년사를 낭독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연이어 사망할 때마다 같은 역할을 반복하며 말년 소련 권력 이양의 얼굴이 되었다.

농민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노조 중앙평의회 의장을 거쳐 소련 외교의 실무 책임자가 되었다. 외무부 제1차관으로 22년간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밀협상, 중소 국경교섭, 유엔 군축외교를 이끌었다. 1977년 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이 된 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사망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권력 공백기마다 임시 국가원수를 지내며 말년 소련을 상징하는 원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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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마케옙카 제철소 연구기사·평로공장장
  • 1931–1933카네기공과대학 연수 (미국)
  • 1937–1940중공업인민위원부 기술국장·주임기사
  • 1940–1944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44–1953전소비에트노조 중앙평의회 의장
  • 1953주중 소련 대사
  • 1955–1977소련 외무부 제1차관
  • 1977–1986최고회의 간부회 제1부의장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우만스키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ма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45 ✕ 항공사고

TASS 특파원에서 워싱턴 최연소 대사로. 스탈린 외교의 날카로운 얼굴

루스벨트는 각료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소련 대사 우만스키가 완고하고 비협조적이며 금 보유고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자, 화가 난 루스벨트는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불렀다."

콘스탄틴 우만스키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주미 소련 대사를 지낸 외교관으로, 당시 워싱턴 최연소 대사였다. TASS 특파원과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장을 거치며 외신 검열을 총괄했고, 언론인 경력 속에 NKVD 정보 활동이 섞여 있었다는 정황이 여러 사료에서 제기된다. 주미 대사 시절 군수 물자 협상에서의 고압적 태도는 루스벨트로 하여금 각료회의에서 그를 '더러운 거짓말쟁이 꼬마'라고 부르게 할 정도였다. 1943년 주멕시코 대사로 부임해 3개월 만에 스페인어를 익혀 가장 인기 있는 외교관이 되었으나, 1945년 코스타리카 부임길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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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ROSTA·베를린·비엔나에서 예술 저널리즘 활동
  • 1922R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22–1931TASS 특파원 — 로마, 파리, 제네바 지국장
  • 1931–1936소련 외무인민위원부 언론정보국 부국장 → 국장
  • 1936–1939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 대리대사
  • 1939–1941주미 소련 전권대표 → 특명전권대사
  • 1941–1943NKID USSR 콜레기야 위원
  • 1943–1945주멕시코 소련 대사, 1944년부터 코스타리카 겸임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멘시코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еньш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76 ○ 자연사

스탈린에게 바나나 때문에 해임되고 흐루쇼프 아래 냉전 대사로 복귀한 무역·외교 관료

스탈린이 휴양지 식탁에 오른 썩은 바나나를 보고 격노하자, 모든 책임은 대외무역부 장관인 멘시코프에게 돌아갔다. 하루 전 '엄중 경고'를 받은 바로 다음 날, 그는 '직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다.

소련의 무역 관료이자 외교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회계 강습을 거친 뒤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했고, 모스크바 플레하노프 국민경제연구소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런던의 소련 무역 협동조합 아르코스(ARCOS) 책임자를 거쳐 1949년 소련 대외무역부 장관에 올랐으나, 1951년 멕시코산 바나나 품질 문제로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 해임되었다. 스탈린 사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인도 대사(1953~1957), 주미 대사(1958~1962)를 역임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직전까지 워싱턴에서 미소 관계를 관리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으로 6년간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연방 차원과 공화국 차원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이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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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 1921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참여
  • 1930–1936아르코스(ARCOS) 런던 지부 책임자
  • 1943–1946유엔구제부흥기구(UNRRA) 부국장 (미국)
  • 1946–1949소련 대외무역부 차관
  • 1949–1951소련 대외무역부 장관
  • 1953–1957주인도 소련 대사
  • 1957주네팔 소련 대사 (겸임)
  • 1958–1962주미 소련 대사
  • 1962–1968러시아공화국(RSFSR) 외무장관

발레리안 알렉산드로비치 조린

Валери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о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2–1986 ○ 자연사

유엔 안보리에서 쿠바 미사일을 부인한 소련의 냉전 외교관

스티븐슨: "쿠바 미사일을 부인합니까, 예스 오어 노?" 조린: "나는 미국 법정에 서 있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직후 스티븐슨의 보좌관들이 미사일 기지 항공사진을 안보리 회의장으로 들여왔다.

소련의 냉전 외교관으로, 25년간 외무차관을 지내며 체코슬로바키아·서독·프랑스 대사와 유엔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유엔 안보리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추궁에 답변을 거부한 장면으로 냉전 외교사의 상징적 순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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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2콤소몰·피오네르 운동 조직가, 모스크바 당위원회
  • 1941–1945외무인민위원부 근무
  • 1945–1947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대사
  • 1947–1965소련 외무차관 (세 차례 재임)
  • 1949–1952소련 대외정보위원회 위원장
  • 1952–1953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60–1963유엔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55–1956주서독 초대 소련 대사
  • 1965–1971주프랑스 소련 대사
  • 197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 소볼레프

Аркад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ол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3–1964 ○ 자연사

유엔헌장을 공동 기초한 소련 외교관, 냉전기 유엔의 소련 얼굴

알제 히스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소볼레프와 파스볼스키에 대해 “그들이야말로 헌장의 형태를 만든 진짜 책임자들이었다”고 증언했다.

국제법 전문가로서,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미국 측 리오 파스볼스키와 함께 유엔헌장의 구체적 문안을 책임진 공동 기초자였다. 전후 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으로 국제기구의 제도화에 참여했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의 유엔 상임대표로서 헝가리 봉기 직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냉전기 소련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이후 생애 마지막까지 외무차관으로 재직하며 소련 외교의 실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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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외무인민위원부 사무총장
  • 1942–1945주영 소련대사관 참사관
  • 1945–1946소련군정청(독일) 정치국장
  • 1946–1949유엔 사무차장(안전보장·정치 담당)
  • 1949–1950소련 외무부 유엔국장
  • 1950–1951소련 외무부 미국국장
  • 1951–1953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53–1954소련 외무부 미주국장
  • 1954–1955소련 유엔 차석대표
  • 1955–1960소련 유엔 상임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대표
  • 1960–1964소련 외무차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노비코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Нов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3–1989 ○ 자연사

케넌의 장전보에 맞선 노비코프 전보: 냉전 개막을 쓴 소련 외교관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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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동양학원 졸업,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기관에서 근무
  • 1935세계경제·세계정치 적색교수연구소 입소
  • 1938외무인민위원부 제1동방부 책임고문
  • 1941–1943외무인민위원부 제4유럽부장
  • 1943–1944주이집트 소련 대사 (그리스 대사 겸임)
  • 1946–1947주미국 소련 대사
  • 1947대사직 해임, 중앙위 간부예비역으로 전출
  • 1950소련 작가동맹 가입, 학술·문학 활동 전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