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빌노 근교의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87년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처형된 바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다. 폴란드 사회당(PPS)의 지도자로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내고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단을 이끌었으나, 그에게 사회주의는 갈수록 독립의 수단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세워 러시아와 싸웠고, 1918년 11월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리투아니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를 아우르는 연방으로 러시아를 밀어낸다는 구상 아래 1920년 키예프로 진공했다가 바르샤바 앞까지 몰렸으나, 8월의 반격으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리가 조약의 국경을 얻어냈다. 192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26년 5월 쿠데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폴란드를 통치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35년 5월 병사했다. 소비에트의 선전과 수사 문서에서 그는 폴란드 반동의 화신이자 「폴란드 군사조직」의 창설자로 살아남아,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근거 서사에까지 등장한다.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요새도, 대포도, 외국의 원조도, 모든 병사 각자가 자신이 조국의 수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30년간 복무한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으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중장까지 올랐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총사령관으로 적위대를 진압하고 섭정이 되어 독립을 공고히 했으며,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사명은 볼셰비즘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에 맞서 싸웠고, 독일과 공동전선을 폈으나 레닌그라드 공격은 거부했다. 1944년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독일군을 축출하여,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점령을 면한 국가로 핀란드를 남겼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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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와 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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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요시지로 우메즈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자 항공전력의 가능성을 일찍 파악한 전략가였다. 미국의 산업력과 석유 우위를 직접 관찰해 장기전의 승산을 낮게 보았지만, 전쟁이 결정되자 일본의 우세를 단기간에 확보할 방도를 찾았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진주만 공격을 밀어붙여 남방 자원 공세의 시간을 벌려 했고, 그 선택은 전술적 성공과 미국의 전면 참전을 함께 낳았다. 1942년 미드웨이 패배 뒤에도 전쟁을 지휘하다 1943년 미군의 요격으로 전사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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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
미치타로 고마쓰바라는 러시아를 연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정보와 참모 업무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제23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의 국경전쟁을 대규모 작전으로 이끌었지만, 주코프의 포위 공세 속에서 사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그의 경력에 책임을 묻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는 1940년 예편한 뒤 그해 사망했다.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체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체코 민족운동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연결한 장교였다. 1918년 그는 펜자에 집결한 약 8,000명의 최대 군단 집단을 지휘했고, 사마라 점령을 통해 코무치 정부가 세워질 조건을 열었다. 그의 행보는 군단 지휘관들이 볼셰비키 군대와의 충돌에서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 준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군 참모와 항공 행정을 맡으며 군단의 전투 경험을 국가 군사체계 건설로 옮겼다.
1939년 7월 9일, 전차의 절반 이상을 잃은 야스오카 파견대는 해산되고 그는 지휘에서 해임되었다.
야스오카 마사오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성으로, 보병 중심 군대에서 전차 운용을 맡은 지휘관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제1전차단을 중심으로 임시 편성된 야스오카 파견대를 지휘해 7월 공세에 참가했지만, 전차와 보병·포병의 협조가 무너진 가운데 장갑차량의 절반 이상을 잃고 부대가 해산되었다. 이후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인도네시아 점령 통치에 참여한 뒤 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1948년 사망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오키나와에 배치된 뒤 제32군을 이끌며 해안 결전 대신 남부의 종심 방어와 소모전을 택했지만, 그 방어 체계는 주민 동원과 전투 편입을 수반했다. 1945년 5월 슈리에서 남부로 철수한 결정은 전투를 연장했으나 피란민을 전장에 몰아넣어 주민 희생을 키웠고, 그는 항복을 거부한 채 6월 자결했다.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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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군사사상가로, 만주를 장차 미국과 맞설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1931년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철도 폭파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시작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면전에는 반대하며 자신의 팽창 구상이 초래한 결과와 충돌했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한 뒤 예비역으로 밀려났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만네르헤임과 가까이 일하며 전쟁 지휘와 군사참모 업무를 함께 맡았다. 겨울전쟁에서 카렐리야 지협 방어를 지휘한 그는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조율한 뒤 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공세를 이끌었다. 전후에는 무기 은닉 사건의 여파로 군 경력을 마쳤지만, 1948년 모스크바 협상과 만네르헤임 전기 집필에 참여하며 군사 전문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므로 일본은 가능한 한 이 나라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관찰한 드문 일본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오지마에서 해안의 결전을 피하고 지하호와 종심 방어를 결합해 압도적 전력에 맞서는 소모전을 설계했다. 그 방어는 일본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미국군의 상륙과 섬 점령에 큰 비용을 부과했으며, 동시에 병사들에게 만세 돌격과 무의미한 자결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지휘 원칙을 드러냈다.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단도 채 갖춰지기 전이었다: 실라스부오는 완편되지 않은 제9사단으로 소련 163사단을 연말까지 격파했고, 이어 라테 도로에서 44사단을 포위해 모티 더미로 만들었다.
헬싱키 출신의 예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예거대대에서 훈련받고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중대장으로 싸웠다. 겨울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9사단을 지휘, 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에서 소련 제163·제44 사단을 모티 전술로 포위·궤멸시켜 오울루를 향한 소련의 핀란드 분단 계획을 무너뜨렸다. 이 전공으로 소장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수오무살미 전투』를 썼으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에서 제3군단장으로 북부 전선과 독일군 축출을 지휘했으며, 1944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받고 54세로 사망했다.
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1939년 4월 1일의 마지막 전황 보고, 그가 직접 서명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가 되고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국민군은 최후의 군사 목표에 도달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6년의 독재가 시작됐다.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경력을 쌓아 서른셋에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된 직업군인. 1934년 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하면서 우파에게 「질서의 회복자」로 각인됐고, 1936년 7월 군부 반란에 합류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날아가 독일·이탈리아 수송기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해 10월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이 되었고, 1937년 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묶어 개인 지배를 굳혔다. 1939년 승리 뒤에는 정치책임법을 앞세운 대규모 처형과 투옥이 이어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에서는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을 보냈고, 1953년 미국과의 마드리드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전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안정화 계획 이후의 고도성장은 체제를 지탱한 또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975년 사망과 함께 체제도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1892갈리시아 페롤의 해군 집안에서 출생
1907–1910톨레도 보병사관학교 수학
1912–1926모로코 식민지 전쟁 참전,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을 거쳐 서른셋에 준장
1928–1931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임
1934.10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
1935–1936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인민전선 정부에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
1936.07.18–19군부 반란에 합류, 전세기 드래건래피드로 모로코로 이동해 아프리카군 공수를 조직
1936.10.01부르고스에서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으로 선포됨
1937.04.19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단일 「국민운동」으로 통합
1939.04.01전쟁 종료 선포, 정치책임법에 따른 대규모 처형·투옥 개시
1940–1943앙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 파병
1953–1955미국과 마드리드 협정, 교황청과 정교협약 체결; 1955년 유엔 가입으로 고립 탈출
1959안정화 계획으로 자립경제 노선을 접고 고도성장기에 진입
1969–1973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 1973년 총리 카레로 블랑코가 ETA에 암살됨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아서 해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를 이끈 공군 지휘관으로, 독일 도시를 겨냥한 지역 폭격을 전쟁 수행의 핵심 수단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대규모 폭격의 작전적 효율성을 높였지만 민간인 사망과 도시 파괴를 낳은 전략의 책임도 함께 짊어졌다.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는 독일 산업에 대한 압박을 약화시킨다며 수송계획으로의 전환에 반대했으나, 1944년 3월 프랑스 철도 중심지에 대한 초기 공격을 명령해 계획을 실행했다. 이 긴장은 전략폭격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공군 지휘와 지상군 지원이라는 연합군의 공동 목표가 충돌한 사례를 보여 준다.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나카 류키치 장군은 전후 증언에서 '대미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주장한 단 한 사람이 쓰지 마사노부였다'고 밝혔다.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는 스스로 작성한 국경 방침서로 1939년 할힌골 사건을 일으켜, 아래로부터의 월권(게코쿠조)으로 소련과의 국경전쟁을 밀어붙였다. 할힌골 패배 뒤에는 소련의 화력을 목격한 경험을 근거로 대소전을 반대하면서도, 도리어 대미 개전의 가장 강경한 주창자가 되었다. 말레이 작전 입안자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숙칭 학살의 주모자였던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주했다가 귀국해 중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맥나마라가 전황 측정 지표에 적어둔 'X 인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랜스데일은 '베트남 농촌 서민들의 감정'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연필로 그 항목을 지워버렸다.
미 공군 소장으로, 광고계에서 군 정보장교로 전향한 후 필리핀 훅발라합 반란 진압에서 심리전을 무기화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군사임무단을 이끌며 응오딘지엠 정권을 뒷받침했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에게 몽구스 작전의 6단계 계획을 제출해 그해 10월 쿠바 내 반란과 정권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촉발한 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지엠 축출에 반대하며 1963년 강제 전역했고, 말년에는 심리전과 대분란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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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7육군 군사정보대 및 OSS 복무, 소령 진급
1947–1950미 공군 대위로 전군, 전략정보학교 교관
1950–1954필리핀 합동군사원조단, 훅발라합 반란 진압 심리전 지휘, 막사이사이 대선 승리 지원
1954–1957사이공 군사임무단장, 지엠 정권 수립 지원, 북부 가톨릭 남하 작전 주도
1957–1961국방부 특수작전 부차관보, 해외 대분란전 기획
1961–1963몽구스 작전 작전책임자,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 제출(1962.2)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베러 키라이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경력을 거쳐 해방 뒤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과 확대에 참여한 장성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전방 경계와 지휘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고, 서울 철수 과정의 한강교 조기 폭파 명령에도 책임이 있었다. 개전 직후 해임된 그는 경남 방어전선에 투입되었고,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 터널에서 그가 지휘한 장갑차 행렬과 시위대의 충돌로 세 명이 사망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소련 말기 장교로 출발해 러시아군 최고위 지휘관으로 올라선 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타만 사단 BMP 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터널에 진입했으며, 충돌로 시위대 세 명이 사망한 뒤 구금됐지만 상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가 취하됐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체첸, 시리아에서 지휘했고,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적 성과와 민간인 피해를 함께 낳은 강경한 작전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국가의 명령 체계가 해체 뒤 러시아의 군사국가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한 경로를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1987옴스크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타만 근위 자동차화소총사단 소대·중대 지휘관
1989–1991아프가니스탄 복무, 타만 사단 제1자동차화소총대대장
19918월 쿠데타 때 모스크바 투입 BMP 대대 지휘, 터널 충돌 뒤 구금 및 기소 취하
우리는 CIA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계곡 출신의 타지크족 군사 지도자로,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군의 아홉 차례 대규모 공세를 게릴라전으로 견뎌내며 '판지시르의 사자'로 불렸다. 1983년 소련군과 직접 휴전을 협상해 판지시르 주민들에게 일시적 평화를 가져왔고, 이후 슈라에 나자르(감독평의회)를 조직해 12개 주 130명의 지휘관을 통합했다. 1992년 나지불라 정권 붕괴 후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군벌 간 내전으로 카불은 파괴되었고, 1996년 탈레반 집권 후 북부동맹의 군사 지도자로 저항을 이끌었다. 2001년 9월 9일, 알카에다가 보낸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고, 이틀 후 9·11 테러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