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Being and Time
마르틴 하이데거가 1927년 에드문트 후설이 엮던 『철학 및 현상학 연구 연보』 제8권에 「전반부」로 발표한 주저. 서양 철학이 잊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겠다며, 그 물음을 던지는 존재인 인간(「현존재」)이 세계 속에 던져진 채 염려하고 죽음을 향해 사는 구조를 분석했다. 후반부는 끝내 나오지 않아 미완으로 남았다. 실존주의, 해석학, 프랑스 현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마르쿠제는 이를 마르크스주의와 잇고자 했으며, 아도르노와 루카치는 그 언어와 정치를 비판했다. 핵심 개념 자체는 별도 항목 「현존재」에서 다룬다.
상세
왜 20세기 철학의 분수령이라 불리나?
『존재와 시간』은 독일어 위키백과의 표현대로 20세기 철학의 「세기의 저작」으로 꼽힌다. 하이데거가 묻는 것은 「존재 일반의 의미」다. 우리는 늘 “나는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하며 무엇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정작 「있다」가 무슨 뜻인지는 묻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 철학이 존재를 눈앞에 놓인 사물처럼, 곧 현재에 머무는 실체로만 생각해 왔고 그래서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놓쳤다고 보았다. 제목의 두 낱말은 이 진단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책이 니체 수용사에 들어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이데거는 실존철학의 길을 연 키르케고르와 니체가 던진 물음, 곧 의미가 무너진 세계에서 개인이 어떻게 자기 삶을 떠맡느냐는 물음을 존재론의 언어로 다시 세웠다. 영어 위키백과는 리처드 월린을 인용해 이 책이 키르케고르와 니체가 앞서 보여 준 대중 사회 비판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적는다. 둘째, 하이데거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니체 강의를 거듭하며 니체를 서양 형이상학의 마지막 사상가로 읽었고, 이 해석이 프랑스의 니체 수용으로 이어졌다. 『존재와 시간』은 그 길의 출발점이다.
어떻게 쓰였고 무엇을 다루나?
독일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책은 시간에 쫓기며 쓰였다. 하이데거는 1923년부터 마르부르크 대학의 원외 교수였는데 거의 10년 동안 책을 내지 않았으므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 자리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내놓아야 했다. 그는 강의에서 쌓아 온 자료를 압축해 체계로 엮었고, 1927년 스승 후설이 엮던 연보 제8권에 「전반부」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책은 후설에게 헌정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나치당원이던 하이데거는 1941년 유대인인 후설에게 바친 헌사를 판에서 빼는 데 동의했고, 헌사는 1953년판에서 되살아났다. 원래 계획은 두 부, 각 세 편이었으나 실제로 나온 것은 서론과 제1부의 두 편뿐이다. 하이데거는 1953년 제7판에서 「전반부」라는 꼬리표를 지워 미완을 인정했다.
분석은 인간 대신 「현존재(Dasein)」라는 말로 시작한다. 현존재는 늘 이미 어떤 세계 안에 던져져 있고(피투성), 그 세계를 이해하며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기투), 평소에는 사물과 사람들 곁에 빠져 산다(퇴락). 망치는 쇠와 나무 덩어리가 아니라 못을 박는 데 「쓰이는」 도구로 먼저 만나진다. 하이데거는 이 세 계기의 통일을 「염려(Sorge)」라고 부르고, 염려의 의미를 「시간성」에서 찾는다. 책은 시간성에서 시간 일반으로, 다시 존재의 의미로 넘어가려는 지점에서 끝난다. 이 개념들의 자세한 설명은 「현존재」 항목에 맡긴다.
「세상 사람」과 죽음을 향한 존재는 무슨 뜻인가?
이 책에서 가장 널리 읽힌 대목은 일상성의 분석이다. 일상의 현존재는 「세상 사람(das Man)」, 곧 아무도 아닌 익명의 남들에게 맡겨진 채 산다. 남들이 즐기듯 즐기고, 남들이 판단하듯 문학과 예술을 판단하며, 심지어 「대중」에게서 물러설 때도 남들이 물러서듯 물러선다. 하이데거는 이 상태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고,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니다.”
Jeder ist der Andere und Keiner er selbst.
이 익명성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불안과 죽음이다. 불안은 일상의 의미 연관을 무너뜨려 현존재를 자기 자신 앞에 세운다. 죽음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가능성이므로,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보는 결단 속에서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자기 삶을 떠맡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 개념들이 가치 판단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만, 독일어 위키백과가 지적하듯 「세상 사람」과 잡담에 대한 공격, 본래성에 대한 호소는 대중 사회와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보수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도 쉽게 읽혔다.
책의 역사성 장(제76절)에서 하이데거는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제2편이 말한 기념비적·골동품적·비판적 역사학의 구분을 끌어와, 그것이 현존재의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석했다. 니체는 이 책에서 아직 주인공이 아니지만, 역사와 삶의 관계라는 니체의 물음은 이미 이 구조 속에 들어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읽었나?
반응은 둘로 갈렸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이 책의 실존 분석을 헤겔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엥겔스의 변증법 쪽으로 늘리려 했다. 그 시도가 「하이데거적 마르크스주의」이며, 마르쿠제는 뒷날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 비본래성과 퇴락의 개념을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바꾸어 썼다. 이 흐름은 「현존재」 항목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비판은 언어와 정치를 겨누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는 1964년 『본래성의 은어』에서 하이데거의 문체를, 일상어를 은근히 다른 뜻으로 바꿔 특정한 사고방식을 퍼뜨리는 「은어」라고 불렀다. 영어 위키백과의 요약대로 그는 하이데거가 「본래성」을 가치 중립적인 기술 용어처럼 내세워 윤리적 판단을 피한다고 비판했다. 죄르지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에서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를 생철학의 연장선, 곧 셸링과 니체에서 나치로 이어지는 비합리주의의 계보 위에 놓았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는 루카치의 하이데거 비판 가운데 일부가 아도르노의 비판과 닮았다고 평한다.
이 책이 하이데거의 1933년 나치 협력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책에 윤리학이 없다는 점, 보수 혁명의 어휘와 겹치는 대목이 있다는 점을 들어 정치적으로 읽는 해석이 있는 반면, 책에 나치의 개념은 없다며 이런 독해를 소급 해석이라고 반박하는 연구자도 있다. 장폴 사르트르는 이 책을 이어받아 『존재와 무』를 썼지만 하이데거 자신은 1946년 「휴머니즘 서간」에서 실존주의적 해석을 거부했다.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이 책은 아직 너무 인간 중심적이었고, 그는 이른바 「전회」를 거쳐 다른 길로 존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