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적 절단
Epistemological Break
가스통 바슐라르가 1930년대에 정식화하고 루이 알튀세르가 1965년 마르크스주의에 적용한 과학철학 개념으로, 한 학문의 이데올로기적 전사(前史)와 과학적 단계를 가르는 비연속적 단절을 가리킨다. 바슐라르 자신의 용어는 '인식론적 파열'(rupture épistémologique)이었고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진 것은 알튀세르를 통해서였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1965)에서 마르크스 사상의 절단을 1845년 무렵으로 보았으나, 절단의 시기와 범위는 논쟁적이다.
상세
개념
바슐라르에게 인식론적 절단은 과학에 내재하는 '인식론적 장애', 즉 사유되지 않은 무의식적 구조가 깨져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 개념을 두 방향으로 사용했는데, 하나는 과학적 인식과 일상적·통속적 인식을 가르는 공시적 구분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이 기존 이론과의 단절을 통해 발달한다는 통시적 관점이다. 절단은 그가 장애, 성격, 행위와 함께 발전시킨 인식론적 범주 가운데 하나로, 사상사에서 비연속성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알튀세르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절단(프랑스어 coupure épistémologique)은 새롭게 성립한 과학을 그 이데올로기적 전사로부터 분리하는 비연속적 파열이다. 그의 핵심 작업은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었고, 절단은 담론의 근본적 문제틀 자체의 변화로 파악되며 '증상적 독해'를 통해 식별된다.
역사
바슐라르는 『새 과학정신』(1934),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 같은 연구로 역사적 인식론을 세웠다. 그는 과학을 연속적 진보로 본 콩트의 실증주의를 비판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힘입어 과학의 역사가 비연속적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표현 자체는 바슐라르가 거의 쓰지 않았고, 이 말이 유명해진 것은 알튀세르를 통해서였다.
알튀세르의 개입은 1950~60년대 서구 대학에서 유행한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 곧 사후에 출간된 청년 마르크스 저작에 기댄 흐름에 맞선 것이었다. 그는 스탈린주의적 교조적 변증법적 유물론과 휴머니즘·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이데올로기적·휴머니즘적·역사주의적 요소를 제거해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으로 재정립하려 했다. 이 작업은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스탈린 시대의 범죄를 규탄한 일, 중소 분쟁과 마오의 이론 작업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스탈린주의의 분석 도구를 버리지 않는 좌파적 비판으로 기획되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 사상의 절단을 1845년 무렵, 곧 『독일 이데올로기』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이 저작들은 청년기의 헤겔적·포이어바흐적 휴머니즘과의 결별이자 역사적 유물론의 성립을 표시하며,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전사에 속한다.
구분
바슐라르의 모형은 순수한 비연속주의가 아니다. 그의 과학관은 '비연속적이지만 진보적'이며, 절단은 과거 과학의 거부일 뿐 아니라 오래된 관념을 새롭고 더 넓은 맥락에서 재정식화해 보존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 개념은 제한된 특수 사례로 남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낳은 '새 과학정신'의 단절을 특히 중시했으며, 뉴턴의 개념은 아인슈타인 체계의 특수 사례로 보존된다고 보았다.
바슐라르는 절단을 '장애'(절단을 가로막는 개념·방법·사고방식), '성격'(한 개인이 역사적 단계에 걸쳐 갖는 개념의 복합적 이해), '행위'(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식의 도약)와 구별했다. 또한 그의 비연속성 이론은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보다 20~30년 앞서 있었고, 바슐라르·캉길렘과 쿤·알튀세르는 각각 별개의 비연속성 모형으로 다루어진다. 바슐라르의 절단이 과학사의 문제라면 쿤의 모형은 패러다임 전환의 문제다.
알튀세르는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를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스탈린주의와 당시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 모두에 대립하는 '이론적 반휴머니즘'을 옹호했고, '인간'이나 인간 본성 같은 개념은 과학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며 역사는 '주체 없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논쟁
마르크스 사상의 인식론적 절단은 논쟁적인 주제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첫 성숙한 저작을 『철학의 빈곤』(1847)으로 보았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에 맞서 청년기와 성숙기의 이분법을 내세우며 『독일 이데올로기』(1845)가 절단점이라고 주장했다. 칼베즈, 터커, 매클렐런, 페처, 아비네리, 메자로스, 콜라코프스키 등은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한 마르크스 사이의 절단을 부정한다. 망델은 세 입장을 구분하고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알튀세르의 절단은 연대기적 한 점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있으며, 이는 목적론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마르크스 사상의 변형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알튀세르가 절단을 1845년에 놓은 것을 두고는, 소련 국가에 곤란한 소외와 노동의 성격에 관한 물음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정치적 해석도 제기된다.
관계와 비판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은 반휴머니즘과 '주체 없는 과정', 중층결정, 상부구조의 경제적 토대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최종 심급에서의 결정'), 구조적 인과성, 후기 작업의 이데올로기와 호명 같은 개념들과 함께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체계 안에 놓여 있으며, 푸랑차스·발리바르·마슈레 등에게 이어졌다. 그의 절단 개념은 이후 청년 마르크스 논쟁의 틀을 이루었다.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지속적 비판에 직면했는데, 대표적으로 E. P. 톰슨은 관념론과 스탈린주의를 문제 삼았다. 1970년대 후반 이 흐름은 내부적 이론 문제와 포스트구조주의의 대두 속에 쇠퇴했고, 알튀세르의 제자 상당수는 훗날 그의 비판자가 되었다.
관련 인물
출처
- 위키백과 (영문) Wikipedia: Bachelard's 1938 concept and Althusser's adoption; the break separates the prehistory of a science (ideology) from science proper
- books.openedition.org Chapter 6 of The Age of Rupture (Presses universitaires de Provence): the epistemological break as a key concept of discontinuity applied by Althusser to Marx's work, marking the divide between early humanist writings and mature scientific analysis of capital
- crisiscritique.org Gillot (Crisis & Critique, 2018): Althusser radicalized Bachelard's 'rupture' into 'coupure' (cut) to account for the irreversible discontinuity between science and ideology in Marx's development
- 위키백과 (영문)
- books.openedition.org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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